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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떠나 만주서 모진 풍상… 조국광복 꽃이 되다

권광순기자
등록일 2015-06-24 02:01 게재일 2015-06-24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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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독립운동 성지` 안동 (하)<bR>  광복의 밑거름 된  여성들
▲ 이해동의 시아버지인 김동삼의 가족사진
▲ 이해동의 시아버지인 김동삼의 가족사진

1910년 나라를 잃자 안동의 애국지사들은 대거 만주로 망명했다. 그들은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을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 만주지역 항일투쟁 곳곳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도 남성 못지 않게 잔혹한 일제와 싸워야 했고, 굶주림과 추위, 각종 전염병과 맞서야 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는 안동의 여성들이 나라 안팎에서 겪었던 인고(忍苦)의 사례가 소장돼 있다.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이곳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고 조국 광복에 힘을 보탠 사례도 적지않다.

강윤정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곳이라서 직접 독립운동 현장에 뛰어든 여성들은 많지 않지만 꾸준히 민족 문제를 담지하고 조국 광복에 힘을 보탰다”면서 “또 자신들의 몫을 찾고자 희생의 진정한 가치를 실천한 안동의 여성들은 만주지역 항일투쟁의 주춧돌이 된데 이어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밝혔다.

◇3대 독립운동 가문을 지켜낸 김락

1919년 만세운동 참여… 취조받다 실명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펼쳤던 한 가문의 며느리 김락(1862~1929)은 1862년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18세에 도산면 하계마을 양산군수를 지냈던 향산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1863~1921)과 혼인했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시아버지 이만도는 단식으로 순절했다. 관직에 있던 사람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과 부끄러움에 스스로를 단죄한 것이다. 이듬해 오빠 김대락과 형부 이상룡이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시아버지의 죽음, 만주로 떠나는 언니와 오빠들, 이들의 행보는 김락에게 일생의 큰 교훈이자 과제가 됐다.

국내에 남아있는 가족들도 그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나섰다. 김락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안으로는 시아버지의 뜻을 새기며, 밖으로는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를 지켜야 했던 그녀도 1919년 3월 독립만세에 직접 뛰어들었다. 이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는 1934년 경북경찰부가 만든 고등계 형사들의 지침서인`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에 남아있다.

여기에 “안동의 양반 고 이중업의 처는 1919년 만세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다가 실명하였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1929년 2월에 사망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몇 줄의 기록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한 여인을 불러냈다. 김락은 안동의 예안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2차 독립청원운동을 준비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만주지역 항일의 버팀목이 된 여인들 박순부·이해동

`만주생활 77년`… 책으로 쓴 인고의 세월

1931년 하얼빈에서 한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였다. 바로 일송 김동삼의 아내 박순부(1882~1950)다. 1911년 남편이 만주로 망명하자 그녀도 아들 형제를 데리고 그 길을 따랐다. 만주에서 그녀는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20년 동안 그녀가 남편을 만난 것은 단 몇 번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만주에서 온갖 풍상을 이겨낸 며느리 이해동(1905~2003)은 1905년 안동의 예안면에서 태어났다. 이곳 그녀의 집, 만화공댁은 바로 김락의 시아버지 이만도가 단식순절한 곳이다. 조부 이강호는 이만도가 순국하자 장례를 치른 뒤 여섯 살 박이를 포함한 전 가족을 앞세우고 만주로 망명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재산이 별로 없었던 터라 이해동의 집안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세월이 흘러 16세가 되던 1920년 이해동의 혼사 이야기가 오고갔다. 마침내 김동삼의 아들로 혼처가 정해졌다. 김동삼은 아버지 이원일의 스승이자 투철한 동지였다. 그런데 그 해 시삼촌이 일제에게 무참하게 학살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에 위협을 느낀 두 집안은 1921년 북만주로 옮겨가게 됐다.

그 뒤 이해동의 가족들은 북만주를 떠돌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광복 뒤에도 중국에 남게 된 이해동은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여섯 살에 고국을 떠나 85세가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꼬박 77년이 걸렸다. 그녀는 그렇게 고단했던 여정을 `만주생활 77년`이란 책으로 엮었다.

“평생 불평 한마디 없이 말없이 참고, 침묵으로 살아온 시어머님의 일생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시아버님께서 혁명가로 평생을 국권회복을 위해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회고 내용의 일부다.

▲ 예안 부포마을 호동파 종가
▲ 예안 부포마을 호동파 종가

◇임청각 종부 김우락·허은

집안 항일투사 뒷바라지 운명으로 여겨

1910년 나라를 잃자, 경북의 수많은 유림들은 만주로 망명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 망명 대열에는 여인들도 많았다. 그녀들의 인고의 세월은 조국광복의 꽃이 됐다. 대표적 사례는 석주 이상룡과 함께 만주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던 임청각 종부 김우락과 그의 손부 허은이다.

김우락(1854~1933)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큰 오빠는 김대락이며, 막내 여동생이 김락이다. 그녀는 성장해 석주 이상룡의 부인이 됐다. 1911년 남편 이상룡이 만주로 망명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57세였다. 그녀의 만주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꿋꿋하게 견뎌냈다. 1922년 그녀는 손부 허은(1907~1997)을 맞아, 그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냈다.

허은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왕산 허위가 그의 재종조부이며,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바로 그녀의 고모다. 그녀는 8살에 아버지 허발을 따라 가족들과 함께 만주 영안현으로 망명했다. 16세가 되던 1922년, 허은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했다. 이상룡의 가족이 된 그녀는 만주지역 항일지사의 그림자가 돼 온갖 고난을 견뎌냈다. 각종 회의가 집에서 이루어지다보니 하루하루 땟거리를 마련하는 일도 녹록치 않았다. 시집 온 이듬해는 쉴 수가 없어 부뚜막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항일투사들을 뒷바라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녀는 조국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녀의 회고록`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 그녀의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부포마을에 뿌리를 둔 세 여성

권성, 남편 순국자결 결심에 같은 길 택해

부포마을 진성이씨 호동파 종가집은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위치인 안동시 예안면 부포못안길로 옮겨졌다. 이병희와 이효정은 종손 이규락의 손녀이자 증손이다. 그 뒤 이규락이 서울로 옮겨 가자, 이명우와 부인 권성이 이어 살았다. 즉 호동파 종가집은 이효정과 이병희가 뿌리를 둔 권성이 살았던 곳이다.

1920년 12월20일, 광무황제의 상기가 끝나는 날 이명우와 그 부인 권성이 자진을 선택했다. 권성(1868~1920)은 1868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닭실마을)에서 태어나 17세 안동시 예안면 부포마을로 시집왔다. 남편은 네 살 아래인 이명우(1872~1920)였다.

남편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12년 봄 가족을 데리고 속리산 아래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평리로 옮겨갔다. 죄인된 몸으로 세속을 버리고 자정하겠다는 뜻으로 고향을 떠난 것이다.

1920년 12월20일, 광무황제의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이 다가오자 남편은 마침내 자결을 결심했다. 이에 부인도 남편을 따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자결 하루 전인 12월19일 저녁, 권성 부부는 자식들을 물리고 유서를 썼다. 다섯 통의 유서에서 권성은 “남편이 지금 장차 순국하려고 하니 혼자 남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아 함께 죽고자 한다. 이에 짧은 편지로 영원히 이별하고자 하니 비탄한 마음 감히 토해낼 수 없다”라는 내용을 남겼다. 남편이 선택한 길이 `충의의 길`이었다면 부인 권성의 길은 충의를 받든 지아비에 대한 `의부의 길`이었다.

▲ 강경옥, 이효정, 이병희
▲ 강경옥, 이효정, 이병희

◇호동파 종가의 독립운동가 이효정·이병희

노동운동으로 일제 저항, 옥고 치르기도

이효정(1913~2010)은 노동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여성이다. 1933년 조직된 사회주의운동 단체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녀의 조상들은 대대로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에 살다가 조부 때 서울로 갔다. 증조부 이규락, 종조부 이동하와 이경식, 숙부 이병기, 고모 이병희 등이 모두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다. 2009년 3·1절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왜 독립운동을 했냐는 질문에 “어릴 때부터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했다”는 생전 그녀의 말에서 그 집안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18세 때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꿈은 문학가였지만 그 꿈을 접어야 했다. 2학년 때인 1929년 광주 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시기에 그녀도 만세를 불러 경찰서에 잡혀갔다. 이듬해 친구들과 백지동맹투쟁을 벌였다. 시험지를 백지로 낸 일종의 시험거부 투쟁으로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후 1933년 9월 턱없이 적은 임금을 이유로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여성직공파업을 주도한데 이어 이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던 그녀는 또 다시 경찰에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 뒤에도 노동운동을 이어가다 1935년 11월 결국 검거돼 1년을 넘게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와서 그녀의 항일투쟁이 새롭게 평가되면서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게 됐다.

이효정의 종고모였던 이병희(1918~2012) 또한 노동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여성이다. 고모이긴 하지만 이효정보다 나이가 어린 그녀는 여성동지들과 뜻을 모아 여공 500여 명을 이끌고 파업을 주도하는 등 노동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1936년 체포돼 4년 가까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9년 4월 출옥한 그녀는 1940년 다시 북경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1943년에는 망명 온 이육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9월 이육사와 함께 북경에 있던 일본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병희는 1944년 1월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육사는 그곳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그녀는 이육사의 시신을 손수 수습하고 유품을 정리해 국내 유족에게 보내는 역할을 담담했다. 1996년 비로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풍산소작인회 집행위원 강경옥

경북女性史선 드문 농민운동가

70대 중반 안동 풍산소작인회 집행위원이 된 강경옥(1850~1927)은 경북 여성사에서 농민운동을 펼친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알려주는 자료는 1927년 당시 언론에 보도된 간략한 기사 4건이 유일하다.

강경옥은 1850년 무렵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867년 17세가 되던 해 전씨와 혼인했다. 31세가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외아들과 함께 생계를 이어갔다. 비록 소작농이었으나 생계를 꾸리기에는 충분했으나 지주의 무리한 요구와 농업정책이 불합리하다고 여겼던 그는 풍산소작인회에 가입했다. 1925년 풍산소작인회관이 건립되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그녀는 이를 적극 지원하는 등 자신의 패물을 팔아 회관에 필요한 비품을 구입하고 경비에 보탰다.

농민운동에 분투하던 그녀는 노환으로 여러 달을 고생하다가 1927년 9월,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죽자 안동의 사회단체는 장례식을 단체장으로 치르기로 뜻을 모았다. 여성의 몸으로 농민운동에 나선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10월 1일, 예정대로 풍산시장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참여 인원이 수천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런데 당시 안동경찰서가 경관을 보내 장례식을 막고 나섰다. 결국 영결식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70대 고령의 나이로 풍산소작인회에서 투쟁했던 그녀의 메아리가 남성 중심의 전통사회에 끼친 영향은 사후에도 안동에서 사회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여성들이 늘어난 계기가 됐다.

안동/권광순기자 gskwon@kbmaeil.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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