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군 글라디우스 검도 톨레도산 강철로 제작 16세기 스페인 아메리카 정복 때도 ‘화력’ 뽐내 8000 대 168 ‘카하마르카 사건’ 때도 위력 발휘
스페인을 여행하며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소 가운데 하나는 고도(古都) 톨레도(Toledo)다.
마드리드 남쪽 약 70km, 타호강(江)이 도시를 병풍처럼 감싼 이곳은 로마와 서고트,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겹겹이 쌓인 역사 공간이다.
알카사르 성채와 대성당, 미로(迷路)처럼 얽힌 중세 골목은 한때 제국의 중심이었던 시간을 말해준다.
그러나 톨레도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돌과 건축만이 아니다. 이 도시의 명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진짜 상징은 오히려 손에 쥘 수 있는 하나의 물건, ‘톨레도 검(劍)’이다.
톨레도는 특정한 형태의 검 이름이 아니라 ‘명검의 기준’으로 통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 지역의 강철은 유럽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톨레도 인근에서 채광된 철광석과 저탄소강·고탄소강을 반복해 접쇠하는 제강(製鋼) 방식, 그리고 독자적인 담금질과 열처리 기술은 강도와 유연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서도 휘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특성은 전투 현장에서 병사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안겼다. 잘 알려진 로마군의 글라디우스가 톨레도산 강철로 제작됐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도 이 같은 명성을 반영한다.
8~11세기 서고트인과 무어인들이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톨레도를 장악한 이후 확보한 강철 무기와 갑옷의 힘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군사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지배의 기반이었다. 훗날 중동에서 ‘다마스쿠스 강(鋼)’이 개발된 것 역시, 톨레도 강철에 필적할 만한 재료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있다. 다마스쿠스 강이 경도에서는 뛰어났지만 유연성 면에서는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가 따라붙는 이유도, 비교의 기준이 이미 톨레도에 설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명검의 진정한 ‘게임 체인저’ 역할은 16세기 신대륙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은 흔히 총과 대포의 승리로 설명되지만, 실제 현장에서 정복자들이 끝까지 의존한 무기는 철제 무기와 갑옷, 그리고 톨레도 검이었다.
화약 무기는 보급이 불안정했고 오작동도 잦았다. 반면 강철 검은 언제나 손에 쥘 수 있는 확실한 힘이었다. 흑요석과 목제 무기에 익숙했던 원주민 사회는 전금속제 무기와 방어구를 거의 경험한 적이 없었고, 강철 검의 대응법 자체를 알지 못했다.
1532년의 ‘카하마르카 사건’은 기술 격차가 전쟁의 룰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가 8000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평화 회담에 나섰을 때,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병력은 불과 168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톨레도 검과 철제 갑옷, 기병, 화승총과 대포를 숨긴 채 매복하고 있었다.
신호와 함께 울린 대포의 굉음, 말의 돌진, 번쩍이며 내려치는 철검이 동시에 몰아치자 잉카군은 공포에 질려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단 하루 만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황제는 생포됐다.
이 전투가 특히 참혹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일방적 살상 구조에 있다. 원주민의 무기는 철제 방어구를 거의 관통하지 못했지만, 강철 검은 면(綿) 갑옷과 신체를 동시에 절단했다.
더구나 많은 원주민 사회가 포로 확보와 의례적 전투, 무력(武力) 게임 정도로 전쟁을 인식한 반면, 스페인군은 철저한 섬멸전을 수행했다. 말과 총성, 강철 검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 초자연적 힘으로 인식되며 공포를 증폭시켰다. ‘공포는 전염된다’는 격언이 확인 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톨레도 검은 단순한 칼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이 전쟁의 양상을 어떻게 바꾸고, 문명의 격차가 패권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이다.
오늘날 톨레도에서 생산되는 검은 실전용이 아니라 영화 소품이나 관광 기념품이 대부분이지만, 그 칼날 위에는 중세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관통한 냉혹한 기억이 서려 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