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달려온 시간들이들녘에 깔려 밤을 재촉한다길게 울며 언덕을 내려가는염소들은 이제 밤을 볼 것이다구름들은 추억을 볼 것이다더욱 급하게 시간들은 들을뒤덮고 염소와 나무들은어둠속에 있다 우리는모두 어둠속에 있다걸어온 길의 발자국을 기억하는데도우리는 숨가쁘다 대지는 신음으로가득하다 언제 우리는 밤과 함께독이 될 수 있으리오 (부분)위의 시에서 어둠은 어떤 긴박함을 느끼게 하는데, 그 긴박성은 어둠에 내포된 종말의 이미지에서 온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 이제 구름들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몸을 감출 것이고, “우리는 모두 어둠속에 있”게 될 것이며, 우리가 걸어왔던 흔적들인 발자국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여 “대지는 신음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 시는 밤으로 표상되는 시간의 정지(끝)를 전율적으로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2-09-21
때까치는 무리짓지 않는다혼자서 행동한다꽃이 있는 공간을 날지 않는다한 마리 새가잎 진 느티나무 아득한 우듬지외로운 높이에 이를 때까지투명한 가을 하늘 전부를가랑잎 뒹구는 스산한 계곡 캄캄한 깊이를노을에 물든 날개를 흔들며단독자처럼 혼자서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 (부분)“높이의 의지”는 혼자서, “가을 하늘 전부를”, 그리고 “계곡 캄캄한 깊이”를 건넘으로써 이룰 수 있다는 시인의 포부가 거대하다. 시인은 대상을 내면화하면서, 상상력이 가진 변용의 힘을 통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 그것은 바로 “캄캄한 깊이”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이루어내지 못하는 일이다. 그는 ‘혼자서’ 언어와 삶의 심연을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깊이가 시인의 “외로운 높이”이다. 문학평론가
2022-09-20
게임 중독에 빠진 게이머처럼 사내는 오로지물수제비 떼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사는 동안 그에게도 수평에 배 대었다 떼며 비상하는 돌의그 아슬아슬한 찰나처럼 짜릿한 긴장에 전율할 때가 있었다하지만 물수제비 뗀 돌들 이내 물 속으로 가라앉듯삶은 지나는 순간 지워지고 만다 흔적이란 그런 것이다노을이 떠메고 간 자리 졸졸졸 어둠이 고여물수제비 보이지 않고 풍덩, 돌 빠지는 소리 산을 울린다. (부분)위의 시의 사내는 왜 중독된 듯 물수제비를 뜨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물에 빠질 듯 수면 위를 타고 날아갈 때 돌이 느꼈을 긴장에 따른 전율을 대리 경험하고 싶기 때문일 테다. 위의 시의 사내가 시인이라면, 그가 느낀 짜릿한 긴장은 시 쓰기의 순간이 주는 긴장과 같다고 유추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시 쓰기야말로 삶이라는 평면에 배를 대었다 떼면서 아슬아슬하게 비상하는 순간을 마련하지 않겠는가. 문학평론가
2022-09-19
하늘 향해 뻗은 가느다란 가지마다빈틈없이 잎을 달고 있는 모습 보시게가느다란 가지만이 잎을 다는 생의 경이를 보시게우람한 역사의 줄기를 살찌우고우수수 낙엽이 되어 종적 없이 사라질초록 이파리같이 빛나는 이야기들 보시게느티나무가 자라 옹이투성이 거목이 될 때까지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다 부러진까치집 삭정이 같은 이야기들 보시게.(부분)“우람한 역사의 줄기를 살찌우”는 것은 결국 “종적 없이 사라질” 초록 이파리 같은 이야기들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역사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다 부러진”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역사 역시 이야기 아니던가. 저 부러질 듯 “가느다란 가지”에 빈틈없이 달린 이파리들이 모여 “옹이투성이 거목”이 되듯이, 평범한 이들의 희망과 지혜가 담긴 이야기들이 모여 ‘우람한 역사’를 형성한다. 문학평론가
2022-09-18
하염없이 우는 영혼이 우리에게는없습니다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궁 속에서 죽은 태아같이 웅크리고만 있습니다숨결이 간결해지려면 맑은 어둠을더 많이 들이켜야 합니다울음을 조심해야 하는 밤울음의 구근을 쥐들에게 던져주는 밤은밀하게 흡혈하기 위하여우리는 서로의 흰 목덜미를드러내놓습니다누구의 피가 가장 달까요? (부분)시인에 따르면 “죽은 태아같이 웅크린” ‘우리’에겐 우는 영혼이 없다. 그러므로 “울음을 조심해야” 한다. 우는 영혼이 없는 우리들에겐 운다는 일은 감당하기 힘든 일일 테니까. 대신 우리는 흡혈하듯 “맑은 어둠을 더 많이 들이켜야” 한다. 간결한 숨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로 상징되는 상대방의 ‘삶-죽음’을 빨아 마셔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뱀파이어’라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2022-09-15
불행한 과거에 찍힌슬픈 낙인,붓이 어루만지자 백한 가지 고뇌가 흘러나온다캔버스에 다 담을 수 없는음지와 음지대칭점에서 만나면 찬란한 빛을만들어내는지압생트 없이도 황시黃視를 자주 본다예전엔 색이란 색 다 섞어보고꽃에도 구름에도 붓을 찍어 보았으나찾을 수 없었던 색,색의 한계를 넘어선 빛이 붓끝에일렁거린다 (부분)고흐는 지금 매춘부였던 클라시나(고흐가 시엔이라고 부른 여인)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는 클라시나의 몸에 찍혀 있는 고뇌들에서 태양광과 같은 황금빛이 번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여 고흐의 붓끝에는 “색의 한계를 넘어선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하고, 고흐는 비로소 자신만의 색채를 확보하게 된다. 즉 클라시나의 고뇌가 고흐를 위대한 화가로 만든 것, 그녀는 고흐에게 신성한 존재였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9-14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나를 내다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창밖 가로등 아래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있는 시인. 그도 역시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던 자이다. 하여, 시인도 저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이여서, 누군가에게는 죽은 사람과 같다. 하지만 시인은 ‘누군가’보다 일을 하나 더 하는데,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일이 그것이다. 즉 그는 시인 내면에 자신이 버려서 쌓여 있는 것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시 쓰는 날은 모두 ‘기일’이다. 문학평론가
2022-09-13
꿈이 하나여서 무겁지는 않지만속이 훤히 보여서비밀을 넣어 두면 뜨끔거렸다간직해야 하는 비밀이 두꺼워질수록아픔은 무뎌지고 파도는 순해졌지만섬은 선홍의 피로 물이 들었다가끔 바다의 호명을 받으면가난한 내 꿈은하나뿐인 불구의 날개로파도의 현을 타고 날아다녔다어느 태양계의 혈통인지나는 내가 궁금하다시인은 내밀하게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보여준다. 그를 초대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그 꿈은 비밀로 간직해야 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오래 간직한 그 꿈이 점차 두꺼워지자 아픔도 무뎌졌다. 하나 그 꿈이 사라지지 않고 삶의 내부를 “선홍의 피로 물”들여 왔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시인의 정열은 ‘바다의 호명’에 반응하기 시작하고 꿈이 다시 활성화된다. 이것이 그를 시로 이끈 이유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9-12
아주 사적인 생각에 빠져뼈다귀들이 설설 끓고 있다거품이 악성 댓글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담 든 몸에 파스 붙이듯이름을 계속 갈아 붙이고 살던 남자가아파트 11층에서 떨어졌다, 단풍 붉게 물든 늦가을회 뜨고 남은 살점 군데군데 붙어 있는 뼈다귀가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어디론가 헤엄쳐 가고 있다짠물에 새기던 사소한 고독의 가시 무늬익명탕이 홀로 졸아들고 있다 (부분)저 서더리탕은 광어의 것인지 도미의 것인지…. 우럭의 것인지 당신의 것인지 모르는 뼈다귀들로 만든 ‘익명탕’이다. 자살한 그나 당신이나 나나, 서더리탕의 뼈다귀들처럼 “사소한 고독의 가시 무늬”만을 남기고 “홀로 졸아”드는 익명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렇게 서더리탕과 익명의 삶을 동시에 포착하여 두 존재를 겹쳐놓으면서, 시인은 자신의 살을 다 해체하게 되는 현대인의 운명을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2022-09-07
봄은 당신의 잇몸 발가락 엉덩이향기롭다 시끄럽다 다정하다나는 인생의 정점에서 입술을 잃었네뒤통수를 잃었네당신의 표정과 눈빛이 되살아났지신발 한 짝을낡은 가방을뜨겁게 노래한다네나와 어울리지 않는 걸음걸이로 비딱하게뿌리가 없어도 좋다네여러 개의 목소리로 서서길이 지워지는 것을새로 태어나는 것을본다 (부분)도래한 봄은 향기롭고 시끄럽고 다정하다. “당신의 표정과 눈빛이 되살아”난다. 되살아난 당신의 육체를 감각할 수 있게 되면서, 시인은 “여러 개의 목소리로”, “뜨겁게 노래”하며 살리라는 의지를 갖게 된다. 삶의 과정과 함께 할 “신발 한 짝”과 “낡은 가방”에 대한 노래를. 시인의 시 원고가 담겼을 “낡은 가방”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상징하리라. 그러자 이제 지나왔던 길은 지워지고 새로운 길이 태어난다. 문학평론가
2022-09-06
간밤 온 비로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빛 드는 쪽으로엎드려잠들어 있을 때이른 아침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떠나는 한 사람종소리처럼빛이 번져가고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깨어나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부분)얼음 속에 잠재해 있던 물소리가 나면서 ‘물의 언어’는 해방되고 시적인 것이 충만한 생명의 세계가 재생될 것이다. 사랑이 숲에 새로이 퍼져나가면서 생명을 가져올 봄이 도래한다. 그 사랑은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건이다. 세계가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떠나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의 귀환을 향한 사랑의 기다림이 숲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 힘을 가져오기에. 문학평론가
2022-09-05
떠나기 위해 기다렸지만우리가 기다리는 비행기는아무래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사람들은 졸거나 속삭이거나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우리는 움직이지 못하고지나가버린 시계의 분침과멈춰버린 유리벽 너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우리는 떠나고 싶었지만떠나지 못하고풍경처럼 거기에 앉아 있었다멈춰 있는 여명 너머로는멀리 새의 그림자 같은 것들도 보이지 않았다 (부분)이 시는 시인이 핀란드의 작은 공항인 이발로 공항에서 직접 겪은 일을 시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직접적인 체험의 묘사는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상황으로 상징화된다. 세계는 멈춰버린 ‘풍경’으로 현상하며, 그 풍경 속에 존재하는 우리 역시 비행기 연착으로 “멈춰 있”는 현 상황. 시인의 인식은 암울하다. 여명도 멈춰버리고 그 너머로 어떤 새도 날지 않는다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2-09-04
양말을 꿰매다가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본 날은작은 바늘을 물려받은 것을 원망했다내가 가진 바늘로는기름에 찌든 끼니를 먹고손가락을 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구멍의 시작, 돌 반지를 팔고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쏘아 올렸다마이너스통장엔 동그라미가하나 더 생기고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보름저 밤하늘도 구멍 난 양말을 신었다발꿈치가 환하다 (부분)“작은 바늘을 물려받은” 위의 시의 화자에겐 바늘구멍은 그나마 있는 돈이 빠져나가는 구멍이다. 화자의 벌이는 구멍 난 양말을 꿰매듯 돈 새어나가는 구멍을 꿰매는 일밖에 되지 않고, 그럼에도 구멍은 꿰매지지 않는다. 하나 화자는 절망에 빠지진 않는다. 하늘 역시 화자처럼 “구멍 난 양말을” 신어 발꿈치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 저 ‘보름달-발꿈치’의 환한 빛이 화자에게 삶의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9-01
착하고 쓸쓸한 도시를 지우는 비문,언젠가 우리도 다 지워지고 말겠지만고인 물은 냄새나고 부패하고 변한다.눈부셨던 날도 흘려보내야반짝이며 산다.저기 멀리에 젖은 땅이 끝나는 근처,하늘이 시작하는 희미한 경계에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순간이 보인다.한나절의 비는 저녁 무렵에야 끝나고그친 곳에서부터 명지바람이 일어난다.바람을 타고 오는 숨결들이오늘은 순한 저녁 햇살이 되었다.주황색 도시가 눈부신 축제를 연다.사방에 퍼지는 장엄한 일몰, 용서해라,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부분)마종기 시인은 죽은 이들이 펼쳐놓은 듯한 일몰의 시공간을 ‘축제’로 표현한다. 그는 저 주황색 축제로 이미지화 되는 죽음을 강렬하게, 그리고 환하게 맞이하고자 한다. 노년의 그는 그렇게 축제 속으로 들어갈 마음의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이때 그는 동생을 포함한 죽은 이들, 아니 그들이 묻힌 도시에게 용서를 빈다. 그것은 이승에서 그들이 살았던 도시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용서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8-31
먹지에 스며든 통증 하늘빛이 자궁으로 들어가고 장승의 광대뼈도 검게 물들었다 느티나무를 뚫은 바람은밤의 몸을 가르고억새가 잠든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아픈 표정을 가린팽나무의 실루엣이 더 검게 보였다 하늘에서 잿가루가 떨어져밤길을 걷는 발자국이 지워지는 그믐 모든 하늘빛이 자궁으로 되돌아갔다.(부분) “자궁으로 들어”간 ‘하늘빛’이 잿가루가 되어 그 자궁에서 다시 나오고 있다. 하여 그믐달이 뜬 밤에는 삶(자궁)과 죽음(잿가루)이 뒤바뀌고 혼재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세계는 “아픈 표정”을 짓는다. “밤의 몸을 가르”면서 세계의 뭇 존재자들을 꿰뚫고 지나가고 있는 바람 때문이다. 바람은 죽음의 흔적-잿가루-을 여기저기 뿌리고, 그믐의 세계에는 이렇게 죽은 자의 흔적들이 ‘먹지’처럼 검게 스며든다. 문학평론가
2022-08-30
당신의 속눈썹에 앉은 하얀 입자,세상의 경계를 지우려던 모든 파동이나풀거린다오직 발자국만으로 두 개의 행성 사이,그 가깝고도 따스한 거리를 재던자오선의 길이태양이 그림자를 가장 줄일 때첫눈이 오면 만나자던 약속은정거장의 늙은 시계탑을 생각하게 한다창을 열지 않아도 길은 은박지처럼 눈을 찌르고사랑이라는 말은 말풍선이 되어입김 같은 너를 떠오르게 했다 (부분)“당신의 속눈썹” 위에 내리는 첫눈은 당신과 나를 연결해준다. 세계의 경계를 지우며 “모든 파동이/나풀거”리는 첫눈의 풍경. 당신과 나, 두 “행성 사이”가 “가깝고도 따스한 거리”임을 보여주는 첫눈 내리는 자오선. 하여, 사랑의 존재를 가시화해주는 첫눈. 그러나 지금은 “첫눈이 오면 만나자던 약속은” 다만 “정거장의 늙은 시계탑” 속에 갇힌 시간, 이제 사랑은 만화의 말풍선처럼 “너를 떠오르게” 할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2-08-29
신이 거대한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다.인간은 오리털 파카에 갇힌 무수한 오리털들, 이라고 시인은 쓴다.이따금 오리털이 삐져나오면 신은 삐져나온 오리털을 무신경하게 뽑아버린다.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중략)죽음 이후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천사와 악마도 없고단지 한 가닥의 오리털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다 바닥에 내려앉는다,고 시인은 썼다.이 시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입은 오리털파카 속 오리털들이며, 인간의 죽음은 삐져나온 오리털을 신이 “무신경하게 뽑아버”리는 일일 뿐이다. 이 엉뚱한 이야기에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어떤 가차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 시인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환상을 갖지 말라고 한다. ‘단지’ 어떤 움직임은 있다. “허공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다” 떨어지는 ‘오리털-인간’의. 삶의 비정하나 슬픈 운명. 문학평론가
2022-08-28
백내장으로은혜도 원수도 다 희미해졌다비루해서남 같지 않는 생,비굴한 체위라도이생을 견디고 싶다쓸쓸한 기미를 좇다가족도 놓쳤고감추며 살았던 흉터는등이 되었다가난을 횡단하며섭섭함도 길이 되었다등을 밀어준 눈물이여눈 감으면만경창파를 보여다오 (부분)시의 화자는 감추고 싶었던 흉터가 등이 되어버린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삶을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은 버리지 않는다. 비록 ‘비루’해져버린 삶이지만, “비굴한 체위라도/이생을 견디고 싶다”는 것이다. 하여, 그 비참의 ‘눈물’이 그의 “등을 밀어”주어 “가난을 횡단하”는 삶의 길을 만들어줄 것이다. 이 시의 절절한 목소리는 숙연한 느낌을 준다. 그 목소리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목소리이기도 하기에. 문학평론가
2022-08-25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알 수 없는 무엇이다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그 눈, 을 빼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은 자다, 하지만그 눈, 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부분)위의 시의 눈은 시적 비전-“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을 가진 눈, 내일의 세계를 재구성하며 재창조하는 “잠들지 않는” 눈이다. 그래서 그 눈에서 나오는 눈빛은 칼처럼 날카롭다. 세계를, ‘네거리’를 다시 구획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베어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눈은 칼날이 서 있기에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것이다. 이 칼이 정숙자 시인의 신조어인 ‘공검’(허공을 베는 검)이다. 문학평론가
2022-08-24
동경을 기웃서울을 기웃널빤지도 없이 홀로 공중에 솟구어북풍받이 중천에서 헤매는 널뛰기 놀이해저문 도시 빌딩 사이사이서리 내린 뒷골목오류의 역사 깊은 그늘에 갇혀반 쪽빠리도 온 쪽빠리도 아닌 재일교포안주할 보금자리 찾아지친 듯 미친 듯이곳저곳 기웃기웃널뛰기 바쁘다 (부분)재일교포인 시인은 한국이나 일본,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에겐 발 딛을 수 있는 기반이 없다. 다만 널빤지도 없이 “헤매는 널뛰기 놀이”만 “지친 듯 미친 듯” 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양쪽 나라 사람들 모두에게 배척받는다는 느낌만을 갖게 된다. 특히 한국인의 배척이 더 심하다. 한국에서 “반 쪽빠리도 온 쪽빠리도 아닌 재일교포”는 일본인보다도 더 소원한 대상으로 취급되기에. 문학평론가
2022-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