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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평어를 쓴다면

등록일 2023-12-03 19:55 게재일 2023-12-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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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희 작가
유영희 작가

아이들이 분가하기 전 나를 부르는 호칭이 ‘용희야’였다.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놀라지만, 그래도 그 호칭 덕분에 지금까지 아이들과 친하게 잘 지내는 것 같다. 갑자기 이 기억이 소환된 이유는 경희대학교 김진해 교수 때문이다. 김 교수는 강의 시간에 교수와 학생이 서로에게 평어를 쓰면서 수업을 한다고 한다. 2022년 2학기부터 평어 수업을 했다고 하니 만 1년이 지난 셈이다. 2015년부터 평어 수업을 해온 고등학교의 이윤승 수학 선생님도 있다.

이런 시도는 교수에게도 낯선 경험일 것이다. 대학에서는 교수도 학생에게 반말하지 않는데다가, 다수를 대상으로 강의할 때는 더더욱 존댓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김진해 교수는 ‘반말’ 대신 평어라는 표현을 써서 수평적 관계 형성을 추구한다는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반말은 ‘야’, ‘너’ 같은 하대의 태도를 띠는 데 비해, 평어는 상대방과 수평을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김 교수는 자기를 소개할 때 경희대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말한다. 교수가 기대한 대로,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질문도 편하게 하게 되었고, 문자나 메일도 존댓말로 할 때보다 마음 가볍게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 김 교수는 이 평어 수업의 중요한 의의는 교수와 학생간의 평어보다 학생들 사이의 평어 사용이라고 강조한다. 학생들이 선후배 사이에 존댓말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요즘에는 같은 학년 같은 나이라도 존댓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이 존댓말은 정말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상대와 거리를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많아서 친근감 형성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를 만들어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

진작부터 평어를 쓰는 기업도 있다. 유명 출판사의 한 팀에서도 2년 전부터 평어를 쓰고 있다고 하고, 일부 스타트업에서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회사에서는 평어는 쓰지 않지만, 직급 대신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모두 존댓말의 위계를 무너뜨려서 소통을 넓히려는 몸짓이다.

한국어의 존댓말이 극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대한항공 비행기 추락사고이다. 1997년 대항항공 801편 항공기가 괌의 섬에서 추락해서 253명의 탑승객 중 228명이 사망했는데, 이 비행기 사고의 결정적인 원인이 부기장이 위계에 눌려 기장에게 제대로 할 말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이 난 것이다. 그 후 영입된 그린버그 부사장은 조종실에서 영어만 사용하게 했고, 그 결과 대한항공이 안전한 항공사로 거듭났다고 하니, 말투와 소통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만 평어를 쓸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시도해보면 어떨까? 며칠 전,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여야 간 대치 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과 평어로 대화한다면 혹시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이런 기대가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한치 앞이 안 보이니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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