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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와 겨울나기

등록일 2025-03-03 18:32 게재일 2025-03-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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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지난 겨울 초입에 야생 미나리 뿌리를 한 줌 캐 왔다. 들에 자생하는 미나리는 기온이 내려가면 잎은 다 시들고 뿌리만 땅속에서 월동을 한다. 아시아가 원산인 미나리는 맛과 향이 좋아 식용작물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도랑에 저절로 난 미나리는 사람이 가꾼 것보다 질기긴 하지만 향은 더 진하다. 여름철에 수북하게 자라면 베어다가 생으로 매운탕에도 넣고 데쳐서 무치기도 했다. 적당한 시기에 자르지 않으면 장다리가 나와 꽃이 피고 쇠어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

반으로 자른 페트병에 물을 붓고 미나리 뿌리를 담가 놓으니 며칠 후부터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따금 물만 갈아 주는데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 올랐다. 두어 주일이 지나자 페트병을 가득 채운 미나리 파란 싹이 어둑한 내 방에 생기와 긴장을 불어 넣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오래 전에 배운 동요가 떠올라 절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람 싹이 돋아났어요.’

살면서 수시로 접하게 되는 주변의 사물과 현상들이 문득 새롭게 보일 때면 그와 관련된 동요가 떠오르곤 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동요를 배우면서 그때까지 무심히 보아 넘기던 것들이 새롭게 인식되고 각인되어서 기억과 정서에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밤하늘을 쳐다보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이라는 동요가 떠오르고, 고향 생각을 하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따라 나온다. 첫돌맞이 아기처럼 방싱방실 웃는 민들레,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스르르 잠이 드는 섬집 아기,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가는 다람쥐,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옹달샘…. 얼마나 맑고 곱고 정감어린 동심의 세계인가.

페트병에다 미나리 뿌리 한 줌을 키우는 일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정성이나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약이나 식용으로 쓸 것도 아니라서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파릇하게 자라는 미나리와 함께 호흡하고 생기를 나누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설령 수억 원짜리 명화를 걸어 놓고 날마다 쳐다본다고 한들 이보다 더 좋은 감동과 기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미나리 뿌리를 캐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물이 마른 도랑에 죽은 듯 시들어버린 미나리 잎을 보고 문득 뿌리를 캐다가 방안에 두면 싹이 나올 거란 생각을 하게 된 것뿐이다. 그렇다. 우리가 평소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도 관심을 가지고 일상 속에 들여 놓으면 삶이 한층 생기롭고 깊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미나리 싹이 자라는 걸 볼 때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셔요’ 동요를 흥얼거리며,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나이도 잊고 아이처럼 순진무구해져서 겨울을 지나왔다.

이제 봄이 왔으니 다시 들녘으로 돌려보낼 테지만, 어둡고 긴 겨울 동안 더없이 해맑고 싱그러운 이웃이 되어준 미나리 싹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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