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갑자 중 마흔여섯 번째는 기유(己酉)다. 천간(天干)의 기토(己土)는 규모는 작아도 비옥한 땅이다. 지지(地支)의 유금(酉金)은 귀금속이나 날카롭고 단단한 금속이다. 동물로는 황색 닭이다.
기유일주는 보석이 가득 묻힌 땅의 형상이다. 이제 막 출생한 갓난아이이며, 깨끗하고 순박한 성품의 소유자다. 어린아이처럼 감정적이고 호기심도 많고 다소 겁도 많은 편이다. 언행이 가벼울 때도 있지만, 온화하고 꾸밈이 없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예술적인 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화술에도 능해 대인 관계도 원만하다. 외모나 성품이 좋은 인상을 주는 캐릭터다. 사회생활도 잘 적응하여 무난하게 뜻을 이뤄 성공과 출세가 빠른 편이다. 신용을 중시하며 남에게 믿음을 주고자 노력하는 경향이다. 자기가 맡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여 남에게 신뢰를 준다. 특히 부모로부터 유산, 예술, 기술적 재능과 사업 등 좋은 기운을 물려받을 수 있어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기유일주는 명랑하고 창의력이 넘친다. 재주와 개성을 많이 갖고 있는 일주다. 냉철하게 분석을 잘하는 성격으로 매사 원칙을 중시한다. 솔직하고 거짓을 싫어하며, 확실하고 정확한 것을 선호한다. 허나 너무 예민해서 생각과 번민이 많고 쉽게 감정에 치우쳐 스스로 쓸쓸함과 고독에 빠져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따뜻하고 온유한 성품에 다정다감하여 사랑을 느끼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프랑스 태생 생텍쥐페리(1900∼1944)가 쓴 소설 ‘어린왕자’를 생각해 본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하여 어린왕자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사랑과 소유, 그리고 인간의 고독을 극복하는 과정이 어린왕자를 통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어린왕자가 사막에서 여우를 만나게 된다. 어린왕자는 여우를 보며 얼마나 예쁜지 몰라 다가갔다. “이리 와서 함께 놀자. 난 지금 몹시 슬퍼….” “난 너와 함께 놀 수 없어.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으니까” “‘길들인다’라는 게 뭐지” “사람들 사이에 잊혀진 것들인데….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인간은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는 과정 속에서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사랑이란 감정이 발전하게 된다.
어린왕자에게 언제 올 건지를 말해 달라는 여우. 만나면 몹시 기쁠 거라는 기대감에 미리부터 즐거워할 것이라며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마침내 4시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돼”라고 여우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대상이 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혹시 잊지는 않았는지?
기유일주의 남자는 포용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과 진솔한 대화를 즐긴다. 지혜롭고 미모를 겸비한 아내를 만나 처가의 덕도 볼 수 있다. 여자는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이다. 단정한 이성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낀다. 가끔 남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아이를 낳으면 자식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 남편을 밀어내며 갈등을 겪는 경우가 있다. 집안 살림도 잘하고 요리와 손재주에도 능하다. 남녀 공히 매너와 체면을 중시한다. 기유일주는 닭이 들판에서 노는 형상이다. 닭이 먹이를 쪼아 먹고 땅을 파헤치기를 좋아하듯이 통찰력과 관찰력이 뛰어나고 예민하다. 사람을 보는 눈도 정확하다. 활동성이 강해 부지런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표현능력이 좋아 자칫 오지랖이 넓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목소리가 좋아 성우나 아나운서처럼 듣기 좋은 음색의 소유자가 많다.
기본적으로 귀티나 부티가 나는 사람이다. 매너를 지키며 자신이 받은 만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주변에서 좋게 생각한다. 너저분한 것을 싫어하고 깔끔한 성격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해 날카로운 모습도 보인다. 또한 한순간의 실수로 남에게 비수를 꽂는 말을 해서 그동안 쌓은 공덕을 한꺼번에 날릴 수 있다. 내면이 불안하고 갈등이 심해 판단을 잘못하여 실수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보석이 흙에 묻혀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약자에게는 잘 베풀지만, 강자에게는 날카로운 언행으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우유부단하지만 특유의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잘 활용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장자 외편 ‘달생’에 나오는 이야기다. 기성자가 왕을 위하여 싸움닭을 기르고 있었다. 왕은 “열흘 만에 닭을 싸움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안 됩니다. 아직 헛되이 교만하여 기운을 믿고 있습니다.”
열흘이 더 지나 다시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안 됩니다. 아직도 상대방의 울림이나 그림자에 대해서도 반응을 보입니다.” 열흘이 더 지나 다시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안됩니다. 아직도 상대를 노려보며 기운이 성합니다.”
열흘이 더 지나 다시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완전히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가 되었습니다. 그의 덕은 완전해졌습니다. 다른 닭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날 것입니다.”
교만과 조급함을 버리고, 남의 소리와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며,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눈초리는 버려야 한다. 즉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 목계지덕(木鷄之德)이다.
“느끼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느끼는 감정 없이 스치는 시간들을 ‘삶’이라는 고상한 언어로 부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것이 ‘삶’이라면 개도 고양이도 살아간다. 동물에게는 느낌의 고뇌가 있던가.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만이 그 끈을 놓지 못하고 고뇌의 기억을 성숙으로 이끄는 지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주려고 한다. 오직 사랑만이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굽은 것을 펴고, 회복하고,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진정한 창조력을 갖춘 사랑이야말로 완벽한 구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