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괴물이 된 진보, 그 위선과 오만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철학자 니체(F. W. Nietzsche)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명언이다. 젊은 시절 민주화를 위해 ‘독재라는 괴물’과 싸웠던 386진보가 권력을 잡더니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괴물’이 되었으니 말이다.괴물이 된 진보의 실체는 ‘위선과 오만의 덩어리’다. 대통령은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해 놓고선 수사하니 검찰총장을 제거하려 안달이다. 통합을 말하면서 분열을 조장하고, 정의를 말하면서 불의를 옹호하며, 협치를 말하면서 독단을 일삼는 대통령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지식인의 앙가주망(engagement)을 주장했던 조국 전 법무장관은 수많은 특권과 반칙, 비리혐의로 재판 중에 있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성추행혐의로 피소되자 자살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입만 살아 있는 ‘입진보’이며 ‘위선의 끝판왕’이다. 오죽하면 최장집·한상진·진중권 같은 진보학자들이 진보정권의 위선과 오만을 비판하고, 진보가수 안치환까지 ‘진보의 아이러니(irony)’를 노래했겠는가?권력의 절제를 모르는 오만한 진보는 민주적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권력기관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여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공수처는 진보의 권력유지를 위한 반대파 사찰기구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윤석열 검찰총장은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독재와 전체주의”라고 에둘러 비판했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도 이미 중심을 잃고 정치권력에 휘둘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3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형해화(形骸化)되고 사실상 전체주의적 독제체제가 되어가고 있다.야당을 공존과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적으로 인식하고, 여당 내부의 문제제기를 진보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공격하는 ‘외눈박이 진보꼴통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괴물이다. 괴물이 된 인간, 즉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마음이 병들어 있는 사람’이다. 정치철학자 아렌트(H. Arendt)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 보다는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괴물로 만들었으니 자연과의 대화가 필요하고, ‘권력이라는 마약’ 때문에 마음의 병이 들었으니 ‘인간의 자기분열성’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하지만 괴물은 자신이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괴물을 응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깨어 있는 민주시민들이다. 아무리 정치적 선전·선동에 능한 진보라고 할지라도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한국의 민주정치사는 위대한 시민들이 괴물이 된 권력과 끝없이 싸워온 투쟁의 역사이다. “나라가 니꺼냐”라고 외치고 있는 성난 민심이 마침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설 때, 괴물은 운명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2020-08-10

오만한 권력의 비극적 종말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대통령·국회의원·자치단체장 등 힘 있는 정치인들의 비극적 종말이 반복되고 있다. 권력형 비리나 성범죄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가 하면, 교도소에 수감되어 권력무상을 실감하면서 회한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권력에 취해서 권력의 야만(野蠻)과 비정(非情)을 진즉 깨닫지 못하고 오만(傲慢)했으니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권력의 오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경심리학자인 로버트슨(Ian Robertson)은 그의 저서 ‘승자의 뇌’에서 “권력을 가지면 뇌가 변한다.”고 했다. 공감능력은 떨어지고 자기중심주의가 강해지면서 합리성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으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권력에 취하면 ‘이성을 상실’하는 이유다.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초로 성희롱변호에 승소한 자칭 페미니스트였지만, 권력을 갖게 되자 ‘성추행’으로 피소되었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가톨릭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교회의 가르침인 ‘내 탓’은 인정하지 않고 ‘네 탓’만 한다. 취임식에서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잘못이 드러나면 전 정권 탓이고 야당 탓이라고 한다. 게다가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대통령이 성추행 가해자에게는 조화를 보내고 피해자에게는 위로의 말 한마디가 없다. 전형적인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의 이중성이다.권력은 마약처럼 중독성 강한 ‘도파민(dopamine)’을 상승시킨다. 정치인이 도파민에 중독되면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다. 괴물의 출현은 비극의 시작이다. 때문에 정치인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국속담에 “오만이 앞장서면, 치욕이 뒤따른다.”고 했다. 정치인은 ‘권력에 내재하는 악마적 속성’을 항상 경계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권력이 클수록 그 주변에 모여드는 예스맨(yes man)들이 부르는 용비어천가는 정치인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악마의 대변인’을 곁에 두고 그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하지만 인간은 나약해서 언제든지 마약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아부꾼들에 둘러싸여 도파민에 중독된 권력은 스스로 마약을 끊기 어렵다. 때문에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만이 괴물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야당과 지식인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 야당은 수적 열세만 탓하지 말고 정부여당을 제대로 견제해야 미래가 있다. 정의로운 정도(正道)정치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권력’과 사회중심적인 ‘이타적 권력’이 충돌할 때 유권자의 선택은 자명하다.또한 여론형성자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민감성’이 살아있어야 권력의 오만을 통제할 수 있다. 권력과 야합한 어용언론인, 권력해바라기가 된 어용교수는 무늬만 지식인이지 권력의 시녀일 뿐이다.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스스로 권력이 되기보다는 ‘권력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때 더욱 빛난다. 지식인이 권력이라는 마약을 즐기면서 이를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2020-07-27

‘어용(御用)’들의 행진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어용’이 판치는 세상이다.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대쪽’은 없고 모두가 소리 높여 ‘문비어천가’를 부른다. ‘가물에 콩 나듯’ 보이는 대쪽들의 직언은 이른바 ‘문빠’와 ‘대깨문’들의 왜곡과 공격으로 무용지물이다. 대쪽 검찰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어용 검찰간부는 항명(抗命)하고 법무장관은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는가 하면, 어용국회의원과 어용언론이 총동원되어 ‘어용검찰 만들기’에 혈안이다. ‘절대화 된 권력의 필연적 부패’ 조짐이다.누가 권력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권력 해바라기’가 된 어용지식인들이다. 어용교수·어용언론인·어용시민운동가들이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권력을 가지려는 속내는 숨기고 마치 정의의 투사처럼 행세한다. 연구와 교육에 거리가 먼 ‘어용교수들’은 정부여당의 외곽단체에 참여하거나 방송에 출연하여 교활한 궤변으로 정권을 비호하면서 권력에 접근한다. ‘외눈박이가 된 어용언론인들’은 진영논리를 펴면서 권력과 밀착되었고, 그 공로로 청와대 대변인·국회의원 등 스스로 권력이 되었으니 언론의 사명을 잊은 지 오래다.‘어용권력이 된 시민단체들’의 병폐도 심각하다. 지식인들의 시민운동이 권력과 밀착됨으로써 출세의 지름길로 변질되었다. 문재인정부에서 참여연대·민변·정대협 출신들이 장관·청와대비서관·대법관·헌법재판관·국회의원 등 스스로 권력이 되어버렸으니 시민단체의 사명인 권력에 대한 감시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보수단체인 자유총연맹까지도 대통령의 40년 지기가 총재에 취임함으로써 그 순수성을 의심받고 있는 실정이다.바야흐로 ‘어용의 시대’를 주름잡는 ‘어용들의 행진’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비난받아 마땅한 어용들이 오히려 목에 힘을 주고 ‘어용이 명예’가 된 어지러운 세태이다. ‘어용을 신념에 따른 행동으로 위장’하면서 요설(妖說)을 펴는 지식인까지 등장했다. 어용은 사익(私益)을 위해 권력에 영합하지만, 대쪽은 공익(公益)을 위해 권력을 비판한다. 권력의 속성상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한다. 권력에게 ‘어용의 감언(甘言)은 독(毒)’이고 ‘대쪽의 고언(苦言)은 약(藥)’이다. 권력이 약을 싫어해서 독을 계속 복용하면 마침내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다. 괴물이 된 권력은 판단력이 흐려져서 ‘어용은 내편, 대쪽은 네편’이라고 착각한다. 권력이 저지른 불의는 정의로 둔갑하고, 권력의 폭주는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면서 독재의 길을 걷게 된다.‘괴물이 된 권력’이 성공한 경우는 없으며 그 끝은 언제나 불행하였다.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어용들을 만들었지만, 바로 그 어용들 때문에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용들의 행진’은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어용이 된 지식인은 개인적 불명예이자 국가적 손실이다. 사익을 위해 권력에 접근하여 스스로 권력이 되기보다는 ‘공익을 위해 권력을 비판하고 바른길로 이끌어주는 것’이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요 사명이다.

2020-07-13

‘민족’과 ‘동맹’의 사이에서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2018년 9월 20일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에서 남북정상이 손을 맞잡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능라도경기장에 모인 15만 평양시민들 앞에서 ‘우리민족’과 ‘민족자주’를 역설하면서 감격에 젖었다. 남북정상의 집무실 간에는 핫라인(hot line)이 연결되고, 개성에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설되었다. 북·미 정상회담도 세 차례나 있었으니 평화와 협력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한다고 천명하였다. 권정근 외무성국장은 “비핵화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한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문대통령의 6·15연설에 대해 “철면피한 궤변”이라고 하면서 대북특사파견 요청을 “불손한 제안”이라고 즉각 거절했다. 심지어 옥류관 주방장까지 나서서 “국수 처먹을 때는 요사떨더니 한 일이 없다”고 조롱한다. 돌연 김정은이 대남군사행동을 유보하면서 우리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김정은·김여정 남매가 역할을 분담해서 ‘때리고 달래는’ 전형적인 ‘한국 길들이기’ 전략이다.동맹의 입장이 나왔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은 역효과를 낳는 추가 행위를 삼가라”고 경고하면서 “동맹인 한국과 긴밀히 조율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특사가 미국을 방문해 공동대응을 협의했다. 하지만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트럼프는 신중하다. 북한의 군사도발이 미국을 겨냥할 경우 재선 가도에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미국우선주의’를 역설하는 트럼프는 북한이 직접적으로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상황의 안정적 관리’가 최선이라는 정치적 계산이다. 게다가 최근에 발간된 볼턴(J. Bolton)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은 한국에 대한 불신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민족도 동맹도 ‘대한민국이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 ‘존재의 가치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민족통일은 미래의 담론’이지만 ‘남북대치는 현재의 위기’이다. 현재를 지켜내지 못한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핵무기는 남북 간 비대칭전력의 핵심인데, 북한이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것은 동맹인 미국의 핵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유약한 이상주의’로서는 핵무장한 ‘강력한 현실주의’를 결코 이길 수 없다.따라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북핵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의 핵우산, 즉 동맹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맹으로 현재를 지켜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족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만약 민족과 동맹이 충돌한다면 생존을 위해서 동맹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6·25전쟁의 교훈이며 비핵국가의 운명이다. ‘한반도 운전자’를 주장하는 문대통령의 운전이 서툴면 대형사고가 일어난다. 국민의 생명을 책임진 대통령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운전해야 한다. 부디 ‘힘과 국익이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직시하고 ‘장밋빛 환상’에서 조속히 깨어나기를 바란다.

2020-06-29

미·중 충돌, 기로에 선 한국외교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미·중 패권경쟁이 전면전으로 확산되면서 한국외교가 중대한 기로(岐路)에 섰다.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관계’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던 문재인 정부의 ‘줄타기외교’가 이제 더이상 계속하기 어려운 한계상황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코로나19의 세계적 팬데믹(pandemic)을 계기로 더욱 격화되고 있는 미·중 갈등의 본질은 패권국 미국과 도전국 중국 간의 패권전쟁이다. 외교·안보·군사차원에서 볼 때 중국이 세력확장을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전략’에 맞서 미국은 ‘인도·태평양전략’으로 중국을 포위하면서 한국의 참여를 독려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G7에 한국을 초청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중국이 ‘핵심이익(core interest)’으로 중시하는 남중국해에서 미국은 ‘국제수로 항행자유’를 주장하며 핵항모전단·강습상륙함 기동훈련을 계속하면서 반중(反中)성향의 동남아국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은 중국이 주권문제라고 강변하는 ‘홍콩보안법’ 제정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홍콩의 특별지위 박탈을 위협하는 등 대중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최근 발표된 미 국방부의 ‘대중국 전략보고서’는 중국에 대한 ‘경쟁적 접근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신냉전을 공식화했다.경제·금융·무역차원에서의 미·중 패권전쟁도 심각하다. 미국은 세계 공급망의 중심국인 중국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방국들과 함께 새로운 ‘경제번영네트워크(EPN)’ 설립을 통한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참여를 공식 요청했다. 화웨이(Huawei)를 비롯하여 첨단기술을 적용하는 ‘중국제조 2025’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견제는 중국의 ‘기술패권’을 결코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게다가 최근 중국이 위안화 기준환율을 인상하자 미국은 이를 환율조작으로 간주함으로써 미·중 통화전쟁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중국과 모든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트럼프의 발언이 단순한 협박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미어세이머(John J. Mearsheimer)는 그의 저서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에서 “강대국 간 패권전쟁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미·중 패권전쟁의 전운(戰雲)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양 강대국으로부터 ‘줄서기’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줄타기’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미·중 패권전쟁에 대비하는 한국외교의 좌표설정이 시급하다.한국은 한·미 동맹의 당사국, 즉 행위자(player)라는 점에서 미·중 사이에서 중재자(mediator)가 될 수는 없다. 만약 불가피하게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패권전쟁에서 이기는 편에 서야 하는데, 대다수 국제정치학자들은 상당 기간 미국의 패권은 지속될 것으로 본다. 또한 정치이념과 가치체계가 이질적인 나라보다는 동질적인 나라가 우리의 국익에 더욱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로에 선 한국외교의 진로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2020-06-15

코로나19,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우리의 삶에서 코로나19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은 무심히 살아온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코로나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축복된 삶의 계기로 전환시킬 수도 있고, 유사한 재앙이 반복될 수도 있다.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일상화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가치이다. 코로나의 확산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일상적 대면접촉은 극도로 제한된 반면, 원격의료·원격교육·원격비즈니스가 급속히 활성화되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인간을 멀리하고 경계하게 된 것’은 비극이지만, 일상의 소통과 업무가 비대면·온라인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자기성찰의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온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은 그만큼 향상될 수 있다. 코로나는 ‘빨리 빨리’를 재촉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 ‘천천히 생각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나아가 코로나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것은 본인은 물론 타인의 건강에 대한 배려행위이다. 이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시민정신이며, 민주주의체제에서 시민정신의 실종은 곧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의료인들의 고귀한 희생과 봉사정신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인·경제인·교육자 등 각 영역의 행위주체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다. 특히 코로나로 고통 받는 경제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지원은 공동체의 중요한 기반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자연친화적인 삶의 중요성’ 역시 코로나의 가르침이다. 코로나의 공격으로 공장이 멈추고 사람과 자동차의 이동이 제한되었지만, 지구환경에는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공기의 질이 나아지고 생태계도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는 코로나의 위험이 없다. 코로나의 공격은 도시의 밀집된 공간에서 숨 막히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가능하다면 ‘자연과 가까이 하라는 메시지’이다. 대자연의 꽃과 숲이 말하는 ‘정신이 건강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도시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이처럼 코로나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코로나 사태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멀지 않아 더욱 심각한 재앙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타성에 젖어 살아온 ‘구태의연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개척자적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2020-06-01

코로나19 이후 세계정치경제의 향방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코로나19의 세계적 팬데믹(pandemic)은 세계정치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예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가 “폭풍은 지나가고 인류는 살아남을 테지만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 것”이라고 한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세계 각국은 감염병 확산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국 우선주의와 각자도생(各自圖生)전략을 채택하였다. 세계정치질서를 주도해 왔던 미국의 리더십은 크게 실추되었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 상대방에게 코로나 확산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향후 전략적 패권경쟁이 더욱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유럽을 표방했던 EU회원국들 역시 위기상황에서는 국익과 자국민 보호가 우선이었고, 강대국의 재정지원에 종속되어 있는 WHO는 국제기구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코로나는 경제세계화의 상징이었던 물자와 인력의 자유로운 왕래를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진출기업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는 이른바 ‘리쇼어링(reshoring)’을 촉진하고 있다. 그 동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수반되어 온 부작용과 취약성이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post­corona)시대의 세계정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코로나의 대처과정에서 글로벌 파워(global power)인 G2의 리더십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견국(middle power)들의 역할공간이 확대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료시스템의 부실이 드러남으로써 선진국들의 신화가 깨어졌고, 코로나 진원지인 중국의 강압적·음성적 대응방식은 결코 방역모델이 될 수 없다. 반면에 최소한의 통제 속에서 민주적이고 투명한 대응으로 선방하고 있는 한국과 같은 중견국들의 역할과 책임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현행 ‘세계화 분업체계’의 위험성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제공급망의 재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특히 과학기술이 낙후한 후진국들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경제적 남북문제도 민감한 이슈로 부상될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19와 같은 세계적 감염병 확산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정치경제질서의 향방은 상당히 유동적이다.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경을 초월하는 질병·마약·환경·테러 등의 초국가적 인간안보(human security) 이슈들에 대처하는데 있어서 각자도생 전략은 한계가 있다. 더욱이 우리는 GDP대비 무역의존도가 70%에 달하는 개방경제이기 때문에 국제교류협력이 생존과 번영의 길이다. 따라서 IT강국으로서 향후 새로이 형성될 세계정치경제질서의 논의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국력과 빈부의 격차를 넘어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의 표준, 즉 ‘뉴 노멀(new normal)’은 우리의 국익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2020-05-18

재기(再起)의 길을 묻는 보수에게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보수는 과연 재기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보수가 올바른 혁신의 길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혁신을 실천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 자중지란(自中之亂)을 겪고 있는 통합당으로서는 ‘사즉생(死卽生)’의 비장한 각오가 요구되는 조건들이다.보수의 재기를 위한 혁신의 길은 무엇인가? 혁신의 전제는 총선 참패에 대한 참회와 자성이다. ‘정권심판’을 외쳤던 보수가 오히려 ‘야당심판’을 당했다. 유권자들은 그 원인이 ‘여당이 잘해서’(22%)가 아니라 ‘야당이 못해서’(61%)라고 답했다. 2040세대의 통합당에 대한 비호감도는 80%를 넘고 있다. 선거는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다. 통합당은 진보의 위선과 반칙을 비판했지만 보수의 품격과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핵심당원들의 평균연령이 60세이고, 지역분포는 영남이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세상의 변화에 둔감한 ‘낡고 늙은 꼰대당’으로 각인되었고, 강남당·영남당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극우 태극기부대에 휘둘리면서 포용성과 확장성을 잃었다.이러한 사실은 혁신의 주도세력이 ‘수도권의 3040세대’가 되어야하며, 혁신의 방향은 ‘포용성과 실용성의 확대’임을 말해준다. 혁신을 위해서는 경직된 보수가 아니라 수도권에서 격전을 치른 3040세대가 주도해야 민의(民意), 특히 선거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도층의 표심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통합당이 보수층만 바라보고 정치를 했으니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금수저는 흙수저의 고통을 모른다.”는 비판은 통합당의 대중성과 공감능력이 부족함을 말해준다. 따라서 보수의 가치인 자유·안보·법치뿐만 아니라 빈부격차·청년실업·서민경제 등 시대적 아픔도 함께할 수 있는 포용성, 그리고 이념투쟁보다는 국민의 생활 속에 뿌리내릴 수 있는 실용성이 크게 확대되어야 한다.더욱 중요한 것은 변화와 혁신을 실천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통합당은 선거패배 때마다 비대위를 구성하고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해 놓고서는 말뿐이었다. 혁신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국민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거짓말까지 했으니 총선참패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보수의 재기는 국민이 통합당의 변화와 혁신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혁신의 길은 고통의 길’이다.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며 때로는 자기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낡은 것을 버려야 새 것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늙은 보수·웰빙 보수·기득권 보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자 시련이다.정치인으로서 소명의식이 투철하면 혁신의 고통도 즐거움이 된다. 초심으로 돌아가 대의(大義)에 충실하면 얼마든지 혁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 혁신할 수 없다면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정신으로 물러나라. 나를 바꾸는 혁신도 싫고 권력도 내려놓지 않겠다면 결국 당과 함께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2020-05-05

톨레랑스(tolerance)를 아시나요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총선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과 통합당의 참패, 중도 군소정당의 소멸, 진영과 지역대결의 심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견제와 균형, 대화와 타협이라는 의회민주주의에서 볼 때 적지 않은 우려를 낳는다. 왜냐하면 정부·여당이 주도해왔던 범 진보연합의 진영정치가 이제는 단독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한국은 복수(vengeance)에 함몰된 정치로 항상 내전(內戰) 상태”라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력 행사가 아니라 상대 진영에 대한 존중”이라고 했다. 그는 “진영정치가 한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것이 슬프지만 분명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을 100회 이상 방문한 세계적 석학의 논평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정치선진국 프랑스에서 ‘톨레랑스(tolerance)’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고 있다. 민주적 가치관으로서 톨레랑스를 ‘관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감성적 관용’보다는 ‘이성적 관용’에 가깝다.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과 입장을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의견과 입장도 존중받는 것이다. 톨레랑스는 나의 생각과 다른 남의 생각을 허용하고 관용하는 정신이다. 따라서 대화와 타협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톨레랑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한국 민주주의의 후퇴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인간 능력의 유한성과 상대성을 부정하면서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빠져 있다. 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독선과 아집이 민주주의를 왜곡시켰다. 여당은 권력으로 정의를 합리화하고, 야당은 정의를 명분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권력에 눈이 먼 외눈박이 정치꾼들의 교활한 선동 때문에 국민들마저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핏발선 눈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한 나라 두 국민’의 비극적 현실이다.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은 ‘다른 점’과 ‘틀린 점’을 구별하지 못한다. 여당과 야당의 생각이 다를 뿐인데,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차이(差異)’가 ‘불의(不義)’와 동의어로 둔갑한다.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태도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다. 격앙된 적대적 감정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민주주의는 이성적 토론이 불가능한 정치문화에서는 성장할 수 없다. 게다가 진영논리에 갇힌 독선정치는 필연적으로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보복을 부른다. 한국정치사가 증명하듯이 역대 대통령들의 퇴임 후 불행은 바로 이러한 진영정치의 결과였다.진영정치는 국론분열을 초래하지만 톨레랑스는 국론통일을 모색하게 한다. 통합과 협치를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오히려 분열과 대립을 격화시킨 것은 진영정치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민주정치와 독재정치의 근본적 차이는 톨레랑스의 가치를 인정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따라서 21대 국회를 장악한 정부·여당은 더욱 낮은 자세로 야당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톨레랑스 없는 다수당의 폭주는 민주주의로 포장된 의회독재일 뿐이다.

2020-04-20

총선, 유권자가 희망이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총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처럼 기막힌 ‘막장 선거판’도 없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선거 승리만을 위한 꼼수 비례당과 꼼수 공천이 난무한다. 권력밖에 모르는 교활한 정치꾼들은 국민이 고통 받고 있는 코로나사태까지도 선거전략의 하나로 이용하고 있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기꾼들이 설치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실이다.선거법 협상을 거부했던 미래통합당은 하나의 위성정당을 만들었는데, 선거법 개정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은 두 개의 위성정당을 거느리고 있다. 민주당은 통합당이 위성정당을 만들 때 ‘표를 훔치는 도둑질’이라고 욕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통합당은 바늘도둑’이고 ‘민주당은 소도둑’이 아닌가? 민주당은 스스로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김의겸·최강욱 등 청와대 참모들과 정봉주·손혜원이 또 하나의 위성정당인 열린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주당은 2중대와 3중대를 만들어 놓고서도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없다.총선에서 유권자의 표심을 사려는 포퓰리즘(populism)도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코로나사태로 삶의 토대를 잃은 국민을 지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코로나를 빙자하여 지방정부들은 경쟁적으로 현금을 살포하고 있고, 중앙정부는 국민의 70%에 가구당 100만원씩 주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더불어시민당은 모든 국민에게 매달 6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선거공약을 중앙선관위에 제출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철회하였다. 재난구호를 명분으로 매표(買票)행위나 다름없는 현금살포가 선거판을 흔들고 있다.이처럼 총선을 앞둔 각 정당과 후보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개 눈에는 X만 보이고, 정치꾼 눈에는 표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 그들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다. 때문에 유권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혹자는 정치판 돌아가는 꼴이 보기도 싫고, 마음에 드는 정당이나 후보자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이 유한한데 완벽한 정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좋은 정당, 좋은 후보자를 찾지 못했다면 덜 나쁜 정당, 덜 나쁜 후보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유권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그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여당의 국정운영, 특히 경제정책의 성과는 무엇이며 북한의 비핵화는 진전이 있었는가? 조국 일가의 비리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은 사실인가 거짓인가? 코로나의 확산 원인은 무엇 때문이며 정부의 방역대책에는 문제가 없는가? 후보자는 사익보다 공익을 중시하는 ‘진정한 정치인(statesman)’인가, 권모술수에 능한 ‘교활한 정치꾼(politician)’인가? 선거 때만 머리를 조아리는 말뿐인 사람인가,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인가?4월 15일은 유권자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날이며, 민심이 천심(天心)임을 증명하는 날이다. 오직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만이 죽어가는 한국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수 있다.

2020-04-06

품격 있는 대구인 vs 외눈박이 정치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서울에서 업무상 대구에 내려온 한 공무원은 “도시가 마치 동면하듯 조용히 숨 쉬고 있다”고 했다. 품격 있는 대구인들이 코로나와 사투(死鬪)를 벌이면서도 매우 절제된 행동으로 시민정신(civic spirit)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면서도 생필품 사재기를 하지 않는다. 당분간 외출을 삼가달라는 시장의 당부에 따라 며칠 동안 사용할 물품만 구입할 뿐이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서서 기다리면서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서로를 격려한다. 환자들을 위해 고생하는 의료진에게는 도시락·빵·과일을 보내는가 하면, 자택으로 배달해주는 택배기사에게도 마스크와 함께 감사의 손 편지를 건네기도 한다. 자신도 환자이면서 “나는 견딜만하니 더 힘든 사람부터 입원시키라”고 병실을 양보한다. 이것이 바로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도리, 즉 ‘선비정신’을 잃지 않는 대구인의 품격이다. 최근 대구를 취재한 미국의 ABC방송기자는 “이곳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절제와 교요함만 있다”고 하면서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표준(new normal)’이 된 지금, 대구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극찬하였다.그럼에도 진영논리에 갇힌 외눈박이 정치꾼과 광신도들은 대구시민을 비하·모욕하고 있다. 친여 방송인 김어준은 “코로나 사태는 대구사태이자 신천지사태이며 대구지역이 문제”라고 대구시민들을 폄훼하고 조롱하였다. 한 때 대구 수성구에 출마하면서 “대구에 뼈를 묻겠다”고 했던 유시민은 연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대구시장을 향해 “권영진 시장이 코로나19를 별로 열심히 막을 생각이 없지 않나 하는 의심까지 든다”는 망언으로 시민들을 격분시켰다. 또한 민주당 청년위원회 한 위원은 “대구는 손절(損切)해도 된다. 대구·경북 지역에 코로나 감염자가 아무리 폭증해도 타 지역까지 번지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고 하면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다른 지역은 안전해서 문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더 강해졌다”고 했다.게다가 민주당 부산시당의 한 관계자는 “코로나19가 대구·경북에서만 심각한 이유는 미래통합당과 그들을 광신하는 지역민들의 엄청난 무능도 큰 몫을 한다”고 조롱했다. 이들의 망언과 독설은 실로 폭력적이며, 힘들게 버티고 있는 대구시민들을 쓰러뜨리려 한다. 오죽하면 대구시장이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쁜 정치바이러스”라고 했겠는가.대구와 대구시민을 비하·조롱하는 외눈박이 정치꾼들의 목적은 뻔하다. 다가오는 총선 승리를 위해 대구를 봉쇄·고립시킴으로써 다른 지역과 진보진영을 결집시키려는 것이다. 생각 없는 정치적 광신도들은 대구시민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내면서 소금까지 뿌리고, 진보의 가면을 쓴 ‘쓰레기 정치꾼’들이 내뿜는 악성 정치바이러스는 나라를 더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바로 ‘품격 있는 대구인의 선비정신’이다.

2020-03-23

코로나19, TK 그리고 정부·여당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온 국민이 ‘멘붕’에 빠졌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에도 수백 명씩 속출한다. 특히 확산의 중심에 있는 TK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구에서는 입원을 기다리던 환자들이 자택에서 숨지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필자의 연구실 15층 창밖의 시내 거리는 적막하다. 긴급 출동하는 앰뷸런스의 다급한 사이렌이 대구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다. 불안과 공포 속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시민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눈물겹다.그럼에도 위기관리에 책임 있는 정부·여당은 헛발질만 한다. 감염원의 차단은 방역의 기본이다. 중국인 입국을 막지 못해 초기대응에 실패했다. 국민의 생명보다 대중외교를 중시한 결과이다. 베트남은 환자가 16명일 때 중국인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확산을 막았다. 이스라엘은 예고 없이 한국인 입국을 금지했는데, 정부가 항의하자 “이스라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인의 어려움은 우리의 어려움”이라는 문 대통령에게 돌아온 중국의 조치는 한국인에 대한 격리와 감금이었다. 정부가 항의하자 “자국민의 생명보호는 당연한 조치”라는 훈계만 돌아왔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모르는 무능한 정부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여당대변인은 TK 봉쇄를 말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고 사퇴했다. 중국은 봉쇄하지 않고 그 피해자인 TK를 봉쇄하겠다는 정치꾼의 발상이 놀랍다. 외교부장관은 “중국인 입국금지는 실효성이 없다”고 했고, 복지부장관은 “확산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 온 한국인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인은 막지 않고 그 피해자인 우리 국민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들은 중국공산당 대변인이거나 중국의 장관들이 아닌지 귀를 의심케 한다.정부·여당의 분별없는 언행은 고통 받는 국민의 상처를 더욱 헤집고 있다. 환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열린 청와대 ‘짜파구리’오찬에서 보여준 대통령 내외의 파안대소(破顔大笑)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국민을 잊은 것 같다. ‘울고 있는 국민과 웃고 있는 대통령’의 대조적 모습은 “이게 나라인가?”를 묻고 있다. “코로나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대통령의 오판은 국민을 더 큰 고통 속에 빠뜨렸다. 대통령은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온 동네를 헤매다가 빈 손으로 돌아서는 시민들의 눈물을 아는가? 1회용 마스크를 3일간 써도 괜찮다는 여당대표는 무식한 것인가 용감한 것인가? 국민에게 강요하기 전에 먼저 대통령과 장관들이 3일 사용을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다.무능한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교활한 정치꾼들은 국민을 분노케 한다. 방역전문가는 정치꾼이 아니라 의사와 학자이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구로 달려 온 의사와 간호사들은 과로로 쓰러지고 있는데, 정부·여당은 총선의 이해득실 계산에 바쁘다. 국민이 있어야 정치도 있는 것 아닌가? 권력밖에 모르는 정치꾼들은 악조건 속에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인들의 숭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배우기 바란다.

2020-03-09

문재인 정부의 정의란 무엇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하버드대학 샌델(M. Sandel) 교수는 그의 저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공리주의나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한 ‘공동체주의적 정의’이다.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에 책임 있는 정치지도자는 물론이고,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국민들도 명심해야 할 관점이다.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 문재인 정부의 정의는 진영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은 나만의 정의, 즉 독선(獨善)에 빠지게 한다. 정치적 경쟁자를 적폐청산의 대상자로 인식함으로써 갈등을 부추기고 공동체를 황폐화시킨다. 공동체 건설을 위한 공동선의 추구가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는 독선을 정의라고 강변하고 있다. 건전한 공동체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청와대에 방마다 걸려있는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는 액자는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불의를 감추기 위한 장식품이 되어 버렸다. 대통령의 30년 친구가 당선한 울산시장 선거에 청와대가 개입한 의혹으로 전·현직 비서관 등 13명이 무더기로 기소되었다. 검찰의 공소장에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공무원에게는 다른 공무원보다도 선거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이 더욱 특별히 요구된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은 “편의적 정의가 아니라면 대통령은 직접 입장을 밝힐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또한 한변 소속 변호사들은 “대통령의 울산선거 개입이 확인되면 탄핵 사유”라고 했으며, 심지어 진보진영인 민변 소속 권경애 변호사도 “명백한 대통령 탄핵사유이며 형사처벌 사안”임을 지적하였다. 진영에 관계없이 모두가 정의를 짓밟고 있는 무법 정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정의를 수호해야 할 정의부(법무부)장관 추미애의 행태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던 검사들을 좌천시켜 인사 학살하더니, 무엇이 두려운지 국회가 요구한 검찰의 공소장 공개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공소장이 언론에 공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번에는 또 다시 수사검사와 기소검사의 분리를 기도하고 있다. 추 장관의 행태는 청와대와 여당의 범죄피의자들에 대한 수사방해와 기소방해를 의심케 한다. 이에 대해 ‘검사내전’의 저자 김웅 전 부장검사는 “이것은 형사사법 정의가 아니라 엿장수 형사사법”이라고 비판했다. ‘정의를 수호’해야 할 정의부장관이 ‘정권의 수호’에 혈안이니 나라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이다.불의를 합리화하여 정의로 둔갑시키고, 검찰 수사에 개입하여 수사를 방해하면서도 민주적 통제라고 강변하는 철면피들은 국민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 나와 내 편밖에 모르는 정치꾼들의 오만과 독선은 ‘정의를 요구한 국민의 엄중한 심판’으로 결국 파멸했다는 역사의 교훈을 명심하기 바란다.

2020-02-24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국민의 기대가 너무 컸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정말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대통령에게 속았다는 배신감 때문이다.대통령이 약속했던 진정한 국민통합은 허언(虛言)이었고, 나라는 ‘한 나라 두 국민’으로 분열되면서 서로를 부정하고 있다. 나라가 이처럼 두 동강 난 적이 없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다. ‘통합의 상징’이어야 할 대통령이 오히려 ‘분열의 원천’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공화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대통령의 편 가르기’이다. 내 편만 바라보는 대통령의 ‘외눈박이 사고’는 정치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 베버(M. Weber)가 지적했듯이 정치인은 “국민에 대한 책임윤리와 자신의 신념윤리가 충돌할 때 당연히 책임윤리가 우선”이기 때문이다.청와대와 검찰의 정면충돌 역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청와대가 전쟁 중이다. 대통령은 윤석열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살아 있는 권력도 엄정히 수사하라”고 당부해 놓고서는 검찰의 칼날이 청와대를 향하자 ‘윤석열 죽이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조국 사건의 수사팀을 교체하여 수사를 방해하면서도 대통령은 인사권의 정당한 행사라고 강변했다. 또한 검찰이 조국 사건의 공범으로 청와대의 최강욱 비서관을 기소하자, 그는 “검찰의 기소는 쿠테타이며, 윤석열 총장은 향후 출범하는 공수처의 수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범죄피의자가 검찰총장을 겁박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이다. 대통령이 역설했던 ‘정의로운 나라’가 이제 보니 ‘내로남불 나라’였다.청와대의 선거개입 및 하명수사 의혹을 받고 있는 정무수석·민정비서관·반부패비서관·울산시장·전 울산경찰청장 등 13명이 무더기로 기소되었다. 대통령의 친구인 송철호를 울산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하여 청와대가 총동원되었다는 혐의이다. 국회가 검찰의 공소장 제출을 요구하자 추미애 법무장관은 무엇이 무서운지 “내가 책임지겠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게 정의부(正義部)의 책임자인 법무장관의 행태인가?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두려움을 모른다. 동아일보의 특종보도로 공개된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청와대가 총괄 지휘하여 7개의 비서관실이 조직적으로 선거범죄를 저질렀다. 참으로 놀랍다. 청와대가 마치 범죄소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게 나라인가?대통령의 언행은 일치되지 않고, 비서들은 내 편 챙기기에 바쁘다. 통합을 말하면서 갈등을 부추기고, 정의를 말하면서 불의를 합리화한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선거부정도 서슴지 않는 권력, 범죄피의자가 권력의 힘을 믿고 수사검찰을 겁박하는 나라, 그것이 바로 대통령이 말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가?

2020-02-10

국가의 원수인가 진영의 보스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사에서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오늘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역설하였다.이처럼 철석같이 약속했던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경쟁의 룰을 정하는 선거법개정 협상에서 제1야당은 배제하고 진보진영(4+1)의 정치적 야합으로 공수처법을 끼워서 패키지로 통과시켰다. 또한 신년기자회견에서는 “조국 전 장관이 지금까지 겪은 고초만으로도 아주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대통령이 수많은 범죄혐의로 기소되어 재판 중에 있는 피의자는 감싸고, 그 피의자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초를 겪었던 국민에게는 진정성 있는 사과 한마디가 없다. 이게 국민에 의해 선출된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란 말인가?더욱이 재판 중에 있는 피의자를 대통령이 감싸는 것은 검찰과 재판부에 대한 압력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자신이 했던 발언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모순이다. 문 대통령은 2012년과 2017년의 대선에서 두 차례나 “대통령 및 청와대가 검찰 수사와 인사에 관여했던 악습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고 공약하였고, 현재의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도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성역 없는 수사”를 주문하였다. 그런데 검찰수사의 칼날이 청와대와 진보진영으로 향하자 법대로 수사 중에 있던 ‘수사팀을 교체’하면서 ‘대통령의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국민을 바보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감히 이런 행태를 보일 수가 없다.사람(人)의 말(言)은 믿음(信)이 있어야 한다. 하물며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보진영의 장기집권이라는 권력욕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는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한 진영의 보스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국가의 원수가 진영의 보스로 전락하는 순간 그의 불행은 시작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임을 왜 모르는가? 한국정치사가 증명하고 있는 대통령들의 비극적 종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혔던 포부들, 즉 ‘대통령의 새로운 모범,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 국민의 자랑으로 남는 대통령’ 등은 이미 코미디가 되어가고 있다. 견제 받지 않는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이 폭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포부는 진영논리에 갇힌 독재정치가 아니라 비판을 경청하는 공화정치에서 이루어진다. 부디 공화국의 원수로서 초심으로 돌아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4월 총선에서 확실하게 심판하는 수밖에 없다.

2020-01-27

정치의 계절이 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총선 예비후보로부터 북 콘서트 초청장이 왔다. 현역 국회의원은 의정보고서라는 이름의 총선 출마 홍보물을 보내왔다. 분열된 보수의 통합이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 체류 중인 안철수 전 의원이 정치재개를 선언하면서 향후 정당의 이합집산이 예상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의 단톡방에서도 정치적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시나브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그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선거 승리를 위하여 정당과 후보자들은 포퓰리즘(populism) 공약을 남발함으로써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한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경쟁자에 대한 중상모략과 허위사실 유포도 서슴지 않는다. 연고주의가 만연하는 한국정치에서는 혈연·지연·학연이 총동원되어 ‘내편 네편’으로 나누어 ‘유치한 편싸움’이 벌어진다. 선거가 끝나면 유권자들은 다시 현실정치로부터 소외되어 방관자가 된다. 민주주의 꽃이요 축제라는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정치의 계절이 오면 유권자는 눈을 더욱 크게 부릅뜨고 각 정당과 후보자의 행태를 주시해야 한다. 정치적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반동화를 초래하여 독재정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권자는 정치적 관심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 정당과 인물을 찾아내야 한다. 민주주의 가치가 내면화되어 있어야 민주정치를 할 수가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흑백논리나 ‘사회적 패권의 교체’를 주장하는 혁명논리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국민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선동정치는 독재자의 혁명전술이다.국가적 당면과제인 ‘안정과 혁신’을 도모할 수 있는 정당과 인물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북한의 핵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여 국가안보를 확고히 하는 한편,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경제혁신을 통해 미래의 번영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출세에 목적을 둔 정치꾼(politician)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봉사하려는 정치인(statesman)으로서의 소명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베버(M. Weber)가 지적한 것처럼 “직업으로서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의식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거 때는 유권자에게 머리를 조아리지만 권력을 잡으면 목에 힘을 주면서 돌변하는 정치꾼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민주주의에 대한 링컨(A. Lincoln)의 명언, 즉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에 의한 정부”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의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현명하면 ‘훌륭한 정치인’을 선택할 것이요, 국민이 어리석으면 ‘교활한 정치꾼’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정치의 수준’은 곧 ‘국민의 수준’이다.

2020-01-13

아듀 2019! 새해에는 상생의 정치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2019년을 작별하는 마지막 날이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가 사생결단의 정쟁을 하다보니 벌써 한 해의 끝에 섰다. 통합과 협치를 약속했던 대통령은 어디로 갔는지 정치판은 쌈박질 뉴스뿐이다. 돌아보면 온 나라가 ‘내편 네편’으로 갈라져 원수처럼 싸운 적이 있었던가 싶다.조국 파문, 선거법 개정, 공수처 설치,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등이 제기될 때마다 정치권은 입에 담기 힘든 진흙탕싸움을 벌였다. 정부 내에서도 청와대와 검찰은 서로 정의를 강변하고 대립하면서 국정불안을 증폭시켰다. 정치권의 갈등은 국민에게 비화되고 진영싸움으로 확산됨으로써 온 나라가 두 동강 났다. 양 진영에서 동원한 ‘광장정치가 의회정치를 겁박’하는가 하면, 정치적 성향이 다른 언론과 유튜브 방송들도 각자의 진영논리를 대변하고 있다. 심각한 이념적 분열과 내로남불의 정치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이다.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교수들은 ‘공명지조(共命之鳥)’에 비유하였다. 최근 교수신문이 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선정한 올 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하나의 몸통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이 새는 공동운명체이다. 두 마음이 서로 질투하던 어느 날, 한 머리가 다른 머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독 있는 과일을 먹었고, 결국 독이 온 몸에 퍼져 둘 다 죽고 만다는 불교경전의 이야기다. 공명지조의 교훈은 ‘상생(相生)’, 즉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윈윈의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상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의 올바른 정치의식이 중요하다. 정치권은 민주주의의 상생정신, 즉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가 아니라 ‘조금 더 많거나 작게(more or less)’라는 타협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독선과 편견을 버리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소통과 대화를 해야 한다.이 때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자, 즉 집권여당이 먼저 야당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며, 서로가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매도하지 않고 그 격차를 좁혀나가야 한다. 또한 정치권의 상생정치를 위해서는 ‘국민이 공정한 심판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유권자가 권력게임의 어느 한 편에 가담하여 적대정치를 부추기는 한 상생의 정치는 뿌리내리기 어렵다. 물론 국민도 개인적 정치성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정치게임에서 심판관 역할을 해야 할 유권자가 정치인처럼 플레이어(player)가 되어서는 안 된다.총선이 예정된 새해에는 정치권의 권력투쟁이 더욱 격화될 우려가 있다. 출마하는 후보들은 왜,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려는지, 정치인으로서 품격은 갖추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또한 국민은 민주주의 원칙에 투철함으로써 상생정치의 적임자를 찾아내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한국정치가 ‘상극의 정치’로부터 ‘상생의 정치’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2019-12-30

대통령과 ‘악마의 대변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은 원래 가톨릭교회의 성인 추대 심사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논의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선의(善意)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악마의 대변인은 조직 내부에 형성된 기류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조직 의견에 동조하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여 토론을 활성화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대안을 찾도록 유도하는 것이다.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차이점은 통치자의 생각과 다른 의견이 허용되는가의 여부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위원장과 다른 의견은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죽음을 각오해야하지만,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얼마든지 피력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다른 생각이 오히려 더 나은 대안이나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권장되기까지 한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애플(Apple)의 광고,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스티브 잡스(S. Jobs)가 인습적 사고에 갇힌 보통사람들에게 ‘악마의 대변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애플의 성공이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이다. 또한 1962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당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에 대처하기 위하여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맡도록 하였는데, 강경파들이 주장했던 당초의 ‘공습전략’은 논의과정에서 핵전쟁으로 확산될 우려가 제기되어 온건한 ‘해안봉쇄전략’으로 수정됨으로써 평화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우리 역사에도 ‘악마의 대변인’의 가치를 잘 인식한 성군(聖君)이 있었다. 세종은 어전회의(御前會議)인 경연(經筵)에서 지나칠 정도로 계속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고약해(高若海)’를 대사헌(현재의 감사원장)에 중용하여 ‘악마의 대변인’으로 삼았다. 절대왕조시대에도 목숨을 걸고 ‘왕과 시비를 다투는 대간(臺諫)’들의 직언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로운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독선을 경계하고 집단사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악마의 대변인’을 두었다. 물론 그의 의견을 수용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통치자의 몫이다. 우리 헌정사가 보여주듯이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은 권력에 눈먼 예스맨(yes man)들에게 둘러싸여 충성스런 비판과 고언(苦言)을 단지 ‘고약한 의견’으로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특히 지금처럼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첨예화된 상황에서는 청와대 참모들의 이념적 동질성이 강하기 때문에 ‘집단사고의 덫’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도 ‘외눈박이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대변인’을 곁에 두고 비판적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소신은 강하나 포용력이 없다면 그에게 참된 조언을 하는 충신들은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9-12-23

포퓰리즘 마약: 베네수엘라 vs 스위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총선이 다가오면서 망국병 ‘포퓰리즘(populism)’이 또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치꾼(politician)’들은 선거 승리를 위해 ‘마약 같은 포퓰리즘’ 공약들을 쏟아내고, 유권자는 그들의 달콤한 유혹에 솔깃하여 이성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포퓰리즘에 대한 베네수엘라와 스위스의 사례 비교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준다.세계 최대의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베네수엘라는 한 때 1인당 GDP가 일본이나 독일보다도 높은 부국이었다. 1999년 집권한 차베스(Chvez)와 2013년 그의 후계자 마두로(Maduro)에 의한 포퓰리즘 정책들의 시행, 즉 무상복지, 연금 및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대대적 공무원 증원 등으로 인하여 다시 최빈국이 되었다. 최근 4년(2015∼2018) 동안 370만 명이 생존을 위해 조국을 탈출했으며, 평균 몸무게가 10㎏이나 빠진 그들은 굶주림을 참다못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고, 살인범죄 세계 1위라는 오명의 나라로 폭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년이었다. 차베스와 마두로가 집권을 위해 사용한 마약, 즉 포퓰리즘에 취한 국민은 ‘금단현상’때문에 다른 길로 가는 것을 거부한 결과였다.반면에 스위스의 포퓰리즘 사례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2016년 6월 스위스기본소득(BIS)이라는 단체가 요구한 ‘모든 국민에게 월 300만원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져 77%의 반대로 부결되었고, 동년 9월 ‘국가연금 10% 인상안’도 60%의 반대로 역시 부결되었다. 양식 있는 스위스 국민들이 자신에게 더 많은 기본소득과 연금을 보장해주겠다는데도 거부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상복지 확대를 위해서 사용하는 세금인상이나 국채발행 또는 통화남발의 부작용이 매우 심각할 뿐만 아니라, 놀고먹는 사람들이 늘어나 노동력이 저하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스위스의 정치권 역시 국민투표 과정에서 인기에 영합하여 복지 포퓰리즘을 부추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이처럼 베네수엘라와 스위스의 사례는 선·후진국의 차이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마약환자’로 만들어도 좋다는 ‘정치꾼들의 나라는 후진국’이요, 인기가 없더라도 국민을 위해서는 절대로 ‘마약’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품격 있는 ‘정치인(statesman)들의 나라가 선진국’이다. 또한 포퓰리즘이 초래하게 될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은 물론 자식들까지도 병들게 하는 ‘마약을 받아먹는 어리석은 국민은 후진국’이요, 그것이 초래하게 될 파괴적 결과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마약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는 지혜로운 국민이 선진국’이다.한국정치의 비극은 진정한 정치인이 없고 권력에 눈먼 정치꾼들만 난무한다는데 있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매표를 위한 정치꾼들의 포퓰리즘 유혹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한국이 마약에 취해서 베네수엘라와 같은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여 스위스와 같은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2019-12-09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붙여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한국과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의 대화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하여 25일부터 부산에서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번 특별정상회의는 2009년 제주, 2014년 부산에 이어 세 번째이며, 한·메콩 정상회의도 처음으로 개최된다.이 회의는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정책’의 일환이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적·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고 한국 외교의 다변화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아세안 외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전반기에 이미 아세안 10개 회원국 방문을 완료함으로써 정책추진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대통령직속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와 외교부 ‘아세안국’을 신설하고, 주아세안대표부를 격상하는 등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 하다.그럼에도 신남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협력파트너인 ‘아세안’과 ‘아세안 방식(ASEAN way)’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대통령의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방문 때 있었던 ‘의전 실수’는 아세안에 대한 전문성 부족이었고, 아세안의 독특한 국제협력방식인 ‘협의를 통한 합의, 점진적·비공식적 접근, 조용한 외교(quiet diplomacy)’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은 정책결정자는 물론이고 외교실무자들의 아세안에 대한 전문성이 크게 제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둘째, 장기적 관점에서 ‘윈-윈’할 수 있는 호혜적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아세안은 중국 다음으로 중요한 교역대상이며, 한국과 아세안 교역은 한국의 일방적 흑자이다. 한국의 무역흑자는 2018년 406억 달러, 2019년 10월 현재 300억 달러이다. 이러한 교역불균형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협력의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아세안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식의 지원을 더욱 확대함으로써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셋째, 사회문화적 교류와 협력의 강화이다. 한·아세안 관계는 상호신뢰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쌍방향의 사회문화적 교류확대가 절실하다. 현재는 동남아지역의 한류 확산에 비해서 한국인의 동남아문화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에 살고 있는 동남아 출신의 결혼이민자 및 이주노동자들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한·아세안 관계 발전에 가교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마지막으로 아세안을 국내정치나 대북정책에 이용하려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조용한 외교’를 선호하는 아세안의 협력방식을 고려할 때 ‘요란한 외교 이벤트’는 대국민 선전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질적 협력을 증대시키기는 어렵다. 또한 이번 특별정상회의를 대북정책에 활용하려고 김정은을 초청했다가 거절당한데서 알 수 있듯이,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외교’는 북한뿐만 아니라 아세안으로부터도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2019-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