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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묵의 텃밭, 꾸준한 먹빛 솎기

등록일 2023-08-15 18:21 게재일 2023-08-1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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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철이나 여름날 비가 잦게 되면 들판에 도사리던 잡초의 복병이 일제히 일어서며 진을 치게 된다.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이곳저곳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가지 풀로, 뽑고 뽑아도 질기고 끈덕지게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데 해(害)를 끼치게 된다. 잡초, 즉 잡풀은 사람에 의해 재배, 관리되지 않는 잡다한 풀로 때와 장소에 적절하지 않은 식물이라 할 수 있다.

잡초나 잡목 같은 것은 논밭이나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나 마음의 밭에도 얼마든지 잡스러움이 튀어나와 쑥쑥 자라며 옳고 바른 일들을 방해하고 지장을 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잡념이나 잡담 등 쓸데없는 생각이나 말들이 언행에 민망함을 주는가 하면, 잡종이나 잡상(雜常)스러움은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쳐서 불미스러움이나 낭패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봄날 시름은 풀처럼 자라거늘/어느 때 낫을 얻어 마음의 뜰 베리오(春日傷悲如草長/何時得<91E4>刈心庭)’라고 읊었던가.

서예창작활동은 어쩌면 붓과 먹의 언저리에서 무수히 돋아나고 비집어 드는 잡다한 풀 같은 불순(不純)함을 걷어내는 지난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비탈진 선지(宣紙)의 밭뙈기에 무딘 붓의 날(刃)로 먹을 찍어 점과 획의 골을 타서 필묵의 밭을 일구며, 생동하는 글과 향기로운 글자의 숲을 이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묵향으로 텃밭을 일구듯 순백의 설원 같은 화선지에 싹을 틔우는 몸짓으로 붓이 노래하고 먹을 춤추게 하는(筆歌墨舞) 먹빛의 향연을 줄기차게 펼치는 것이리라.

‘마음의 뜨락에 서(書)의 창을 드리워/먹 갈고 붓 잡기 위안으로 삼은 나날/무채색 끝 모를 깊이에 솟아나는 빛줄기//순백의 설원에 그리움의 점을 찍고/마르고 거친 맥박 애환의 획을 그어/들끓듯 뿜어진 먹빛/눈부신 침묵이어라’ -拙시조 ‘먹빛 솎기’중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농작물이 자라듯이, 글밭(書田)에 어리는 먹의 새순(荀)들은 꾸준하고 한결같은 붓질에서 비롯된다. 부지런히 먹을 갈아 줄기차게 붓을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먹물의 거침없는 번짐과 주체 못할 난감이 잡히고, 붓놀림의 잡기같은 난삽하고 생경한 서체의 행색이 차츰 유려해지지 않을까 싶다. 꽃솎기나 적과(摘果)로 실한 열매를 기약하듯이, 먹빛 솎기는 필묵의 절제와 숙성을 가늠한다.

붓과 먹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먹빛 솎기를 수십년 일삼아온 전국의 중진 서예가들이 ‘월간 서예문화’가 주최하는 KOCAF ‘筆墨의 世界化展’에 초대되어, 오늘부터 1주일간 서울 인사동에서 먹빛의 향연을 펼치게 된다. 문화와 트렌드의 중심인 서울에서 작가 나름의 통찰과 소신의 다변화된 붓질로 한국서예의 새로운 아이템과 발전적인 미래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특장의 서예작품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필묵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쉼 없는 먹빛 솎기는 필묵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함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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