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자 봄날에 지천으로 꽃이 피듯 온 산천이 울긋불긋 풍엽으로 물들고 있다. 꽃이 차례대로 피고지고 하듯이, 푸르고 무성함을 자랑하던 초목도 기온의 변화에 따라 저마다의 색과 빛으로 한껏 피어나다가 하나, 둘 시들고 떨어지는 조락(凋落)의 시기를 맞게 된다. 가을임에도 마치 봄날같이 자연의 색조가 여지없이 입혀지기에 두번째 봄이라 하기도 하고 소춘(小春)이라 칭하기도 한다. 다만, 봄날이 여성의 화사한 아름다움이라면 가을날은 남성의 수수한 멋스러움(?)이라 해야 할까?
그래서 가을을 남성의 계절이라 했던가? 스산한 바람소리나 떨어지는 낙엽에도 왠지 마음 뒤숭숭하고 헛헛해지는 듯한 느낌은, 아마도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심하게 받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센티멘탈해지고 일시적인 우울감에 빠져드는 것도 계절의 변화로 찾아오는 감정의 기복이 어쩌면 남자에게 더 크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일과 회사밖에 모르다가 퇴임한 중년의 남자들에게는, 어쩌면 떨어지는 낙엽이나 길거리에 뒹구는 고엽(枯葉)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여겨져서 자신도 모를 속울음이 더욱 깊어지는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아내들은 일벌레처럼 일만 하다가 은퇴한 남편들을 ‘누레오치바(젖은 낙엽)’라 빗대며 쓸모없고 귀찮게 하는 처치곤란한 존재라 했을까?
그렇다고 여성들이 가을날을 무덤덤하게 대하고 아무 거리낌없이 보낸다는 얘기는 아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가을은 감상적이며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사색의 계절이다. 결실과 수확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미어지고 상실감에 젖어들게 하는 아이러니한 우수(憂愁)의 나날이기도 하다. 텅 빈 충만감이 밀물처럼 몰려오면서 무엇인가 부족하고 결핍의 언저리를 맴돌게 하는 상심(傷心)의 여울같은 것이랄까? 그렇기에 가을에는 누구나가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고 그냥 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꽃이 진 자리마다/열매가 익어가네//가을이 깊을수록/우리도 익어가네//익어가는 날들은/행복하여라//말이 필요 없는/고요한 기도//가을엔/너도 나도 익어서/사랑이 되네”(이해인 시 ‘익어가는 가을’ 전문)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데, 사람도 익을수록 벼처럼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낮출 수는 없는 걸까? 사람에 따라 자라온 환경이나 가치관, 생각 등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대상을 두고서라도 관점이나 감정이 달라지게 됨은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듯이(過猶不及), 과욕이나 과잉에서 비롯되는 행태나 폐단을 익히 알면서도 줄이거나 멈추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독단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려와 존중의 마음이 부족하고 경청과 절제의 미덕이 결여되기에 겸손과 포용의 가슴을 넉넉하게 펼 수가 없는 것이다. 가을을 탄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이 격해졌다고 치부하는 궁색함보다는,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떨구고 비워내는 나무의 순연(純然)함을 배울 일이다. 가을처럼 온전하게 익어가는 보법(步法)을 익히며 푸른 하늘을 닮아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