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가 자기 인식 능력이다. 인류학자들은 초기인류의 등장을 대략 200만 년 전으로 보는데, 그 시점부터 어느 정도는 자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직립보행 같은 신체적 구조의 변화와 함께 두뇌의 용량이 커지면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기능도 발달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기인식 능력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실존적인 질문도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물음이야말로 인간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요 종교와 철학과 문학과 예술이 태어난 원천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고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완결된 해답을 제시해온 것은 종교였다. 기독교와 이슬람, 불교와 유교 등 인류의 고등종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인생의 본질을 규정하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종교의 영향력도 많이 약화되고, 과학과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인간은 편리함과 풍요를 누리는 대신 본질적인 질문에서는 멀어져 갔다.
아무리 문명과 문화가 발달해도 인류가 자연의 일부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터이다.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가야 할진대 자연생태계가 살아있는 교과서요 경전일 수밖에 없다. 눈만 뜨면 보게 되는 나무와 풀, 주잠비복 생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답과 길이 있는 것이다. 일찍이 공자가 말한 성(誠)이 바로 자연의 모습이라는 생각이다. 거짓이나 나태, 사악함이 없는, 오로지 참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자연의 모습이 아니던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개인적인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인 만큼 그 삶의 터전이 바로 사회인 것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삶의 실현인 것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태에 따라 개인의 삶도 좌우되게 마련이다. 아무리 올곧게 살고자 해도 사회가 부패하고 혼란하다면, 그 속의 개인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신의 지식과 양심과 성의(誠意)를 다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사람이 추구하는 인의예지 같은 덕목들도 모두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사회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불의한 일을 자행하거나, 그릇된 판단으로 사회를 어지럽히는 일, 그것을 보고도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다. 그런 개인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병들고, 나라는 쇠락한다. 결국 그 피해는 자신에게 돌아간다. 사회의 도덕이 무너지고 공동체의 신뢰가 깨어지면, 개인의 삶도 설 자리를 잃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묻는 것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