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흠뻑 내린 봄비가 대지의 생명을 일제히 깨우고 있다. 어느새 양지 바른 비탈엔 여린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앙상하던 가지엔 움이 트는가 하면, 서둘러 꽃을 피우는 봄의 전령(傳令)들은 새뜻하게 웃음짓고 있다. 언 땅과 세찬 바람 속에서도 뿌리와 가지를 건사했기에 땅의 기운과 봄볕의 입김으로 당당히 땅을 헤치고 일어서며 온몸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노래하듯 흐르는 개울물의 졸졸거림을 추임새 삼아 연둣빛 수양버들이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며 봄맞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봄은 색깔의 변화로부터 온다. 파릇한 새싹이며 연푸른 잎새, 울긋불긋 진달래와 복숭아꽃,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새하얀 목련과 눈송이 같은 벚꽃 등이 돋거나 피어나면서 천연색 봄의 향연이 시작된다. 삭막하고 스산한 무채색의 겨울 화폭에 군데군데 채색의 삽화가 그려지고 더해지면서 화사한 봄의 캔버스가 알록달록 채워지는 것이다. 봄에 피는 노란 꽃은 어쩌면 봄을 대표하는 컬러가 아닐 듯싶다. 샛노란 개나리와 유채꽃은 희망이나 쾌활, 기대 등의 꽃말을 차치하고라도 노오란 꽃물결을 보기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지고 설레지 않을까 싶다.
노란 병아리 역시 봄날의 이미지를 더해준다.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 옆으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병아리떼는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을까? 3~5월경에 자연부화하는 병아리의 탄생과정은 신기하기만 하다. 껍질을 경계로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고 쪼면서 껍질을 깨고 나와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부리로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5550>)’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하여, 줄탁동시(<5550>啄同時)는 생명의 오묘한 탄생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두 존재가 하나의 계기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는, 결국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즉 아무리 좋은 의견을 가지고 있어도 한 쪽의 힘이나 논리만으로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까? 이렇듯이 어떠한 사물이나 상태의 대부분은 작용과 반작용처럼 동작과 반응으로 나타나는 상호작용의 결과와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가정이나 직장, 사회생활 등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이처럼 긴요하고도 치밀한 상호작용의 원리와 동작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한 쪽의 주장이나 노력만으로 성사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의 흐름이고 이치다. 학업을 펼치거나 창작활동의 영역에서도 스승의 가르침이나 우연찮은 동기부여를 통해 문리(文理)가 트이고 번뜩이는 예술혼이 살아날 수도 있다. 행운도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곳엔 깃들지 않는 인간적 노력의 산물이듯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꾸준히 노력하며 쉼없이 추구하는 손길이 어떤 상황이나 시간과 합치되면 보다 긍정과 희망적인 시너지 효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