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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국가소멸위기, 이민과 다문화로 극복하자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나라가 비어간다.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모든 정책이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2017년에 5천136만명이었던 한국인구는 2047년에 4천771만명, 2067년에 3천689만명, 2117년에는 1천510만명으로 줄어들 것이라 한다. 백 년 후에는 나라인구의 70%가 사라진다는 셈이다.지역소멸이 문제라지만, 이쯤 되면 ‘국가소멸위기’라 불러야 하는게 아닐까. 인구가 국가성장동력의 한 축이라면 대한민국은 특단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세계 10위를 넘나든다는 국위와 국격도 인구가 실제로 급격히 줄어든다면 그리 오래가지 못할 터이다. 정부가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실효적인 방안들이 강구되어야 한다.많은 나라들에서 인구정책으로 골치를 앓는 가운데, 캐나다 인구는 1년 만에 100만명 이상 증가하여 인구증가율 2.7%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국의 인구가 14% 감소한 데 비하면 놀라운 성장이다. 캐나다 정부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한다. 이같은 증가세가 지속된다면 약 25년 후에는 캐나다 인구가 지금의 두 배가 된다는 예측마저 한다.미국은 건국초기부터 이민자의 나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인종갈등과 여론동향에 따라 이민정책이 그리 유연하지 않았다. 이민자들에게 유리한 다문화정책(multiculturalism policy)과 동등기회정책(equal opportunity policy)을 점진적으로 시행하면서 미국 이민사회와 인구추이는 안정적인 성장을 기록하는 중이다. 캐나다와 미국에도 이민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없지 않지만, 유입되는 이민인구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개방적인 정책성향을 장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 보다 적극적이며 공격적인 이민정책을 시도하는 셈이다.우리는 어떤가. 5천100만 전체 인구 가운데 다문화배경 인구가 200만명을 넘어서고 결혼하는 10쌍 가운데 1쌍은 다문화가족이라고 한다. 전체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동안, 초중고교에서 다문화 학생수는 한 해 1만명 이상씩 늘어난다고 한다. 이민과 다문화정책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문화배경 시민들의 70% 이상이 한국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했다고 한다. 단일민족을 내세우는 고루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은 이미 글로벌 환경으로 변하였는데 우리만 폐쇄적인 구습에 머물 수가 없다. ‘다’문화를 ‘다른’ 문화로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대하고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인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다문화는 낯설고 다른 문화가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의 새로운 얼굴로 받아들여야 한다.글로벌 세상에서 대한민국이 환영받으려면 나라 안에서 글로벌을 환대해야 한다.추세로 보아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면 인구감소위기에 반전의 계기가 솟아날 것으로 기대된다. 이민을 신성장동력의 축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고, 교육과 문화의 현장에서 보다 포용적인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국가소멸위기는 이민과 다문화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정책적 시선으로 극복해야 한다.

2023-03-29

복수가 해결책일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며 우리는 학교폭력 피해자의 복수에 열광하였다. 폭력에 대한 징악과 보복을 탓할 수는 없다. 감정적으로 시원하고 최후 승리를 거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학교폭력’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방법으로 보복과 복수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학교, 교육청과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학교폭력이 사회적 담론의 이슈가 되는 경로가 있다. 미디어가 전하는 뉴스나 드라마를 통하여 학교폭력의 실상이 전달되면, 대중적 분노를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일시적으로 생성된 피해의식과 응보감정을 정책마련의 근거로 삼는다. 분노를 기반으로 하는 대중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가해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일에 방점을 둔다. 가해자는 처벌을 피하려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학교폭력의 처리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입은 피해로부터 회복하는 일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한국청소년학회의 보고에 따르면, 20대 성인들의 34% 정도가 어린 시절에 학교폭력을 경험했다고 하며 그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학교폭력은 피해자들에게 씻어내기 어려운 온갖 피해를 안긴다.학교폭력은 피해자에게 만성적이며 장기적인 외상을 안긴다. 발생했던 학교폭력을 가해자들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피해자들은 방금 벌어진 듯 생생하게 되뇌이며 마음에 입은 상흔을 털어놓곤 한다. 피해학생과 가족들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언론과 미디어의 충격적인 보도에 대한 관심의 강도는 약간 증가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아직도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학교폭력 가해자를 다루는 사회적 기관들은 넘쳐나는 가운데, 피해자와 가족들의 상처와 회복에 관심을 두는 공적 기관은 드문 형편이다.학교폭력을 바라보는 학교의 시선도 문제다. 학생들의 바른 인성을 길러내기 위해서도 ‘폭력’을 예방하고 퇴치하는 노력을 교실에서부터 기울여야 한다. 학교폭력을 교사가 성가시고 귀찮은 현상으로만 치부한다면, 폭력없는 학교가 온전히 회복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가 운영하는 대안학교 ‘해맑음센터’가 피해학생들을 맡아 돌보며 지도하지만, 정작 그들이 떠나온 학교는 교실 분위기에 어떤 변화를 시도하는지 의문이라고 한다. 학생을 기르는 일이 학교의 일이라면, 폭력없는 즐거운 교실을 확보하는 일은 교사의 당연한 책임이 아닌가.최근 증폭된 관심에 따라 교육부는 학교폭력근절대책을 준비한다고 알려졌다. 학교폭력 경력을 생활기록부에 적극적으로 기재하고 대학입시에 불이익을 가중한다는 방침은 학교폭력의 뿌리를 다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 처벌에 더하여 진정한 화해와 조정, 사후처벌보다 사전예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피해복구와 관계회복에 초점을 두는 피해학생 보호와 회복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폭력은 범죄다.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가해자를 벌하는 엄정한 접근과 함께 피해자와 가족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폭력이 사라져야 교육이 산다.

2023-03-22

결국 미디어가 한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학교폭력은 무섭다. 폭력은 범죄라는 상식이 있지만, 폭력이 학교에서 벌어지면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누구에게나 어렵다. 피해당사자 본인은 물론 가족과 학교, 교육청과 정부 등 모두 이를 대처하는 방식에 혼돈스럽고 당혹해한다. 사건이 붉어지면 언론이 뜨겁게 보도하고 정치가 담론으로 삼기도 하지만, 오래 가지않아 불씨는 시들고 기억에서 다시 멀어진다. 그런가하면, 종교를 허울삼아 못된 짓들이 발생해도 우리는 마찬가지였다. 교회나 사찰 등지에서 성폭력이 간간이 발생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대처방식은 늘 같은 모습이었다. 정치와 언론이 근본적인 대안들을 만들어주었으면 하지만, 기대가 있었을 뿐 우리 사회는 같은 문제를 너무 오랫동안 품고만 있는 셈이다.미디어의 역할이 신선하다.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의 실체를 극적으로 부각하여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복을 행사하는 극적진행을 통해 학교폭력이 처음부터 없어야 했다는 당위명제를 던진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는 실제피해자들을 가감없이 등장시켜 피해자가 겪는 고통의 깊이와 범죄상황의 적나라한 모습을 있었던 그대로 전달한다. 언론에 기대했던 사실의 전달과 정치에 기대했던 해결의 실마리를 미디어의 이야기가 새로운 방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학교폭력과 사이비종교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되려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보다 강도 높은 전달효과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언론과 정치는 각성해야 한다. 사실전달이 언론의 본령인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도 함께 전달하고 제시하는 시도도 있어야 한다. 해외에서 번져가는 솔루션저널리즘(Solutions Journalism)은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대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탐색한다. 정치는 중첩한 사회문제를 논하며 정치적 수사와 탁상공론으로 허비할 게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담론을 설정하고 토론을 진행하여 실천적 대안을 도출해야 한다. 언론이 겉모습만 겨우 보도하고 정치가 허망한 수사만 반복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기대와 희망을 더 이상 당신들에게 걸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치와 언론에서 실질적인 담론과 실천적인 대안을 구하기보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얻은 다음 시민들이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언론과 정치가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결과를 빚을지도 모른다.디지털세상이 그래서 무섭다. 특히, 정치와 언론에 가혹한 현실을 드리울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사회문화적 현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대중에게 정치와 언론이 가교역할을 해 주었다면, 디지털은 그 거리를 현저하게 좁혀놓았다. 모든 뉴스와 사건의 현장이 시민들에게 그리 멀지 않게 되었다. 언론의 보도기능과 정치의 담론진행조차 누구나 온라인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언론과 정치가 보통사람들의 일상에 가 닿는 저널리즘과 정치행위를 실천해야 한다. 언론과 정치가 본질을 회복해야 사회가 살고 나라가 선다.

2023-03-15

그걸 못하면 모두 죽는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벗꽃피는 순서로 죽는다’고 야단이다. 대학들, 특히 지방대학들이 남쪽으로부터 죽어나갈 판이라고 아우성이다. 인구감소로 학령인구가 줄어간단다. 그건 벌써 오래전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학은 게을렀을 뿐이다. 스스로 일어설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정부의 재정지원에만 기대며 살아온 게 수십 년이 아닌가. 대학을 잘못 운영하면 재정지원을 중단하는 게 나라의 규정이었으니, 사고만 치지 않으면 학교는 그럭저럭 굴러갈 판이었다. 온 나라가 혁신과 개혁을 외쳐도 대학은 그냥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런데 이젠 힘들다는 거다. 학생숫자가 눈에 보이게 쪼그라들 판이니 나라가 도와주는 걸로만 버티기에 힘들어졌다는 게 아닌가. 아직도 홀로 일어나 보겠다는 대학은 보이지 않는다.대학은 그전에도 망해 있었다. 거의 모든 대학에 거의 모든 학과가 있다. 같은 종류의 청년들을 모든 대학이 만드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하는 게 아닌가. 대학마다 바라보는 바가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같은 무늬로만 존재하는 대학들은 이미 천천히 무너지고 있지 않았을까. 같은 전공은 같은 내용을 담는다. 교수가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는 건 핑계일뿐, 같은 껍데기가 같은 영역을 다루지 않겠는가. 모든 대학이 같은 전공학과들을 모두 가진다는 건, 대학마다 특성이 없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우리 대학은 그래서 이미 죽어있었다. 모두 같은 일을 하면서 오래도 버틴 셈이다. 이제는 대학이 달라져야 한다. 바뀌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순서대로랄 것도 없이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다.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그간 모방하고 추격하며 달려왔다면 이제는 혁신하고 창조하며 달려야 한다. 대학은 더이상 무엇인가 많이 아는 사람을 기르는 게 아니라 작은 무엇이라도 새것을 만드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암기반복형 인재가 아니라 문제해결형 인성을 길러야 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과목들도 강의 중심이 아니라 프로젝트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의 거친 물결을 만나기 전에 학생들이 실전과 검증을 경험해야 한다. 성공의 짜릿함도 느껴봐야 하고 실패의 쓰라림도 일깨워야 한다.지방대학은 지역과 함께 살아내야 한다. 대학은 지역에서 문제를 탐색하고 지역담론에 참여하여 지역과 더불어 호흡해야 한다. 교수들이 지역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발견하고 학생들이 지역에서 배운 것을 나누어야 한다. 몇 년을 보내며 가르치고 배운다면서 지역과 담을 쌓은 모습은 스스로 존재이유를 망각한 처사가 아닌가. 대학이 지역사회와 문화에 흠뻑 젖어야 하고 지역은 대학으로부터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 지역과 대학은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지역소멸의 위기는 지역과 대학이 함께 풀어야 한다. 대학이 있으면서도 지역의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대학과 지역은 함께 부끄러워야 한다. 젊은이들로 넘치면서 젊은이가 없다는 불평이 말이 되는가. 지역이 대학을 품고 대학이 지역으로 나서는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그걸 못하면 지역도 대학과 함께 죽는다.

2023-03-08

평등만으로 부족하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최근 방영됐던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100’에 등장한 출연자들은 출신, 성별, 국적, 직업에 상관없이 똑같은 조건에서 겨뤘다. 같은 무게 돌덩이를 들고 버텼으며 같은 밧줄에 매달려 견디었다.누가 봐도 차별없는 동일한 룰을 적용받으며 기량을 다투었다. 완전한 평등을 보장받으며 기량껏 겨루어 결과를 받아들였다. 진 사람은 불평없이 탈락했으며 이긴 사람은 힘차게 다음 승부에 도전했다.평등했으니 괜찮은 것일까.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똑같은 조건만 주어지면 세상은 좋아지는 것일까. 투명하고 평등했으므로 결과는 이제 공정했을까. 몸으로 겨루는 경쟁을 붙이면서 평등한 조건만 내걸면 모두가 결과에 행복할 수 있을까. 모두에게 평등해야 하지만, 공정하기 위해서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을까.경제협력개발기구 OECD는 회원국들에서 ‘성별 간 임금격차’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들여다본다. 남성노동자가 받는 평균임금에 비하여 여성노동자가 어느 정도 받는지 비교한다. 우리나라는 이 통계에서 수년째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31% 적게 받는다. 세계평균 12%에 견주어 부끄러운 수준이 아닌가. 사회문화적인 다른 까닭을 떠올려도 보지만, 여성이 남성에 비해 평균적으로 여전히 낮은 대우를 받고있음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 다 자란 두 딸이 사회생활을 늠름하게 하길 바라지만, 여성이라는 까닭에 공정하지 못한 자리에 서지 않을까 부모는 걱정스럽다.사회가 ‘공정’하려면 개인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각자에게 맞는 자원과 기회를 할당해야 한다. 평등을 넘어 공정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오는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이다. 여성의 권익향상과 차별철폐를 위해 유엔이 정한 기념일이며 우리나라도 2018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삼는다.올해 캠페인주제는 ‘공정포용(Embrace Eguity)’이다. 평등한 기회제공만으로는 더이상 충분하지 않으며, 공정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언이다.성경은 2000년 전에 이미 ‘남자와 여자가 같다(갈라디아서 3:28)’고 했다. 기나긴 세월을 두고도 아직 우리는 남녀 간에 평등한 세상도 만들지 못했다.그럼에도, 공정한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서로가 가진 처지와 배경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새롭게 해야한다. 똑같은 조건만 제공했으니 공정을 이뤘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가 생기고 또다른 불균형에 이르게 된다.평등하고 공정한 세상. 쉽지않은 과제다. 기계적인 평등은 객관적인 조건을 같게해 이룰 수 있겠지만, 보다 공정한 세상에는 더 많은 고민과 배려를 필요로 한다.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모두의 다짐이 있어야 비로소 공정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 그나마 평등한 조건을 확보했으니, 공정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외부적인 조건이 차별받지 않을뿐 아니라 처지와 배경이 인정되고 능력과 경륜에 따라 공감있는 배려가 제공되는 공정한 세상을 당겨야 한다. 평등을 넘어 공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2023-03-01

학교폭력, 나라의 문제

장규열 한동대 교수 배우려고 학교에 간다. 다양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습득하고 경험하여 바람직한 인성으로 자라기 위해 학교교육을 받는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끊임없는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다. 부모와 교사, 친구와 이웃이 성장과정에 반드시 필요하다. 배우고 자라는 길에서 주변으로부터 받는 신호와 목소리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긍정적인 부추김과 부정적인 두려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들게 된다. 한때 부모나 교사가 무서워 억지로 구겨넣듯 배웠던 과목들이 있다. 느꼈던 공포는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무엇을 배웠는지는 생각도 하기 싫지 않은가. 학교폭력은 어른들만 저지르지 않는다. 같은 반 친구가 두려움의 대상이라면, 일상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불안과 분노, 스트레스와 우울증세, 무력감과 실패감에 휩싸이고 학교성적이나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등 피해학생의 일상이 무너지게 된다. 길게는 사회성의 저하, 정신과민증, 대인기피증, 인격장애현상 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자살(Bullycide)에 이르기도 한다. 일상이 망가질뿐 아니라 일생을 망치게도 된다. 최근 OTT 인기드라마에 등장한 한 연예인에게 오래전에 학교폭력을 당했노라는 고발이 있었다. 가해자는 심심해서 장난삼아 생각없이 벌인 일이 피해자에게는 평생을 두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터이다. 피해는 학교현장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번져 24시간 발생하므로 가해자로부터 피할 방법이 없다. 학교폭력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두려움이 그늘진 마당에 교육이 일어날 방법이 없다.폭력은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 학교폭력은 더욱이 사후수습보다 사전예방이 먼저다. 미국학생들은 학폭과 관련하여 세 가지 다짐을 한다. 학교폭력이란 해서도 안 되고, 하는 걸 목격했을 때 간과해도 안 되며, 당했을 때에 가만히 있어도 안 된다. 이와 함께 연중 꾸준히 학교폭력의 위험과 폐해에 관해서 경계하고 가르친다. 학폭에 대하여 무관용원칙(Zero tolerance principle)을 가지고 강력하게 대처하는 미국이 다소 심하다 싶지만, 자칫 총기사고와 연결되는 그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하겠다. 벌어진 학교폭력에 대응하여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가 교육지원청 주도로 구성되지만, 구성과 심의방법 및 처분결정내용 등은 보다 전문적으로 정교하게 기획할 필요가 보인다. 학폭위의 논의과정이 폭력의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자 처벌에 방점을 두는 현황을 재고하여 피해자와 가족들이 장기적으로 겪을 어려움과 상흔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일에도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과 학대, 놀림과 따돌림은 현대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폭력이 교육의 현장에서 똬리를 트는 일에는 전쟁이라도 선포해야 한다. 한 아이에게 참다운 교육이 진행되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학교폭력을 학교만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 전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야 한다. 다음세대를 바르게 키우는 일보다 중요한 숙제가 어디 있을까.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3-02-22

대학이 바뀌어야 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폭풍전야. 대학교육은 폭풍을 앞에 두고도 변하지 않는다. 타성과 관성에 젖어 구태와 구습을 반복하면서 개혁과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 급격한 인구감소는 대학정원을 채우기에도 힘들 시간을 예고했지만, 대학들은 교육부의 지원에 기댄 채 아무런 변화를 불러내지 않는다. 유초중등 공교육이 기른 학생들을 받아 책임있는 고등교육을 이어가야 하는데, 대학은 정원의 위기와 재정의 어려움 앞에 내실있는 교육을 일으키지 못한다. 교육부장관이 제안하는 대학교육 개선방안에도 ‘교육’보다는 ‘재정’에 높은 우선순위가 놓여 있다. 대학설립과 운영을 위해 정해진 재정적 요건을 완화하거나 대학기본역량 진단을 폐기하여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생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돈 문제만 해결되면 대학교육이 제대로 될까.대학은 시대를 읽어야 한다. 디지털과 온라인은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대세가 되었다. 인공지능은 챗GPT로 이어지면서 교육현장을 거세게 흔들 모양이다. 지난 세기를 휘몰았던 이념경쟁이 물러가고 실리 위주의 국제관계 형성이 글로벌 트렌드가 되었다. 대학교육을 20대 초반에 마치고 평생을 사는 교육 모델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기술과 지식의 수명도 예전같지 않다. 인성의 기본을 다지는 유초중등 교육과는 다르게, 대학교육은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대학개혁을 진정으로 겨냥한다면, 대학교육의 본질과 내용을 다시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대학은 각자 차별화와 특성화에 나서야 한다. 모든 대학에 모든 전공과 학과가 존재하는 ‘백화점식 대학교육’은 수명을 다했다.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며 모두 서서히 가라앉는 방식은 버려야 한다. 대학마다 독특한 연구와 색다른 융합을 통하여 각자의 존립이유를 밝혀야 한다. 특정한 대학에 진학하는 특별한 까닭을 학생이 찾아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학이름이 출세를 위한 간판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학에서 익히는 전문지식이 삶을 이어가는 데 끊임없이 힘이 되는 ‘지속적인 전문교육의 장’으로 대학을 바꾸어야 한다.대학은 내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을 겨우 따라잡는 교육은 대학교육이 아니다. 내일을 성큼 앞당겨야 하고, 미래를 먼저 조망해야 하며, 오늘 보이지 않는 사조를 이끌어야 한다. 실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하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열하게 겨루기 위하여 토론이 일어나야 한다. 어제는 없었던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대학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래지평을 향한 특별한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는 대학은 사라져야 한다. 다짐과 각오가 분명하지 않는 대학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대학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변화와 혁신을 위한 분석과 통찰이 있어야 한다. 공교육이 아무리 애를 써도 대학교육이 매듭을 잘 지어야 한다. 공교육과의 연계성을 잘 살려야 하고, 사람의 일생에 멋진 다리를 놓아주어야 한다. 사람이 평생을 거는 대학이 되어야 한다. 대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3-02-15

학교폭력의 서늘한 그늘

장규열 한동대 교수 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에 학교폭력이 등장한다. 교육현장에서 사라져야 할 어두운 그림자가 인기드라마의 소재가 됐다. 만성적인 사회문제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긍정할 수도 있겠지만, 부끄러운 실태는 숨길 바 없이 부정적이다. 미디어와 언론은 자극적이거나 충격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느라 학교폭력의 현상에 관심을 둔다. 재발방지를 위하여 가해자처벌이 주목받는다.상대적으로 피해학생이나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나 어려움은 소외되기 일쑤다. 상상도 못했던 일을 당하여 일상이 흔들리고 마음이 위축되며 삶의 지평이 한꺼번에 무거워진다. 가족의 평화가 깨어지고 관계마저 흔들리면, 학교폭력은 그 어느 범죄나 폭력의 폐해 못지않은 악영향을 끼친다.지역에도 학교폭력은 끊임없이 학교와 지역사회에 어려움을 던진다. 교문 앞에 걸린 학폭 관련 현수막은 교육현장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는가. 피해학생과 가족들을 위하여 애쓰는 이들이 있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긴 이름은 피해학생이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어려움의 자락들을 보여주는가 싶다.‘포항경북센터’를 시내에 두고 학폭피해자와 가족들을 돕는다. 피해자학생에게 대학생멘토를 일대일로 붙여주어 회복에 이르게 한다. 가족들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신뢰의 기반을 되찾기 위해 위로상담가들이 함께한다.피해가 극심하여 학교생활이 어려운 경우에는 학교를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학습과 위로를 경험하는 시설을 둔다. 대전지역에 둔 ‘해맑음센터’는 수요에 비하여 태부족이지만 그마저도 노후하여 장소를 다시 찾아야 한다.학교폭력은 뒷끝이 길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학교폭력 이슈로 떠오를 때면 으레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이다. 정작 가해자는 ‘기억도 나지않는’ 일인데 피해학생에게는 씻기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 터이다. 방금 저지른 학교폭력에도 ‘장난’이었거나 ‘생각없이’ 한 행동이었다고 항변하려 든다. 입은 피해가 안겨준 상흔과 고통은 두고두고 되살아난다. 학교폭력이 발생한 바로 그때 바르게 정리하고 회복하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평생을 두고 짐을 지우게 된다.진상 규명과 가해자처벌이 필요한 만큼 피해자와 그 가족을 돌아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불어, 학교폭력피해의 심각성과 지속성을 제대로 알려 예방에 힘쓰는 교육시스템도 구축해야 한다.폭력은 범죄다. 학생이 저질렀다 해도 범죄라는 기본성격은 그대로 있다. 범죄피해가 끼치는 사회적 악영향처럼 학교폭력이 교육에 던지는 악영향의 그늘이 짙다. 밝고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인성을 길러내기 위해서도 피해학생 회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피해가족의 어려움도 돌아보아야 한다. ‘해맑음센터’를 지역에도 두면 어떨까. 인구감소로 늘어난 폐교자원을 학교폭력피해의 그늘을 걷어내는 일에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가해학생을 필요한 처벌과 동시에 바르게 선도하고, 피해학생이 올바르게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야 한다. 교육의 마당에 드리운 폭력의 그늘을 씻어내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내일이 산다.

2023-02-08

우리에게 소는 다음세대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소는 누가 키우나. 농가에 소가 소중했다, 나라에 소는 무엇일까. 집안에 소가 자식들이듯이 나라의 소는 ‘다음세대’가 아닌가. 정치권은 표나 얻으려 감언이설을 늘어놓을뿐 다음세대를 진정으로 돌아보지 않는다. 마음을 모아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걱정하고 그들이 만날 내일을 잘 준비해야 하겠거늘, 나라의 어른들은 오늘 싸움박질에 여념이 없다. 무엇을 가르쳐 나라와 다음세대의 미래를 탄탄하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백년대계(百年大計)라면서 누구도 교육을 말하지 않는다. 험한 세상을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길러야 하는 소양은 무엇인가.상상과 창의. 그간 모방과 추격을 거듭하며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는 상상과 창의로 앞자리를 지켜야 하고 격차를 더욱 벌여야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무엇으로 승부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향하여 비판적 시선을 던지며 신박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누구도 밟지 않았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기존의 틀을 깨고 세상을 놀라게하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결과물을 드러내야 한다. 교육은 다음세대를 상상과 창의의 바다로 이끌어야 한다.글쓰기와 말하기. 너무나 기초적인 소양이지만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부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읽고 익힌 것도 나누지 못하면 배움의 의미조차 사라져 버린다. 무엇을 하든 영향력을 가지려면 글쓰기에 능해야하고 말하기에 앞서가야 한다. 자연공학계열일수록 역량을 표현하고 계획을 조리있게 설명이 가능할 때 리더로 성장해 간다. 인문사회분야에서 글과 말이 결정적인 경쟁력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교육은 글쓰기와 말하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글로벌과 균형감각.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국내만 생각하면 답답하고 협소하지만 다음세대가 헤쳐갈 활동무대는 글로벌시장이다. 시선을 확장해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와야 한다.교사의 업무와 경험도 글로벌시각을 가지도록 이끌어야 한다. 나라 안 경쟁에 매몰되어 낙심하지 않도록, 나라 밖 환경에 익숙할 틀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은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글로벌 호연지기를 길러내야 한다.세상은 이미 선진 대한민국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다음세대가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를 바꾸어 가도록 부추겨야 한다.이념의 낡은 틀도 극복해야 한다. 건강한 보수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진보의 발걸음을 자신있게 내딛도록 가르쳐야 한다. 좋은 것을 지키고 꽃피우면서도 새로운 사조를 자신있게 만나는 다음세대를 길러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양자택일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는 넓은 가슴을 가르쳐야 한다.21세기를 보다 자신있게 걸어가는 다음세대가 되어야 한다. 백년대계 교육은 백년 너머를 준비해야 한다. 선진국 대한민국이 길러낼 다음세대가 세상을 바꾸어 갈 터이다. 교육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대한민국이 살아야 세상이 바뀐다. 정치권에게 진짜 소는 다음세대다. 민생의 핵심도 다음세대다. 교육이 바로 서야 세상이 옳게 간다.

2023-02-01

평균수명과 대학교육

장규열 한동대 교수 여성은 86세, 남성은 80세까지 산다.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평균수명 83세는 세계 3위 수준이다. 일본과 스위스가 아주 작은 차이로 앞서며 우리 앞에 있을 뿐,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사람들인 셈이다.사회경제적 현실을 반영하며 예측하는 바에 따르면, 2067년에는 평균수명이 90세에 육박할 것으로 기대한다.싱클레어(David Sinclair)는 저서 ‘기대수명(Lifespan)’에서 ‘과학과 문명의 발전으로 인류의 평균수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어렵지 않게 113세 정도에 이를 것이라서, 모두 증손자를 넘어 고손자를 만나보게 될’것이라 한다. 오래 살 터이며 모두 장수할 모양이다. 좋을까?미국 페퍼다인(Pepperdine)대 총장을 역임했던 데븐포트(David Davenport)는 ‘오늘 대학졸업생들은 사는 동안 평균 여섯 번 직장을 옮길 것이며 두 번 이상 커리어를 바꿀 것’이라고 예견했다.20대 초반에 마친 대학교육을 기반으로 평생을 사는 교육모델은 수명을 다했다. 배우기를 20대 초반에 마친 사람이 거의 10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사회환경이 다가온다. 대학졸업생이 학사를 딴 그 분야가 아예 사라지면 그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같은 분야의 지식집적도도 이전과는 달라서 겨우 몇 달 안 가 새로운 지식체계가 들어서고 생소한 기능이 필요해진다. 오래는 살겠지만 무엇을 기반으로 살아갈 것인지 난감해지는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모두 어찌할 터인가?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태어난 아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고 사람 몫을 하도록 가르쳤던 교육모델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궤도에 한 번 올려놓았더라도 스스로 판단해 또 배우고 다시 배우는 ‘학습사이클의 연장’이 긴요하게 됐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과 대학 4년을 기본으로 구성된 교육년수모델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20대 전후의 학생들만 주로 상대하던 대학교육모델을 전면 개편하고 문을 넓혀 새로운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 모두를 반겨 필요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이른바 ‘평생교육’을 하지만 교육대상으로서 20대 초반을 생각하는 고정관념은 바뀌지 않았다. 전통적인 대학교육의 곁다리격으로 겨우 열리는 우수리 교육으로는 새로운 사회환경을 대할 수 없다.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대학은 운명을 달리할 터이다. 대학은 그렇다치고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매사에 호기심의 안테나를 세우고 궁금증의 스위치를 올려야한다. 지식은 집적도만 증대된 게 아니라 유연성과 환골탈태력도 증강됐다. 금방 나왔던 게 언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온라인과 디지털은 연결성만 증폭된 게 아니라 가변성은 폭증했다. 평균수명을 끝까지 건강하게 지키며 살아가려면 실력을 키워야 함은 물론 확장성과 가변력에 있어 역량을 가져야 한다.정부가 노인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대학이 교육대상의 확장에 힘쓰는 한편,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늘어갈 기대수명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평균수명이 기대되지만 건강수명은 우려스럽다.

2023-01-25

일자리만큼 문화가 급하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지역의 인구 위기가 전국뉴스에까지 다루어졌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누구도 신통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 가히 대학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지역에서도 졸업과 함께 젊은이들이 사라진다. 뉴스에 등장한 청년들은 ‘지역에서 일자리를 발견하지 못한 걸 첫째 이유로 꼽는다. 혹 두 번째 까닭을 물어는 보았는지.필자가 대학에서 발견한 또 하나 중요한 까닭은, ‘지역에는 재미가 없다’였다. 문화적 토양이 척박하고 삶을 풍성하게 할 거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혹 수도권과 비슷한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규모나 수준이 낮을 뿐 아니라 같은 값이면 지역이 아닌 큰 도시에서 즐기고 싶다고 한다.무엇이 있어봤자 수도권에는 이미 있었던 게 뒤늦게 펼쳐진 정도라고 평한다. 4년 이상 머물러 공부했던 지역에 대하여 그들은 이처럼 부정적이다. 대학이 지역에 있어도 ‘지역의 대학’은 아닌 셈이다. 짧지않는 시간이었음에도 지역은 대학생들에게 비전과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 터이다. 대학생들이 재학 중에 지역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고 졸업 후에도 머물러 삶을 이어가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문화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역에 문화가 있다는 말은 타지와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뜻이어야 한다. 타지에도 있는 걸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모방 또는 추격이면 몰라도 지역의 문화라 부르기엔 부족한 게 아닐까. 다른 곳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만나보지 못한 볼거리, 맛보지 못한 먹거리와 찾을 수 없는 놀거리가 우리 지역에 있어야 한다. 문화가 힘이 되려면 차별성과 독립성이 느껴져야 한다. 달라야 하고 여기에만 있어야 한다. 놀라워야 하고 타지에는 없어야 한다. 비슷한가 싶어도 다르게 만들어야 하고 이곳이 아니면 찾을 수 없어야 한다. 희소성이 있어야 문화가 되고 독창성이 보여야 사람이 모인다. 지역의 분위기에 문화의 상상력이 넘실거리면 재미를 느낄 발길이 머물게 된다.문화에 젊은 감각을 실어야 한다. 대학생 청년층과 다음 세대에 주목해야 한다. 문화를 ‘옛 모습을 복원하는 정도’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름다운 전통을 살리고 멋진 이야기를 재현하는 일이 소중하지만 젊은이들이 즐기고 누릴 만한 재미를 싣지 못하면 구태를 찾아낸 이상의 의미를 건질 수 없다. 멋진 옛이야기와 오랜 전통에 오늘의 감각을 실어 쉽고 재미있게 나눌만한 문화상품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어린 세대가 반기는 문화가 만들어질 때 문화에도 비전이 실리고 미래가 열린다. 멈춰선 느낌을 가져야 문화라 여기는 생각을 벗어야 한다. 문화를 청년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재미가 없으면 지역은 또다시 젊은이들에게 외면당하고 만다. 문화의 마당에 젊은 감각이 흐르고 청년문화가 깃들며 다음 세대가 호흡해야 한다. 굳이 붙들지 않아도 찾아와 머무는 지역이 되려면 문화의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다른 지역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문화콘텐츠에 젊은 감각을 입혀야 한다. 문화가 지역의 내일을 당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2023-01-18

대학에게, 위기는 기회일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학이 많다. 일반대학, 전문대학, 교육대학, 전문대학, 사이버대학, 기술대학 등 모두 합치면 400개도 넘는다. OECD 회원국들의 평균 대학진학율이 42%인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69%로 단연 일등이다. 미국이 47%이며 유럽국가들도 40% 초반에 머문다. 독특한 교육열이 배경이 되고 정책이 뒤를 밀어 대학들이 많아졌지만, 저출산, 고령화와 함께 다가온 인구감소현상은 급기야 대학교육의 지평에 위기를 불러왔다.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도모해도 시원치 않을 터에, 우리 대학들은 과감한 변화와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우선 지방대학.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는 현실에서 이전에도 지역의 대학들은 쉽지 않았다. 지역소멸까지 예상되는 형국에 지방대는 가히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위기가 기회라지만, 그간에도 교육부의 재정지원에 기대어 근근히 버텨오던 대학들이 지역에서 활력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까. 지역대학들이 시들해지면 지역에 젊은이들이 사라져 역동적인 기운마저 없어지면서 지역은 소멸의 동력을 부추길 뿐이다. 대학들이 지역에서 상생과 협력의 정신을 회복하여 지역과 함께 일어설 방도를 찾아야 한다.먼저, 평생교육. 20대 초반까지 교육을 마치고 평생을 그에 의존하여 살았던 교육패러다임은 수명을 다하였다.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지식과 기능을 배우고 다시 배울 필요는 점증해 간다. 인공지능과 코딩역량, 온라인과 디지털은 이전에는 없었던 교육수단과 전달방법으로 습득해야 할 덕목이 되었다. 20대 초반 학생들만 상대했던 대학교육 대상모델을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백세시대에 걸맞게 대학의 문을 더욱 넓게 열어야 하며 학기제, 학과제, 학위제로 제한된 교육과정패러다임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교육상품이 변화된 소비자 트렌드에 맞게 제공되어야 한다. 디지털문명과 함께 의미가 없어야 할 지역격차를 활용하여 지역과 대학은 분명하게 특화된 교육모델을 제시하면서 돌파해 나가야 한다. 진정한 상상과 창의는 21세기 지역에서 대학이 쏘아올릴 신호탄이어야 한다.수능을 기반으로 하는 대입제도를 이제는 손을 보아야 한다. 시험결과에 의존하여 학생을 선발하는 시스템의 경직성도 극복해야 한다. 재기발랄한 MZ세대의 고등교육이 30년도 넘은 제도에 묶여 휘둘리는 게 말이 되는가. 전국이 학생들에게 동일한 시험을 통과하도록 설계된 구조적 획일성도 문제다. 지역대학의 특성에 따라 독자적인 방식으로 학생을 선발하여 지역에서 비전을 가지고 꿈을 키워갈 기회를 다양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객관식으로만 디자인된 시험방식도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학생이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생각하고 분석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지역과 대학에게 닥친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20대 청년층만 상대하던 대상마켓을 성인 전 연령층으로 넓혀 바라보고 개인과 지역에 필요한 교과과정을 융통성 있게 기획하여 대학이 살아날 뿐 아니라 지역도 함께 일으키는 계기로 만들었으면 한다. 대학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

2023-01-11

지역은 대학부터 살려야 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학들이 새해 벽두부터 긴장을 탄다. 신입생 모집이 예전 같지 않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이미 예고되었지만 누구에게도 뾰족한 대책이 없다. 벚꽃 피는 순서로 문을 닫을 것이라는 경고등도 들어와 있었다. 대학들은 사실상 대안을 준비하지 않은채 바라만 보고 있다. 교과 과정뿐 아니라 행정 시스템에서도 교육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입장에서 특별히 손을 쓸 겨를도 없다. 수년째 동결된 등록금으로는 학교 운영도 버거워 정부 지원에 목을 매는 형편이다. 학령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신입생 정원도 채우기 힘들게 되었다. 경북은 어떤가. 이를 어찌해야 하나. 대학의 위기지만, 대학만의 책임일까.지역에 대학들이 있으면 지역에는 무엇이 좋을까. 대학생들이 넘실대는 지역에는 우선 젊음이 넘친다. 청년문화가 지역의 역동성을 이끌어 싱싱한 분위기가 생긴다. 인구 고령화로 지역 소멸의 위기가 다가온다면, 지역은 대학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대학생들에게 지역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일하고 누릴만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졸업과 동시에 지역을 떠난다는 대학생들에게 물어보자. 4년 이상 머물렀던 곳을 왜 떠나려 하는지. 일자리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떠나지 않을까. 기회가 충분하지 않고 미래를 담보할 비전을 발견할 수 없다. 지역에 독특하고 분명한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데, 청년들이 머물러 기다릴 까닭이 없다. 정주여건으로 보아도 문화가 척박하여 재미가 없다. 재학 중에도 주말이면 지역에서 즐기기보다 서울로 달린다. 지역은 젊은이들이 머무르며 누릴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대학도 문제다. 지역을 소재지로 삼은 것 외에 대학이 지역과 학생들을 함께 생각하며 제공한 협력수단은 무엇인가. 학생들이 지역에서 공부하는 동안 지역과 함께 호흡하면서 배우고 익히는 기회가 드물다. 대학에서 갈고 닦는 전문역량은 재학 중에도 얼마든지 지역에서 발휘하고 기여할 가치가 있다. 지역의 기업들과 단체들이 지역 대학생을 인턴으로 기용하여 경영일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대학생들은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여 열심히 일할 터이고 기업에는 청년들이 불러올 젊은 기운으로 활기가 돌지 않을까. 더이상 강의실에서만 배우지 않는다. 현장에서 배우고 일하며 익히는 기회를 지역의 대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지역과 대학이 함께 호흡하며 상생과 협력의 기운을 만들어야 한다.교육부도 문제다. 지역 대학들이 지역과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지역에 필요한 교과과정과 협력체계를 대학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정부는 대학들이 지역사정에 맞는 발전대안을 마련해 가도록 지원해야 한다. 대학은 자율과 책임을 확보하여 스스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일어나야 한다.필요한 재정은 일부 정부가 지원하되 대학이 자구책을 도모할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나라의 고등교육은 그야말로 높은 수준에서 돌파구가 모색돼야 한다. 상상과 창의로 빛나는 열매를 일구어내는 지역대학 문화가 꽃피어야 한다. 교육부의 방침과 지도에 자율성이 꺾이는 대학은 부끄럽지 않은가. 대학이 살아야 지역이 살고, 대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3-01-04

기대를 높이 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2022년이 저문다. 정치가 국민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가운데 해를 넘긴다. 갈등과 반목이 진행되는 속에서 새해를 맞는다.세대와 지역 간에 격차를 확인하며 달력을 넘긴다. 선진국 문턱에 섰다는데 국민의 일상은 여전히 힘들다. 정치권 언사에 민생은 없다. 국민을 언급하지만 진심은 보이지 않는다. 언론의 담론에 서민의 일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일까. 국민이 안 보이는 정치는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을까. 정치의 진심은 누굴 위해 작동하고 있을까. 새해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정치와 언론이 유유상종(類類相從)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 편의 목소리만 들어서는 바꿀 방법이 없다. 생각의 지평을 열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당장은 힘들어도 차분히 들을 귀를 준비해야 한다. 진영논리에 빠져 하염없이 같은 목소리만 반복하면 국민도 나라도 나아질 방도가 없다. 상대방이 항복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있을 턱이 없다. 반대편이 힘들면 중도진영의 생각에라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나만 옳다는 고집으로는 국민 가운데 화합의 물꼬가 터지지 않는다.온라인에서조차 차단과 봉쇄로만 응대하면 나라는 하나가 될 방법이 없다. 끼리끼리만 뭉치는 관성을 떨쳐내야 한다. 다른 생각들이 풍성하게 드나드는 담론의 장을 펼쳐야 한다.공격성향(攻擊性向)을 재고해야 한다. 작은 틈을 비집고라도 반박과 공격을 앞세우는 습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상대도 우리만큼 생각하지 않을까.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마음은 같지 않을까. 결투와 총성을 바라지 않는다면 지금보다는 부드러워야 한다. 공격하고 돌아서서 사이다 맛을 고소해 해야만 한다면, 발전과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일단 듣고 이성적으로 헤아리며 상대하고 응대하는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차피 협상과 타협의 기술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만남과 대화에는 조정과 조율이 필수가 아닌가. 공격과 타도가 아니라 경청과 협력의 묘미를 발휘해야 한다. 공격성향을 극복하지 않고는 협상의 기술을 써먹을 수가 없다.헌법정신(憲法精神)을 다시 헤아려야 한다. 헌법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권력이 정권이나 금권을 가진 이들에게 있지 않고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거나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도 않는 듯 보이지만 굳이 ‘국민’이 권력의 원천임을 왜 적어놓았을까. 어렵더라도 ‘주인의식을 가진 국민’이 생각을 모아 나라를 바르게 운영해 가기를 염원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나라의 주인처럼 일하고 있는가. 보고 듣기도 하겠지만, 답답하고 필요하다면 의사소통의 통로를 살펴 개인적 의견을 개진하고 사회적 연대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사상가 벤담(Jeremy Bentham)의 생각처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민주주의를 통하여 구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해 2023년에는 국민의 기대가 반영되는 나라가 되기를!

2022-12-28

성탄과 새해, 정치와 언론

장규열 한동대 교수 다사다난 2022. 디지털시대를 만나 수북이 쌓이는 뉴스들 가운데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자락이 별로 없다. 언론이 뉴스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늘 슬프고 힘들거나 충격적인 소식들만 따라다닌다. 올해의 ‘10대뉴스’도 마음을 어렵게 만드는 소식들로 한가득이다. 그런 틈을 비집고 2022년에 희망을 선사하고 마음을 즐겁게 했던 뉴스들이 있다.지난 6월, 우주의 문이 열렸다. 한국형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목표고도 700킬로미터에 인공위성을 거뜬히 올려놓았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1톤 이상 실용위성을 쏘아 올리는 우주선진국이 되었다.또한, 8월에 달탐사선 ‘다누리’가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한국 첫 우주탐사가 시작되었다. 인사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최근 소식이 걱정스럽지만, 이제 우주를 향한 대한민국의 꿈이 드디어 날개를 단 소식은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오징어게임’. 발표는 작년에 했지만 넷플릭스의 한국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지난 9월 에미상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기생충’과 ‘미나리’, 그리고 BTS의 활약은 K-콘텐츠의 성공을 넘어 창의와 상상력의 가능성에 한계가 없음을 새삼 증명해 준다. 이들 작품에 실린 예능적 기예뿐 아니라, 콘텐츠에 담긴 메시지도 모두의 관심과 느낌을 불러일으킨다.한국축구. 온 국민의 애증의 대상인 한국축구가 큰일을 했다. 모처럼 겨울에 감상한 세계축구 축제마당에서 당당히 겨루어 16강에 오른 선수들에게 한없이 감사하다. 사방을 에워싸는 궂은 뉴스들 한복판에서 밤을 지새며 응원에 집중한 국민들의 기대와 희망에 보답한 쾌거가 아닌가. 다음 월드컵에도 좋은 성과를 내려면 축구협회가 세간의 의혹을 떨치고 멋진 지원을 해야할 터이다.과학, 문화, 체육이 해냈다. 정치, 경제, 언론이 걱정만 끼치는 와중에 그래도 오늘이 살만한 날임을 증명해 주었다. 내일을 향한 희망과 기대를 다시 걸게 하였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려운 소식 틈바구니에 좋은 뉴스자락들을 더많이 만나고 싶다. 언론이 분발하여 사건사고의 고발과 함께 문제해결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충격과 함께 해결의 실마리도 더불어 제공하는 언론을 만나고 싶다. 디지털문명과 함께 쏟아지는 이야기들 가운데, 훈련되고 정제되어 조리정연한 분석기사들은 오히려 희귀해져 간다.신문과 방송은 사양산업이 아니라,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 오히려 필수산업이 되어가는 중이다.책임있는 언론행위, 표현과 언론의 자유, 사실확인 취재보도, 양심바른 권력견제, 진실추구 원칙언론, 시민독자 중심언론, 불편부당 독립언론 등 온라인의 어지러움 가운데 혹 잊었을까 싶은 언론의 기준들은 못내 절박하도록 유용하다.정치와 경제가 난해할수록 독자시민에게 알 권리는 소중하다. 형태를 불문하고 힘을 가진 이들을 바르게 견제하는 일도 언론만 할 수 있다. 성탄과 새해를 맞으며, 언론이 언론다운 나라를 기원한다.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12-21

문화강국을 겨눈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김구 선생은 그의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인류가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진정한 세계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되기를 원한다.”세상이 하도 어지럽다 보니 문화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인류문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문화’가 강한 민족이 끝내 융성하였다. 인의와 사랑이 문화에서 비롯한다는 백범의 통찰도 놀랍다. 정서와 느낌을 문화로 녹여내어 표현하고 발산할 때, 문화의 힘은 무력과 금력을 너끈히 능가할 터이다. 여유롭고 풍성한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게 하여, 민족적 자신감과 사회적 연대감이 든든해질 것이다.하버드대 조셉나이(Joseph Nye) 교수는 군사력·경제력 같은 하드파워(hard power)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소프트파워(soft power)가 치명적으로 중요해졌으며, 문화적 매력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힘이야말로 현대 국가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하였다.문화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을 배워야 하며, 문화의 힘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일깨워야 하고, 누구든 문화 에너지를 적용하여 상상과 창의를 발휘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문화적 소양은 개인적인 능력이면서 집단활동으로서 공동체적 산물이기도 하다. 지역마다 고유한 문화적 전통이 피어나며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기반이 생겨난다.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질 때, 지역 공동체는 협력과 상생의 정신이 살아나고 함께 살아가는 묘미에 빠져들게 된다. 문화적 토양이 척박하고 메마르면, 사람들을 모으기 어렵고 지역의 공동체성도 고갈되기 마련이다.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 춤과 뮤지컬, 전시와 공연이 마을과 지역에 넘실대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함께 사는 재미로 출렁거린다.학교에서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잃어버린 음악시간과 미술시간이 여느 교과만큼 다시 주목받아야 한다. 문화적 감수성을 심어야 하고 교차문화적 식견도 길러야 한다. 나의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남의 문화를 아끼고 존중하도록 배워야 한다. 문화소양과 함께 상대적으로 소외된 영역이 운동역량이다. 문화와 스포츠가 나라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학교는 음악, 미술과 함께 체육시간도 늘여야 한다. 말로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면서 대학입시를 위해 달리느라 찌든 몸은 도외시하지 않았던가.우리가 겨냥하는 문화강국은 어떤 모습일까. K-POP과 한국영화, 드라마, 웹툰과 게임 등에서 이미 앞자리에서 겨룬다. 멋진 콘텐츠를 만들어 문화상품으로 겨루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모두의 문화감수성이 뛰어나서 대한민국의 문화역량이 세계문화 속에서 넉넉히 견주어져야 한다. 문화적 영향력이 세계시민들의 호기심과 관심에 불을 당겨 대한민국을 찾고 배우게 하여, 평화와 안녕에 기여하기까지 밀어 보았으면 싶다. 문화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12-14

월드컵 한 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월드컵이 뜨겁다. 대한민국 축구가 16강에 올랐던 감격이 참으로 고맙다.월드컵 전장의 대세인 유럽과 남미가 끝내 8강을 장악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와 북미도 열심히 겨루었다. 모로코가 마지막 기대를 불태우면서 월드컵은 막바지 결전으로 치닫는다. 둥근 축구공이 세계인의 모든 시선을 강탈하면서 온 세상을 하나로 묶는다. 월드컵 덕분에 몰랐던 세상을 배운다. 이란이 무엇으로 몸살을 앓는지 알게 되었고 웨일즈와 영국 이야기도 배우게 되었다. 튀니지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카메룬…. 생소했던 나라들을 찾아보면서 너른 글로벌 지평을 새롭게 깨우치기도 하였다. 나라 안 궂은 소식에 애만 태웠던 좁다락한 시선이 한층 확장된 느낌이 신선하였다. 아직도 진행 중인 월드컵이 세계를 향한 관심과 기대를 높이고 있다.평소엔 어떤가. 정치권의 이념대립과 언론의 편향보도는 국민의 관심을 국내뉴스로만 몰아가지 않는가. 사회적인 이슈와 문화적인 지평이 나라 안에만 묶여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데, 우리는 이러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월드컵이 열어준 세상의 모습은 4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는 지나간 역사에 안주하고 있지나 않은지. 디지털과 온라인이 열어준 초연결사회와 우리는 어느 만큼 교감하고 있는지. 영화와 음악이 그나마 체면을 세우고 있는 사이에 정치와 사회의 시선은 글로벌을 대상으로 얼마나 열려있을까. 이제라도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글로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본격적으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좁은 국토에 시선을 묶기에는 세계가 너무나 크다.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도 글로벌 안목을 키워야 한다. 교차문화적 감수성을 길러야 하고 다원사회적 이해도를 늘려야 한다. 나만 옳다는 생각을 이겨내야 하고 남을 존중하는 마음을 깨우쳐야 한다. 미묘하게 남을 비하하는 버릇을 극복해야 하고 누구와도 어렵지 않게 어울리는 습관을 배워야 한다. 소통과 교류에 보다 적극적이어야 하고 차단과 배제의 구습은 버려야 한다. 글로벌은 자신감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우뚝 성장하였다. 국민이 상대적으로 덜 자란 느낌이다. 세상이 기대하는 만큼 우리가 반응해야 한다. 영어가 불편했던 소극성을 극복해야 하며, 우리 문화의 빼어난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나라 밖 소식에 마음의 문을 열어두어야 하며, 우리 소식을 밖으로 전하는 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습관에 익숙해야 하고 다른 문화와 교감을 넓혀야 한다.월드컵에는 32개국이 출전했지만, 세상에는 훨씬 많은 나라들이 있다. 풍성한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환경을 가지고 색다른 기회와 도전의 가닥을 품고 있을 터이다. 나라 안에 묶였을 흥미와 관심의 테두리를 확장해야 한다. 경쟁과 다툼의 연속에서 찌들었을 자신감과 상상력의 가능성을 키워야 한다. 세상은 저렇게 기다리는데 우리가 쪼그라들 까닭이 없다. 넓은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2022-12-07

대입제도, 어찌해야 하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 ‘나라의 교육은 대학입시가 망친다.’ 공교육이 유치원, 초등과 중등교육을 잘하고 싶어도 대학입시가 버티고 있어 힘들다고 한다. 학교는 치열한 경쟁보다 함께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지만, 대학입시 앞에서 방향을 잃는다. 선생님은 친구들 사이에 화목하길 원하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점수싸움의 늪으로 빠져만 든다. 아름다운 공동체적 가치를 가르치고 싶어도 수능을 맞이해야 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경쟁적일 수 밖에 없다.수능이 방금 지나갔지만 학원가에서는 벌써 특정대학 어느 학과에 들어가려면 수능점수 몇 점이 필요하다는 둥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경쟁과 눈치싸움으로 몰아세운다. 대학숫자가 많이 늘고 인구절벽으로 학생숫자가 대폭 줄었지만 대입의 현장은 수십 년 전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공교육과 대입현장의 부조화를 교육당국은 인지하고 있는지. 교육이 백년대계라면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아닐까.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버젓이 있으면서 대학입시가 빚어내는 사회, 문화, 교육적인 문제와 현상에 대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회적 트렌드가 아무리 바뀌어도 대입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데는 교육계의 반성과 함께 국가적인 숙고가 있어야 한다.대입제도와 시스템이 국가 공교육의 지향점에 도움이 되기보다 다소라도 방해가 된다면 이는 교육의 미래를 위해서도 시급히 조정해야 하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나라의 장래와 교육의 앞날을 위하여 사회적 합의를 통하여 대학입시제도의 개선에 나서야 한다. 교육부와 교육청을 비롯한 교육계가 제안하고 시민과 학생이 폭넓게 참여하는 국민토론이 일어나야 한다.나라 안에 ‘교육을 위한 담론’이 태부족이다. ‘백년대계(百年大計)’는 구호일 뿐 누구도 교육이 세워 올릴 백년을 고심하지 않는다. 중차대한 국가적 과제가 많아서라는 핑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나라의 미래를 담보해야 할 교육을 등한시하는 사회는 내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국민을 길러낼 뿐이다. 따뜻하고 풍성한 교육담론을 공교육이 수다히 만들어 열심히 운영하면서도 거대한 장벽 ‘대학입시’와 함께 만사가 물거품이 되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두고 볼 터인가. 선구자 한 사람이 제창하여 해결할 문제도 아닌 바에야, 국가적인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회적인 담론을 일으켜야 한다. 나라가 풀어야 할 필수과제임을 인식하고 각계각층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 우선순위를 끌어올려야 한다.대학은 어떤가. 코로나19 상황을 지나면서 온라인과 비대면교육을 경험하였다. 대학 강의실의 존재이유와 연구개발과 지식전달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터이다. 대학으로 들어오는 학생을 선발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나름의 의견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나라의 교육과 고등교육의 미래를 위해서 대학도 공적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대학입시를 이대로 두고는 우리 교육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하기 어렵다. 학생 개인의 성장과 발전은 물론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대학입시 제도개선에 임해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11-30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

장규열 한동대 교수 언론은 왜 필요한가. 디지털세계는 소통의 형태와 소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온라인과 사이버 세상은 온갖 정보를 범람하게 만들어 필요한 정보와 소식은 딱히 언론기관을 통하지 않아도 쉽게 접하게 되었다. 수 년 전 미국 카네기멜론(Carnegie Mellon)대학의 보고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하루에 소통되는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한 가운데 99퍼센트는 의미없는 대화일 뿐이라고 하였다. 웹정보분석회사 시만텍(Symantec)은 주고받는 이메일의 70퍼센트 이상이 스팸(Spam)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메일과 스팸, 블로그와 트윗, 페이스북과 카톡 등 온갖 통로를 활용하는 정보와 소식들 가운데에도 ‘저널리즘(Journalism)’이라 일컫는 언론행위에는 아직도 대중이 거는 비교적 높은 기대가 있다.소비자 대중은 언론에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언론이 지향하는 소통에는 다른 소통방식들과 어떤 차이와 까닭이 있어 끊임없는 주목과 관심을 향유하는 것일까. 오늘처럼 바뀐 미디어환경에서 언론은 어떻게 변화해 가야하는 것일까. 수다한 스토리들과 연예공연물, 스포츠와 오락콘텐츠, 의견과 주장, 광고와 선전물들이 득실거리는 현대 미디어의 틈바구니에서 취재와 보도를 기반으로 하는 언론행위가 명맥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저널리즘이라 불리우는 이 독특한 영역이 아직까지는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으로 보인다. ‘기레기’라는 멸칭이 특정한 의미를 동반하며 언론인들을 공격하지만, 기자들이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울 영역이 존재하므로 언론의 존재 이유는 남아있는 터이다.사실보도를 비롯하여 논설집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언론의 사명은 퇴색하지 않았다. 미디어환경에서 감지되는 정보의 무분별한 범람으로 인하여 정돈되고 분석력이 넘치는 고급 정보콘텐츠는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언론행위의 목적은 독자시민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보다 나은 다양한 결정이 가능하도록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전하는 데에 있다. 사실을 사실로 확인하는 수고를 독자를 대신하여 성실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언론행위의 가치는 충분히 보인다.진실을 전한다는 맥락에서 언론이 때로는 독자를 대신하여 권력에 맞서야 한다.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으로 힘을 가진 이들이 가진 권력을 온당하게 행사하는지 감시하고 살피는 역할은 언론에게 특별히 지워진 책임이며 사명인 셈이다.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삼권분립에 더하여 언론을 네 번째 축으로 여기는 까닭이 그에 있지 않을까. 나라의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언론에 특별하게 허용하는 까닭도 언론이 자임하는 ‘감시자의 역할’에 기인한다.언론은 사회가 공동체적 의미를 회복하고 공론의 장을 펼치는 데 기여해야 한다. 비판과 타협을 사회적으로 숙성시키는 일에도 언론의 책임이 크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러 영역에도 목소리를 제공하는 사회적 공기로서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언론이 가진 본연의 사명과 역할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가진 책임에 오히려 치열하게 복무하는 언론을 만나고 싶다.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11-23

수능을 생각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수능 아침. 청년들이 십대를 마감하며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 앞에 온 나라가 거의 멈춘다. 날씨보다 마음이 훨씬 춥다. 수험생은 마음이 떨리고 부모는 가슴이 아린다. ‘최선을 던져라’ 응원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속내가 종일 힘들다. 실수없이 실력만큼 지르고 오기를 기원한다. 친구들이 경쟁의 대상이 되어버린 오늘이 밉다. 선생님도 제자들의 이 하루가 안타깝고, 가족과 친지들도 같은 마음이다. 이날은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다. 세 번째 맞는 코로나 수능. 수능만큼은 누구도 소홀할 수가 없다. 온 나라가 절묘한 긴장에 빠져든다.수능의 ‘역할’은 무엇인가. 실력평가인가 소양인증인가. 대학입시를 위해 설정된 관문이지만, 실력을 평가해서 줄세우기의 도구로 삼는 일은 너무 낡은 생각이다. 대학 공부를 해낼 수 있겠는지 기초적인 소양을 인증하는 정도로 그 기능을 조절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이 놀랄만큼 다양하다. 수능의 결과로 학생의 진짜 실력을 평가할 수가 이제는 없다. 겨울로 들어가는 길 스산한 아침에 서 있는 수능의 고전적인 모습은 유효기간이 지났다.그 ‘하루’도 문제다.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바닥인 건 용납되지 않는다.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오늘을 피하지 못한다. 엄청난 경사를 맞거나 깊은 슬픔을 당해도 수능은 수능이다. 무조건 오늘 치른다. 딱 하루 딱 한 번이다. 거른다면 온통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365일 가운데 딱 하루만 치러야 한다는 생각은 누가 만들었을까. 여지껏 그랬다 해도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교육과 관련된 제도를 바라보는 정책적 시선이 어쩐지 느슨하고 게으르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 우리 수능은 멈춰 서 있다. 생기발랄한 십대에게는 일 년에 적어도 몇 차례 기회를 주어야 한다. 대학이 무슨 성역인가. 고등교육을 위한 준비상태를 살핀다면서 이처럼 불필요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가. 대학입시와 고등교육에 관한 결정도 과감하게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대학입학을 위한 기본소양을 살피는 새로운 수능은 일 년에 수차 치를 수 있도록 하여, 학생도 교사도 부모도 훨씬 편안하고 유연하게 치러야 한다. 실수를 돌아보며 수정해 가는 값진 경험도 허용해야 한다. 일 년에 딱 하루 로또처럼 만나는 수능은 이제 접어야 한다. 딱 한 번 시험을 잘 쳤던 경험을 평생 붙들고 국민 앞에 무례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목격하지 않는가. 제도와 시스템은 시대와 세대에 어울리게 바꾸어야 한다.오늘을 향해 달려온 수험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기울인 수고와 노력에는 결실과 보상이 반드시 돌아오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꾸준히 실력을 쌓은 사람이 끝내 이기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교육을 생각하면서 ‘한판의 경쟁’을 떠올리는 게 정상일까. 일등만 대접받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과정도 결과도 모두에게 뿌듯함과 보람을 안겨주어야 한다. 수능과 대입제도, 대학과 대학교육은 오늘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다음세대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