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갑자 중 서른여섯 번째는 기해(己亥)다. 천간(天干)의 기토(己土)는 화초나 묘목을 심은 작은 정원이나 논밭이며, 지지(地支)의 해수(亥水)는 큰 강이다. 그러니까 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초원의 형상이다. 동물로는 황금돼지다.
기해일주는 기토(己土)라는 작은 땅이 해수(亥水)라는 물을 만나 ‘물기 촉촉한 땅’을 이룬다. 사람이 반듯하고 깔끔하고 섬세하고 흐트러짐을 싫어한다. 작은 것, 세세한 것까지 챙기므로 주변사람에게 신뢰감과 믿음을 준다. 너무 실수하지 않고 규칙을 잘 따르는 성향으로 인해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해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삶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분들이 많다. 허나 모든 것을 뒤엎는 혁명의 기운도 품고 있어 삶의 불예측성이 높은 일주이기도 하다. 바다처럼 넓다가도 세숫대야처럼 좁기도 하다. 굉장한 처세술을 부리다가도 어느 날 만사 싫증을 느껴 뜬금없이 반전을 꾀하기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기도 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주변 상황에 맞게 자신을 포장하는 능력이 뛰어난 탓도 있다. 본인 스스로도 모순을 느껴 간혹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찰하는 힘도 길러야 한다.
또한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 보증을 서거나 사기당하기가 쉬워서 돈이 많이 모이다가도 한 번에 재물을 잃을 수 있다. 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좋으나 재물의 관리가 허술해 주의가 요망된다. 개인사업보다는 조직생활이 더 나으며 가족 간의 돈거래는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좋다. 특히 부모 유산으로 인해 분쟁의 소지가 있어 조심해야 한다.
물상으로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과 같다. 사회와 떨어져 있어 소외된 생활로 외로움이 수반되는 삶을 살기도 한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작품 ‘펨페스트(폭풍)’가 있다. 밀라노 군주인 프로스페로는 마술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동생에게 나라를 빼앗긴 채 어린 딸 미란다와 함께 나무 상자에 넣어져 바다에 버려진다. 기적적으로 외딴 섬에 당도한다. 거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다만 섬에는 마녀가 죽으면서 나무에 가둔 많은 선량한 정령들이 있었다. 프로스페로는 마법을 사용해 그들을 풀어준다. 우두머리 이름은 에어리얼이다. 그는 작은 요정 에어리얼을 하인처럼 부린다. 동생을 도와 자신을 추방한 나폴리 군주가 자신의 딸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뱃길에 프로스페로는 마법으로 폭풍을 일으켜 배를 난파시킨다. 이들의 죄를 응징하기 위해서다.
미란다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마법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딸에게 12년 전에 동생에게 추방당한 일을 이야기해준다. 요정 에어리얼은 나폴리 군주의 아들 페르디난드를 외진 곳으로 피신시키고, 미란다와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처음으로 남자를 본 미란다는 잘생긴 청년 페르디난드와 사랑에 빠진다. 프로스페로는 딸 미란다와 페르디난드의 사랑을 통해 보복 대신에 동생을 용서하고, 화해와 관용을 통해 새 삶을 누린다는 내용이다.
그는 섬을 떠나면서 마법에 사용한 지팡이를 섬에 버리고, 요정 에어리얼도 자유롭게 풀어준다. 여기서 마술이 권선징악으로 이용된다. 마술과 마법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를 유발한다.
해(亥)는 동물로 돼지다. 돼지꿈을 꾸면 로또에 당첨된다는 속설이 있다. 또는 저금통을 돼지 모양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저축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좋은 이미지로 사용한다. 우리는 고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사용한다.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돼지 돈(豚)과 돈의 발음이 비슷해서 사용한 것이 아닐까?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돼지를 뜻하는 다른 한자어로는 저(猪)가 있다.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猪八戒)의 원래 이름은 오능(悟能)이다. 오능의 뜻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부처요, 이미 깨달음의 상태가 부처라는 소리다. 문제는 돈이나 이성 또는 재물을 보면 그만 술 취한 무리가 되어 헤까닥 중생으로 변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여덟 가지 계율만 지키라는 뜻에서 이름이 팔계(八戒)로 불린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마지막 부분에 ‘어느 쪽이 돼지인지, 어느 쪽이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은 작가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돼지처럼 지나친 욕심을 낸다면 경을 칠 일이 생기고 신랄하게 비판당할 일이 생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각인된 돼지의 이미지와는 별개로 ‘돼지’는 인간에게 효용성의 측면에서 유익한 동물이다.
기해일주는 기본적으로 재물의 기운을 깔고 있어 꼼꼼하고 부지런하긴 하지만 스케일이 좁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해야 할 일과 감당해야 할 몫이 커지면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 마음속에 큰 산을 품고 있어 삶은 안정성이 있지만 나를 얽매는 규제를 깨버리고 싶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즉 특별한 재능을 숨기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기운으로 볼 수 있다.
남녀 모두 배우자에게 충실하다. 남자는 현명한 아내를 만나 해로할 가능성이 높다. 노래를 잘하거나 목소리가 좋은 경우가 많다. 선견지명과 탁월한 감각, 유머 위트에도 뛰어나다. 다정다감한 면이 있고 순박하며 재주도 많아 팔방미인이다. 영감, 직감, 예감이 좋아 모든 감각이 살아있다고 하겠다.
반면 부드러우며 여성적인 성향이 있어 말과 행동이 소극적이고 우울, 근심, 걱정, 애수가 있다. 귀가 얇아 타인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향이 있어 주의해야 한다. 의심과 이기심이 있어 이해타산적이고 짜증을 많이 내는 편이다. 역마성이 있어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여행이나 무역과 같이 해외에서의 생활이 유리하겠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고 다르게 느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사랑’이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다리다. 그리고 내 안에 존재하는 단점이나 외면하고 싶은 어두운 면을 포용하고자 하는 힘이 자기애(自己愛)다. 이것이 ‘너’와 ‘나’를 넘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