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중턱에 만난 전남 곡성
곡성은 시골스러운 풍경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다. 곡성을 휘감아 흐르는 섬진강은 어머니의 젖줄처럼 푸근하기만 하다. 맑은 물길은 들판과 만나고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감성을 적시는 풍경이 펼쳐진다. 가을의 중턱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자연의 순정함이 가득한 곡성으로 떠나보자.
천혜 자연환경 품은 ‘섬진강의 무릉도원’ 침실습지
수달·삵 등 6천665종의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보고
섬진강 기차마을 증기기관차 여행·레일바이크…
유리온실·로즈카카오체험관·장미공원도 즐기자
하늘로 시원스레 뻗은 숨은 명소 메타세쿼이아 길
평지 자리한 이색 천문대, 곡성섬진강천문대도 눈길
◇섬진강의 무릉도원 ‘침실습지’
전남 곡성에 있는 섬진강은 수많은 보물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자연 생태가 고스란히 보존된 침실습지는 아름다움의 으뜸으로 칠 만하다. 침실습지는 섬진강과 곡성 군내에서 흘러든 곡성천, 고달천, 오곡천 등이 만나는 길목에 형성된 자연형 하천 습지다. 침실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는 명당’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어 ‘섬진강의 무릉도원’으로 불리는 침실습지는 203만㎡ 규모로 형성돼 있다. 수달과 삵, 남생이, 흰꼬리수리 같은 멸종위기 야생 생물을 비롯해 6천665종이 넘는 생물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습지 인근 주민들도 수달을 종종 목격하는데, 수달 서식지가 있다는 것은 습지의 생태 피라미드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침실습지 전역에는 청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버드나무 군락이 있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홍수로 많은 나무가 쓸려 내려가 숲처럼 무성했던 모습이 사라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살이 돋듯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다. 스스로 상처를 회복하는 습지의 모습에서 자연은 스스로 정화하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울지는 강물과 물에 비친 산 그림자, 소박한 들꽃 등 침실습지의 주변 풍경도 매력적이다. 특히 새벽 풍경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습지 사이로 갈대가 흔들리고 안개가 짙게 피어오르면 물고기들은 숨을 죽이고 밤을 새운 왜가리만 푸드덕거린다.
새벽 추위를 떨치고 섬진강 서편 강둑에 새벽 출사를 나온 사람들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카메라 렌즈로 강물을 응시하고 있다. 침실 습지가 제법 넓기 때문에 인근만 둘러보려면 침실목교와 퐁퐁다리를 왕복한 뒤 생태 관찰 데크를 거쳐 전망대까지 다녀오는 코스가 좋다. 습지를 가로지르는 침실목교는 제법 길고 외형이 아름다워 포토존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사진작가들이 모여드는 곳은 해뜰녘에는 고달교 남쪽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섬진강 서편 강둑이나 생태데크가 시작되는 지점, 혹은 침곡목교 위쪽이다. 해질녘에는 동악산으로 떨어지는 풍광을 렌즈에 담는 포토그래퍼들을 볼 수 있다.
침실습지는 물을 바라보며 멍한 상태를 유지하는 ‘물멍’의 최적지다. 모든 시름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이만한 곳이 없을 터다. 하이라이트 구간은 퐁퐁다리다. 철제 다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물에 잠겨도 떠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퐁퐁다리 한복판에 있으면 흐르는 물소리만 끊임없이 들린다.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지고 자연과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다.
◇코키아 단지가 조성된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
침실습지 인근의 또 다른 명소는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이다. 4만㎡ 부지에 유리온실, 초콜릿을 만들어보는 로즈카카오체험관, 장미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이국적인 분수대와 연못, 정자가 어우러진 장미공원은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가을 끝 무렵인 이맘때에는 붉게 물든 코키아(댑싸리) 단지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기차마을답게 증기기관차를 타고 가정역까지 짧은 기차 여행도 할 수 있는데, 열차 안에서 쫀드기와 별사탕처럼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주전부리도 판다. 가정역에 내리면 섬진강을 따라 옛 전라선 철도를 달리는 레일바이크를 체험할 수 있다.
기차마을에서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곡성의 숨은 명소인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다. 국도 17호선이 지나는 신기 교차로에서 곡성 군내로 들어서는 2차선 도로를 따라 메타세쿼이아가 하늘로 시원스레 뻗었다. 녹색으로 쭉쭉 뻗은 여름철에도 좋지만 나뭇잎이 갈색으로 물드는 가을 풍경이 으뜸이다. 800m 남짓 늘어선 나무 사이로 드러나는 논 풍경도 볼거리다.
영화 ‘곡성’을 본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종구(곽도원 분)가 딸 효진(김환희 분)과 오토바이를 타고 가며 환하게 웃던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도로변에 주차공간이나 갓길이 없지만 차량통행이 적은 편이라 느긋하게 드라이브 하기 좋다.
숲속에 스며든 가을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동악산 자락에 있는 도림사가 제격이다. 도림사(道林寺)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도인이 숲처럼 모여들어 도림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보물로 지정된 과불탱과 아미타여래설법도 등 문화재를 품고 있다.
도림사 앞에 이르면 돌을 층층이 쌓아올려 만든 돌계단이 보인다. 수작업으로 한 칸 한 칸 쌓아 올렸을 계단은 보기에 아름답고 편안하다. 절에 들어서기 전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마음을 추스른다. 한 칸씩 계단을 오를수록 도림사의 기품 있는 풍경이 눈으로 가득 들어온다. 고즈넉한 절 마당에 청량한 목탁소리가 울려 퍼진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도림사의 전경 앞에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이다. 곡성 8경 가운데 하나인 도림효종(道林曉鐘)은 도림사의 종소리가 새벽 기운을 타고 먼 곳까지 은은하게 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고요하고 한적한 경내에 맞은편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퍼지고 가을빛으로 물든 나무가 하나, 둘 잎을 떨어뜨린다. 계곡 암반에 앉아 계절이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자연과 하나 된 자신을 발견한다.
동악산 북쪽에 있는 치유의 숲은 가을철 산책로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산림청 산하기관인 한국산림복지진흥원에서 운영하는 곡성 치유의 숲에서는 동악산 등반, 꽃차 블렌딩을 비롯해 산림을 이용한 치매 예방, 수면 건강 증진 프로그램, 숲에서 실시하는 태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별빛 가득한 곡성섬진강천문대
곡성섬진강천문대는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고 서 있다. 순하게 흘러드는 물줄기처럼 둥글둥글 참 유한 모습이다. 한데 여느 천문대와 달리 평지에 자리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주변으로 민가도 더러 눈에 띈다. 사실 이곳 곡성섬진강천문대가 들어서 있는 고달면 가정마을길 일대는 천문대가 들어서기에 그리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천문관측을 위해서는 주변의 인공광원이 없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곡성섬진강천문대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건 천문대 측이 마을주민들과 불리한 여건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한 덕이다.
우선 천문관측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마을과 도로에 설치된 가로등에 갓을 씌워 빛이 위로 향하지 못하게 했고, 천문관측이 이뤄지는 시간대 도로를 지나는 마을 차량들은 스스로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끄고 지나기도 한다.
/곡성=글·사진 최병일 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