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심훈의‘상록수’란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 1930년대 농촌 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인데,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는 공모전의 당선작이다. 1935년 9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일부가 교과서에도 실리는 바람에 널리 알려졌다. 최용신이란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은 농촌 계몽운동에 투신한 남녀 주인공의 활동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30년 당시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77.73%였다. 여성의 경우는 92%나 되었으니 열에 아홉은 글을 못 읽는 까막눈이었다는 얘기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맹퇴치가 우선이라는 걸 깨닫고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계몽운동을 펼쳤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농촌에서 야학을 열어 국어와 산술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벌였다.
2025년 현재 한국의 문맹률은 1%도 되지 않는다. 이제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실행되어 한글은 물론 영어도 의무적으로 배운다. 일부 고령층이나 장애인들을 제외하고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문맹퇴치는 거의 완성이 된 셈이다. 그런데 때아니게 “저는 계몽이 되었습니다”란 말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대통령 탄핵을 심리하는 법정에서 김계리 변호사가 변론 중에 한 말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민주당의 패악과 일당독재, 파쇼 행위를 확인하고 이 사건 변호에 참여하게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정국을 계기로 상당수 젊은이들이 ‘계몽’되었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까지 올랐으면 전임 대통령처럼 국빈대접 받으며 외유나 하다가 임기를 마칠 것이지, 느닷없이 비상계엄이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여간한 충격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그 때까지 덮이고 감춰져 있던 온갖 것들까지 백일하에 본색을 드러냈다. 국회는 물론 사법부와 언론까지, 심지어는 정부기관인 검·경과 군부까지 좌경화 의식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뜻 있는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계몽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순수와 정의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찌들지 않은 열린 사고라야 가능하다. 불순한 욕망이나 완고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과오가 밝혀져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행태를 보인다.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 했던 사람들 중에도 노선을 바꾼 사람이 적지 않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으로 사회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 어느 정도 달성되고, 운동권이 변질되고 타락한 양상을 보이자 단호히 절연했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은 여전히 운동권 전력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계몽파와 비계몽파가 대선을 앞두고 일대 결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내전을 방불케 하는 이 대결의 승패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