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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화, 벗님네야

등록일 2025-08-11 18:09 게재일 2025-08-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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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수 수필가

“어화, 벗님네야. 우리 소리 들어보소!”

사람 손길 멈춘 두 번째 해 여름날. 우거진 푸른 생명의 노랫가락이 녹지 숲에 여울진다. 도시 한가운데서 진초록 풀들의 노래를 듣다니, 푸진 행운이다.

도심의 S 초등학교 서북쪽에 사람이 만든 녹지가 있다. 그 안엔 다 커 보이는 여러 그루 소나무가 적당한 거리로 살고, 측백나무 몇 주, 사철나무 서너 그루, 느티나무 두어 주도 함께한다. 나무들 사이에 잔디, 쑥, 망초, 바랭이, 강아지풀, 클로버 등 여러 종의 야생 풀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못 보던 외래종도 함께 지낸다.

메마른 시가지에 이런 녹지가 있음은 주민에겐 분명 축복이다. 성경이 가르치듯,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그 안에 살다가 그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니까. 사람들은 녹지 안 의자에서 담소하며 쉬어가고, 훌라후프를 하며, 애완견과 함께 산책도 즐긴다. 이를테면, 녹지는 동네공원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한 주에 대여섯 번 녹지 숲을 걸어서 오간 지가 10년째다. 하니, 나도 이 숲과 교감하는 사람이리라. 녹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다. 그런 게 녹지와 시민에겐 중요치 않으니까. 재작년까지, 한 해 두세 번 사람이 벌초했다. 한데, 작년부터 벌초가 사라졌다. 학교 문 오른쪽 녹지 중간쯤에 내걸린 현수막 하나 때문일 거다. 바람에 살랑이는 현수막엔 이렇게 씌어 있다.

“…공원토지는 개인 사유지입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본 토지를 사용 시 고발될 수 있습니다. -토지 소유자 알림- ”

그랬다. 이 녹지는 공공지가 아니고 사유지였다. 아마도, 지주가 벌초했던 측에 이의를 제기한 결과가 바로 현수막이리라. 바다 쪽으로 1/3 지점에 녹지를 가로질러 학교진입로가 있다. 벌초할 때는 그 왼쪽 녹지에도 산책로가 있었다. 벌초 안 하니 풀이 무성해져 발길도 끊어지고, 산책로도 사라졌다. 벌초는 달리 말하면, ‘풀에 대한 사람의 규제’다. 규제를 푸니 2년 만에 녹지는 풍성한 원래 모습으로 바뀌었다.

넉넉한 자연, 진초록 숲이 부르는 노랫가락을 마음의 귀로 듣는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좀 바라보소···.”

불현듯 ‘인간사회도 자연과 원리는 같구나!’하고 속 소리가 가락에 실려 들린다. 벌초 곧, 규제를 안 하니까 녹지가 자생력으로 싱그런 자연 숲을 이루었듯, 자유민주주의 국가사회도 규제를 줄여야 자생력‧경쟁력이 높아질 게 아닌가.

미국은 자국 경제를 위해 ‘관세 포탄’을 세계에 터뜨렸다. 각국이 전전긍긍 협상에 응하며 세계 경제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관세 협상 같은 국익 챙기기보다 노란봉투법‧방송 3법, 법인세‧주식거래세 인상 등 국가경쟁력을 해칠 수 있는 전체주의적 입법과 규제정책에 넋이 나가 있다. 한심하다. 장기 집권을 위한 표를 의식한 때문인가. 부디 정치인들이 ‘벌초 않기’를 깨달아 개인과 당보다 나라와 국민을 더 헤아려, ‘어화, 벗님네야. 우리나라 앗싸!’라고 노래하는 길로 나서기 바란다.

/강길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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