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캐나다·영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멕시코·칠레까지도 코로나 백신접종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언제 그 수혜자가 될지 기약이 없다. 경제는 무너져 실업자가 속출하고, 부동산정책 실패로 아파트 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오만과 독선에 빠진 정권이 폭주하는데 야당은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서민들은 몸도 춥고 마음도 춥다. 절망 속에 아우성치는 백성들의 처연한 세밑 풍경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유권자들이 선택한 정권이니 누구를 탓하랴. 촛불정신을 역설한 정권은 다를 줄 알았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을 믿고 싶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겠다.”고 했을 때 박수를 보냈다. ‘착한 사람(?)’ 이미지를 가진 인권변호사는 대통령이 되어도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부리지 않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정치권력의 속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통합을 약속한 대통령이 권력을 잡자, 편 가르기로 나라를 완전히 두 동강 내어버렸다. 적폐를 청산한다면서 ‘신 적폐’를 양산하고, 권력기관을 개혁한다면서 검찰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려고 한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재가한 검찰총장 징계를 법원이 효력을 정지시켰겠는가? 촛불 덕에 권력을 줍다시피 한 정권이 촛불정신을 왜곡하고 국민을 배신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끝판 왕이다.
이처럼 무도한 정권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해도 우리는 절대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절망보다 무서운 것은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도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이것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는 희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우리는 권력밖에 모르는 위선자들이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 스스로가 희망’이 되어야 한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니 말이다.
우리의 희망가는 시민이 만들고 시민이 함께 부르는 노래이다. 우리가 희망이 되려면 ‘권력의 편’이 아니라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 우리도 성현들처럼 ‘불의의 꽃길’을 단호히 거부하고 ‘정의의 가시밭길’로 당당하게 나아가자. 권력에 빌붙어 사익을 탐하는 ‘간상배(奸商輩)’가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정의의 사도’가 되자. 공자·석가·예수·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현들의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救援)인 것은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삶에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우울한 세밑이지만 희망을 노래하자. 셀리(P. Shelley)는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고, 푸시킨(A. Pushkin)은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기쁨의 날이 오리니…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목 놓아 부르는 ‘정의와 진리의 노래’는 반드시 새해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