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위로 한 무리 청둥오리들이 날아간다. 어제까지는 보이지 않더니, 분주하게 오가는 걸 보니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다. 먼 북쪽에서 겨울을 나려고 찾아온 철새들이다. 작년에 왔던 녀석들도 있을 것이고 새로 태어난 놈들도 있을 터이다. 이 들판에는 청둥오리들 말고도 수십 마리의 고니도 날아오고 기러기들도 더러 와서 겨울을 난다. 해마다 찾아와서 겨울 생태계를 이루는 철새들은 삭막하고 냉랭한 겨울 들판에 활력과 온기를 불어넣는 이웃들이다.
매년 우리나라에 도래하는 겨울철새의 규모는 작지가 않다. 환경부와 국립생물자원관이 실시하는 최근 조사에 따르면, 약 103종 136만 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종류별로 보면 오리류가 약 81만 마리, 기러기류 23만 마리, 갈매기류가 12만 마리에 이른다. 한때는 193종이 1월에, 206종이 12월에 관찰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우리나라의 겨울철새들 중에는 흑두루미나 큰고니, 황새와 같은 멸종위기종도 있다.
서식환경의 변화는 당연히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친다. 청둥오리 같은 담수 오리는 감소하고 있고, 반면 쇠기러기나 큰기러기는 증가추세를 보인다. 습지의 파괴, 간척을 통한 갯벌 변화, 저수지의 수위 변화, 농업 구조의 변화 등이 철새들의 서식환경에 영향을 주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조류인플루엔자(AI)의 위험이다. 철새의 집단 서식지에 인접한 가금류 농장에 질병을 전파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실제로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우리나라를 찾는 철새 무리는 관광 자원의 역할도 하지만, 우리의 환경과 생태계의 중요한 연결 고리다. 번식지와 월동지, 중간 기착지를 오가며 양 지역의 생태계를 연결하고, 다양한 먹이 사슬에 기여한다. 예를 들어, 먹이로 섭취한 식물과 곤충은 다른 생물에게 전달되고, 배설물은 비료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존재는 습지와 물환경의 건강 지표가 되기도 한다. 많은 철새가 안정적으로 월동하려면 물의 질, 먹이 자원의 적정성, 휴식 공간 등이 확보되어야 한다. 철새의 개체 수 변화는 환경정책, 습지관리, 농업방식, 수자원계획 등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흔히들 선거철마다 지역구를 찾는 정치꾼들을 ‘철새’라고 하지만, 그것은 철새들의 생태를 왜곡하고 모독하는 망언이다. 철새들이 혹독한 겨울 들판을 찾아오는 것은 부질없는 욕망이나 놀이 삼아 오는 게 아니다. 엄연하고 절실한 삶의 여정으로 수만리 하늘 길을 날아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들은 손님이나 구경거리가 아니다. 우리의 환경이고 생태계, 즉 삶의 일부다. 그들에게도 이 들판은 수만 리 삶의 여정의 터전이고 목적지일 터이다.
나처럼 평생 이 땅을 떠나지 못한 붙박이도 저들과 삶을 공유하는 것으로 내 삶의 영역도 그만큼 확장이 된다. 비단 물리적 공간뿐이겠는가, 오로지 맨몸 하나로 수만 리 여정을 오가며 이 들판의 혹독한 계절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생명의 엄연함과 감동이 없을 수가 없다. 힘찬 날갯짓으로 분주히 오가는 청둥오리들처럼 나도 좀 더 절실하고 뜨겁게 오는 겨울을 맞아야겠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