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갑자 중 서른 번째에 해당하는 계사(癸巳)다. 천간(天干)의 계수(癸水)는 약한 음수(陰水)다. 깨끗한 물, 비, 연못을 의미한다. 지지(地支)의 사화(巳火)는 불꽃, 연기 등을 상징한다. 동물로는 검은 뱀이다.
계사일주는 물과 불의 만남이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기운이다. 12운성으로 ‘태(胎)’다. 태(胎)는 생명이 사라진 후 다시 시작하는 단계다.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은 시작의 단계이므로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다. 순수하고 낭만적이며, 보이지 않는 꿈을 먹고 사는 이상주의자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형이다.
계사일주는 물속에 사는 뱀의 모습이다. 또한 수화상전(水火相戰·물과 불이 서로 싸우는 모습)이니 성급한 성미와 함께 변덕스러운 성향을 보일 수가 있다. 음양이 극과 극을 오가니 그만큼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정신적인 질환을 겪을 수가 있고, 우울증이 올 수도 있다. 뱀은 이빨에 독이 있어 독한 말을 하며, 혀가 둘로 갈라져 있어 두 말을 잘한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말을 잘 바꾸는 단점이 있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스신화에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가운데 두 번째는 레르나늪에 사는 머리 아홉 달린 거대한 물뱀 히드라를 죽이는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물뱀을 처치할 방법을 조카 이올라오스에게 상세히 설명한다. “히드라의 머리는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나온다고 한다. 내가 낫으로 히드라의 머리를 벨 터인즉 너는 불방망이로 그 벤 자국을 지져버려라. 불과 물뱀 히드라는 상극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히드라를 불로 잡아야 한다.”
헤라클레스는 칼로 히드라의 대가리 하나를 잘랐다. 그때 이올라오스가 재빨리 불방망이로 잘린 곳을 지졌다. 불에 지져진 곳에서는 다시 대가리가 생겨나지 않았다. 헤라클레스와 이올라오스는 히드라의 대가리를 길가에 묻고 무거운 돌로 눌러 놓은 다음 뮈케나이로 돌아갔다. 제우스신이 히드라를 하늘로 불러 올려 별자리로 박아주었다. 우리가 ‘물뱀자리’라고 부르는 별자리이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미움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술에 취하여 아내와 자녀를 죽인다. 그는 죄책감에 스스로 벌을 받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12가지 과업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운명에 맞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타고난 운명이라면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지 사화(巳火)가 배우자궁으로 좋은 배필을 만나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한다. 남자는 역마와 재물이 깔려 있어 좋은 집안의 여자를 맞이하고, 사회생활을 잘하는 배우자를 얻게 된다. 여자는 현실적인 감각이 있어 조건이나 배경을 잘보고 결혼상대를 결정하여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부부 금슬도 역시 좋다.
계사일주는 천을귀인으로 공직 등 명예로운 직업을 갖고, 사회적 성공에 이르는 일주다. 물이 필요한 여름에 시원하게 내리는 비처럼 두루 쓸모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으며, 역마 기운이 있어 일생을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일귀(日貴)격이라 순수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성정이 자비롭고 용모도 준수하고 지혜로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원칙에 밝고 실리를 중시하니 개인사업으로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는 조직 내에서 대표나 고위직을 보좌하는 참모형이 제격이다.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 말기에 인상여는 조나라의 내시였던 무현의 식객이었다. 무현이 우연히 시장에서 산 옥구슬은 보물 화씨의 벽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혜문왕은 무현에게 구슬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보여주면 화씨의 벽을 빼앗길 게 뻔해 무현은 화씨의 벽을 도난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느 날 무현이 출타한 사이 집을 뒤져 보물을 가져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무현은 연나라로 도망하려 했다.
인상여가 말했다. “연나라는 조나라보다 약하므로 조나라가 공을 포박해 조나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차라리 공께서 어깨를 드러내고 형틀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 것이 나을 것인데, 그러면 요행으로 죄를 벗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무현이 크게 깨닫고 조왕에게 사죄하자 조왕은 다행히도 무현을 용서했고, 무현은 인상여의 용기와 지모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괴로워한다. 이미 보물을 취한 조혜문왕은 성취감에 취해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했기 때문에 무현을 용서해준 것이다. 인상여는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탁월한 판단으로 주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우리가 자주 쓰는 ‘완벽하다’의 ‘완벽(完璧)’은 인상여가 천하의 보물인 화씨의 벽을 탐낸 진나라 왕으로부터 죽음을 무릅쓴 용기로 다시 가져온 데서 유래했다. 그 공으로 재상이 되었다. 그러한 용기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전략가 염파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개 식객에서 재상이 되자, 염파장군이 시기하는 것을 알고 맞대면하는 것을 피했다. 식솔이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염파장군을 일부로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염파가 이 말을 듣고는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빈객으로서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 “저는 상경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벗이 되었다. 부형청죄(負荊請罪)와 문경지교(刎頸之交 ) 고사가 여기에서 나왔다.
조나라가 한때 최강국인 진나라와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염파, 인상여와 같은 충성스런 장군과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죽거나 쫓겨나면서 조나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뱀 같이 냉철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스스로 적을 물리칠 능력이 양성될 때 외교력도 발휘되는 것이다.
통 큰 사람은 남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그리고 자기가 남에게 의지하고 호의를 받는 것은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호의와 친절을 베풂은 우월감의 상징이며, 그 반대는 열등감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