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엔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다상관없는 일들이 계속 나의 초인종을 누른다용건도 없는 빈손이 찾아든다궤도를 이탈해 서로를 밀어내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중력에 굴복하는이름도 쓸모도 없는 행성 같은 이웃들이를 테면 옆집 사람의 감정사이사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다정한 말이 될 때거리를 회복할 수 있을만한 몇 종류의 안부도 희박하다지나치게 맑아 할 말이 없는 오늘 날씨처럼(부분)시인은 우리가 이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면서 살아나가고 있다는 현실을 민감하게 포착한다. 위의 시에서 이웃은 시적화자에게 이름도 없고 쓸모도 없는 머나먼 행성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저 이웃 아닌 이웃의 존재가 시인의 의식의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면서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극은 시인이 이웃의 상실을 무감각하게 버려두지 못하고 삶 자체의 위기로서 감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2-08-22
얼굴은 슬픔의 태막슬픔이 태어날 때마다얼굴이 찢어져서뒤집어 쓸 얼굴이필요해 더 많이밤하늘의 검은 동공은겹겹이 쌓인 시간의 그림자그림자는 다시밤의 얇은 살갗녹아내리는 손으로빈칸이 된 얼굴을 휘젓다 깨어나벼르고 벼르던낡은 수건 한 장을 버렸다(부분)밤하늘의 동공을 바라보는 얼굴과 그 동공으로 시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밤의 그림자가 대면한다. 그러자 손은 녹아내리고, 슬픔이 스며들며 찢어지는 얼굴은 빈칸이 된다. ‘얼굴-주체성’은 저 밤의 그림자와 뒤섞여 그림자의 시간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낡은 수건 한 장을” 버린다. 이제 그는 밤과 뒤섞인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의 몸에 묻은 밤을 닦아낼 수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리라. 문학평론가
2022-08-21
꼬박 하루를 지나야 빵이 익는다고느리게 흘러가는 이곳의 시간을 닮아가는 것이라고혼자 중얼거립니다. 나도 느릿느릿내일까지 모레까지 그리고 아득한 훗날까지당신이 익기를 기다려야 하겠다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우리 잠시 서로를 놓아준 틈에 잘 익어가기를,그러다 세상 반대편에서 빵을 캐 먹듯서로 뜯어먹을 수 있기를(부분)“시간을 닮아” “느리게 흘러”가며 천천히 익어가는 삶, 그리하여 빵처럼 “세상 반대편”에 있는 타인이 뜯어 먹을 수 있게 되는 삶. 그것은 사랑의 삶이겠다. 그 삶을 굽는 화로는 기억이며, 기억을 통해 익어가는 것은 기억 속의 ‘당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으로서의 삶이기도 하겠다. 기억의 불로 사랑하는 당신을 굽는 행위는 시 쓰기를 가리키기도 하기에. 자신의 기억으로 타인이 먹기 좋은 빵을 구워내는 시인. 문학평론가
2022-08-18
유년의 봄 날삼십 리 밖 쓸쓸한 소나무집훤칠한 처녀가뽑아다 준 백목련 한 그루.내 마음에서 뽑혀나간 구덩이 하나 남기고환한 얼굴처럼 온통봄을 쏟아내던지금도 그 울타리를두근두근 배회하고 있을까무심히 걸어두고 떠나 온네 번이나 강산이 변한 오늘백목련 한 그루 아직도훤칠한 얼굴로 피어 있을까.보아라, 만인萬人들아툭툭 주름 터뜨리며 나무가 늙지꽃이 늙더냐. (부분)‘환한’ 백목련 나무는 사랑의 대상인 처녀이자 사랑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의미하겠다. 시인은 유년 시절에 보았던 백목련 나무가 “아직도 훤칠한 얼굴로 피어 있을”지 자문한다. 이는 자신에게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 것, 그는 단호히 말한다. 나무는 늙지만 꽃은 늙지 않는다고. 바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자 기억 속의 그녀의 존재라고 할 꽃은 결코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8-17
겨울의 재 속뒹굴던 뼈에 살이 오른다동면의 시간을 깨고 죽음을 흔든다깊은 대지의 속을 깨고 나온 푸른 촉들이 번들거린다알을 깨고 나온 어린 새가 고요를 쪼고 있다숫총각과 숫처녀의 첫사랑은 수줍다그렇게 산은 수줍게 흔들린다바람과 햇살은 조연으로 들러리다굳었던 손가락을 펼쳐라마비되어 쩔뚝이던 다리를 버려라얼었던 나무에 생기가 돈다기름기 하얗게 흐르며 타던 장작의 시간을 떠올린다(부분)눈 속에 묻혀 죽어 있던 자작나무가 “죽음을 흔”들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알을 깨고 나오는 어린 새에서 볼 수 있듯이, 식물뿐만이 아니라 동물도 새로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아니 세계 전체가 새로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산 역시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수줍게 흔들”리는 것을 보라. 시인은 이 세계의 재탄생을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겨우내 굳어졌던 손을 풀고 마비된 다리를 버리라고 명한다. 문학평론가
2022-08-16
숨길 것 없는 수직의 빗줄기숲을 뚫고 내리꽂히는 원시의 햇살아마존 정글 반라의 검은 맨살들국부만 살짝 가린 거침없는 패션쓸데없이 웃고 떠들고 소리치며스치는 바람결에도 비명 지르며오직 생체 리듬의 순연한 본성을 따르고 있으므로찬양하라, 생명의 고향찬양하라 (부분)“반라의 검은 맨살들”, “국부만 살짝 가린 거침없는 패션”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아마존 사람들. 이들은 “오직 생체 리듬의 순연한 본성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찬양하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이들의 삶을 접하면서 크게 감화되었던 것 같다. 그에게 고향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고 이 아마존 마을이라고까지 말한다. 이곳은 모든 “생명의 고향”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2-08-15
바람이 가을을 끌어와 새가 날면안으로 울리던 나무의 소리는 밖을 향한다나무의 날개가 돋아날 자리에 푸른 밤이 온다새의 입김과 나무의 입김이 서로 섞일 때무거운 구름이 비를 뿌리고푸른 밤의 눈빛으로 나무는 날개를 단다새가 나무의 날개를 스칠 때새의 뿌리가 내릴 자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나무가 바람을 타고 싶듯이 새는 뿌리를 타고 싶다밤을 새워 새는 나무의 날개에 뿌리를 내리며하늘로 깊이 떨어진다타자와의 관계가 맺어지면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고자 하는 욕망을 낳으며, 그 욕망은 현재의 삶을 어떤 변화로 이끈다. 비상하고자 손짓하는 나뭇가지와 그 위에 앉아 뿌리를 내리려는 새가 관계를 맺자 나무의 ‘새-되기’와 새의 ‘나무-되기’가 이루어지는 것, 이때 새가 “하늘로 깊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되기’를 욕망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비상과 추락의 동시성, 그 역동적인 얽힘을 함의한다. 문학평론가
2022-08-11
암병동에도 눈은 내린다첫눈이라 더 절절한 사람들이창밖을 가리키며 소곤댄다그 가슴마다 소복이 눈이 쌓이면현실의 뒷길로 걸음을 옮기는 미련들고통을 잠시 잊는다고달라지는 것은 없다지만새하얀 천지간집으로 가는 길이 환하게 밝다첫눈이 다 그친 뒤에도마지막 눈은 내릴 것 같지 않다암병동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들은 저 첫눈을 보면서 “마지막 눈은 내릴 것 같지 않다”고 소곤댄다. ‘마지막’은 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가망 없는 기대일 수 있지만 삶의 막바지를 그래도 밝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저 눈이 환하게 드러내는 ‘천지간’을 통해 집으로 가는 길이 ‘마지막’이 도래할 길-미래-의 자리를 미리 차지하고 있으리라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2-08-10
비 그친 사이고추잠자리 한 쌍 옥상 위를 빙빙 돌고 있다두 마리가 하나로 포개져 있다누가 누구를 업는다는 거업고 업히는 사이라는 거오늘은 왠지 아찔한 저 체위가 엄숙해서 슬프다서로가 서로에게 서러운 과녁으로 꽂혀서맞물린 몸 풀지 못하고땅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나는 임계선 어디쯤문득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앉는 곳이 곧 무덤일질주의 끝이 곧 휴식일 어느 산란처죽은 날개는 너무 투명해서 내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고독한 개체들은 서럽다. 홀로 있으면 죽음을 향한 우울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 개체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를 과녁 삼아 목숨을 걸고 꽂히는 화살이 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자신을 열어 상대의 화살에 제공하는 과녁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에게 사랑의 삶은 감미로운 것이 아니라, “맞물린 몸 풀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임계선까지 화살 맞은 상처로 피 흘리며 다다르는 삶이다. 문학평론가
2022-08-09
2층 아파트에서 짐을 싸다 말고 베란다로 가서 마당에 침을 뱉는다. 그때 아파트로 들어서던 남자의 머리에 침이 떨어지고 그가 쳐다보며 욕을 한다. “미안합니다.” 말하고 돌아와 짐을 쌀 때 키가 큰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누구세요?” 그녀는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말한다. “난 며칠 절에 가서 쉬려고 그래요.” 내가 말하자 “저도 그래요.” 처음 보는 그녀가 말한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일련의 사건들이 인과관계 없이 연결된다. 짐을 싸다 침을 뱉고 침을 맞은 남자가 욕을 하고 시인은 사과한다. 그런데 사과하고 돌아오니 키가 큰 어떤 처음 본 여인이 자기도 함께 가지고 한다. 이러한 뒤죽박죽의 상황은 꿈과 유사하다. 시 속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들은 실제 대상이 없는 것이다. 이 시는 꿈을 그대로 시화해서 현실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 하여 이 시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는 해체된다. 문학평론가
2022-08-08
무너진 둑을 수리하느라, 물을 빼버려뻘을 드러낸 천흥저수지에도밑바닥 가득히 눈이 쌓였다겨울 내내 저수지를 지날 때마다내 밑바닥 또한 모든 것이 비워지면저렇듯 흉물스러울 것이라고만 여겼거니.결코 지워질 수 없는 삶의 몇 조각 남루만이뻘에 처박힌 쓰레기들처럼아프게 눈을 찌르리라 여겼거니.퍼붓는 눈 속에 스스로마저 지워져버린오늘, 천흥저수지와 더불어 밑바닥에 쌓이는비워짐의 무게, 그 눈부심!‘무너진 둑’은 무너진 삶을 의미할 터, 무너진 삶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삶에 남아 있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지워버려야 한다. 하지만 “삶의 몇 조각 남루”인 기억들은 “쓰레기들처럼/아프게 눈을 찌르”며 지워지지 않는다. 반면 눈이 쌓이고 있는 물 빠진 저수지는 “스스로마저 지워져버린”다. 눈은 눈‘꽃’이기 때문, 그 꽃의 눈부신 순결함이 ‘나’라는 저수지를 “스스로마저”, 즉 자아마저 지우게 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8-07
나는 나의 생을,아름다운 하루하루를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생’-삶-은 언제나 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버리고 또 다른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반복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은 허무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반복하는 것이 ‘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루를 쓰고 버려도 우주가 항상 새로운 ‘생’을 ‘리필’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생’은 우주의 선물이며 축복받은 것이다. 반복의 허무는 이렇게 극적으로 역전되어, ‘생’은 기쁨을 주는 것으로서 긍정된다. 문학평론가
2022-08-04
몸과 마음을 버려야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곳아내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와 시안에도들렀다내 생의 마지막 투병하는데절두산 부활의 집을 계약했다고 한다신혼 초 살림 장만하듯 아내와 반겼다절두산은 성지순례로 가족과 들렸던 곳낮은 나에게도 지상의 집을 사랑으로주셨다머리가 없는목 잘린 순교의 산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무두정無頭釘부활의 집 지하 3층에서망자와 함께 이제사 천상의 집 지으리라시인은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위의 시를 썼을 것이다. 그는 성지 절두산에 있는 ‘부활의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결심을 한다. ‘절두산’은 고종 초기 대원군에 의해 천주교 신자가 목이 잘려 순교-병인박해-한 곳이어서 ‘절두’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시인은 그가 마지막으로 이승에 남길 못은 목 잘린 순교자들처럼 머리가 없는 무두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2022-08-03
오래전 그녀와 통했던 비인 앞바다에 갔다가물결이 채색한 무지개빛 조개껍데기를 주워 와흰 접시 맑은 물에 넣어서 서탁에 얹어두고오래오래 들여다보았더니스무 살 봄풀 같은 아내를 다시 만났네물속에 어떤 사물을 넣었을 때, 그 사물은 어느덧 아름다웠던 시절을 현실화한다. 오래전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에서 가져온 조개껍데기를 접시 위 맑은 물에 넣고 들여다보니 스무 살 시절 아내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 물은 오래전에 펼쳐졌던 사랑을 다시 복원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물위에 쓰는 글 역시 그러하지 않겠는가. 물속에 용해된 글도 마법처럼 현실화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시인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고독을 살고 있는 것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2-08-02
사랑은 넝쿨손입니다철골 철근 콘크리트 담벼락그 밑으로 흐르는오염의 띠 죽음의 띠시뻘건 쇳물녹물을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부분)생명 작용의 미세한 산물들은 사랑을 드러낸다. 이 사랑 덕분으로 우리는 생명의 힘에 따른 인연으로 맺어진다. 생명을 낳고 되살리는 사랑. 그래서 사랑은 죽음을 생산하는 근대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다. 죽음-철-을 끌어안으면서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저 작은 ‘푸른 이파리’는 생명의 근원이자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린 이파리 한 잎이야말로 이 세계,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해주는 근원이다. 문학평론가
2022-08-01
얇은 옷을 트렁크에서 꺼내 입고녹야원 푸른 잔디에 앉았다햇살이 따가웠다 잘 가꾸어진 꽃을 쓰다듬으며‘분명 겨울이 아니야’그날 밤 몸은 심하게 열이 올랐다, 연신 콜록거렸다몸이 인정하지 않던 겨울에몸이 중심을 잃었다부겐베리아가 빨갛게 웃고 있는 바깥실내는 온통 포인세티아로 장식 돼있다여기는 지금 꽃 지지 않는 겨울마음을 가져오지 못한 몸은감기에 시달리는 중 (부분)‘부겐베리아’나 ‘포인세티아’는 모두 빨간색 꽃들이다. 그 빨간색은 심장의 색깔이라고 한다면 그 빨간색은 겨울을 견디는 마음을 전해준다. 추위를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도는 겨울에도 지지 않는 붉은 꽃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화자는 그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미리 봄을 맞이하고자 하다가 그만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감기로 인한 열병은 겨울을 나는 성숙을 위한 고통일 게다. 문학평론가
2022-07-31
고작 칠일 울려고땅 속에서 칠년을 견딘다고더 이상 말하지 말자매미의 땅속 삶을사람 눈으로어둡게만 보지 말자고작 칠십년을 살려고우리는없던 우리를 얼마나 살아왔던가환한 땅 속이여환한 없음이여긴긴 없었음의 있음 앞에있음이라는 이 작은 파편이여우리에게 없음으로 인지되었던 땅 속의 삶이야말로 매미에게는 환한 삶이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인간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때, 인간의 삶은 “긴긴 없었음의” 삶을 살아간 매미의 삶보다 열등하다. 인간에게는 없음을 살 수 있는 능력, 땅 속의 삶을 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매미보다 훨씬 떨어지기에. 이에 매미를 따라, 시인은 없음이 있음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전복적인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7-28
일하지 못해 상처받았거나상처받아서 일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실업명세서를 드립니다일을 멈추고 주저앉아시간을 멈추고하루를 멈추고 말을 멈추고 사랑을 멈추고세상을 멈추는 순간의 당신에게‘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두툼한 실업봉투 다달이 건네줄 수 있다면월급날 으쓱했던 당신의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요오늘은 월급날일하지 못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일하지 못하는 당신의 마음에 지금 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부분)위의 시는 실업 시간에 놓인 당신에게 “월급날 으쓱했던 당신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연대의 정신을 말해준다. 이 정신은 ‘실업명세서’라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상처받아서 일하지 못하는 당신”의 손을 잡는 이미지를 통해 제시된다. 이러한 ‘이미지-사유’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암시해준다. 그것은 삶이 삶을 나누는 연대의 시간, ‘공통체의 시간’을 창출하면서 살아가는 길이다. 우리 모두 떠나가며 만들어야 할 길. 문학평론가
2022-07-27
한 달에 한 번은 죽음 쪽으로 가서 이쪽을 돌아봅니다계절이 바뀔 때마다 탄생 이전으로 가서 여기를 바라봅니다생각하기 전에 평화라고 속으로 말합니다생각하고 말하고 난 뒤에도 평화라고 말합니다나지막이 평화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이것이 평화보다 먼저 평화가 되는평화보다 먼저 평화를 사는 몇 안 되는 방법입니다 (부분)위의 시에 따르면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평화 자체가 될 때, 즉 “평화보다 먼저 평화를” 살 때 비로소 도래한다. 생각 이전에 ‘평화’라고 속으로 발화하게 되는 상태, 이는 우리가 평화로서 존재하고 있는 상태다. 이렇듯 우리 자신이 평화가 되었을 때, “생각하고 말하고 난 뒤에도” “평화라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평화를 생각하며 읽은 시. 문학평론가
2022-07-26
노래하는 당나귀를 보았는가 무거운 짐 이고 지고앞만 보고 걸어가는 무심한 눈길짓누르는 돌덩이 아래서 흘러나오는경쾌한 노랫소리그에겐 이미 짐이 없다부서지기 쉬운 자들이 짐을 진다천천히 가지만 언젠가는 사막을 통과한다가녀린 나비가 바리케이드를 넘는다날개 한 잎 상하지 않았다 (부분)저 당나귀는 엄혹하게 착취 받고 있지만 경쾌하게 노래 부를 줄 안다. 이 능력은 당나귀의 잠재력과 존엄성을 증명하며, 그 노래는 “언젠가 사막을 통과”할 미래를 품고 있다. 노래 부를 수 있는 자는 “짓누르는 돌덩이”를 지고 있을지라도 자유로운 존재다. 그래서 그는 “부서지기 쉬운 자”이긴 하지만, ‘가녀린 나비’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 수 있으며, “날개 한 잎 상하지 않”고 “바리케이드를 넘”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2-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