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로 하룻새 삶의 터전 잃은 의성 주민들 망연자실<br/>몸만 빠져나와 대피소서 하룻밤… 돌아오니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br/>특산물 마늘도 뜨거운 산불 열기로 모두 말라버려 앞으로 생계 막막<br/>숯검정 산 멍하니 바라보며 눈시울 “정부 빠른 지원 대책만이 살 길”
23일 오전 의성군 초입에 들어서자 자욱한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공기는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진화작업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곳곳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관련기사 2·5면>
도롯가에 서 있던 일부 주민들은 숯검정이 돼버린 산을 멍하니 지켜보며 아무 말 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산불에 몽땅 타버린 주택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잔해에서 흩날리는 재는 그 참담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안평면 신월리 신동마을 주민들은 전날 간신이 몸만 빠져 나온 뒤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화마가 쓸고 간 처참한 모습에 망연자실했다.
주민 이상달(70) 씨는 “칠십 평생 이 마을에서 태어나 살아왔는데 이번 산불로 집이 다 탔고, 내 인생도 함께 타버렸다”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산불이 나자 다들 대피했다. 집을 나설 때는 불길이 이미 눈앞에 있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김민수(51)씨는 ”대피소에 머물다 돌아오니 집은 온데간데 없고, 키우던 소 두 마리만 불길을 뚫고 살아남아 날 보고 울더라“면서 ”소에게 먹이던 짚이 타버려 물이라도 먹이려고 했는데, 강한 불길에 수도 계량기도 녹아 이마저도 당장 줄 수 없게 돼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며 눈물을 훔쳤다. 그의 집은 폭격을 맞은 듯 폭싹 내려앉았고, 벽돌 더미만 나뒹굴었다.
김씨 이웃에 사는 정상섭(78)씨의 집도 흔적 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정씨는 ”산불이 집 근처를 쓸고 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땐 가재도구고 뭐고 모든게 사라지고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고 힘들어했다.
근처에서 만난 또 다른 주민은 당시 휴대전화로 촬영한 산불 영상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촬영한 휴대전화 영상 속에서는 불길이 마을을 향해 치솟듯 번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는 “불이 이렇게 빨리 번질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이 한순간이었다”며 당시 공포를 전했다.
의성군 특산물인 마늘도 산불 열기가 닿으며 모두 말라버렸다. 마늘 농사를 짓는 황장하(71) 씨는 “마늘이 열기에 다 쪼그라들었다. 이제 농번기인데 빨리 안정화됐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농사로 먹고 살고 있는데 이제 다 날아갔다. 정부가 빨리 지원대책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토로했다.
의성읍 중리리의 한 농산물 유통업체는 공장 건물 2동이 모두 불에 타는 피해를 봤다.
공장주인 김양수(46) 씨는 “8년 전 건물을 신축해 사과, 배 등 과수 농산물을 저장하면서 유통시켰는데, 이번 산불로 모두 날려버렸다”며 “앞으로 생활이 막막하다. 정부의 특별재난지역 선포로 막대한 피해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길 바랄 뿐이다”고 하소연했다.
김씨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라며 답답한 심정을 나타냈다.
의성군이 운영 중인 자연장지 ‘천제공원’도 이번 산불로 잔디장 2977개, 수목장 312개가 불에 탔다.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김운표(50) 씨는 “공원 잔디가 다 타버려 돌아가신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른 것 같다”며 “빠른 피해복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산림청은 지난 22일 오전 11시 24분쯤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야산에서 산불이 발생한 뒤 2시간 46분 만인 이날 오후 2시 10분쯤 산불 3단계를 발령했다.
산불 3단계는 피해 추정 면적이 100∼3000㏊ 미만, 초속 11m 이상 강풍이 불고 진화 시간이 24∼48시간 미만으로 예상될 때 발령한다.
의성군은 한 성묘객이 ‘묘지를 정리하던 중 불을 냈다’며 “그가 직접 119에 신고했다”고 설명했다.
/이병길·피현진·단정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