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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일가 등 항일 유공자들 발자취 고스란히

권광순기자
등록일 2015-06-23 02:01 게재일 2015-06-2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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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독립운동 성지` 안동 (상) <br>전통마을
▲ 안동 무실마을 수몰 전 전경
▲ 안동 무실마을 수몰 전 전경

선비의 고장 안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다.

안동 사람들은 1894년 전국 최초로 일어난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900년대에는 구국계몽운동을,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자정순국과 만주 독립군 기지건설에 이어 광복회 등 비밀결사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또 1919년 3·1독립만세와 대한민국 임시정부·파리장서의거를 거쳐 1920년대에는 의열투쟁·육십만세운동에서부터 청년·농민·노동·여성·형평운동 등 대중운동까지 그 활약성이 대단하다. 1930~40년대 들어와서도 안동 사람들의 나라사랑 정신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학생항일운동·항일문학·한국광복군 등을 통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됐다.

이처럼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쉼 없이 펼쳐졌다. 또한 유교적 중화주의나 복벽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정치이념과 사상을 수용해 자주독립과 근대국가를 이루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방법·전략·단체들의 갈등을 통합하고, 힘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지식인이자 지배층이 역사적인 책무를 진 전형적인 모범에 속한다. 요즈음 더욱 강조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곳도 바로 안동인 것이다.

본지는 창간 25주년을 맞아, 올해 광복 70년을 맞는 뜻깊은 해를 상기하는 `미리보는 광복 70주년`특집을 마련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안동의 전통마을과 광복의 밑거름이 된 안동 여성들을 상·하로 나눠 소개한다.

안동은 독립운동유공자가 가장 많은 곳, 자결 순국자가 가장 많은 곳, 독립운동 반세기 역사를 메운 곳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독립유공자를 많이 배출한 배경에는 전통마을이 많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안동의 내앞·무실·법흥·부포·하계·금계·하회마을 등 7개 마을은 독립유공자가 10명 이상 나온 곳이다. 특히 안동 사람들이 펼친 항일투쟁의 바탕에는 바로 전통마을의 역사가 강하게 자리하면서 마을마다 뜻을 세워 사람을 기르고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다.

김희곤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 바탕에는 바로 전통마을이 있었기에 활발할 수 있었다. 600년 역사를 가진 이 마을마다 뜻을 세워 사람을 기르고 그 시대마다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면서 “이러한 마을들이 나라 찾는 일에 나서기 위해 일제강점기 전통사회에서 가졌던 기득권을 역사적 책임으로 승화시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 배출 명성

선비정신에 韓日 병탄땐 순국도 잇따라

물속으로 사라진 무실·부포·하계마을

역사적 교훈 되새기며 `기적비` 건립

그날 기억 새록새록… 항일역사 한눈에

▲ 안동 내앞마을 전경
▲ 안동 내앞마을 전경

◇독립운동의 성지 내앞마을

경북 안동시 임하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내앞마을은 천전(川前)의 한글 이름이다. 이곳에는 내앞마을 의성김씨의 산실인 큰종가(의성김씨 종택)와 귀봉 김수일의 종가인 작은종가(귀봉종택)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펼친 일송 김동삼 생가, 6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온 백하구려가 있다.

내앞마을의 독립운동은 1895년 의병항쟁에서 광복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또 공간적 범위도 `내앞에서 취원창까지`라고 일컬을 정도로 넓었으며, 활동 내용도 다양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아 이 마을 출신으로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이는 20여 명에 가깝다. 여기에 포상을 받지 못한 30여 명과 만주망명 당시 함께했던 여성들을 포함하면 실제 이보다 더 많다. 내앞마을을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내앞마을에 설립된 것도 이러한 지리적 공간이 갖는 현장성 때문이다.

▲ 안동 하계마을 기적비
▲ 안동 하계마을 기적비

◇물 속으로 사라진 무실마을

전주류씨 류성의 후손들이 500여 년 역사를 이어온 무실마을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애국계몽운동과 3·1운동에서 그 활동이 두드러져, 모두 16명이 서훈을 받았다.

정재종가의 류지호는 안동 전기의병 결성에 큰 버팀목이 됐고, 항쟁과정에서는 류완과 류연박을 비롯한 청년들의 역할이 컸다. 또한 류시연은 전기의병에서 후기의병 시기에 걸쳐 줄기차게 항쟁을 이어갔다.

애국계몽운동으로는 협동학교의 운영과 역할이 돋보인다. 1907년 내앞마을에서 시작된 협동학교는 주역들이 만주로 망명하자, 1912년 이곳 정재종가로 옮겨왔다. 협동학교 학생들은 임동면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이유로 폐교되고 말았다.

류세진과 류연덕은 만주에서 활약하였고, 류연건은 1920년대 국내 사회운동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이 밖에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지는 못 했지만 독립운동상에 드러나는 인물이 30여 명에 이른다.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이끈 법흥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일가가 자리잡은 곳이다. 이 마을은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사람이 모두 11명에 이른다. 특히 임청각 사람들의 삶과 독립운동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안동을 떠나 한국을 대표할 만하다.

이상룡과 동생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종숙 이승화는 모두 만주로 망명해 만주항일투쟁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겼다. 이외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은 1919년 3월 13일 안동시장(현재 신한은행 앞)에서 홀로 독립만세를 부르다 고초를 겪었고, 이종영은 대한광복회에서, 이종국은 1921년 의용단에 가입해 활약하다가 고초를 겪었다.

◇사회운동을 이끈 부포마을

부포마을은 진성이씨·안동권씨·봉화금씨·횡성조씨 등이 어우러져 500여 년 역사를 이어온 곳이다. 비록 안동댐 건설로 마을 자취는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마을 출신 독립유공자는 무려 14명에 이른다.

예안에서 일어난 3·1운동에 큰 역할을 한 금용문·금용운·이성호·이회벽·조방인·조병건·조수인, 만주에서 활약한 이동하, 자정순국으로 저항한 이명우와 권성 부부, 6·10만세운동의 주역 이선호, 여성 노동운동가 이효정·이병희가 모두 이 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가운데 부포마을 호동파(虎洞派) 종손 이규락의 후손들이 펼친 3대에 걸친 항일투쟁은 부포마을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룬다. 그의 맏아들 이동걸(이동식)은 교남교육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동걸의 손녀 이효정은 1930년대 노동운동으로 항일에 나선 여성독립운동가다.

둘째 이동하는 만주로 망명해 활약했다. 그의 아들 이병기도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동운동을 하다가 1934년 2월 붙잡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셋째 이경식은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7년 10월 장진홍 의거가 일어나자 체포돼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또한 그의 딸 이병희도 1930년대 노동운동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 이상룡 선생 생가 임청각
▲ 이상룡 선생 생가 임청각

◇사라진 독립운동의 보고, 하계마을

퇴계종택을 지나 얼마를 가다 보면 나오는 하계마을 기적비는 이 마을에서 근대 민족문제에 맞서 자신들을 불살랐던 독립운동가가 무려 25명이나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계마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향산 이만도와 동은 이중언은 1896년 선성(宣城·지금의 예안)의병에 나섰다.

이어 나라가 망하자 두 사람은 관직에 몸 담았던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단식`으로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들의 죽음 앞에 하계마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걸음걸음을 민족을 위해 내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영향으로 하계마을에서는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한 이동흠, 예안면과 도산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동봉·김락·이비호·이기호·이용호·이극호·이호준, 유림단의거(파리장서의거)를 주도한 이중업,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던 이동흠과 이종흠,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원일, 창씨개명에 저항해 자결한 이현구 등 20명에 가까운 독립운동 유공자가 나왔다.

하계마을도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부 사람들이 하계마을의 역사를 되살려 역사적 교훈으로 삼자는 뜻에서 2004년 10월 7일 마을 옛터 언저리에 세운 비가 기적비다.

▲ 안동 금계마을 학봉종택
▲ 안동 금계마을 학봉종택

◇의병항쟁을 이끈 금계마을

금계마을은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500년의 역사를 이어 온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불굴의 의리정신을 보여 줬다. 이러한 정신은 근대기 독립운동사에도 그대로 드러나, 금계마을에서만 14명의 독립운동 유공자가 나왔다. 의병항쟁으로 안동지역 항일투쟁사를 열었던 서산 김흥락의 뜻을 이어 이들은 파리장서의거·의용단·만주 항일투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금계마을의 독립운동은 의병항쟁으로 시작됐다. 김흥락·김회락·김윤모·김진의·김준모는 전기의병을 이끌었던 인물로서 이들은 모두 학봉종가의 후손이자, 서산 김흥락의 문도(門徒)였다. 중·후기 의병시기(1904~1909)에는 김호락·김규헌·김현동·김용환이 이강년의진에서 저항을 이어갔으며 3·1운동 이후에는 김용환·김규헌·김현동이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결성하고, 자금모집에 집중하였다. 김연환·김원식 등은 만주로 망명해 활동했는데, 더욱이 김원식은 활동 기간이나 투쟁 강도 면에서 만주지역 항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렇듯 금계마을의 독립운동은 서산 김흥락을 필두로 의병항쟁의 장을 여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3·1운동 이후 만주지역 항일투쟁사를 지원하는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 안동 하회마을 전경
▲ 안동 하회마을 전경

◇부자(父子)가 순절한 하회마을

하회마을은 풍산류씨 600여 년 역사가 담긴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同姓)마을로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사람이 모두 10명이나 된다. 자정순국에 이어 3·1운동, 군자금 모집, 의열단,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한국광복군, 조선회복연구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항쟁이 펼쳐진 곳이다. 특히 류도발은 나라가 무너지자 단식 순국한데 이어 그의 뜻을 이은 아들 류신영도 1919년 고종의 장례일에 음독 자결했다. 이어 3·1운동에 나선 류점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인 류창우, 의열단에서 활약한 류병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나선 류택하,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류소우·류시보·류시훈,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 단체 조선회복연구단원으로 활동한 류시승이 모두 이 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동/권광순기자 gskwo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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