오름의 왕국, 제주도에는 368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있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필자도 수없이 올랐던 ‘새별오름’에 매혹되어 올해도 어김없이 또다시 찾았다. 오름의 서쪽, 경사가 가파른 길로 정상에 올라서 360도 파노라마 풍경을 감상한 후, 경사가 완만한 동쪽으로 내려왔다.
만추의 새별오름이 가르쳐주는 정치철학적 함의는 크다. 멀리서 보는 새별오름은 민둥산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억새꽃들이 춤추고 있다. 오름의 정면에서는 억새들만 보이지만, 오름의 후면에서는 작은 나무들과 넝쿨이 빽빽이 엉켜있는 숲을 볼 수 있다. 오름의 아래에서는 능선만 보이지만, 정상에 서면 동쪽의 한라산, 남쪽의 산방산, 그리고 서쪽 바다의 비양도까지 볼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억새꽃을 은빛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언제나 맞는 말이 아니다. 억새의 색깔은 빛과 바람의 방향, 꽃이 핀 시기에 따라서 다르다. 빛의 순방향과 역방향에서 보는 억새의 색깔과 농도는 전혀 다르며, 저녁노을이 질 때는 황금색을 연출한다.
가을에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억새가 겨울을 앞두고 다시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경이롭다. 특정 시점, 특정 장소에서 내가 보았던 억새의 색깔이 전부는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합적 팩트(fact)를 간과하고 단편적 인식의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자연현상에 대한 거시적 또는 미시적 인식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처럼, 정치적 신념에 따른 문제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른 선입견과 편견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한 사실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는데 보지 못했을 뿐’이다. ‘관점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를 초래한다’는 자연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 비로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억새의 생존법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유연성’에 있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함으로써 부러지지 않는다. 유연성은 ‘채움보다 비움’에서 나온다. 억새가 비우지 않고 엽맥(葉脈)이 가득 차 있으면 강풍에 꺾이고 만다. 그럼에도 인간은 억새가 가르쳐주는 ‘비움의 철학’을 외면한다. 권력·돈·명예를 더 많이 가지려고 혈안이다.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얽매이므로 유연성을 상실한다. ‘텅 빈 충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한다.
‘유연성’은 상대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철학이고 ‘경직성’은 절대를 추구하는 독재주의 사고다. ‘민주정치는 인간의 정치’이고 ‘독재정치는 신의 정치’이다. 나의 판단만이 옳다고 우기는 정치인들은 신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치는 수많은 신들의 싸움판이 되어버렸다.
내가 본 것, 내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주장은 오만이며 독선이다. 민주정치의 요체는 조화정치이며, 조화정치의 생명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유연성에 있다. 정치인들은 자연이 가르쳐주는 정치철학적 함의를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