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새 버릇이 생겼다. 아니, 버릇이라기보다 새로 하게 된 ‘셀프 세족례(洗足禮)’라고 하는 게 낫겠다.
새 셀프 세족례 전에는 발을 손으로 만지며 씻는 일은 뜸했다. 따뜻한 물에 발을 불려 굳은살을 각질 제거 돌로 밀 때나, 뗄 거나 씻을 것이 묻었을 경우 외는 거의 발을 만지지 않았다. 보통은 바가지로 물을 양발에 한두 번 붓고 말거나, 물을 부으면서 한쪽 발바닥으로 다른 쪽 발의 등을 몇 번 문지르는 정도였다.
젊은 날부터 오랫동안 성당의 봉사자 활동을 하면서 여러 번 세족례를 받아보기도 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은 모범을 따라, 성목요일 미사 때 사제가 선정된 12명 신자의 발을 씻는 예식이 세족례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면서도 형식적 예식으로 치부하고 실생활에서 몸과 발, 여러 지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안다는 것과 깨닫고 행하는 삶의 거리가 북극성만큼이나 멀었다.
나이 들어가며 피부가 건조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때, ‘몸에서 아픈 소리가 난다’라고도 했다. 젊은 날 어른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을 때는, 다른 나라 얘기처럼 그냥 흘려보냈었다. 한데, 어느 날 자신에게도 닥친 문제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바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자기 몸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비로소 바라다보았다.
이 무렵부터 발이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지체처럼 발을 두 손으로 꼼꼼히 씻었다. 발이 자신을 위해 고난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발가락 사이엔 때가 많이 끼었고, 뒤꿈치는 굳은살이 늘어났으며, 박힌 티눈도 커진 걸 새삼 알아챘으니 말이다. 때, 굳은살, 티눈 모두가 온몸의 압박을 견뎌내며 죽어간 발의 세포들일 터. 발을 씻고 나면, 끝으로 맑은 물로 발을 헹구며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것이 ‘발을 다른 지체들처럼 대접하는 행위 곧, 셀프 세족례’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을 떠받치고 걸어가야 하는 버거운 몫을 말없이 해내는 존재가 발이다. 이유 없이 천대받기도 하는 존재도 발이다. 가슴에서 맨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 만일, 발이 없다면 인간은 문명은커녕, 생존조차도 못했을 터다. 발 못 쓰는 장애우를 보면 금방 그 소중함을 알고도 남는다.
사람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진 생명 유기체라면, 국가는 사람으로 조직된 유기체다. 따라서, 국가도 지체들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의 지체가 서로 이어져 유지, 발전하는 유기체가 국가이기에 생명 유기체와 닮았다. 국가의 지체는 지도층, 관리층. 감독층, 실무층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발에 해당하는 지체는 실무층이며 근로자, 농어민, 소상공인 등이 그들이다.
국가란 몸의 발 역할을 감당하는 실무층이 무시되거나 소외당하고 저소득 구조에 가난하다면, 이는 자유민주주의 복지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보편복지가 아니라, 꼭 필요한 저소득층을 도와주고 돌보는 선별복지가 요구된다. 셀프 세족례가 발의 소중함을 알아주는 데서 나왔듯이···.
/강길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