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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력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선현(先賢)들은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남에게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나 명심하면서 살아야 할 금언(金言)이지만, 특히 정치권력을 가진 국회의원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손혜원 의원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의 행동이 위법인가의 여부는 검찰에 고발되었으니 수사를 통하여 법원의 판단으로 가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자의 행동이 ‘법적 정당성’은 물론이고 ‘도덕적 정당성’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권력자의 행위가 위법은 아니었지만 매우 비윤리적인 것이었다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법원의 무죄 선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미 도덕적으로 매장되었기 때문이다.목포의 문화재 사랑에 대한 손 의원의 선의(善意) 여부는 본인만이 알고 있기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다. 또한 정치인의 행위가 선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법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 정치쿠테타의 장본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국민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그 선의를 역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법적 행위가 합법화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손 의원의 선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특권과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으로서 올바른 처신을 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손 의원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여당 간사로서 문체부와 문화재청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남편 재단의 작품을 피감기관에 판매하였고, 그 재단의 이사를 문화재위원으로 추천하였으며, 국립박물관의 인사에도 압력을 행사한 의혹을 받고 있다.나아가 그가 목포 구도심에 가족·인척·지인의 명의로 사들인 20여 채의 부동산은 이 지역이 근대문화유산 공간으로 지정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었다. 국회 문체위 간사라는 ‘공적 권한’과 본인을 비롯한 친인척의 ‘사적 이익’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손 의원이 주장하는 ‘문화재 사랑’의 진정성은 설득력이 약해진다. 그의 문화재 사랑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 모든 일들을 ‘사적·비공개적’으로 추진할 것이 아니라 ‘공적·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했었다. 권력자의 진정성은 ‘그가 하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노엄 촘스키는 ‘책임의 윤리’를 논하면서 “책임은 특권에 정비례한다.”고 하였다. 특권이 많은 정치인일수록 그만큼 책임도 무거운 것이다. 모든 권력자는 자신의 특권을 사용한 행위에 대해서는 무한 책임을 져야하며, 그 책임에는 법적 책임은 물론이고 도덕적 책임도 따른다. 만약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정치인이 나라의 정신문화 육성을 말한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목포 부동산 구입을 계기로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손 의원과 친동생 간의 진실공방을 지켜보아야 하는 국민들의 마음은 참담하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떠나서 왜 우리는 이런 정치인들의 모습을 자주 보아야 하는가? 한 때 도지사 동생은 ‘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더니 이제는 국회의원 누나가 “동생의 말을 믿지 말라”고 한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정치인의 개인적 불행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모든 국민들의 불행이기도 하다. 개인적 불행도 슬픈 일인데 굳이 국민적 불행으로까지 확산시켜야 속이 시원한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내로남불’을 주장하는 데는 뛰어난 언술을 구사하고 있지만, ‘가진 자로서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우리는 언제쯤 품격 있는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을까?

2019-02-07

김정은의 핵외교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제외교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초미의 관심사인데다가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중 및 북미 정상회담이 계속되면서 국제적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의 핵외교는 그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제고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대미협상력을 증대시키는 이중효과를 거두고 있다.김정은의 핵외교는 북미협상의 ‘후원자로서는 중국’을, 그리고 ‘중재자로서는 한국’을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미중 패권경쟁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을 최대한 이용하여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제고시킴으로써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은 북미협상에서 양국 동시행동, 즉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제재완화’를 동시에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고, 유엔제재의 장기화에 따르는 북한의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은밀한 방법으로 대북지원을 계속하여 왔다.한편 북한은 한국을 북미협상의 중재자로 활용함으로써 외교적 성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재인 정부를 북미협상의 중재자로 나서게 함으로써 북한의 주장을 반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채널을 확보하였다. 김정은은 지난 해 5월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연기 발표가 있자 긴급히 문 대통령의 중재를 요청함으로써 가까스로 회담이 열릴 수 있었다. 또한 문대통령은 작년 10월 유럽방문 때 비핵화의 단계적 조치에 따른 유엔의 제재완화가 필요하다는 북한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김정은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재인 정부의 중재외교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니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우리민족끼리’라는 명분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남북경협을 모색함으로써 한미동맹을 균열시키고 경제제재도 극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외교전략은 없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김정은의 비핵화를 명분으로 한 외교는 다차원적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김정은의 핵외교가 한국안보에 미치고 있는 중대한 영향을 경시(輕視)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은이 북미협상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는 미중경쟁과 갈등을 우리가 해소하기는 어려우며, 중국도 역시 미중협상의 과정에서 북핵문제를 최대한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비핵화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북핵은 해결되어야 할 일이지만 북한을 절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한미동맹은 균열상을 보이고 있다. 국내적 위기에 몰려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 입지 강화와 다음 대선을 위하여 북미협상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최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미협상과 관련하여 “궁극적으로는 미국 국민의 안전이 목표”라고 한 발언은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의심케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동맹국도 배신할 수 있는 것이 냉혹한 국제정치이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북미협상에서 중재외교를 자처하고 있으니 미국 역시 한국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협상의 진전 속도를 초과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우려와 불만도 적지 않다. 이처럼 한미동맹의 이견이 너무 심하다보니 ‘북핵은 제거가 아니라 동결로 끝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따라서 이제 정부는 ‘동맹의 당사자인 동시에 협상의 중재자’로서 그동안 추진했던 ‘동맹외교’와 ‘중재외교’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 평가하여 향후 외교전략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19-01-21

김정은의 ‘투 트랙’ 협상전략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새해 첫날에 발표된 김정은의 신년사는 비핵화협상과 관련해 북한이 어떠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미국과 한국을 ‘두 개의 트랙(two track)’으로 분리해 미국에 대해서는 비핵화 이행에 상응하는 제재완화 조치를,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유엔제재와 관계없이 남북경협의 가속화를 요구하고 나섰다.북미협상과 관련해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서 “언제든지 미국 대통령과 마주앉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한편, “미국이 우리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함께 경고하고 있다. 이는 북미협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비핵화 과정에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양국 동시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고수해 온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완화’라는 정책의 변화를 촉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고집할 경우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강온 양면전략’이다.반면에 남북협상과 관련해서는 한반도 전역에서의 적대관계 해소와 더불어 한미연합훈련 및 미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의 ‘완전한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작년 3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방북했을 때 “김 위원장은 한미연합훈련이 연례적이고 방어적 훈련이라는 점을 이해했다”고 밝힌 것과는 다른 태도이다.이러한 북한의 ‘투 트랙 협상전략’은 한미동맹의 균열, 남남갈등의 심화 등 한국안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치밀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한미동맹의 약화 내지 균열의 가능성이다. 중재외교를 자임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제재완화에 동조하거나 남북경협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미국의 양보와 협조를 요청할 경우 비핵화 공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한 김정은이 요구하고 있는 한미연합훈련의 전면중단에 대한 양국의 입장 차이를 조율해 나가면서 안보위협에 대처해야 한다. 게다가 최근 미국의 중간선거로 하원을 장악하게 된 민주당이 트럼프 대통령의 북핵 협상방식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와서 향후 북미협상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한편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싼 남남갈등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부여당은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해서 비핵화 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야당은 실질적인 비핵화에 진전이 없으며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남북경협과 대북지원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커다란 인식차이에다가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둘러싸고 일부 진보단체들의 ‘백두칭송위원회’ 결성과 이에 대한 보수 단체들의 격렬한 비판은 우리사회 남남갈등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이처럼 김정은의 투 트랙 전략은 한미갈등과 남남갈등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는 향후 북핵 협상의 과정에서 한미공조와 국론통일에 각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협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은 대북제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속도조절론’을 피력하고 있고, 북한은 협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자력갱생노선’을 신념화할 것을 또 다시 선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정부가 북미협상의 촉진자로서 중재외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만약 북한의 비핵화가 우리의 의도대로 진전되지 않을 때를 대비한 ‘플랜B’도 함께 강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국제협상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으며, 국가안보전략은 이 두 가지 가능성에 모두 대비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2019-01-10

한국당, 인적 쇄신 제대로 하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한국의 보수정치를 대표하는 한국당은 과연 회생할 수 있을까. 한국당의 개혁 핵심인 ‘인적 쇄신’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것과같은 한국정치를 염려하는 사람들은 한국당의 재건을 애타게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한국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정치현실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권력남용을 막을 수 있고 정치발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최근 한국당의 비대위가 발표한 ‘인적 쇄신안’을 둘러싼 당내 논란을 지켜보면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린 것같다. 전직 두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어 있는 데다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쇄신 같지도 않은 쇄신안’을 놓고 친박과 비박이 싸우는 꼴을 보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같다. 한국당 소속의원 112명 전원이 물러나도 모자랄 판에 고작 21명, 그것도 이미 총선 불출마 선언이나 재판 중에 있는 의원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6명 정도에 불과한 당협위원장 배제라는 쇄신안을 두고 서로 네 탓을 하고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그렇다면 한국당의 인적 쇄신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의 불신을 초래한 이른바 ‘친박·친이 핵심들’은 스스로 당협위원장에서 사퇴하는 것은 물론이고 총선 불출마도 선언해야 한다. 전직 두 대통령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는 데도 측근 인사들이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강변한다면 정치도의는 고사하고 그들의 인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잘못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이 국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말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한국당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위해서는 ‘전면적인 물갈이’가 필요하다. 현재의 한국당 의원들은 대부분 지난 두 정권과 인연이 있었다는 점에서 ‘부정적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당협위원장의 선출이나 총선 공천에서는 현역의원의 재임용보다는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흐려진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야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썩은 물을 정화해도 마실 수가 없다. 진흙탕 싸움에 익숙해져서 악취풍기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면 새로 영입하는 인물들을 오염시킬 뿐이다.그런데 최근 ‘인적 청산의 전권을 요구’했던 전원책 변호사가 김병준 비대위원장과의 갈등으로 조직강화특별위원회 위원에서 해촉된 사실은 인적 쇄신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비대위원장이 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친박의 지지를 받아서 원내대표로 당선된 나경원 의원은 인적 쇄신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면서 당의 단합만을 강조하고 있어서 더욱 우려된다. 지난 잘못에 대한 반성과 청산없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주장은 병의 원인을 찾아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병이 없다’고 진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돌팔이 의사’를 만나게 되면 ‘병든 한국당’이 일단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이처럼 당 지도부의 안이한 태도로서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져 있는 한국당을 구할 수가 없다. 2014년 4월 16일 침몰해가는 ‘세월호’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승객들을 버리고 제일 먼저 탈출했던 선장’ 때문에 더욱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장은 선장다워야 하고, 정치지도자는 지도자다워야 한다. ‘자기 정치’를 위해서 인적 쇄신을 망설이거나 쇄신의 칼이 다시 자기를 향할까 두려워하는 장수(將帥)라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모름지기 장수는 충무공 이순신의 가르침, 즉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必死卽生, 必生卽死)’이라는 진리를 명심할 일이다. 한국당은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각오로 쇄신하지 않으면 더 이상 미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2018-12-25

대학의 위기, 교수의 위기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대학의 위기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인하여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압력이 가중되고 있는데다가 무크(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와 같은 온라인 강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됨으로써 교육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등록금 동결로 재정난이 가중되고 있고, 대학 정체성(identity)의 상실, 재단과 총장의 비리, 정치화된 교수들, 입학생들의 수학능력 저하 등 위기의 요인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러한 ‘대학의 위기’는 결국 ‘교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고, ‘교수의 위기’는 또 다시 ‘대학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대학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교수들이 위기에 직면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연구와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교수의 책무를 다해야 할 사람들이 권력 해바라기가 돼 권력자 주변을 기웃거리는 정치교수, 즉 폴리페서(polifessor)로 전락되는가 하면, TV출연에 혈안이 된 ‘예능 지식인들’이 목에 힘을 주고 있다. 학생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교수들의 ‘포퓰리즘(populism)’도 문제이고, ‘연구프로젝트’라는 명분으로 지식을 팔아서 돈을 구하는 ‘지식장사꾼들’마저 나타나고 있다. 또한 대학의 총장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판을 방불케 하는 ‘캠퍼스 폴리틱스(campus politics)’ 역시 우리나라 교수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오죽하면 현직교수가 “대학의 총장 선거판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면 웬만한 비위 좋은 사람도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겠는가.이처럼 오늘날 교수의 위기는 학령인구의 감소와 대학구조개혁이라는 외부적 요인보다 교수들 자신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연구자이자 교육자, 그리고 사회봉사자로서 교수가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교수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지식인의 죽음, 대학이 죽었다라고 하는 일부 사회적 시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70.2%의 교수들이 ‘그런 편이다’ 또는 ‘매우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교수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지식인으로서 교수들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 변화에 이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병든 사회를 치료해주어야 할 ‘교수들이 먼저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교수사회의 위기라고 하겠다.물론 외풍(外風)에 흔들리지 않고 연구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교육자로서 열정적인 강의와 성의있는 학생지도로 본연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교수들도 적지 않다. 혼탁한 사회의 광풍(狂風)에도 꼼짝하지 않고 ‘올곧은 선비의 길’을 고수하고 있는 ‘청정(淸靜)한 교수들’이 우리사회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고지식하고 원칙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딸깍발이’ 교수들이 대학에서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따라서 대학의 위기가 지속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교수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수사회의 대오각성(大悟覺醒)이 절실하다. 사회지도층인 교수들이 대학의 위기를 핑계로 본연의 책무에서 벗어나 일탈행위를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현재 당면한 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교수들은 더욱 더 정도(正道)를 걸어가야 한다.대학을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교육자인 교수가 정치권력과 돈에 민감하여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정치꾼이나 장사꾼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교수는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예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며, 학생들에게 ‘가치와 당위의 문제를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교수들마저 돈과 권력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2018-12-18

동맹론 vs 자주론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국정감사장에서 ‘동맹론자’와 ‘자주론자’가 격돌하였다. 한국당의 김무성 의원은 ‘북핵 위협에 대처하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민주당의 송영길 의원은 ‘한반도문제의 주체로서 자주적 자세’를 역설하였다. 동맹론자는 ‘현재’의 북핵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려는 ‘현실주의자’이며, 자주론자는 ‘미래’의 바람직한 남북관계에 역점을 두고 있는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국가안보전략으로서 이 두개의 관점은 각기 장단점이 있다. 현실주의자는 국가안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 즉 ‘국력’임을 명확히 인식시켜준다. 평화는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에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핵무기가 없는 한국이 북한의 핵위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의 핵우산’이며 그것을 보장하는 수단이 바로 한미동맹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역시 강력한 한미동맹과 대북제재가 뒷받침될때 비로소 진전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다만 한미동맹은 ‘힘의 불균형 동맹’이기 때문에 미국의 지나친 간섭 또는 이익을 위해 우리의 이익이 훼손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수반된다.반면에 이상주의자는 주권국가의 안보전략은 주체적으로 결정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한반도문제 당사자는 한국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북정책과 비핵화접근법에 대해 미국은 당연히 존중하고 협력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은 지속적 제재가 아니라 협상에 따른 제재완화라고 주장한다. 다만 이상주의자는 ‘비핵국가인 한국’이 ‘핵보유국인 북한’에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반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선의는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한미 사이에 엄존하는 현저한 ‘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제정치관은 비현실적이다.그렇다면 북한의 핵위협으로부터 우리의 생존을 확보하는 동시에 평화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식과 접근이 필요한가. ‘생존은 현재의 위협’이며 ‘통일은 미래의 과제’다. 미래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재의 위협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평화통일은 정확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모색할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 남북한 간의 ‘핵 비대칭성’과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전술’의 의도를 경시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을 고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맹론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생존이 전제되지 않는 통일이란 자유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권국가로서의 자주성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냉혹한 국제정치에서는 힘이 없으면 지켜지기 어렵다. 만약 우리에게 힘이 있었다면 1950년 북한의 남침을 유엔군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한미동맹은 그 연장선에 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연히 자주국방을 희망하지만 북한의 핵위협에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면서 평화를 염원했던 미국의 이상주의자 윌슨(W. Wilson) 대통령은 국제연맹(LN)을 제창했으나 현실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상원의 비준 거부로 가입하지 못했다.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만 추구함으로써 ‘자기모순(自己矛盾)’을 범했던 것이다. 국제연합(UN)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의 5대 상임이사국에게 ‘거부권(veto power)이라는 특권’을 주고 있는 것도 그들이 세계평화를 책임질 수 있는 ‘5대 핵강국’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정치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이상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결국 실현될 수 없는 공상(空想), 즉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나고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018-12-04

북핵 협상의 장기화에 대비해야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북미협상이 상당히 장기화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무산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증대되고 있다. 미국과 북한은 비핵화의 절차와 방법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가 없다. 북한은 고위급 또는 실무회담에서 ‘대북제재 완화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선 비핵화 후 제재해제’에서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양국은 ‘비핵화 조치’와 ‘제재완화 및 안전보장’에 대한 이견(異見)을 좁히지 못하여 결국 지난 8일 뉴욕에서 열기로 발표되었던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고위급회담이 연기됐다.북미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는한 협상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협상의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음을 여러 차례 밝히고 있다. 북한 역시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복원하여 협상력을 제고함으로써 미국과의 장기전에 대처하고 있다. 북한은 이른바 ‘살라미 전술(salami tactics)’로서 협상을 오래 끌면서 파키스탄이나 이스라엘처럼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인정받으려 한다는 우려가 증대되고 있다.이처럼 북미협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상당히 우려되는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비핵화를 공동노력으로 견인해야 할 ‘한미공조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남북협력’은 미국이 공들이고 있는 ‘북미협상’보다 앞서나감으로써 한미동맹이 삐꺽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또한 정부의 중재외교는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하면 뺨이 석 대’이다. 만약 중재외교가 실패할 경우에는 동맹국도 잃어버리고 국가안보도 위험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이 점은 북핵 ‘위협의 당사자인 한국’이 ‘제3자적 입장의 중재외교’를 추진함에 있어서 항상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북미협상의 장기화는 방위력과 안보의식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과정에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진전이 없고 여전히 갈 길이 아득한데,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으로 인한 화해무드로 마치 한반도에 평화가 온 것처럼 ‘평화의 착시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협상은 이제 시작단계에 불과한데 벌써 일부 언론에서는 곧 통일이나 될 것처럼 북한에 대한 투자와 관광을 보도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13개 진보단체들은 ‘백두칭송위원회’를 결성하고 서울의 한 복판인 광화문에서 ‘김정은 만세’를 외치고 있다. 나라의 안보를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그렇다면 우리는 북핵협상의 장기화가 초래하고 있는 부작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 핵심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외교역량을 발휘하는 한편, 만약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서 국방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데 있다. 중재자를 자임하고 있는 정부는 북미협상의 교착상태를 조속히 타개해 협상이 추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양측에 설득력 있는 협상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는 협상이 장기화되면서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대내외적 갈등요인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대책도 함께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중재외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핵화 협상이 실패로 끝날 경우에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협상의 실패’란 북미간의 ‘비핵화협상 자체가 결렬’될 경우 뿐만 아니라, 협상이 북핵의 ‘폐기가 아니라 동결로 타결’될 경우를 의미한다. 이 둘 중에 협상이 어느 쪽으로 끝나도 우리는 북핵의 인질이 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비핵화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18-11-13

의원님! ‘관광’이 아니라 ‘연수’입니다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청명한 하늘이 유혹하는 여행의 계절, 가을이다. 이 좋은 계절에 의원님들이라고 해서 여행하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공무를 위한 ‘해외연수’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혈세를 쓰면서 ‘해외관광’을 하고 있으니 문제이다. 바야흐로 전국의 지방의회 의원님들이 연수라는 명분으로 서로 앞다퉈 해외로 나가고 있으니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다.지방의원들의 ‘외유성 해외연수’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필자는 대구의 한 기초의회가 추진하고 있는 해외연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제출된 연수계획서를 살펴본 결과 문제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은 장시간 토론 끝에 당초의 연수계획을 연수목적에 맞게 완전히 수정해 시행함은 물론, 연수가 종료된 후에 ‘결과보고서’의 제출과 함께 반드시 ‘연수보고회’를 개최하는 조건으로 통과시켜 줬다.이처럼 지방의원들의 해외연수는 계획수립, 내용심사, 연수실시, 결과보고 등 전반적인 과정에서 모두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의원들이 연수계획의 수립과정에서 연수목적의 달성에 필수적인 충분한 연구와 준비가 없으니 연수는 형식화되고 관광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심사위원회가 내용을 심사하는 과정에 연수 당사자인 의원들이 참여하는 것은 심사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것이며, 연수 후에는 ‘형식적인 결과보고서’만 제출할 뿐 ‘실질적인 연수보고회’가 없다는 사실은 주민의 감시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물론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가치있는 해외연수를 다녀온 의원도 없지 않다. 지난 해 대전시의회의 김동섭 의원은 동행하는 연수단과 함께 수차의 협의회를 통해 사전에 연수준비를 직접 했을 뿐만 아니라, 연수단이 5명 이하로서 심사제외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연수계획서의 심사를 자청했다. 또한 해외연수에 관행화돼 있는 의회사무처 소속 공무원의 동행도 없었으며, 연수결과를 3개 분야 120쪽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서 연수보고회까지 열었다. 이는 매우 모범적인 해외연수사례로서 지방의회의 발전에 대한 함의가 크다.따라서 지방의원들의 해외연수가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원 자신의 해외연수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절실하다.주민의 봉사자를 자처해서 당선된 지방의원들이 당선 후에는 주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파렴치한(破廉恥漢)이 돼서야 되겠는가? 의원들은 연수목적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해외연수는 계획의 수립단계에서부터 방문기관의 접촉이나 방문국 관계자와의 공동회의 등과 관련하여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그러나 지금까지의 해외연수 실태를 볼 때 지방의원들에게 이러한 노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따라서 지방의원들의 바람직한 해외연수를 위해서는 ‘법적, 제도적 장치’의 강구와 함께 ‘지속적인 감시’가 이뤄져야 한다. 제도적 장치로서는 의원들의 외유성 연수가 불가능하도록 조례를 개정하는 한편, 해외연수 심사위원회의 구성에서 의원은 배제돼야 하며, 연수 후에는 반드시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연수결과보고회’의 개최를 의무화해야 한다. 또한 지방권력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감시자로서 ‘언론과 시민단체의 역할’도 중요하다. 주민들의 정치적 관심은 대부분 ‘중앙권력’에 집중되고 있어서 ‘지방권력’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이 지방의원들의 부패행위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지역주민의 여론을 대변하고 지방의원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언론과 시민단체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018-10-31

한미공조의 균열에 대한 우려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협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국가는 한미동맹과 북미협상의 당사자인 미국이다. 북한의 핵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은 북핵 폐기에 공동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미공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미협상의 중재자를 자임하고 있는 한국이 협상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의 공조가 원활하지 못하면 북한의 비핵화를 효율적으로 견인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볼 때 한미공조의 균열이 우려된다. 미국 폼페이오(M. Pompeo) 국무장관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군사분야 합의사항들이 미국과 사전협의가 없었음에 격분하면서 항의하였다는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또한 폼페이오의 북한 방문을 앞두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 보유목록 제출(핵신고) 요구를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의 외교장관이 북한의 논리로 미국을 압박한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이뿐만 아니다. 강 장관은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질의에 대해 ‘5·24 조치를 해제하는 문제를 관계 부처와 검토 중’이라고 답변해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정부의 입장이 미국에 알려지자 즉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은 우리의 승인(approval) 없이는 대북제재 해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승인’이라는 거친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트럼프의 발언은 주권국가에 대한 ‘외교적 결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도 높은 것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비판이 일어나자 다음 날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5·24 조치의 해제를 검토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외교부 장관의 발언을 하룻만에 뒤집었다.이처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남북관계개선을 서두르는 것을 마땅찮게 여기고 있다. 갈루치(Robert L. Gallucci) 전 미 국무부 북핵특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이 바라는 속도보다 더 빨리 북한과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하면서 “한국과 북한이 이루는 진전은 한미동맹관계에 균열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피츠패트릭(M. Fitzpatrick) 전 미 국무부 비확산담당 부차관보는 “대북제재 틀 안에서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대북경협사업은 극히 제한적”이라고 하면서 “제재를 위반하면서까지 북한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실책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물론 한국과 미국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서 일치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한 방법론에 있어서도 이견(異見)이 존재할 수 있다. 한국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하여 비핵화를 견인하고자 하는 반면, 미국은 제재와 압박을 유지해야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따라서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한미 간 협의와 소통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한미공조에 문제가 생기면 북한은 그 틈새를 파고들 것이다. 최근 북한의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판문점선언을 이행하는 데서 그 누구의 눈치를 보아서는 안 되며 모든 문제를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풀어나가야 한다”고 한미공조의 균열을 겨냥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하여 북·중·러 3국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김정은은 이미 세 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의 지원을 확보했으며, 3국은 러시아에서 차관급 외교회담을 통해서 대북제재 완화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공조의 균열이 계속된다면 북한의 비핵화는 물 건너간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0-17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위하여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민주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민주주의 교육을 받아 왔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원칙’의 전제가 되고 있는 ‘대화와 타협’은 민주시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라고 배웠다. 다수결원칙은 단순히 다수 의사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견(異見)과 갈등을 민주주의 공동체의 가치로 조정, 통합해 나가는데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며 이해관계의 차이를 인정한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인식의 차이를 좁히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설득과 타협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필수과정이다. 반면에 독제체제에서는 오직 하나의 가치관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상대성’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이지만, 독제체제에서는 신격화된 인간의 ‘절대성’, 즉 절대권력자에 대한 복종만 강요될 뿐이다. 그런데 민주시민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성장하면서 점차 혼란에 빠진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정치는 대화와 타협인데, 정치현실에서 정치인들은 ‘내로남불’의 ‘흑백논리’로 날을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한국 정치문화의 폐단이 되어버린 ‘승자독식(勝者獨食)’과 ‘승자의 일방통행’은 공동체의 대의를 위한 대화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고 패자(敗者)의 저항만을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한국정치의 비민주성은 정치인들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강변하는 오류에서 비롯되고 있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프레임(frame)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주장이 나의 견해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비판한다.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를 통일반대 세력으로 매도하고,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들을 친북 세력이라고 비난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주장에는 귀를 막는다. 노란색 안경을 낀 사람이 초록색 안경을 낀 사람에게 세상은 노란색인데 당신은 초록색이라고 하니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경을 서로 바꾸어서 사용해 보는 것,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이다.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극단적 대결의 한국 정치풍토에서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는 통합론자는 자칫 회색분자 내지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 이러한 풍토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당신은 천사이고 나는 악마인가? 파스칼(Pascal)이 갈파하였듯이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야수도 아닌 중간적 존재’임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가 중간적 존재로서 보수와 진보의 장점을 수렴하고 그 단점들을 배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정치는 선진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국가안보를 염려하는 보수’와 ‘남북대화를 강조하는 진보’가 허심탄회하게 대화와 협력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확고한 안보의 바탕 위에서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한국정치에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을 가진 자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이는 보다 ‘큰 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이 상대적으로 ‘작은 권력을 가진 야당’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이나 교수 등 지식인들은 한국정치의 선진화를 위하여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 조성에 앞장서야 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보수나 진보에 편향된 보도 자세를 취하는 ‘외눈박이 언론’이나 특정 정당에 밀착된 권력지향성이 강한 ‘폴리페서(polifessor)’들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특정 이념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자유롭게 ‘경계선(境界線)에 설 수 있는 균형감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2018-10-10

남북회담과 남남갈등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1년4개월동안 벌써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한반도 평화정착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정상회담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게 될 북핵 폐기를 위해서 분투(奮鬪)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정부의 대북정책과 남북회담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국민적 합의를 기반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동맹의 균열이나 남남갈등은 정책의 추동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북한의 ‘우리민족끼리’라는 통일전선전략에 악용될 수도 있다. 특히 남북회담에 있어서는 한미동맹의 균열보다 ‘남남갈등’이 더욱 위험하다. 한미갈등은 기본적으로 양국의 이해관계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남남갈등은 통일의 주체인 국민들의 북한정권에 대한 인식·이념·전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5월 10일 취임식에서 “오늘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국정운영의 동반자인 ‘야당과의 협치’를 강조하면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대통령이 직접 나서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처럼 문대통령의 초심(初心)은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대통령이 취임한지 아직 1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초심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국민의 생존에 직결되어 있는 대북정책과 남북대화에 대한 청와대의 행태는 철저히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야당 및 보수진영과의 협의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최근 청와대는 3차 남북정상회담에 야당대표와 국회의장단의 동행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야당과는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비서실장을 통해서 갑자기 발표한 것은 진정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야당을 ‘평화반대세력’으로 몰고 여당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여당출신인 문희상 국회의장까지도 “청와대가 무례하다”고 비판하면서 국회의장단의 동행을 거절하였겠는가? 청와대의 일방적 발표는 진정성을 가지고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서 인정하고 협력을 구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다음 날 또 다시 국회와 야당을 향해 “민족사적 대의 앞에 당리당략(黨利黨略)을 거두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야당의 거절을 ‘당리당략’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참할 것을 계속 압박한 것이다. 이는 야당과 협치를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며 또 다른 정략(政略)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남남갈등의 극복은 남북대화의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함께 살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이념과 체제가 다른 남북한 간의 갈등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남북대화에는 적극적이면서도 남남대화에는 소극적인 청와대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정권의 코드와 색깔만을 고집하면 안 된다. ‘남남통일’은 ‘남북통일’의 초석(礎石)이기 때문이다.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白凡)이 분열된 독립운동단체들의 연대와 좌우익의 통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던 것처럼, 문대통령은 초심을 잃지 말고 보수와 진보의 대화, 여당과 야당의 협치를 위해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독일의 통일도 서독 내부의 합의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9-19

‘외교 포퓰리즘’의 시대

▲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정치지도자들이 국민의 단기적·일시적 이익에 편승하는 대중영합주의, 즉 포퓰리즘(populism)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포퓰리즘은 국내정치 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외교는 내정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 아래 중국 및 유럽동맹국들과 무역전쟁을 벌이는가 하면, 중간선거 승리를 겨냥해 북한과의 비핵화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 지지자들이 요구하는 ‘영국의 통제권을 되찾자’는 요구에 편승하여 유럽연합(EU)을 탈퇴하였으며,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을 비롯하여 그리스 체코 헝가리 폴란드에서 포퓰리즘 정당들이 집권하였다는 사실은 오늘의 국제정치를 잘 말해주고 있다.이처럼 ‘외교 포퓰리즘’은 대중에 영합하여 국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주의보다는 국수주의, 자유주의보다는 보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하는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는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또한 정치지도자가 추구하는 외교 포퓰리즘은 결국 자신에 대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과 연계되어 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유권자의 요구에 대한 수용은 곧 득표와 연결되고 선거에서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물론 정치지도자는 유권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요구가 이해관계 당사국과 갈등을 일으켜서 장기적으로 국익의 손실을 초래할 경우가 문제다. 더욱이 유권자의 요구에 편승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치인의 개인적 이익보다 국익의 손실이 더 클 경우에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절하는 이유를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만약 외교부장관이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정치적·단기적 이익과 국가적·장기적 이익 사이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이와 관련해 지난 5월에 출범한 외교부 산하 ‘국민외교센터’의 기능과 역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외교는 외교정책의 결정과정에 국민이 외교주체로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교 민주화(democratization of diplomacy)’의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외교정책에 대한 정부의 일방적 홍보가 아닌 국민과 정부 간의 쌍방향 소통으로 정책수립과 집행에 절차적 정당성을 제고할 수 있다. 이처럼 국민외교는 공공외교가 더욱 중요해진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엘리트외교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그렇지만 국민외교에는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외교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고 민감한 이슈들을 다루기 때문에 비전문가인 일반 국민들의 외교현안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그대로 정책에 반영할 수는 없다. 게다가 외교협상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이익이지 국민 상호간에 갈등을 겪고 있는 개인적·집단적 이익이 아니다. 더욱이 민감한 외교현안일수록 국민들이 협상과정에 개입할 경우 오히려 협상의 입지를 약화시키거나 어렵게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나아가 국민외교는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 ‘포퓰리즘 외교’로 변질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치지도자는 외교적 수단을 활용하여 자신의 국내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론에 편승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국민여론을 동원한 포퓰리즘 외교가 상대국의 그것과 충돌할 경우에는 국가 간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켜서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치지도자는 외교 포퓰리즘의 역효과를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18-09-05

‘권력 해바라기’를 아시나요?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한여름의 해바라기 꽃은 신록의 아름다운 풍경을 더해주지만, 우리사회에 난무하고 있는 ‘권력 해바라기들’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쫓아가듯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권력을 쫓아다니는 ‘권력 해바라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연구와 교육에 전념해야 할 교수들이 선거철만 되면 경쟁적으로 선거캠프에 기웃거리며 권력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는 ‘정치교수(polifessor)’들의 행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뒤질세라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군인들도 ‘정치군인’이 되어 쿠테타, 불법계엄령 기도, 선거개입과 민간인사찰 등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온갖 범법행위들을 자행해 왔다. 이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수호해야 할 검찰이 권력 해바라기가 되어 ‘정치검찰’로 전락하는가 하면, 사법 심판의 최후보루로서 권력자를 견제해야 할 대법관까지도 스스로 정치권력의 시녀가 되려고 하였다니 기가 막힌다. 게다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 입장에서 공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려주어야 할 언론과 시민단체마저도 권력 해바라기가 돼 ‘외눈박이’ 편견들을 소리높여 질러대고 있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장군·검사·판사·언론인 등이 보여주고 있는 ‘권력 해바라기 현상’은 참으로 심각하다.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에 권력에 접근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사회의 ‘권력 해바라기들’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당초에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들, 즉 연구와 교육(교수), 국가안보(군인), 사회정의(검사·판사·언론인) 등은 소홀히한 채 오직 권력만 쫓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치들이 함께 존중받고 있는 선진사회와는 달리 우리는 권력만을 지나치게 선호하니 아직도 후진사회가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권력 해바라기’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권력 해바라기는 이미 우리의 의식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사회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감투 지상주의’는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권력 지향적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세 사람만 모여도 회장·사무국장·감사를 두는 조직을 결성한다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이다.사람의 가치는 그가 맡고 있는 ‘직위, 즉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맡은 바 ‘직무에 얼마나 충실하고 유능한가’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장은 교사보다 직위는 높지만 교장은 학교경영, 교사는 학생교육이라는 직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누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권력의 크기’가 ‘도덕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권력’과 ‘도덕’은 반비례할 위험성이 훨씬 더 크다.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두 전직 대통령들이 지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을 서열화하여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하여 ‘올바른 가치관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사람은 오직 ‘한 번 뿐인 인생’을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돈·권력·명예를 가진 사회지도층은 반드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미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권력 해바라기’가 되어 추태를 벌이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가 비록 ‘자신의 삶을 인류구원에 헌신한 예수나 석가’는 되지 못하더라도, 의미없이 권력을 쫓아다니다 죽는 ‘불나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18-08-28

군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교수가 권력을 쫓아다니는 ‘정치교수’가 되면 교수의 책무를 다할 수 없듯이, 군인도 ‘정치군인’이 되면 본연의 사명인 국가안보에 충실할 수가 없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정치군인들이 날뛰는 나라의 안보는 위태롭고, 정치는 후진적이다.최근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과 관련하여 드러난 군 간부들의 일련의 행태(行態)를 보면 말문이 막힌다. 국방부와 예하 조직인 기무사령부의 대립, 국방장관(예비역 대장)과 기무부대장(대령)의 ‘거짓말 공방’, 기무사령관(중장)과 기무사 참모장(소장) 및 5처장(준장)의 상충되는 진술을 보면서 ‘이게 군대인가’라는 한탄이 저절로 나온다.명예를 생명과 같이 여기는 군에서 ‘거짓말 공방’이 벌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전시에 군인이 거짓말을 한다면 이적(利敵)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 더욱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엄격한 군에서 대령이 면전에서 장관을 비판하고, 기무사령관은 그의 참모들과 노골적으로 대립한다면 이것은 이미 군대라고 할 수 없는 조직이다.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군인이 소신없이 권력의 눈치를 보는 ‘정치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무사령부는 과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개입으로 악명이 높다. 군이 국가위기를 명분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簒奪)하는가 하면, 민간인을 사찰하고 선거에 개입하는 등 정치군인들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이러한 정치군인의 문제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철저하게 보장하고 ‘공정한 인사’를 했더라면 정치군인들이 발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군이 ‘국가에 충성’할 것을 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가의 여부, 즉 ‘정치적 성향’이 더 중요한 인사기준이었다.이는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별 달기가 하늘의 별’과 같은 상황에서 최고 인사권자의 의중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따라서 군이 명예롭게 국가안보에 전념할 수 있으려면 대통령은 물론이고 군 스스로의 대오각성(大悟覺醒)이 절실하다. 우선 무엇보다도 대통령은 군의 최고통수권자라는 점에서 그 책임과 역할이 매우 크다.현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무사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대통령의 군에 대한 ‘확고한 정치적 중립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청와대는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 관련자들의 조사 및 처벌에 있어서 공명정대해야 하며, 이 기회를 통하여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나아가 대통령은 정치군인을 배제하고 ‘참 군인’을 우대하는 등 군대문화를 대대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하극상(下剋上)을 벌이는 정치군인들을 방치해 둘 경우에는 마침내 대통령의 군통수권마저도 위험해질 수 있다. 대통령은 눈앞에서만 충성을 맹세하는 ‘정치군인’과 묵묵히 국가안보에 헌신하는 ‘참 군인’을 구별할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져야 한다.마지막으로 군인은 ‘생명과도 같은 명예’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장군들은 장군답게 말하고 장군답게 행동하라. 국가와 국민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계급장 뗄 각오를 하고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한다. 별 하나 더 달려고 권력에 아부하는 장군은 이미 장군이 아니다. 군인정신을 잃어버리고 정치권력에 비굴해진 장군들에게 국가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18-08-14

포스텍의 인문학 강화를 환영하며

▲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우리나라 대학에서 인문학이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지 오래다. 대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역사·문학 등은 비인기학문으로서 통폐합 구조조정의 최우선 대상이 되고 있다. 취업이 잘 안되니 신입생 모집이 어렵고, 그 결과 교육부의 대학평가에서도 불리하기 때문이다. ‘교육백년대계’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할 인문학이 시장논리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 ‘생각이 없는 기계적 지식인’만 양산한다면 기술학원과는 무엇이 다른가?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포스텍이 추진하고 있는 인문학 강화정책은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더욱이 포스텍은 일반대학이 아니라 공과대학이라는 점에서 인문사회교육 강화는 다른 대학들에게 커다란 함의(implication)를 던져주고 있다.포스텍의 김도연 총장은 “미래 리더를 기르는 과학기술대학으로서 인문사회교육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새로운 산업시대를 주도할 인재를 양성하려면 전공을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 인간 이해와 탐구를 통한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김 총장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우리나라 사회학계를 대표하는 서울대 송호근 석좌교수를 9월 1일부로 포스텍 인문사회학부의 석좌교수이자 학부장으로 초빙하게 되었다고 밝혔다.송 교수 역시 청춘시절부터 몸담았던 모교를 떠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인문의 균형을 위해 포스텍에서 할 일이 많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대학을 책임지고 있는 김 총장의 올바른 인재육성관과 삼고초려의 자세도 좋았지만, 서울대 최초의 인문사회계 석좌교수로서 정든 모교를 떠나 지방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송 교수의 국가와 청년의 미래를 위한 용기 있는 결단에도 박수를 보낸다. 세계 최고의 명문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는 인문학의 석학 촘스키(N. Chomsky)교수가 있어서 더욱 빛났던 것처럼, 향후 포스텍에서의 송 교수도 반드시 그러한 존재가 될 것으로 믿는다.그렇다면 포스텍의 인문사회교육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학의 사명은 훌륭한 인재양성을 통해 인간사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공학’에 ‘인간’을 넣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그 ‘의미와 목적’이 더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학의 지성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인문학적 소양과 융복합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현재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는 인문학과 예술이 공학만큼이나 중요시되고 있다. 애플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애플의 DNA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양과 인문학이 결합한 기술이야말로 가슴 벅찬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했다. 유튜브의 CEO인 보이치키(S. Wojcicki)는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고, 메신저 개발업체인 슬랙(Slack)의 창업주 버터필드(S. Butterfield)의 전공은 철학이었으며, 중국의 알리바바그룹 마윈(馬雲) 회장의 학부 전공은 영어였다.또한 공과대학 MIT의 인문사회학부는 “위대한 사상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슬로건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이처럼 공과대학에서 인문학의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한다면, 하물며 일반대학의 경우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포스텍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인문사회교육의 강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우리 대학들이 ‘본연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18-07-25

한국당, 국민에게 길을 묻다

▲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6·13 지방선거 참패 후 한국당은 국민들에게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리고는 의원총회에서 계파별로 나뉘어 상대방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다. 국민의 눈으로 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찾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지 어이가 없다. 이것 역시 국민을 우습게 보는 권력자들의 나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정치적 쇼’를 벌인 것인가? 한국당 의원들이 잘못을 모를 수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모르겠다면 국민에게 직접 물어보라. 잘못은 그 원인을 알아야 고칠 수 있고, 한국당의 운명은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가지고 있는 국민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국민들은 한국당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가? 국민은 한국당이 중병에 걸려있으니 대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수술 부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첫째, ‘권력욕이 병’이 되어 초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초심은 무엇인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던 초심이 지금은 나를 위해 정치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직 국민만 보고 걸어가겠다고 해놓고선 권력을 잃을까 염려되어 보스(Boss)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친이·친박·비박 등 계파별 권력투쟁으로 날을 새웠다. 초심을 잃고 부패하였으니 국민이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당연하다.둘째, 중병에 걸렸는데도 ‘치료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병을 숨기려고만 했지 그 원인을 찾아서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한국당의 수술에 뜻있는 의원들이 있었다면 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치료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국민의 신임을 잃어버렸으니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말기 암환자인 한국당이 회생할 수 있는 길은 암세포를 제거하고 참신한 인재들로 이식수술을 하는 것이다.셋째, ‘국민을 우습게 생각하는 병’이 문제라는 것이다.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자신들보다 높은 데도 국민을 기만하려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탄핵에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지려하지 않고 당명만 바꾸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또 다시 당명 변경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도대체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말 모르는 사람들 같다. 국민보다 무지한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라고 허세를 부리면서 국민을 우롱한다면 영원히 버림받게 될 것이다.이상과 같은 진단과 처방에도 불구하고 한국당이 스스로 치료를 하지 않거나 치료를 미루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충무공 이순신은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국당 의원들이 죽을 각오로 자신을 버리면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당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수술이 두려워서 시기를 놓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한국당은 지난 6월 24일 ‘혁신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준비위는 혁신비대위 구성에 있어서 국민의 뜻을 잘 대변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과단성 있는 위원장과 위원들을 선정해야 한다. 최근 비대위원장의 초빙과 관련하여 한국당이 ‘희화화(戱畵化)’되고 있는 점이 상당히 우려된다. 비대위의 인적 구성이 참신하지 못하거나 계파별로 적당히 안배하여 혁신을 위장하려 한다면 더 이상 한국당의 미래는 없다. 따라서 혁신비대위는 그 인물에서부터 혁신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뜻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당의 이념·노선·조직·공천 등에 걸쳐서 전반적으로 대수술을 감행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이 한국당에 주는 마지막 기회이다.

2018-07-11

북미협상과 한국안보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다. 양국 정상의 화려한 정치적 연출은 있었으나 공동발표문은 북한 비핵화의 구체적 내용이 없는 추상적 선언에 불과하였다.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이 ‘진실’인지 아니면 하나의 ‘책략(策略)’인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다. 또한 앞으로 논의하게 될 후속협상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이 역시 많은 장애요인들 때문에 순탄치 않은 과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북미정상회담의 결과는 한국안보에 이미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회담 직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돈이 많이 들고 도발적인 ‘전쟁게임(war game)’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동맹국의 대통령이 ‘방어적 성격의 한미연합훈련’을 ‘전쟁게임’이라고 하니 걱정이다. 북핵은 아직 달라진 것이 없는데 벌써부터 ‘한미동맹의 유명무실’과 ‘주한미군의 철수’가 우려되고 있다. 더욱이 향후 후속협상은 그 향방에 따라 한국안보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미국과 북한이 협상과정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국익이지 한국의 이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안전과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하여 협상에 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김정은 역시 자신의 체제안전보장과 유엔의 대북제재 해제에 일차적 관심이 있다. 따라서 미국의 선의(善意)에 의존하는 ‘한미동맹’이나 북한의 선의에 의존하는 ‘비핵화’는 모두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배신(背信)당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常存)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이러한 점에서 북한의 비핵화 이전에 한미동맹의 균열이 먼저 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트럼프의 ‘미국중심주의’와 ‘즉흥적이고 일방적인 정치성향’을 고려할 때 북미협상의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한국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타협안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미동맹의 당사자인 한국이 제3자로서 북핵 중재외교를 추진하는데 대한 미국의 불신이 심화될 경우에는 그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된다.나아가 북미협상의 과정이 중도에서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협상의제가 매우 민감할 뿐만 아니라, 북미협상을 이용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지역패권을 장악하려는 중국이 김정은에게 훈수(訓手)를 들고 있기 때문에 협상과정은 도처에 지뢰밭이다. 만약 북미협상이 실패로 끝나게 된다면 미국은 강경책으로서 ‘군사옵션’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유화책으로서 ‘평화협정체결 및 미군철수를 조건으로 대타협’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미국이 어느 것을 선택해도 한국은 엄청난 안보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북미협상의 과정 및 그 결과에서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북미협상에 대한 우리 정부의 역할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은 한미동맹과 북핵 위협을 받고 있는 ‘당사국’이지 이해관계가 없는 ‘제3국’이 아니다. 우리가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비핵화 중재외교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북미협상의 과정에서 증대될 수 있는 미국의 불신과 한미동맹의 균열을 막아야 한다.나아가 ‘배신의 국제정치’에 대비해 반드시 ‘검증(verification)’하는 동시에 ‘자주국방’을 강화해야 한다. 국익이 최우선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에서는 ‘위계’와 ‘배신’이 난무한다. 국제관계에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미국이나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의 선의를 믿되 반드시 검증’해야 하며, 배신에 대비하는 자체 방위력 강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018-06-26

벼랑 끝에 선 ‘보수’를 위한 고언(苦言)

▲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보수(保守)가 죽어가고 있다’, ‘보수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이다’, ‘보수는 죽어서 다시 살아야 한다’는 등 벼랑 끝에 서있는 보수의 몰락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가 ‘좌우의 두 날개’로 나는 것처럼, 정치도 발전하려면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루면서 ‘생산적 경쟁’을 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보수는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보수의 전통적 덕목인 ‘도덕성과 성실성’을 상실하였다는 사실이다. 지난 두 차례 보수정권을 이끌어왔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정부패로 구속·수감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보수는 자신의 잘못된 관행을 스스로 개선하고 보수(補修)하지 못했다. 진정한 보수의 강점은 ‘경험을 중시하고 끊임없이 쇄신하며 도덕성이 높고 성실하다’는 점에 있는데, 한국의 보수진영은 이러한 장점을 살리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보수진영의 ‘사회변화에 대한 무감각과 부적응’ 역시 문제였다. 한국의 보수는 남북분단과 냉전을 거치면서 반공보수주의와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결합, 즉 이른바 ‘박정희 패러다임(paradigm)’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냉전종식과 함께 상호의존시대가 되었는 데도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의 ‘다원화와 민주화’라는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기존의 ‘경직된 가치체계’를 고집하였다. 과감한 혁신을 통하여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보수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더욱이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제1야당인 한국당에는 유능한 지도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 지도부가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홍준표 대표는 여론의 악화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 때 지원유세를 중단한 바 있다. 오죽하면 보수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지역의 후보자들조차도 당 대표의 지원을 사양하거나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겠는가 말이다.또한 당 대변인을 맡고 있는 정태옥 의원은 ‘인천·부천 비하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자 결국 탈당하였다. 이처럼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막말과 돌출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한국 보수정치의 참담한 현실이다.그렇다면 죽어가는 보수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처방이 필요한가? 가장 시급한 것은 ‘보수의 변화와 혁신’이다. 보수의 고전적 가치는 ‘안정 속의 개혁’에 있으며, 보수는 ‘수구(守舊)’나 ‘반동(反動)’이 아니다. 따라서 과거에 집착하는 ‘수구적 보수’가 아니라 변화를 수용하는 ‘혁신적 보수’, 냉전시대의 ‘권위주의적 보수’가 아니라 탈냉전시대의 ‘민주적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또한 ‘깨끗한 보수’로서 보수주의의 기본 덕목인 ‘도덕적 엄격성’을 반드시 회복해야 하며, 양극화의 심화로 고통받고 있는 약자를 보호하는 ‘따뜻한 보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수는 ‘죽어서 다시 태어남’으로써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재기(再起)의 기회가 올 것이다.한편 보수의 재건을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이슈에 대처할 수 있는 ‘차세대 지도자의 육성’이 절실하다. 전통적인 보수의 강점이었던 안보와 경제뿐만 아니라, 양극화·저출산·비정규직 등 새로운 이슈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정치지도자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보수가 ‘경로당’에서나 먹혀들어가는 ‘늙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낡은 보수’로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보수가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배타적이고 완고한 노인집단’으로 인식된다면 나라를 위한 그들의 충정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낡은 보수’에게 ‘젊은 수혈’이 시급한 이유이다.

2018-06-13

대통령의 ‘비핵화’ 중재외교

▲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외교가 중대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의 취소를 발표함으로써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에 당황한 북한은 미국에게 유화적인 자세로 정상회담의 개최 희망을 거듭 밝히는 동시에, 문 대통령에게는 극비리에 비공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해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재천명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회담 직후 그 결과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세하게 전달했음은 물론이다. 이에 트럼프는 실무협상의 결과에 따라 북미정상회담이 다시 정상적으로 6월 12일에 개최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이처럼 문 대통령의 비핵화 중재외교는 북미정상회담 개최와 관련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북미 간 직접대화를 통한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중재외교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또한 전격적으로 열린 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꺼져가는 북미정상회담의 불씨를 다시 살려냈다는 점에서 중재외교의 의미는 적지 않다.그러나 문 대통령이 중재외교를 통하여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중재자’로서 향후 구체적 협상의 진행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한국은 북한의 핵 위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미동맹의 당사국이라는 점에서 ‘중재자로서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세심한 주의와 준비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중재외교 추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재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중재외교의 1차적 목적은 비핵화 협상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의 이해갈등을 중재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한국 안보와 한반도 평화정착’에 있다.중재외교의 초점을 북한과 미국의 이해관계 조정에만 두게되면 자칫 우리의 국익을 간과하게 된다. 만약 美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먼저 제거하고 핵무기는 단계적으로 폐기하는 것으로 북미협상이 타결된다면 우리에게는 악몽(惡夢)이다. 미국은 이미 인도·이스라엘·파키스탄이 ICBM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핵보유를 허용한 전력이 있다. 미국에게는 ICBM이 중대한 위협이지만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더 큰 위협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중재외교는 강력한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북한이 주장하는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한미동맹의 균열전략에 말려 들어가면 미국의 불신을 초래하게 된다.한미정상회담 직후 정의용 안보실장은 북미회담이 “99.9% 성사될 것”이라고 했으나 미국은 하루만에 회담취소를 발표했다. 북한은 이미 두 차례 북중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의 지원을 확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북한의 비핵화는 핵동결·신고·사찰·검증·폐기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한미동맹은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스타일이 ‘일관성이 없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한미동맹의 균열은 우리의 국익을 훼손할 수 있다.따라서 정부는 비핵화의 핵심인 ‘검증(verification)’이 끝날때까지 ‘살얼음판’을 걷게 될 중재외교의 성공을 위해 철저한 연구와 대비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중재외교는 북미정상회담 개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이 예상되는 핵사찰과 검증을 거쳐 비핵화가 완료될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비핵화 과정에서는 ‘위계(僞計)의 위험’이 상존(常存)할 뿐 아니라 북한의 ‘주권존중 요구’와 미국의 ‘투명성 요구’가 또다시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2018-05-29

풀뿌리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라고 불리는 6·13 지방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유권자 표심을 겨냥한 인기영합주의, 이른바 ‘포퓰리즘(populism)’에 대한 우려가 증대되고 있다. 지방자치라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풀뿌리 포퓰리즘’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이상이 왜곡된 병리적 현상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내재적 한계가 초래한 도전이다. 포퓰리즘은 선거정치에서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하여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현혹한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하다. 재원조달 방안도 없는 각종 복지확대 공약에서부터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추진이 가능한 공약에 이르기까지 오직 당선만을 목적으로 현실성도 없고 무책임한 공약(空約)들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선거정치에서 포퓰리즘을 이용하여 승리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있는 후보자는 이념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마찬가지이다.이러한 포퓰리스트(populist)들은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반이성적인 선동정치'를 일삼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들이 활용하는 이분법은 정치현상을 지나치게 극화(劇化)시킴으로써 그 본질이 왜곡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을 선동하여 지지를 유도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자주 악용된다.더욱이 포퓰리스트의 선동정치가 힘을 얻는 곳에서는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인 ‘합리적 사유’와 ‘이성적 토론’이 불가능하다. 포퓰리스트는 유권자의 이성보다는 감성, 복잡한 논리보다는 단순한 설명으로 자신에 대한 지지를 유도해 낸다. 이 같은 포퓰리스트의 선동적인 동원정치에 현혹되어 유권자들이 이성적 판단을 상실하게 되면 민주정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에 있어서 '정상적인 민주정치'와 ‘비정상적인 포퓰리즘’을 구분하는 것이 점차 힘들어지면서 선거정치에서도 ‘내로남불’이 확산되고 있다. 후보자들은 ‘내가 하면 민주주의’이고 ‘남이 하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의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선거정치에 나서는 후보자는 물론이고, 후보자의 공약을 판단하는 유권자들의 인식과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후보자의 입장에서 볼 때 유권자의 표심을 얻어야 하는 선거정치에서 어느 정도의 포퓰리즘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후보자의 지나친 인기영합주의는 유권자들을 ‘중우정치의 늪’에 빠지게 함으로써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다. 따라서 후보자들은 확고한 민주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포퓰리즘의 유혹을 극복하는 동시에, 실현 가능한 정책대결을 통하여 유권자의 선택을 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포퓰리즘의 도전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임은 후보자가 아니라 유권자에게 있다. 왜냐하면 당선을 목적으로 출마한 후보자는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한 정치'이기 때문에 국민의 절대다수가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에 현혹되지 않는 한 선거정치에 나선 후보자가 포퓰리즘을 이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따라서 유권자들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잣대’로 후보자가 ‘민주주의자인지 포퓰리스트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유권자들이 혈연·지연·학연이나 개인적 이해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후보자의 능력·정책·비전 등을 살펴보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풀뿌리 민주주의는 성장할 수가 있다. 민주정치는 ‘선동정치가 아니라 토론정치'이기 때문에 ‘감성이 아니라 이성적 토양’에서 잘 자라난다.

2018-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