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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가 멈춘 산에 자리잡고 나라를 도와 神異한 일을 일으켰다

이용선기자 ·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4-08-20 19:22 게재일 2024-08-2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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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재발견<br/>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br/>&lt;4&gt; 성스러운 어머니는 어떻게 선도산에 머물게 되었을까
서라벌 사람들이 신성한 땅으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의 현재 모습.
서라벌 사람들이 신성한 땅으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의 현재 모습.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이 책엔 기이한 설화와 신묘한 전설이 곧잘 등장한다. 그래서, 대중들에겐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쉽고 재밌게 읽힌다.

‘삼국유사’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불리는 ‘선도산 성모’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것이다.

 

“(선도산 성모는)옛날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신선처럼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그녀는 해동(지금의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딸을 걱정하던 황제가 편지를 써서 솔개의 발에 달아 보냈다. ’이 솔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고 살라‘는 내용이었다. 사소는 아버지의 말대로 솔개를 날렸고, 솔개가 멈춘 산에 머물면서 신선이 됐다. 그 산의 이름은 서술산(지금의 선도산)이었고, 신모(사소)는 오랫동안 거기 살면서 나라를 도와 신이(神異)한 일을 많이 일으켰다.”

 

선도산 성모, 또는 선도산 신모로 불리는 설화 속 여성은 절벽에 세운 마애여래삼존불, 무열왕릉을 비롯한 여러 개의 거대 고분과 함께 선도산의 수수께끼를 푸는 주요한 3개의 열쇠 중 하나다.

베일 속에 싸인 비밀스런 이 여성이 신라 당대에 가졌던 위상과 서라벌 귀족들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건 흥미롭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몇몇 고문헌에 서술되는 내용만으론 구체적 실체가 선뜻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

 

신라시조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산 성모’는

신선들을 부리며 절대 지위자로 숭배받던

중국 곤륜산 신화의 여신 ‘서왕모’ 신라판

힘세고 거대한 여신 제주 ‘설문대할망’ 설화

서양엔 신들의 어머니 ‘가이아’ 신화 전해져

Chat GPT가 만들어낸 설화 속 선도산 성모의 모습
Chat GPT가 만들어낸 설화 속 선도산 성모의 모습

◆곤륜산 서왕모와 선도산 성모의 연결고리는...

신라사 연구자들은 그간 각종 연구 논문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선도산 성모’에 접근하려 애썼다.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김태식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김태식은 그의 논문 ‘고대 동아시아 서왕모(西王母) 신앙 속의 신라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에서 중국 고대사와 연관시켜 선도산 성모를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신라 건국신화에 의하면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선도산 성모가 낳은 아들이다. 선도산은 경주의 서악이었다. 나아가 선도(仙桃)라는 이름 자체는 중국의 곤륜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즉, 중국 곤륜산 신화에서 서왕모가 지배하는 곤륜산에는 불로장생을 보장하는 선도(仙桃·먹으면 죽지 않는 복숭아)가 자란다고 했거니와, 이 런 모티브를 신라 왕도에 적용한 산악이 바로 선도산이었다. 선도산 성모는 신라 건국시조의 어머니인 까닭에 성모(聖母)로 추앙되었다. 성모란 신라라는 지상왕국을 낳은 최고 여신격이란 의미다. 이런 점에서 선도산 성모가 바로 신라판 서왕모였음은 명백하다.”

인접한 나라의 고대 설화 속 여신과 신라의 ‘성스러운 어머니’를 연결고리로 묶어낸 김태식. 그렇다면 논문에서 언급되는 ‘서왕모’는 어떤 인물일까?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서왕모는 선도산 성모처럼 숭배 받는 여성이었다. 곤륜산에 살면서 신선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요지금모(瑤池金母), 왕모낭랑(王母娘娘) 등으로도 불린 서왕모를 과거 우리나라에선 통상 ‘왕모님’이라 칭했다.

재밌는 건 크고 사나운 파랑새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교활한 여우를 수족처럼 부렸고, 어린 아이의 정기를 빨아들여 항상 부드러운 살결과 젊음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다.

선도산 성모에 얽힌 전설 또한 근엄하고 진지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재밌고 가벼운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삼국유사’를 다시 펴보자.

“신라 54대 경명왕이 선도산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사냥매를 잃었다. 성모에게 사냥매를 찾아주면 작위를 주겠다고 빌었더니, 사라졌던 사냥매가 왕의 책상 위로 날아와 앉았다. 이후 경명왕은 선도산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했다.”

 

◆세상을 쥐락펴락한 제주도 여신 이야기

오래전 쓰인 몇몇 책에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희미한 존재의 실체를 찾아다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학자들의 고난이자 즐거움일 터. 선도산을 오르는 기자의 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백 번을 거듭 오르내려도 선도산 성모가 “나 여기 있소”라고 모습을 드러낼 턱이 없음에도 그냥 무작정 그녀의 신위가 있다는 성모사(聖母祠)를 향했다.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그 와중에 몇 해 전 한라산을 등반했던 때가 떠올랐다.

역사가 5000년쯤 되는 국가면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매혹적인 설화나 신비한 전설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

한라산이 있는 제주 역시 ‘거대한 여신’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긴 시간 떠돌았다.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 ‘설문대할망’. 다소 과장된 이 여신의 스토리를 ‘한국민속문학사전’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태초에 탐라(제주도)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워 자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아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불꽃이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부지런히 한라산을 만들었다. 치마폭의 흙으로 한라산을 이루고 치맛자락 터진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들이 모여 오름이 생겼다. 할머니는 몸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풍요로웠다. 탐라 백성들은 할머니의 부드러운 살 위에 밭을 갈았다. 할머니의 털은 풀과 나무가 되고, 할머니의 오줌 줄기에서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했다. 그때부터 물질하는 해녀가 생겨났다.”

신라의 선도산 성모, 중국의 곤륜산 서왕모, 제주의 한라산 설문대할망. 이들이 능히 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었다.

도망친 매를 왕의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복숭아를 키우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70km가 넘는 섬을 혼자서 만들고….

고대 한국과 중국엔 ‘불능’을 모르는 절대적 힘을 가진 여성들이 있었다. 물론 설화 속에서지만.

선도산 자락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여럿 있다.
선도산 자락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여럿 있다.

◆‘만물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은 서양에도 존재

신라의 첫 번째 왕을 탄생시키고(선도산 성모), 신선들의 머리 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곤륜산 서왕모), 수천수만 사람들 삶의 토대가 될 섬을 만들어낸(설문대할망) 동양의 여신들.

그렇다면 서양엔 이에 필적할 여신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동서양 불문 인간들이란 무엇이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걸 옮기는 걸 즐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된 동양 세 여신 수준에 이르는 서양 여신으로는 ‘가이아(Gaia)’를 내세울 수 있겠다. ‘만물의 어머니’이자 ‘신들의 어머니’로 지칭되는 여성이다.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는 가이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의인화된 여신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또 다른 명칭으로 ‘게(Ge)’가 있다. 이 명칭의 어원적 의미는 ‘땅’ ‘대지’, 또는 ‘지구’다. 이름의 어원적 의미에서 추측할 수 있듯, 가이아는 모든 생명체의 모태인 대지를 상징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가이아는 ‘카오스’와 더불어 혈연관계 없이 태초부터 존재한 신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작가 히기누스의 ‘이야기’ 서문에 의하면, 가이아는 혈연관계에 의해 태어난 존재로 빛의 의인화된 신 아이테르와 낮의 의인화된 신 헤메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생불멸 신들의 계보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모신(母神·어머니 신)으로….”

어느 시대, 어느 장소건 삶이 유한한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를 동경해왔다. 선도산 성모와 가이아는 그런 부러움의 마음이 탄생시킨 고대 설화 속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계속)

/홍성식기자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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