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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판사의 양심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양심에 따른 판결이란 주관적인 개념이어서 자의적인 판결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래서 법관의 양심은 일반 개인과는 달리 법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합리적 판단에 기초해야 한다. 대법원은, “법관의 양심이란 개인의 주관적 도덕 감정이 아니라, 직업적 사명감과 책임감, 법에 대한 이해와 해석 능력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 판단이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고, 법관 윤리규정에도“법관은 공정하고 독립된 자세를 견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심리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더블어민주당 대선후보인 이재명은 지난 20대 대통령선거 과정에 저지른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2022년 9월 8일 기소되었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일 때 개발사업 1차장이었던 고 김문기 씨를 몰랐다고 한 사실과, 경기도지사 시절 성남시 백현동 부지의 용도변경과 관련하여 국토부의 협박이 있었다고 발언한 것이 허위 사실 공표라는 혐의다. 법원은 1심은 6개월 이내, 2심과 3심은 각각 3개월 이내 재판을 마치도록 한 공직선거법 제270조의 규정을 어기고, 2년 7개월이 지난 2025년 5월 1일에야 유죄취지 대법원 파기환송이 있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감안할 때, 만약 공직선거법의 강제 규정대로 신속하게 처리가 되었더라면, 이재명은 지난 총선의 출마뿐 아니라 이번 대선의 후보도 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중형이 내려진 사건을 2심에서 무죄로 판결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대법원에서도 1심 판결 취지를 그대로 인정하여 유죄 취지 파기환송 한 것일 터이다. 판사의 정치·이념적 성향에 따라 법 적용이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은 여간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자,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을 했다. “명백한 정치재판이자 졸속재판”이라거나 “법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결”이라는 것도 모자라 “극우 내란 세력의 역습”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사법쿠데타”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민주당 초선의원들은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압박했고, 당 차원에선 조 대법원장에 대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엄정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자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는 당초 2025년 5월 15일로 예정되었던 파기환송심 첫 공판을 대통령 선거 이후인 6월 18일로 연기했다. ‘대통령 후보인 피고인에게 균등한 선거운동 기회를 보장하고 재판의 공정성 논란을 방지하기 위한 결정’이라는 이유였다, 이는 어처구니가 없는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피고가 후보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결하는 것일진대 선거 후로 미룬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대법원에서 이미 유죄 판결이 난 후보의 공판을 선거 후로 연기하는 것은 선거의 당락에 따라 법적용을 달리 하겠다는 저의가 아닌가. 이는 명백히 법리보다 정치적 판단을 우선하는 비양심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판사가 양심을 버리면 법치는 무너지고 만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5-12

김문수와 이재명

이번 대선정국에서 여당과 야당의 선두 주자인 김문수와 이재명은 후보들 중 가장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이다. 정치 성향뿐 아니라 삶의 역정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소년 김문수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해서 지방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결국 중징계를 받은 것이다. 입시 준비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정의감과 패기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반면, 이재명은 일찍부터 학업을 잇지 못하고 소년공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때를 회상하며 2006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꼬맹이 여자애가 나이를 두 살이나 속여 나로 하여금 ‘누나’라고 부르게 하여 머리끄덩이를 잡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고, 점심시간에 힘 약해 보이는 동료에게 식판을 집어 던지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공장 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나이를 속였다고 여자애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버르장머리를 가르치고, 힘이 약해 보이는 동료에게 식판을 던져서 기세를 제압하는 ‘만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김문수는 그 어려운 일류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장래가 보장되는 대학 생활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71년 위수령반대 시위와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제적을 당하자, 한일도루코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노조위원장을 지내는 등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출세 영달보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정의실현이 우선이었다. 이 역시 오로지 신분 상승을 위해 독학으로 대학에 들어가고, 고시공부에 전념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재명과는 대조가 되는 행적이다. 두 번의 경기도 지사와 세 차례 국회의원 등 오랜 공직생활 중에도 김문수는 한 번도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적인 없는 그야말로 청백리였다. 경기도 지사 시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도내 전 공무원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청렴의 중요성을 강조 했으며, ‘부패즉사(腐敗卽死), 청렴영생(淸廉永生)’ 슬로건을 내걸고 부패공직자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퇴출이란 원칙을 적용하는 등 청렴문화 확산을 실행했다. 이 부분도 두 사람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재명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지금 재판 중인 사건만도 공직선거법위반, 위증교사혐의, 대장동·성남FC·백현동 개발 특혜, 대북송금,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등 다섯 건이나 된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가진다. 누가 대통령직을 맡느냐에 따라 국운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을진대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이 절실한 시점이다. 가장 훌륭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판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나라를 위태롭게 할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먼저라야 한다.

2025-04-28

한국과 계몽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오래 전에 심훈의‘상록수’란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 1930년대 농촌 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인데,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는 공모전의 당선작이다. 1935년 9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일부가 교과서에도 실리는 바람에 널리 알려졌다. 최용신이란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은 농촌 계몽운동에 투신한 남녀 주인공의 활동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30년 당시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77.73%였다. 여성의 경우는 92%나 되었으니 열에 아홉은 글을 못 읽는 까막눈이었다는 얘기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맹퇴치가 우선이라는 걸 깨닫고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계몽운동을 펼쳤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농촌에서 야학을 열어 국어와 산술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벌였다. 2025년 현재 한국의 문맹률은 1%도 되지 않는다. 이제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실행되어 한글은 물론 영어도 의무적으로 배운다. 일부 고령층이나 장애인들을 제외하고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문맹퇴치는 거의 완성이 된 셈이다. 그런데 때아니게 “저는 계몽이 되었습니다”란 말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대통령 탄핵을 심리하는 법정에서 김계리 변호사가 변론 중에 한 말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민주당의 패악과 일당독재, 파쇼 행위를 확인하고 이 사건 변호에 참여하게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정국을 계기로 상당수 젊은이들이 ‘계몽’되었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까지 올랐으면 전임 대통령처럼 국빈대접 받으며 외유나 하다가 임기를 마칠 것이지, 느닷없이 비상계엄이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여간한 충격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그 때까지 덮이고 감춰져 있던 온갖 것들까지 백일하에 본색을 드러냈다. 국회는 물론 사법부와 언론까지, 심지어는 정부기관인 검·경과 군부까지 좌경화 의식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뜻 있는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계몽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순수와 정의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찌들지 않은 열린 사고라야 가능하다. 불순한 욕망이나 완고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과오가 밝혀져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행태를 보인다.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 했던 사람들 중에도 노선을 바꾼 사람이 적지 않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으로 사회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 어느 정도 달성되고, 운동권이 변질되고 타락한 양상을 보이자 단호히 절연했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은 여전히 운동권 전력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계몽파와 비계몽파가 대선을 앞두고 일대 결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내전을 방불케 하는 이 대결의 승패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2025-04-14

소크라테스의 변론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가황으로 불리는 나훈아의 ‘테스형’이란 노래를 듣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 대중가요에 그리스의 철학자를 끌어들인 것도 엉뚱한데, 소크라테스란 이름에서 테스만 잘라 형이란 칭호를 붙인 게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 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이라는 가사도 소크라테스란 철학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쓴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즉흥적으로 끌어온 게 아닌가 싶다. 소크라테스는 예수, 석가, 공자와 더불어 세계 4대 성인(聖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기독교, 불교, 유교 같은 종교적 교리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흔히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나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자는 아폴론 신전 앞에 새겨져 있던 말이고 후자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보다는 “무지(無知)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는 말이 신빙성이 있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일 테다.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역시 직접 저술을 하지는 않았다. 그의 행적이나 사상은 주로 제자였던 철학자 플라톤의 저술에 의해서 후대에 전해졌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란 책이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아테네의 신을 부정했다’는 죄명으로 아테네 법정에 섰을 때, 자신에 대해 변론했던 말을 그 자리에 참석했던 플라톤이 옮겨놓은 것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을 담은 이 변론에서 그는 참된 정의와 진실과 용기가 무엇인지를 설파했다.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명변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배심원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변론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정의와 진실의 규명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그로부터 500여 년 후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는 말조차 하지를 않았으나 빌라도는 그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았다. 채찍질을 해서 풀어주고자 했으나 거부하는 군중들의 소요를 우려해서 결국 십자가형 선고를 내렸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한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들이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친 빌라도의 법정의 군중들이 그렇듯, 예나 지금이나 민심이 반드시 정의와 진리의 편만은 아니라는 것을 되새기게 하는 사건이었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나훈아의 이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대답을 할까? 대답보다는 되묻기가 전공인 그는 되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세상이 어떤데?” 세상이 어떤지를 미주알고주알 일렀다고 한들, ‘테스형’은 그 해결책을 스스로 찾도록 소위 ‘산파술’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렇다. 오늘 대한민국을 난국에 휩쓸리게 한 것도 국민들이고, 그 난국을 헤쳐나갈 해결책도 결국 국민의 몫이다.‘테스 형’에게 물을 일이 아닌 것이다.

2025-03-30

값과 가치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인터넷으로 난(蘭)을 몇 촉 샀다. 구입한 난의 종류와 재배방법을 알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난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보기에는 잎의 모양이나 색이 조금씩 다를 뿐인데 판매 가격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몇 촉에 만 원 이하의 난이 있는가하면, 일견 비슷해 보이는 다른 종류의 난은 수십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값이 매겨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희귀종이라는 난은 20억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풀 한 포기의 값이 보통사람은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라니, 놀라움을 넘어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미술작품 중에도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작년까지 경매시장에서 팔린 작품 중에 가장 비싼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르도문디’라는 그림이라고 한다. 무려 4억5천30만 달러에 사우디 왕자가 낙찰 받았다고 하는데, 한화로는 5천억 원이나 되는 가격이다. 그 밖에도 폴 세잔, 폴 고갱, 잭슨 폴락 등의 그림이 3천억 원을 호가했고, 렘브란트, 앤디워홀, 마그로스코, 크림트 등의 그림이 2천억 원 상당에 팔렸다고 한다. 물론 경매시장에 나오지 않고 박물관 같은데 보관된 작품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값나가는 것도 많을 것이다. 난이나 그림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것을 그저 준다고 해도 마다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애호가들은 애지중지 수억 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희귀난도 김매는 시골 아낙네의 눈에는 그냥 귀찮은 잡초로 보이지 않겠는가. 극단적인 예로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수천억 원짜리 그림이 물 한 모금보다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흐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를 못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그림을 빵부스러기와 바꾸어 먹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 결국 요절하고 말았다 한다. 우주 만물에는 원래 차별이나 가격이란 게 없었다. 사람들이 자의로 구분하고 값을 매겨서 경중이나 귀천이 생긴 것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가격의 형성은 보통 상품으로서의 가치, 즉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가령 예술 작품의 경우는 시대적·문화적 의미부여와 상업적 계산도 작용해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는 가치일 수는 없을 터이다. 물론 세상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더 많다. 우선은 하늘과 바다, 해, 달, 별, 눈비와 바람 같은 자연이 그렇고, 생명과 영혼과 사랑과 진실이 그렇다. 인간 사회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위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가 삶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비관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마음먹기 따라서는 누구나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가 있다.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고, 그것으로 얼마든지 삶의 보람과 기쁨을 창출할 수가 있는 것이다.

2025-03-17

미나리와 겨울나기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지난 겨울 초입에 야생 미나리 뿌리를 한 줌 캐 왔다. 들에 자생하는 미나리는 기온이 내려가면 잎은 다 시들고 뿌리만 땅속에서 월동을 한다. 아시아가 원산인 미나리는 맛과 향이 좋아 식용작물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도랑에 저절로 난 미나리는 사람이 가꾼 것보다 질기긴 하지만 향은 더 진하다. 여름철에 수북하게 자라면 베어다가 생으로 매운탕에도 넣고 데쳐서 무치기도 했다. 적당한 시기에 자르지 않으면 장다리가 나와 꽃이 피고 쇠어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 반으로 자른 페트병에 물을 붓고 미나리 뿌리를 담가 놓으니 며칠 후부터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따금 물만 갈아 주는데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 올랐다. 두어 주일이 지나자 페트병을 가득 채운 미나리 파란 싹이 어둑한 내 방에 생기와 긴장을 불어 넣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오래 전에 배운 동요가 떠올라 절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람 싹이 돋아났어요.’ 살면서 수시로 접하게 되는 주변의 사물과 현상들이 문득 새롭게 보일 때면 그와 관련된 동요가 떠오르곤 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동요를 배우면서 그때까지 무심히 보아 넘기던 것들이 새롭게 인식되고 각인되어서 기억과 정서에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밤하늘을 쳐다보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이라는 동요가 떠오르고, 고향 생각을 하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따라 나온다. 첫돌맞이 아기처럼 방싱방실 웃는 민들레,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스르르 잠이 드는 섬집 아기,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가는 다람쥐,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옹달샘…. 얼마나 맑고 곱고 정감어린 동심의 세계인가. 페트병에다 미나리 뿌리 한 줌을 키우는 일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정성이나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약이나 식용으로 쓸 것도 아니라서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파릇하게 자라는 미나리와 함께 호흡하고 생기를 나누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설령 수억 원짜리 명화를 걸어 놓고 날마다 쳐다본다고 한들 이보다 더 좋은 감동과 기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미나리 뿌리를 캐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물이 마른 도랑에 죽은 듯 시들어버린 미나리 잎을 보고 문득 뿌리를 캐다가 방안에 두면 싹이 나올 거란 생각을 하게 된 것뿐이다. 그렇다. 우리가 평소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도 관심을 가지고 일상 속에 들여 놓으면 삶이 한층 생기롭고 깊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미나리 싹이 자라는 걸 볼 때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셔요’ 동요를 흥얼거리며,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나이도 잊고 아이처럼 순진무구해져서 겨울을 지나왔다. 이제 봄이 왔으니 다시 들녘으로 돌려보낼 테지만, 어둡고 긴 겨울 동안 더없이 해맑고 싱그러운 이웃이 되어준 미나리 싹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2025-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