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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특권에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국회의원은 특권을 가진다.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 그는 현행범이 아닌 이상 회기 중 국회의 동의없이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는다. 국회에서 직무상 발언하고 표결한 바에 대해 민사상, 형사상 및 행정상 그 어떤 법적 책임을 지지않는다. 국회의원이 국민을 대표하여 국정을 살피고 입법함에 있어 외부의 압력이나 위협을 받지않고 소신껏 발언하고 행동하도록 보장한다. 그의 행위와 발언이 진정과 진실을 담고있을 것이라는 국민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발언의 내용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행위의 기저에 불법이나 비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국민은 그들을 믿거라 하면서 국회로 보낸 셈이다.신뢰가 무너지면 기초부터 흔들린다. 발언이 명백한 허위사실을 담고 있었다면, 그 발언에 기초한 내용과 논지를 국민이 수용할 방법이 없다. 거짓말을 믿어줄 국민이 어디 있는가. 어쩌다 이처럼 딱한 일이 벌어졌을까. 국민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분명하게 확인하지 않고 발설한 의원에게 명백한 책임이 있다. 국민이 특별한 권리를 제공할 때에 의원은 특별한 책임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을 대표하고 국익을 우선하여야 할 자리에서, 정당만 대표하며 당략에만 몰입한 나머지 벌인 패착이 아닌가. 국민은 진실을 원할 뿐이다. 허위와 과장을 담은 발언과 주장에 넘어갈 국민은 없다. 거짓이 드러나면 지지하던 국민들도 생각을 달리하지 싶다. 의원 본인은 물론 소속정당도 부정적인 국민여론에 시달리지 않겠나.권리는 소중하다. 특별하게 부여받은 권리일수록 특별하게 다루어야 한다. 특권을 함부로 여기면 국민저항을 만난다. 해당발언을 접한 국정조사장에서 당장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사람 의원이 저지른 뼈아픈 실수가 국회가 소신있고 책임바르게 국정을 수행할 소중할 권리를 손상하고 박탈당할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국회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릴 위기국면이 아닌가. 세상이 변하여, 같은 편이라면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지고 거짓과 왜곡도 믿어삼키던 시절이 더는 아니다. 내 편일수록 철저하고 세심하게 살펴 확인한 정보를 기반으로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국민은 어찌해야 하는가. 나를 대표하라고 보낸 국회의원의 행위에 거짓이나 기만이 없는지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팩트와 진실이 넘쳐야 할 자리에 허위와 날조가 들어서면, 나라와 민생은 갈 길을 잃는다. 국민은 국회가 있어 편안해야 한다.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는 국회는 상상에도 없다. 오로지 진실에 기초하여 나라와 국민을 섬겨야 한다. 발표와 토론에 동원하는 자료는 모두 사실에만 근거해야 한다. 사실확인을 토대로 나누고 알려야 한다는 원칙은 국회뿐 아니라 언론에도 마찬가지다. 팩트에 힘이 있다. 거짓에 의지하면 무너질 뿐이다. 확인없이는 팩트가 죽는다. 진실이 흔들리니 특권이 도전받지 않는가. 진실이 드러나야 나라가 산다. 팩트가 확인되어야 국민이 편하다.

2021-10-20

오징어게임 덕에 돌아보다

장규열한동대 교수 오징어게임이 지배한다. 넷플릭스 전용 콘텐츠로 소개된 지 3주 남짓 전 세계 94개국 1억이 넘는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456억, 어른들의 동심이 파괴된다’는 슬로건으로 어릴 적에 동네 골목길에서 즐기던 놀이들이 소환되었다. 미국 내 주요매체와 외신들마저 ‘한국적 콘텐츠가 지구 보편적 감성을 흔들어놓은 작품’으로 호평한다. K-pop이 이끄는 한류가 영화계를 연이어 휘젓더니 이제는 글로벌뉴미디어 시장에서 드라마가 기회의 창을 넓게 열었다. 경제적 위기에 처한 456인의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456억원에 도전한다. 여섯 게임을 통과하여 살아남으면 큰 돈을 거머쥐겠지만 최후의 승자 한 사람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드라마적 허구로 가득하지만 현대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다.456인 가운데 455인은 죽어야 하는 비정하고 슬픈 구조를 드러내며 무자비한 경쟁과 극도의 긴장으로 몰고간다. 시청자들의 인기가 드높고 언론의 호평이 가득하지만, 희한하게도 ‘죽음’을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다. 콘텐츠는 오히려 패자의 죽음에 분홍색 리본으로 충격을 줄인다. 삶을 마감해야 하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유연해 졌을까. 폭력적 콘텐츠에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는 모두 죽음과 살인에 관하여 무감각해진 것일까. 돈을 위해서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냉소와 자조에 빠진 것은 아닐까. 죽어 사라지는 경쟁자들에 오히려 짜릿한 승리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일까. 상생과 협력, 공감과 배려는 듣기에만 좋은 소리였을까. 죽음에 대하여 이렇듯 드러내고 바라보면서 슬픔이나 동정이 사라진 현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최후의 한 사람이 456억을 굳이 다 가져야 하는 경기방식.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고안한 룰이지만, 돌아보면 극도의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우리네 자화상이 아닌가.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Winner takes it all.) 운영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짜릿한 쾌감마저 느끼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1억씩 공평하게 나눌 생각은 아예 해 보지도 않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너무 익숙한 것은 아닌지. 극한의 양극화가 삶과 죽음으로 극화 대비되었을 뿐 극소수와 99%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가. 분배정의를 논하지만 공평하게 나누는 일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능력과 배경에 따른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제도와 관습이 지어져 오지 않았는가. 이제라도 돌아보며 공정과 상식을 살려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죽음을 버거워하지 않는 사회와 승자만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삶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고 경쟁의 가치만 드러내는 일도 부당하다. 힘들어도 살아내며 어려운 이를 돌아보는 정서를 회복해야 한다. 오징어게임이 콘텐츠로 표현하는 비정함의 오류와 무한경쟁의 약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죽음보다 삶이 소중하다. 정글같은 경쟁만큼 협력하는 상생이 화두여야 한다.갖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노력과 서로 살피며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2021-10-13

토론 유감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선이 이제 다섯 달 앞이다. 정당들이 대선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경선에 힘을 쏟는다. 국민 앞에 주자들을 선보이고 평가받기 위해 토론을 여러 차례 벌인다. 방송사들과 시민들의 금쪽같은 시간을 쓰면서 벌이는 말의 경연은 도무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강점이 있어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당신의 제시하는 나라의 내일이 내가 꿈꾸는 비전과 함께 하는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경선의 ‘흥행’이 목적인지는 몰라도, 후보들이 국민과 경선의 본질을 나누지는 못하고 있다. 토론은 국민의 선택을 도와야 한다. 토론은 국민으로 나라의 내일을 기대하게 해야 한다. 토론은 나라경영을 위한 후보의 자질을 보여주어야 한다.부동산에 관한 국민의 혼돈은 어찌 해야 하는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는 어떻게 줄일 터인가. 백년대계 교육은 어느 한 사람 언급조차 없다. 청년의 절망을 제대로 이해하는 후보가 보이지 않는다. 지역 간 갈등은 자신들의 출신지로 때울 뿐이 아닌가. 평화통일은 우리의 소원인가 아닌가. 만성적인 저성장의 굴레는 어찌 극복해야 하나. 사회에 만연하는 차별과 혐오정서는 그대로 두어도 되는지. 고령화와 저출산은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가. 나라의 안전과 사회의 질서를 확보할 지름길은 무엇인가. 디지털과 인공지능이 이끄는 4차산업혁명을 당신은 속속들이 이해하는가. 지구온난화와 환경문제는 그 뿌리를 헤아리고나 있는지. 후보 당신은 이들 과제를 폭넓게 담아 대처할 인성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가.당신의 어깨에 실릴 내일의 무게와 기대의 총량을 이해하는가. 토론하는 자리에서 국민이 목격해야 할 내용과 태도는 오늘 당신이 보여주는 그것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역대급 네거티브 비방전은 그만 보았으면 한다. 당신이 품은 고약한 속내만 드러날 뿐이다. 화려한 말솜씨로 국민의 마음을 사겠다는 술수도 반갑지 않다. 국민은 언변보다 역량을 찾는 중이다. 흠집 내기와 말꼬리 잡기도 식상할 뿐이다. 당신들 덕에 코미디쇼들이 사라졌다는 비아냥이 들리지 않는가. 대선경선 토론에 정책은 사라지고 말싸움만 가득하다는 관찰은 치명적이다. 방송전파를 허비하고 국민관심을 배반하는 게 아닌가. 이제라도 돌이켜, 나라의 내일과 국민의 일상에 희망과 기대를 안기는 토론을 열어주었으면 한다.대선주자는 누구보다 정직해야 한다. 솔직해야 한다. 어느 인간이 완벽할 수 있나. 실수와 부족함이 드러날 참이면, 진솔하게 시인하고 다음 라운드에 새롭게 임하는 자세를 보여 주시라. 모르면서 아는 양 없으면서 있는 양 하는 태도, 국민이 금방 알아채서 당신의 신뢰도만 깎일 뿐이다. 청렴하고 일 잘하며 인간미도 넘치는 당신이 다음 오 년을 맡아주었으면 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이웃과 함께 호흡하면서 빈틈없이 국정을 살피고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줄 리더를 기다린다. 토론에서 또 만날 당신에게 국민은 그래도 기대를 건다.

2021-10-06

청년은 무엇을 어쩌란 말이냐

장규열 한동대 교수 50억원. 돌려 말하지 않는다. 크다. 커도 너무 크다. 액수가 크고 충격이 크다. 20대와 30대가 대선을 향한 표심에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할 터에, 정치권도 사뭇 긴장하는 중이다. 한 시간 열심히 일해야 만 원도 안 되는 최저임금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그 충격은 치명적이다. 받은 돈이 퇴직금 또는 성공보수라고도 하고 산업재해 보상금이라고도 하지만, 청년들에게는 그 액수 자체가 너무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마음을 어지럽힌다. 소박하나마 고정적인 수입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불철주야 달리는 오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뉴스는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다. 취업 길은 꽉 막힌 듯 보이고 창업 전선도 쉬운 게 아니다.가르치는 사람에게도 충격의 강도는 세다. 소양을 기르고 실력을 닦아 자신과 사회를 위해 득이 되고 덕이 되라 선생들은 가르치고 있었다. 고작 여섯 해 남짓 일하고 저 큰 돈을 거머쥐었다니, 우리는 잘못 가르치고 있었던 것일까. 본인은 아직도 정당한 업무의 대가였다고 우긴다는데, 우리는 그 돈의 정체를 알아야겠다. ‘아빠찬스’였는지 우회뇌물이었는지 그 소위를 밝혀야 한다. 영문도 모르고 일격을 당한 채 물러설 국민은 없다. 자신이든 그 아비이든 솔직했으면 하지만 그럴 확률은 터럭만큼도 없다. 어안이 벙벙해진 대한민국 청년들을 위하여 분명한 해명과 납득이 없이는 한 치도 나아갈 수가 없다. 겨냥하는 정치적 목표에 가 닿으려면, 50억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야 한다.청년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저울질당하고 있었다. 비정규직 가운데에서도 시간제, 한시직, 비정형직으로 구분되며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퇴직금은 상상 조차 못하며 생존의 가능성을 염려하였다. 그 틈에 저런 청년이 존재하였다니, 거의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당신들이 진심으로 20/30을 당겨 안고 싶었다면,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분명하다. 나락으로 추락한 젊은이들의 사기를 일으켜 세우려면, 우리의 관심은 저 돈의 소위를 밝히는 데 있어야 한다. 극도의 불공정과 비상식이 이처럼 붉어진 터에, 공정과 상식을 논하는 자는 오히려 의심을 사지 않을까. 혜택을 누리도록 시스템을 설계한 자를 탓하는 맹랑한 소리가 있다. 칼로 살인을 저질렀는데, 칼 만든 사람을 탓하며 용서해야 하나.옳지 않은 건 누구나 안다. 바르고 정의로운 나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험하다. 오늘 당장은 나라의 청년을 위로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선생과 학교도 할 말을 잃었다. 충격과 혼돈이 가득하지만, 관련 당국은 가장 빠르게 이 일의 소위를 밝힐 방도를 찾아야 한다. 물타기와 시간끌기로 막으려 하겠지만, 온 국민이 주시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른쪽 왼쪽 겨루기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이고 상식과 비상식이 드러나는 일이며 부패한 기득권과 성실한 시민들의 뚜렷한 차이가 아닌가.할 말을 잃은 청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돌려주어야 한다. 청년이 힘을 내야 미래가 있다. 그 미래가 닫힌 느낌이 아닌가. 50억을 밝혀야 한다.

2021-09-29

추석 정취와 치매 혐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하필 올 추석날이 ‘세계알츠하이머의 날(World Alzheimer’s Day)’과 겹쳤다. 노인이 되어 기억력이 사라지고 인식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질명, 치매(Dementia)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예방과 치료에 인류의 공동노력을 기울이자는 다짐을 담은 날이다. 전세계 노인인구 가운데 5천만 명이 넘게 앓고 있으며, 65세 이상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치매에 걸린다고 한다.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치매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지역의 보건소에는 검사와 대응을 위한 ‘치매안심센터’를 둔다. 치매야말로 인간 노후 삶의 질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병이 아닌가. 생노병사의 노정 위에서 치매에 대해 완벽하게 안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국회의원들은 가히 현수막으로 정치를 한다. 의정성과를 알리며 자랑하거나 명절인사도 길거리 현수막 문구로 건다. 추석이 다가오는 어느 날, 서울 어느 지역에 내걸린 현수막은 ‘축, 실버케어센터 계획, 전면 백지화 확정’이라 적었다. 그가 속한 정당도 ‘우리의 염원, 실버케어센터 백지화 달성!’이라 외치고 있었다. 눈을 의심하였다. 세상에 축하할 일과 염원 삼을 일이 따로 있지, 어르신을 돌보는 장소가 지역의 혐오시설이 되다니! 계획을 백지화시킨 일이 국회의원의 치적이 되고 정당의 자랑거리가 되다니!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을 가까이 모실 기회일 뿐 아니라, 어린 자녀들에게 공감과 배려를 가르칠 교육기회일 수도 있을 게 아닌가.아니 어쩌면, 센터를 더욱 적절한 곳에 세우기 위해 계획이 무산되었을 수도 있겠다. 보다 안전하고 비용대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일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국회의원과 정당은 그런 사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계획을 알리면 된다. 지역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니 ‘축하’하거나 계획무산이 ‘우리의 염원’이었다고 치하할 일을 없었을 게 아닌가. 지역에 혹 실제로 아파트 가격하락을 걱정하는 민원이 있었다면, 더욱 세심하게 공간의 필요와 지역의 상황을 폭넓게 살펴 최선의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았을까. 새털처럼 가벼운 혐오 정서에 편승하여 저런 현수막을 높이 거는 일은 없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세상이 거꾸로 흘러가도 국회의원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추석은 물론 가족의 시간이다. 가족 구성원 사이의 정을 확인하고 나누는 좋은 명절이 아닌가. 우리 가족 안에 나타날 수 있는 질병, 치매가 내게 닥칠 때에만 무서울 것인가. 사회가 함께 겪는 어려움으로 바라보고 공동체적 배려와 공감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혹 아직껏 그같은 공동체적 인식에 달하지 못하였다 해도 치매를 ‘혐오’로 바라보는 일은 지나친 게 아닐까. 누구나 나이가 들고 쇠약해 간다. 인생의 황혼길에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그만큼 서글픈 일이 다시 있을까. 인생의 선배로 앞서 세월을 지내오신 어르신들을 보다 따뜻한 눈길로 섬겨야 하지 않을까. 추석의 아름다운 정취가 치매를 멀리하는 밉상스런 정서에 떠내려 가지 않기를 바란다. 어른들이 계셔서 당신이 있다.

2021-09-22

눈에 보이는 대로 배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사람은 어떻게 배울까? 책보면서 깨우치고 학교에서 습득하며 살아가면서 여러 모양으로 배운다. 생각보다 우리는 ‘보면서’ 배운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목격하고 흉내내면서 내 것을 만들고 인성을 형성한다. 책이나 학교보다 눈으로 보면서 실제로 경험한 일들로부터 훨씬 많이 배운다.대선정국. 담론 주제가 위중하고 정치에는 모두 관심이 높은지라 국민의 흥미를 사로잡는다. 언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필자에게 깊은 우려를 가지게 한다. 정치의 현실이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게 숙명이라지만 정도(正道)가 있고 금도(禁道)도 있는 게 아닌가. 원칙도 없고 소신도 바르지 못한 모습을 흔하게 목격하는 국민은 지치다 못해 나라의 앞길을 걱정하게 된다. 그리고 국민이 특히 다음 세대가 무엇을 배울까 우려가 앞선다.거짓말. 돌아서서 살피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당당하게 한다. 실수로 발설한 거짓말도 끝까지 진실이라 우긴다.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길 원하지만, 혹 실수였다면 바로 사과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눈덩이처럼 불어난 산더미 거짓된 모습이 정치의 현실이라면 국민은 또 얼마나 가여운 처지가 되고 마는가. 개인이 아니라 특정 집단이었다면 당연히 나라와 국민 앞에 거짓을 고하고 속속들이 살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숨겨서 될 일이 아니다. 디지털과 온라인, 4차산업혁명은 거짓을 드러내는 데에도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뿌리채 드러나 형편없는 창피를 당하기 전에 국민 앞에 정직해야 한다.말을 바꾸는 일. 평균적으로 지능이 높아져서 그럴까, 했던 말을 교묘히 바꾸며 빠져나간다. ‘법적으로는 모르지만 도의적인 책임은 지고’ 미끄덩거리며 꼬리를 뺀다. 실질적인 책임과 분명한 사리판단은 언제나 남의 몫이고 자신은 어느 틈에 그 자리에 없다. 유체이탈.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 말을 바꾸고 사라져 버린다. 거짓과 악행의 증거와 자취는 감쪽같이 없애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으로 행동한다. 국민은 무엇을 배울까. 거짓과 위선을, 말과 훈계로 경계하기 보다 저렇듯 뉴스 속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며 실증적으로 체득하게 되지 않을까. 궂은 일에 걸리면 핸드폰들은 파쇄되거나 사라질 터이다. 거짓말을 하면서 태연히 눈을 부릅뜨지 않을까.공정과 상식, 정의와 올바름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국민의 눈에 목격되어야 하고 경험과 기억 속에 들어와 박혀야 한다. 보고 듣는 것은 늘 거짓과 위선인데 어떻게 공정과 정의로 세상을 물들일 것인가. 공의가 물같이 흐르려면 거짓없는 사람을 흔하게 만나야 한다. 상식이 가득한 세상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상식에 맞게 살아내야 한다.남들은 몰라도 나는 나를 안다. 거짓을 저지른 당신은 그것이 거짓인 줄 스스로 안다. 필요한 건 용기. 나라가 선진국으로 우뚝 서기 위하여, 거짓을 떨치는 당신의 용기를 ‘보고’ 싶다. 사람은 본 대로 배운다.

2021-09-15

위드코로나를 기다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코로나19가 질기다. 인류를 감염병 공포로 몰아넣은지 500일이 다가오는데 도무지 물러설 기색이 없다. ‘뉴노멀’이라지만 세상은 몰라보게 바뀌었고 관계도 조금씩 틀어져간다. 만나고 어울리며 부대끼고 정겹게 돌아가야 할 인간사가 ‘사회적거리두기’로 차단되고 단절되어 이전의 모습을 회복할 길이 있을까 싶다. ‘재택근무’가 자리를 잡는다지만 일터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느낌은 그리 고운 게 아니다. ‘원격진료’가 세심한 의료진의 손길을 대신할 수 있을까. 비대면강의가 넘실거리지만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물론, 교우들 간의 정서마저 끊어진다.가을학기 개강을 했지만 교정의 모습도 벌써 을씨년스럽다. 북적이는 강의실과 낭만넘치는 캠퍼스풍경은 오간데가 없다. 학생들이 근처에 있는 듯 하지만 강의현장에는 사람이 없다. 대학의 뉴노멀은 온라인강의와 비대면접촉으로 마감할 것인지. 학생들이 학교와 강의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가 어긋난 나머지 바람직한 모습을 영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공교육의 현장에도 같은 우려가 없지않아 온라인수업의 확대는 물론, 학교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학교는 왜 다니는 것이었을까?학교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공부’에만 있을까. 코로나19 와중에 학력저하가 걱정되고 학력격차가 벌어질까 마음이 쓰이지만, 학교의 존재이유가 ‘학력’에만 있었을까. 학교에서 진짜로 배우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만나고 헤어지며 어울리고 나누는 가운데 깊어가는 인간애를 배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미움과 갈등도 어떻게든 헤쳐가며 애증이 쌓이는 학우들과의 관계형성. 그것 뿐인가. 학생과 선생, 교수와 제자 사이에 무르익는 정서와 관계는 교풍을 만들고 전통을 세워가는 다리가 아니었을까.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백신접종과 방역효과와 함께 이제는 보다 유연한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차단과 단절에만 기대는 방역은 인성을 무너뜨릴 위험에 봉착하였다. 재택근무의 효율성과 함께 생산성 높은 대면업무도 다시 불러와야 한다. 온라인과 비대면으로 시들어가는 캠퍼스 분위기도 기운을 다시 차려야 한다. 학업보다 훨씬 중요한 관계형성을 배우도록 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썰렁한 여러 마당을 사람들로 새롭게 채워야 한다. 문화가 융성하고 사회가 역동성을 찾도록 방역의 기조를 살폈으면 싶다. 백신접종과 치료제개발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사람이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회복하도록 또다른 판을 짜내야 한다.학교와 일터 그리고 장터는 사람으로 북적여야 제맛이 아닌가. 만나지 못한 사이 혹 상처받은 이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고, 포스트코로나의 뉴노멀이 만남을 버거이 여기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충격과 두려움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지혜롭게 극복하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위드코로나로 다가서면서, 뉴노멀이 인간의 본성을 망각하지 않도록 잘 설계해야 한다.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2021-09-08

답이 없다는데 웃음이 나오나

장규열 한동대 교수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언론중재법)’이 겨우 파국은 면하였다. 개정안을 다루던 국회가 그 통과 여부를 놓고 대치하던 중, 의장의 중재로 논의를 한 달간 계속하기로 하였다.다툼이 멎어 다행이라지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바라보는 국민은 답답할 뿐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언론을 개혁하겠다는 국민의 의지와 변화를 부정하는 언론의 입장 사이에 국회가 끼인 게 아닌가.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언론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왕 확보된 한 달 동안 우리 언론을 개선하여 ‘시민의 눈초리이자 목소리’로서 언론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을 다듬어야 한다.미확인보도와 허위정보, 가짜뉴스와 왜곡보도 등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면서 언론을 향한 시민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독자 대중의 신뢰를 잃어오지 않았는가. 일차적인 책임은 언론 스스로에게 있다. 매체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취재와 보도에 있어 속도경쟁이 가속화된 사정을 이해하고 남는다. 그렇다 해도, ‘사실확인’에 충실해야 함은 저널리즘의 양보할 수 없는 본질이 아닌가. 언론지상에서 이따금씩 목격되는 확인없이 또는 취재없이 적혀내린 기사는 기자 스스로 자존감을 훼손하는 결과를 빚게 마련이다. ‘따옴표’ 언론도 사라져야 하고 미확인보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기관 내외부로부터 전달되는 유무형의 압력으로부터도 기자는 자유로와야 한다.대선상황을 취재하는 현장의 모습이 전달되곤 하지만, 기자정신은 아직 저널리즘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후보의 기자회견에 준비한 질문을 던진 일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답하기 곤란하다’는 후보의 답변에 기자들은 ‘와’하고 웃음으로 양보하며 물러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기자라면 ‘가파른 질문으로 맞서야 하고, 적절한 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기자는 누구에게라도 겁 없이 맞설 줄 알아야 하며, 또 기자라면 누구라도 겁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치를 보며 대강대강 얼버무리는 일은 누구는 못하는가. 당신이 기자인 까닭은 물러설 수 없는 등 뒤의 낭떠러지를 분명히 인식함이 아닌가. 당신의 등 뒤엔 독자가 기다리고 있다. 답을 구하며 물었으면서, 답이 없다는 답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처사는 누구를 위한 언론행위인가.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바뀌어 갔으면 하는 방향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언론이 먼저 자성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국민은 사실확인에 충실하고 기자정신으로 충만한 저널리즘을 기대한다. 우리 사회에 완벽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하여 까닭없이 남에게 입힌 피해에는 당연히 중재도 해야하고 구제도 필요하다. 이 한 달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우리 언론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그런 결과, 시민의 알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고 힘있는 자들을 매섭게 견제하는 책임있는 언론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선다.

2021-09-01

확인 없는 저널리즘은 누더기가 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뉴스가 넘치는 세상이다. 하루 중에도 새 뉴스가 다른 뉴스를 덮을만큼 뉴스거리가 쏟아진다. 미디어가 시민들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뉴스거리라고 간추려 정리하는 기능을 게이트키핑(Gate keeping)이라 불렀다. 매체의 그 기능이 무색해질 정도로 새로운 소식거리가 많다.그럴수록 언론은 책임있는 기사발굴과 취재 그리고 보도에 집중해야 한다. 디지털과 뉴미디어가 범람하여 언론지평이 흔들릴수록 매체는 본연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에 더한 감시와 견제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언론이 본질적인 소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필자는 ‘사실 확인’이라 부르고 싶다.‘언론의 요소들(Elements of Journalism)을 저술한 코백(Bill Kovach)과 로젠스틸(Tom Rosenstiel)은 ‘언론의 기본은 확인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시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기 위하여 기사를 작성하지만, 사실에 근거하고 직간접 취재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 보도행위가 있어야 한다. 사실을 벗어난 한 자락의 기사가 초래하는 위험은 상상을 넘는다. 미확인보도, 따옴표언론, 가짜뉴스는 모두 기자가 확인을 소홀히 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확인없이 마구 게재된 기사가 만들어내는 피해는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언론인이라면 확인하며 글쓰는 일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 사실로 확인한 끝에야 진실이 드러날 수 있으며 진정한 알 권리가 확보될 터이다.언론중재법을 두고 걱정하는 소리가 있다. 이해는 하면서도, 국민과 국회가 언론을 무슨 연유로 걱정하게 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언론환경이 온라인과 디지털을 수용하면서 기존 레거시미디어의 책임 바른 언론행위가 디지털미디어의 폐습을 오히려 닮아가면서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이전에도 물론 부적절한 언론행태가 없지 않았지만, 디지털환경이 펼쳐지면서 그 폐습은 급속도로 자리잡았다. 속도경쟁과 특종문화가 변화하는 매체환경을 만나 ‘확인’은 아예 거추장스러운 일거리가 되고 말았다. 저널리즘의 본령인 ‘사실확인’이 무너진 자리에는 병든 언론이 만연하게 마련이다.언론중재법이 언론재갈법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함은 물론, 언론계와 언론인은 이를 계기로 본질을 회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언론자유의 당당함을 유지함은 물론 충실한 사실확인을 토대로 한 책임있는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그 어떤 사실확인도 없이 의견과 주장을 게재한 후에 ‘아니면 말고’식의 언론행위는 사라져야 한다. 병폐가 얼마나 깊었으면 오늘같은 국민의 우려를 만났을까 돌아보아야 한다.민주주의를 구현함에 있어 언론의 자유는 기본이 아닌가. 돌아가는 사정을 시민이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언론은 사실확인에 성실해야 한다. 언론행위가 구실이 되어 부당한 손해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확인을 최우선에 두는 언론행위가 있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사실확인이 분명한 언론을 기다린다. 언론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선다.

2021-08-25

더는 속지 않는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실망이다. 대통령을 선출할 판이 열리면 하고 상상하였던 국민은 기대를 접어야 하는가. 대선판에 나선 이들이 스물이 넘는데 나라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들어본 적이 없다. 자기들끼리 말다툼에 골몰하고 있어 국민은 싸움판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흥행이라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한 거대담론과 정책논쟁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날마다 좁쌀영감 말꼬리 잡기만 거듭하는가 싶다. 티격태격거리다 결판이 안 나면 국민을 끌어들인다. 국민이 심판을 봐야 할 주제는 당신들 말장난이 아니라 이 나라 미래를 이끌어낼 꿈과 비전이 아닌가.역사에서 배운다. 제2공화국에서 잠시 의원내각제를 시험해 본 때를 제외하고 우리는 내내 대통령중심제였다. 한 사람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개척해 온 그간의 발자취는 나름 효과적이었다. 그 한 사람의 전횡을 막기 위해 ‘5년 단임제’로 헌법을 바꾼 일도 제법 작동하였다. 이같은 골격이 우리의 미래에도 바람직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걸어온 길 위에 어두운 구석이 없지 않지만, 대한민국은 이제 선진국 소리를 들으며 세계질서에서 당당한 위치를 만들어 간다. 나라가 처한 오늘의 위치에 걸맞는 대통령을 만들어야 한다. 발자취 위에 드러난 공과를 적절하게 살피며 오천만 겨레를 넓게 보듬을 사람이었으면 싶다. 바꿀 일이라면 과감히 바꾸되 국민의 마음을 거뜬히 담아내는 그였으면 한다.나라를 더는 흩지 말아야 한다. 영남과 호남, 수도권과 지방을 구분하는 버릇이 사라져야 한다.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지방색은 암적 존재임이 분명하며, 수도권집중 현상은 건강한 견제와 균형을 회복하도록 수정해야 한다. 화목해야 할 세대 간의 갈등과 긴장도 해소해야 하는데, 정치권은 이를 오히려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청년도 살아야 하지만 노년도 행복해야 한다. 가운데 중장년도 소외할 수 없다. 지역 간 불균형도 문제지만 세대 간 부조화는 사회적 불화를 부른다. 평화와 소통 위에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고 내일을 열어갈 남북대화도 필요하다. 긴장과 불통을 극복하며 포용적 교류를 이끌어낼 리더십을 기대한다.지역과 세대, 남북관계와 국제관계, 경제와 사회, 문화와 소통 등 굵직굵직한 생각거리가 산더미가 아닌가. 역량이 미치지 못할 양이면, 자신이 제일 먼저 깨달을 터이다. 차라리 용기있게 내려놓든지 아니라면 치열하게 겨루어 주시라. 국민이 지혜로운 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였다. 국민의 눈높이를 속일 방법은 없다. 말싸움을 국민에게 끌어대는 당신의 헛수고에 국민이 더는 휘둘리지 않는다. 당신이 오늘 하는 생각이 나라의 미래에 닿아있는지 스스로 살펴보기 바란다. 국민의 생각은 당신보다 높은 데 있다. 헌법1조가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얄팍한 계산으로는 국민을 이길 수 없다. 나라의 운명은 국민의 행복과 함께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의 얕은 수가 국민을 이길 수 없다. 국민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1-08-18

생각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산불이 먼저 일었다. 코로나19로 인류가 시달리기 전에 이미 호주대륙은 화마에 삼켜지고 있었다. 팬데믹이 세계인의 보건과 방역환경을 힘들게 하는 사이에도 산불과 자연재해는 끊이지 않았다. 터키 산불은 온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면서 섬 하나를 집어삼켰다.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도 솟아오른 불길이 잦아들지 않으며 북극 지역마저 위협하는 중이다. 캘리포니아도 역사상 가장 큰 산불인 딕시(Dixie)를 잡지못해 서울의 세 배도 넘는 산야를 잃어버렸다. 캐나다도 이탈리아도 알제리도…, 기후변화로 초래된 높은 온도와 건조한 공기에 강한 바람까지 더해져 누구도 손을 쓸 수가 없다. 코로나19에 빼앗긴 관심은 지구온난화를 살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걱정은 많이 하지만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좋은 생각들은 떠올리지만 누구도 행동하지 않는다. 기온상승의 마지노선 1.5도에 달하는 데 20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여름이 이처럼 더웠던 것도 기후변화의 탓일 터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에어컨 과소비와 전력부족을 걱정하면서 근본적인 대안 마련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코로나19 위기도 빌게이츠(Bill Gates)가 수년 전에 이미 예견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가올 미래는 거의 보이는데 준비는 누가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역사는 그저 기억만 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지난날 기억을 살피며 내일을 준비해야 실수가 없다. 오래된 패착에 남 탓만 하다가는 같은 일을 다시 겪지나 않을까. 말로만 넘어가기엔 문제가 심각하다.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이 위험하다.우리에겐 할 일이 많았다. 나라엔 바꿔야 할 일이 한 가득이었다. 국민이 일어나 세상을 바꾸었다. 나라가 바뀌고 상식이 돌아올 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게 바로 잡히는가 높은 기대를 걸었다. 기득세력의 반발이든 정권실세의 무능이든 까닭이 있었겠지만,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뒤로 돌아갔나 싶은 가닥마저 보이는 게 아닌가. 나라는 다시 좀스러운 정치배들로 드글거린다. 생각은 듣지도 않고 세력만 불린다. 준비는 부실한데 구호만 가득하다. 정치를 공격과 수비로만 이해하며 국민의 민생은 언제나 뒷자리다. 지구온난화 같은 근원적인 문제에는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다시 한번 믿어볼 것인지 다시 한번 바꿀 것인지 국민은 혼돈스럽다.세상이 좀처럼 바뀌지 않지만, 사람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각만 하는 사람은 생각만 하고 행동은 해 본 사람만 하게 마련이다. 좋은 생각만으로는 나라가 바뀌지 않는다. 착한 태도만으로 좋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 바른 생각이 중요하지만 행동 습관이 보여야 한다. 실패를 딛고라도 걸어온 길을 살펴야 한다. 생각만 화려하고 주장이 번들거리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불만으로 가득하나 계획이 없는 이들도 멀리해야 한다.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리더십을 찾아야 한다. 행동이 없이는 변화도 없다. 국민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1-08-11

당신은 정치를 왜 하려 하는가

장규열한동대 교수 대선 후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프리드먼(Milton Rose Friedman)의 저서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인용하면서 ‘저소득층이 기준에 못 미치는 식품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해서 소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하였다. 시장경제주의자인 프리드먼이 ‘과도한 규제가 자유로운 시장기능을 제약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소비자들이 살아가면서 결정하는 데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고 적은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가 설파한 내용은 ‘아무 거나 다 괜찮다’고 주장할 만큼 부실했을까.그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규제하기 보다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방법들로 업계의 자율규제, 소비자의 주권의식, 업계의 상도덕 등을 들고 있다. 길게 보아 아담스미스(Adam Smith)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작동할 것이므로 시장에 맡기는 게 좋겠다는 정도다. 시장의 자유와 소비자의 선택 가운데에서 시장은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고 소비자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는 게 없다. 가격의 차이만 눈에 보일 뿐 속속들이 내용을 알 길이 없다. 상품의 안전도와 위험 수준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소비자가 과연 있을까. 소비자가 취약한 경제여건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을 ‘무엇이든’ 소비할 수 있게 한다면 위험천만한 결과를 빚을 것이 뻔하지 않을까.경제활동에 그같은 자유를 과도하게 허용한 끝에 맞을 수 있는 부작용으로는, 개인의 건강과 복지를 해칠 뿐 아니라 거시적으로는 환경에도 악영향을 끼쳐 물과 공기의 질마저 낮아지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있다. 프리드먼 자신도 ‘정부의 규제가 필요없다’는 데 방점을 두기보다 ‘깨어있는 시민의 소비자의식과 업계의 수준 높은 상도의’가 먼저 있어야 함을 동시에 강조한다. 경제활동에 있어 업계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를 견주어 볼 때에도 누리는 자유를 통하여 업계는 번창하게 되는 반면 시민은 같은 자유를 누리면서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만 떠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짚어야 한다.정치는 왜 하는가. 국가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적정수준에 미달하는 재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소비하게 하기보다는,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양질의 소비활동이 가능하도록 돕는 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가난한 사람도 사람다운 생존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와야 하는 게 아닌가. 정보의 비대칭이 가속화되어 가는 지식정보화사회를 맞아 시민들에게 가격 이외의 정보도 투명하게 전달되고 경제활동에서 불확실성이 제거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게 당신이 고민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시민의 복리와 안전을 확보하고 공동체의식이 살아나도록 살피는 일을 정치의 제일 과제로 삼아야 한다.학자도 사람이다. 그가 한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인용하기 보다 시민을 위한 무거운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고심하는 정치를 만나고 싶다. 시민도 물론 깨어있어야 한다.

2021-08-04

평화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도록

장규열 한동대 교수 인터넷과 노트북 그리고 핸드폰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모든 지식과 정보, 소통과 교류는 이미 온라인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코로나19가 모두를 힘들게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오히려 앞당긴 셈이다. 비대면과 디지털이 대세가 되어 교역과 외교, 교육과 경제를 포위했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고도 못 할 게 없는 환경으로 바뀌어 간다. 얼른 적응해야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터. 편한지는 몰라도 혹 잃는 게 없을지 살펴야 한다.찌는 더위 속에는 없으면 상상하기 힘든 게 또 하나 있다. 에어컨. 한국에 들어온 지 반세기도 안 되었는데 도시를 완벽 점령했다. 빌딩과 오피스는 에어컨이 장악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무겁게 들어선 도시의 숲은 폭염을 에어컨으로 겨우 식힌다.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와 차량배기열이 기온상승을 부추기고 부자연한 순환환경 탓에 냉방병이 기승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로 여름마다 몸살이다. 자연스럽게 만나고 사귀며 오가는 정을 나누지 않게 된 만큼, 자연과의 연결도 인공적으로 차단해 함께 숨을 쉬는 자연스러움마저 잊어가는 중이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그런 중에 올림픽은 열렸고 남북대화의 물꼬가 터질 모양이다.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 열어젖힌 스포츠의 축제마당에서 세계가 겨룬다. 어려운 가운데 혼신을 기울여 준비했을 선수들 땀방울에 감동할 뿐이다. 코로나19의 그늘로 신음하는 온 세계에 빛줄기 한 가닥이 드리워진 느낌이다. 답답했던 남북관계도 문이 열리는가 싶다. 안팎으로 꽉 막힌 사정들만 그득한 차에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릴 기미를 환영하지 않을 국민이 없다. 올림픽이 팬데믹을 염려하며 진행 중이듯 남북이 만나는 일에 더 이상 실수와 패착은 없어야 한다. 평창올림픽에서 대화의 문이 열렸던 기억은 내년 초 베이징올림픽 즈음에 결실이 있을까 기대하게 한다. 일방적 구애와 독선적 주장은 피해야 하고 겨레와 한반도의 운명에 집중해야 한다.국제사회도 남북대화를 반기는 분위기다. 미국과 유엔도 한반도에 연락과 소통이 열린 일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간의 합의와 성과를 바탕으로 하나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온갖 어려움 속에도 살아있는 올림픽 정신처럼 난관과 역경을 뚫고라도 끝내 이뤄낼 평화와 통일의 깃발을 올려야 한다. 우리 모두의 소원을 기억해야 하고 뭉치면 더욱 강해질 겨레의 내일을 겨냥해야 한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환경과 기조에도 흔들림없이 벼루는 민족의 목표를 기억해야 한다. 조용하게 끊임없이 노력해 온 정부가 지펴낸 불씨에 고마운 마음이며, 이를 보다 높이 타오르게 하여 마침내 평화의 기틀이 든든하게 들어섰으면 한다. 비대면과 차단막이 육중하지만 민족이 하나가 되려는 상생과 화합의 기운을 꺾을 수는 없다. 평화가 없는 세상을 상상도 할 수 없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올림픽 마당에 남북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 등장할 날을 만나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조금 트인다.

2021-07-28

내일을 이야기하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 본인은 억울하지 않을까. 52시간 정책이 문제라는데 120시간만 시비거리가 된다거나, 대구를 칭찬한다는 소리가 다른 지역을 폄훼한다고 들렸다는 게 아닌가.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들다. 오죽하면, 어느 옛 시인은 ‘말로써 말많으니 말말을까 하노라’고 했을까. 글이든 말이든 적거나 뱉은 다음엔,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읽고 들은 사람들이 새기고 해석하며 소비한다. 나의 배경과 처지를 바탕으로 표출된 생각이지만, 받아서 사용하는 쪽에도 그들의 배경과 처지가 있다. 내 생각에 대한 그들을 오해를 내가 아무리 애쓰며 바로잡으려 해도 좀처럼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처럼만 생각하라고 주장할 방법이 없다. 공인으로 사는 길은 그래서 피곤한 법이다.고단한 길에 그들은 왜 나섰을까. 나 하나만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을 위해 살겠다는 진정성을 믿어주기로 하자. 그렇다면 남들의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지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와 백성이 살아가는 길에 꿈이 살아나고 희망이 피어나는 생각이 들려야 하지 않을까. 출사표를 던진 이들이 벌써 여럿이지만, 국민은 내일을 이야기하는 당신을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 현란한 말솜씨와 빼어난 설전이 이어지지만, 어제를 탓하고 흠집만 파고드는 당신들에게 국민은 이미 지쳤다.포스트코로나를 어떻게 맞을 것이며 4차산업혁명을 어찌 대처하고 기후위기는 무엇으로 막을 것인지 당신에게는 큰 생각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좌우와 빈부로 갈라진 사회의 모습은 어찌할 것인가. 경제와 기업, 노동자와 사용자를 함께 이롭게 할 방법은 있는가. 세대와 성별 간 갈등을 해결할 열쇠를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청년문제가 잠시 떠오르는가 했더니 어른들 샅바싸움에 다시 가라앉은 느낌이다. 백년대계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있지 않은가. 나라의 국제적 위상과 외교적 위치도 새롭게 정비해야 하고 북한과의 관계정비와 평화를 향한 통일정책도 만만치 않다.그럼에도 국민에겐 하잘것없는 말싸움만 들린다. 무게있는 분석은 없고 사이다적 세 치 혀만 들린다. 나라에 필요한 건 ‘통쾌한 반격’이 아니라 ‘진중한 해결’이 아닌가. 듣고 당장 시원해지는 탄산소다보다는 조금 천천히 가도 내일을 다지는 무거운 정책을 만나고 싶다. 어제와 오늘이 불편한 까닭을 내일을 향한 비전과 계획으로 이겨내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런 꿈을 당겨오는 당신에게 내 표를 던질 터이다.작가 제임스클라크(James Freeman Clarke)는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만,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걱정한다’고 하였다. 고달픈 공인이 되어 남을 위하여 살겠다는 참된 다짐을 하는 정치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정치꾼인가, 아니면 정치인인가. 당신의 그 한마디가 세상에 희망을 주는가 아니면 그저 속만 시원하게 하는가. 나라를 이끌어 보겠다고 나선 당신에게서,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깊은 속내를 눈치채고 싶다.

2021-07-21

이 여름이 뜨거운 까닭은

장규열 한동대 교수 한여름이다. 스치듯 지나간 장마의 자리를 찌는듯한 땡볕이 물려받았다. 코로나19는 하필 또 이럴 때 기승을 부리는지. 무더위가 힘들어 스트레스는 두 배. 일 년을 넘기며 감염병에 지친 사람들이 갈 바를 찾지 못한다. 선거판은 때맞춰 시동을 걸어 언론 지면은 정치인들이 물들이고 있다. 대권을 누가 잡든 세상이 그리 변할 것 같지도 않은데 주장과 막말이 춤을 춘다. 흥건히 땀에 젖으면서도 오가는 말들에 주목하며 심사가 오르내리는 착한 국민들이 아닌가. 이왕 들려줄 말이었으면 진심과 배려가 실렸으면 좋았을 걸, 눈을 씻고 보아도 자신들의 입장만 고집하고 옹호할 뿐이 아닌가.때가 되어 치르는 형식적인 선거보다는 진정으로 세상이 나아지는 그 한 판을 기대하지만, 내년 대통령선거가 그런 축제를 몰고 올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당신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패거리 다툼에 지나지 않을 표싸움으로 그칠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세상의 오늘 모습이 최선이 아닌 것쯤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당신은 뭘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아무에게도 들은 바가 없다. 현란한 언변과 시원한 말솜씨로도 당신의 ‘생각없음’을 감추지 못한다. 산업화를 거뜬히 이루고 민주화를 힘겹게 건너온 국민에게는 당신의 부실한 철학과 공허한 비전이 금세 보인다.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언제쯤이면 정치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게 될까. 아마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하는 것도 보통 사람들이 해야할 터이다. 동화작가 달(Roald Dahl)이 ‘세상을 바꿀 힘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였다. 특별한 정치인이나 특출한 지도자에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게 아닌가. 선거의 전 과정을 목격하며 걸으면서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 한다. 여론조사에 응답하거나 선거에 나선 후보자에게 생각을 건넬 수 있겠다. 온라인과 SNS는 너무 쉬운 세상이 아닌가. 당신의 생각을 들리게 하여 선거의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플라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덜 떨어진 사람을 당신의 대표로 선출하게 된다’고 한 말은 투표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이제 막 시작한 대선의 과정에 당신의 소신과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당신을 대변해 주기를 기다리는 일은 거의 난망한 기대임이 확인되지 않았는가. 그는 욕심으로 가득한 직업정치인일 뿐이다. 링컨대통령도 ‘선거는 보통 사람의 것이다’라고 확인하였다. 즉, 선거를 통하여 무엇인가 이루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이어야 한다는 깨우침이 아닌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남에게 양보할 일인가.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여름을 관통하며 내일을 고민하는 당신과 내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 여름이 이렇게 뜨거운 까닭은 대한민국의 내일을 치열하게 걱정하는 당신을 기대함이 아닐까. 대선은 내년이지만, 세상은 이미 당신이 바꾸고 있다.

2021-07-14

표리부동 대한민국

장규열 한동대 교수 조심스럽다.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적어 내리는 일은. 보이는 그대로 적는다 해도 세상이 그렇게 읽어주지 않는다. 사회가 이념과 성향에 따라 두 쪽으로 극명하게 갈라졌다.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나름 긍정적이라 해도, 소모적인 언쟁과 피곤한 정신소비에 이르기 일쑤다. 누구를 만나도 살피게 되고 무엇을 이야기해도 편하지 않다. 당신이 어느 편인가 늘 궁금하고 끼리끼리만 모이게 된다. 사회적 통합은 멀어만 가고 패거리 문화만 춤추고 있다. 우리만 그런가 궁금했더니, 바다 건너 사정도 엇비슷한 모양이다. 인간의 본성일까 배워박힌 습관일까.칸느영화제를 우리 봉준호 감독이 열었다. 한국영화가 글로벌은막을 물들이는 중이다. BTS는 빌보드 수위를 6주째 달리고 있다. 음악과 의미로 세계를 매료시킨다. 유엔무역개발회의 UNCTAD가 대한민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그룹으로 승격했다. 193개 유엔 회원국 만장일치였으며 이런 승격은 유엔 최초였다고 한다. 지구와 환경을 살리자는 녹색미래성장회의 P4G를 국내에서 열었다. 나라는 세계의 신뢰와 신용을 쌓는 중이다. 글로벌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사뭇 앞서가고 있다. 밖에서는 그렇다 치고,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나라는 갈등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다. 싸우며 자라는 이치가 있지만, 그 까닭이 상식을 벗어나 고집에 이르면 보기에도 딱하다. 세대 간 갈등과 성별 간 긴장은 문화적 배경과 경제적 고민이 있어 정책입안에 전문적인 자문이 필요할 터이다. 이념적 차이로 몰고가기보다 사회통합적 접근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나 쉽게 진영 간 다툼으로 불거져 나온다. 해방 직후 미군정의 성격은 점령군이자 해방군이었다. 이후 전개 과정에서 이념적 충돌이 존재했지만, 이제 와 이념 갈등의 빌미로 삼을 일은 아니다. 소모적 논쟁에 빠지기보다 역사로부터 배울 것을 챙겨야 한다.힘겹게 달려온 끝에 오늘 모습은 어떤가. 오늘까지 오는 길에 모두 기여하였다. 패착이 있었다면 함께 성찰할 일이다. 특정 집단이나 진영이 성과를 독점할 까닭도 없으며 송두리째 비난받을 어느 편도 없다. 보수와 진보가 끝내는 같은 편임을 기억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국민에게는 이념보다 ‘오늘 저녁’과 ‘내 가족’이 중요한 게 아닌가. 이념에 갇히면 삶을 잃어 버린다. 개념으로만 성공한 정치는 없다. 실용에 도움이 되는 방도와 정책을 찾아야 한다.밖에서 보는 만큼 안에서 생각해도 그럴듯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지표로도 발견되고 삶에서도 실감나는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괜찮은 모습을 공연히 비난하여 깎아내리지 말아야 하고, 숫자로만 허장성세를 부리는 일도 사라져야 한다. 겉에서 보거나 안에서 발견하는 살 만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초보운전’ 선진국. 갈 길이 멀다. 표리가 부동한 나라의 상태를 솔직하게 보아야 한다. 이만큼 왔으니, 다시 목표를 정해야 한다. 표리가 일치하는 대한민국을 겨냥해야 한다.

2021-07-07

청소년은 무엇으로 사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 고등학생 또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학교 공부와 장래 계획에 대해서 고민과 스트레스가 쌓인 나머지 극단의 선택을 했다는 게 아닌가. 2010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자살률이 인구 10만 중 31.2명으로 OECD 국가들 가운데 1위라고 한다. 그런 중에 청소년 사망원인 첫째가 ‘자살’이라고 한다. 학교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행복하기 위하여 하는 게 공부가 아닌가. 즐겁고 행복하려고 나아가는 길에서 불행하여 고민이 쌓인다면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닐까. 피어보기도 전에 스스로 생명을 거둘 어두운 생각에 이른다면 이는 사회병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을 살리고 나라를 일으켜야 할 교육의 현장이 사회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어린 생명이 교육과 관련한 고민을 삼키다 못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음에도 교육을 맡은 이들로부터 이렇다 할 생각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힘들어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는 어른들의 억지가 아닐까. 한 학생의 잘못된 선택 탓으로만 돌리며 거듭 발생할 불행 앞에 눈감을 것인가. 학교와 가정에서 매일 만나는 기대와 요구, 억압과 혼돈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가. 사회는 공정과 정의를 말하면서 나라의 교육과 미래를 설계하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원색적인 논리만 내세울 것인가. 구성원들 사이의 협력과 상생은 어디로 사라지고 경쟁자들 간의 극심한 아귀다툼으로만 몰아가는가. 일등만 대접받는 풍토는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세상에 할 일이 저렇게나 많은데 공부를 잘 해야만 그걸 할 수 있다는 오해와 착각은 어디서 생겨났을까.학교와 교육당국은 ‘즐거운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인성과 소양이 다음 세대의 밑천이 되어 남들을 밟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조금씩 손해보더라도 여럿이 즐거울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도록 가르쳐야 한다. 내가 실력을 기르는 까닭이 남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어서임을 깨우치도록 이끌어야 한다. 나 혼자 성공하여 잘 살겠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도록 들려주어야 한다. 이렇게 슬픈 뉴스를 접하고 꿈쩍도 않는 학교와 교사는 반성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약육과 강식이 아니라 공감과 배려를 보여주어야 한다. 승자독식이 아니라 공동체와 상생을 이야기해야 한다.오스트리아의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였다.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오늘 일상이 혹 이해되지 않거든 차라리 저 먼 앞날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긴 여정 인생을 두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꿈을 꾸었으면 한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으로 남들과 무엇을 나눌 것인지 상상해 보았으면 한다. 꿈이 나를 밀어올려 억압과 스트레스도 거뜬히 이겨내는 당신이 되었으면 한다. 가장 귀한 것은 나의 꿈이 아닌가. 청소년이 살아야 세상이 선다.

2021-06-30

산업화와 민주화, 그 다음 서사는?

장규열 한동대 교수 최근 2030 청년층의 대두에 관한 해석이 여러 가닥이다. 지난 세기 산업화의 높은 언덕을 힘들여 넘어온 세대가 있었다. 곧이어 건너왔던 민주화라는 산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길지도 않았던 반세기 남짓 세월 동안 성큼성큼 지나온 이야기들이라서 모두에게 익숙한 것으로만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1950년대 이후 세대에게 한국전쟁이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던가. 1980년대 이후 세대에게는 유신도 광주도 기억 속에 없는 서사인 셈이다. 지난 역사로부터도 배워야 할 테지만, 오늘 우리는 새로운 기억을 지나가는 중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서사(敍事)는 무엇일까.대한민국의 국격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게 아닌가. G7체제를 D10(Democracies10)으로 확장하여 재편하면서 대한민국이 들어갈 모양이다. 국제적 경쟁구도의 아래쪽에서 오로지 모방하고 추격하던 세월을 넘어 어느덧 앞자리에 와 있다는 게 아닌가. 그게 사실이라면 산업화와 민주화를 건넌 후에 우리가 다듬어야 할 스토리의 성격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닐까. 잘 살아보겠다는 산업화의 다짐을 건너며 사람답게 사는 민주화된 세상을 만들었다. 이제는 누구든 보듬고 아우르며 나누고 소통하는 가운데 이웃에 유익을 끼치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잘 사는 나라에서 사람다운 삶이 펼쳐지며 주변에 기여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나라 안의 다문화는 어디쯤 와 있을까. 낯선 얼굴들을 위한 배려는 얼마만큼 하고 있을까. 2018년 현재 다문화가구원이 100만을 넘었다. 5천만 인구의 2퍼센트에 달한다. 학생인구통계에 따르면 전국 초등학생 가운데 이미 4퍼센트가 다문화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나라 밖을 살피기 전에 우리 안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다문화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어쩌면 아직도 우리는 낯선 그들을 그저 낯설게만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라의 다문화정책은 다양한 문화를 우리 문화로 받아들이겠다는 인식과 다짐으로 시작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우리의 생존과 자존감을 세우려는 노력이었다면 우리의 새 지평은 ‘세계를 담는 큰 그릇’이어야 한다.모방과 추격 끝에 추월하고 있다. 앞자리에 서서 어제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과거를 닮은 습성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얼른 찾아내어 버려야 한다. 생각이 내일에 닿아야 하며 그러려면 상상력과 창의로 승부해야 한다. 껍데기만 젊은 가짜는 차라리 배격해야 한다. 공정과 평등은 기본이 아닌가. 젊은 생각과 싱싱한 꿈으로 가득한 세대가 나타나야 한다. 나이로만 정하지 않기로 하자. 숫자에만 휘둘리지 않기로 하자. 세계를 바라보는 너른 지평을 향하기로 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넉넉한 시선을 만나기로 하자.역사에서 배우는 민족이 되자. 전후 상처에서 산업화로 일어났으며 그 부작용을 민주화로 극복했다면 이제는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웃과 세계를 담는 백성이 되었으면 한다. 인류가 저질러 온 실수와 패착에도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대한민국이 살려내는 세상, 멋지지 않은가.

2021-06-23

대한민국, 국가브랜딩이 필요하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카리브해의 작은 섬,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자치령이다. 멋진 풍광과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변에는 플로리다, 쿠바, 아이티와 자메이카,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들이 수두룩하였다. 홍보 책임을 떠맡은 광고인 데이비드오길비(David Ogilvy)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 그가 도출해낸 푸에르토리코의 강점은 의외로 문화였다. 세기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zals)가 그곳에 살았던 기억을 찾아내었다. 광고슬로건 ‘푸에르토리코, 그냥 멋진 해변만이 아닌(Puerto Rico, Not Just a Beautiful Beach.)’을 도출한 것이다.필자의 프로젝트과목에 클라이언트로 참여한 ‘주한콜롬비아대사관’은 한국인들에게 콜롬비아를 어떻게 알려야 하겠는지 도와달라는 주문을 학생들에게 과감하게 하였다.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나라, 콜롬비아를 한국인들의 마음에 심기 위하여 학생들이 학기를 열심히 달렸다. 상황을 분석하고 메시지를 고안하며 슬로건을 도출하고 실행계획을 다듬으면서 디지털과 온라인은 물론 전통미디어를 활용할 기획아이디어를 만들고 있다. 한동대를 방문하였던 카이자 로세로(Juan Carlos Caiza Rosero) 주한콜롬비아 대사는 본국 홍보를 위한 학생들의 결과물을 기대하고 있다. 나라를 알리는 일에도 브랜딩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대한민국은 어떤가. 세상을 얼어붙게 했던 팬데믹은 백신 접종과 함께 서서히 물러갈 모양이다. G7 회담을 비롯한 세계무대에서 나라는 선진국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 세상은 한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기업이 좋은 물건을 팔아도 업체가 하는 일과 상품의 가치를 알리는 일은 특별한 경영수단을 필요로 한다. 브랜딩(Branding). 대한민국이 좋은 모습을 여러 가닥으로 가지고 있지만, 세계인의 마음에 다가가는 일은 또 다른 수준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 나라 간 통행과 교류가 활발해 지면 관광과 여행은 국가경영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산업영역이 될 터이다. 대한민국을 세계인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고 마음을 사로잡을 ‘국가브랜딩’이 긴요하게 요청되는 바이다.국가경쟁력과는 별도로 나라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일을 전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사이몬앤홀트(Simon Anholt)가 개발한 ‘좋은나라지표(Good Country Index)’는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을 위하여 끼친 기여도를 평가하여 순위를 매겼다.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은 28위, 미국 38위, 중국 60위 등이었다.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면 순위는 아마도 조정되지 않을까 싶다. 세계와 함께 호흡하며 상생과 공존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우리의 모습이 세계인의 인식 가운데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각인될 수 있도록 전문적인 브랜딩에 착수해야 한다. 효과적인 소통을 위하여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많은 것을 이룬 대한민국이 국가이미지브랜딩에 나서야 한다. 어떻게 만드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알리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2021-06-16

젊은 나라를 기다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60대가 주도하던 판이 흔들린다. 한 때 40대 기수론을 들어보았지만 30대가 지도자 반열에 선 모습은 사뭇 낯설다. 늘 보던 얼굴들에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경험과 관록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보지만, 이제는 고인 물이 되어버린 당신들의 세상이 아니었던가.젊은 정치인이 선배들을 간결한 논리와 수려한 말솜씨로 마주하는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다. 그가 만들어낼 충격과 변화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관심을 모은다. 젊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판에 세상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20대와 30대는 함께 뛸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을까. 선배들은 저 현상 앞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진보의 깃발이 높기는 했지만, 함께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놓쳤던 모양이다. 공감과 배려를 말하기는 했지만, 바라보는 지평이 좁았던 모양이다. 민생의 현장과 청춘의 난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는 국민의 신뢰를 잃게 마련이다. 88만원 세대와 헬조선이 오래 전부터 경고해 왔건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젊은 세대는 놀라우리만큼 소외되었다는 자각에 이르고 말았다. 나라경영에도 청년정책은 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렸고 결론은 언제나 나이든 기득권층에게만 과실이 돌아가는 듯 보인 게 아니었을까.노동현장의 안전사고, 병역과 군대의 현실, 대학입시와 대학교육, 페미니즘과 성차별, 공교육과 사교육의 부조화, 취업장벽과 불투명한 미래….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젊은이들과 관련된 정책 어젠다는 많은데 어느 하나 시원하게 정리된 게 없다.분노할 만도 하다. 그러니 젊은 정치인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도 맞다. 청년이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 하고 미래가 기대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생각이 젊어져야 하고 지향점이 싱싱해야 한다. 누가 맡아도 그가 바라보는 앞길에 청년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바람을 일으키는 그가 나이가 젊다는 까닭으로만 표심이 움직인다면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나이가 젊은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의 생각이 실제로 ‘청년의 기운’을 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나이는 그냥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노인에게만 해당하는 경고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이가 젊어도 생각이 고루할 수 있고, 노년에 이르러도 젊은 생각을 샘처럼 퍼올리는 어른들이 있다. 일으킨 바람에 어울리는 젊은 기운이 나라 안에 폭넓게 번져가길 기대해 보자.이번뿐이 아니다. 앞으로 만날 모든 선택의 과정에서 우리는 젊은 생각과 싱싱한 기운을 찾아야 한다.청년들 뿐아니라 모든 세대가 젊음을 회복해야 한다. 희망과 기대를 접었다는 사람처럼 불행한 이는 없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떠오를 무지개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기회는 온다. 젊고 싱싱한 생각이 가득한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상상과 창의로 넘실대는 청년 지도자들이 나와야 한다. 생각이 젊은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야 한다. 선배들이 만들어온 기반 위에 새 기운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2021-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