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병인(丙寅)

등록일 2022-02-23 20:19 게재일 2022-02-24 16면
스크랩버튼
류재학 작가의 ‘태극호문명와당인(太極虎紋銘瓦當印)’.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아 중앙에 호랑이 문양, 가운데에 태극 문양, 주위에 주역 하늘, 땅, 물, 불을 새긴 와당 형식의 인장 작품이다.

하늘의 기운인 병화(丙火)를 태양이라 칭하고, 양 중의 양이며 땅의 기운인 지지(地支)인 인(寅)을 호랑이로 형상화하지만, 호랑이로 태양 아래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낸 모습이다. 옛사람들은 ‘동방 인(寅)’이라고 했고 시작하는 기운을 의미하기도 한다. 호랑이 중에서도 ‘병(丙)’이라는 호랑이는 고향을 떠나 개척을 하며, 다른 기운을 받아야 성공하는 간지다. 하늘이 땅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을 운용하는 호랑이가 ‘하늘 시계 병(丙)’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그 이후 일이 달라진다.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편 김현감호(金現感虎)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면 8일부터 15일까지 경주의 남녀가 흥륜사 탑돌이를 하며 복을 비는 행사가 있었다. 김현이 늦게까지 탑돌이를 하는데 웬 처녀가 염불을 하며 김현의 뒤를 따라 돌았다. 서로 눈이 맞아 처녀로 변신한 호랑이가 김현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정을 통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요, 다른 종류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일이라. 처녀 호랑이는 김현을 출세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이야기다. 김현은 벼슬에 등용된 뒤에 호랑이 처녀의 소원대로 경주 서천가에 절을 짓고 이름을 호원사(虎願寺)라 하였다. 남편 출세를 위해 사람이 아닌 호랑이 처녀의 희생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남편들은 아내로 인하여 곤욕을 치르고 있다. 서로가 오십 보 백 보가 아니겠는가.

류대창 명리연구자의 전각 작품 ‘경(敬)’. 마음에 경을 두고 정신을 집중하여 외물(外物)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류대창 명리연구자의 전각 작품 ‘경(敬)’. 마음에 경을 두고 정신을 집중하여 외물(外物)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병인(丙寅)은 ‘봄의 태양’이라고 하며 새로운 생명을 알리기도 한다. 1866년 병인년은 조선을 서양에 처음으로 알리는 해이기도 하다. 중국의 속국 정도로 알았던 조선이 엄연한 독립국임을 알리는 기회였다. 그러나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천지 분간도 못하여 자신과 집안만을 생각했던 선조들이 결국은 죽을 쑤어 일본에 주어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서구열강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입한 최초의 사건이다. 프랑스 로즈제독은 병인년 10월, 7척 군함에 600명의 해병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 물치도(지금의 작약도) 부근에 나타나 14일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고, 16일 강화부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식량을 약탈했다. 그러나 10월 26일에 약 120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 소부대에게 공격받아 20여명 사상자를 내고 도주한데 이어 11월 9일에는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양헌수의 포수꾼에게 30여명이 사상당하는 참패를 맛보았다. 이 전투의 참패로 프랑스군은 조선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한다. 11월 11일 강화성에서 철수하면서 모든 관아를 불 지르고 막대한 양의 보화, 서적, 무기 등을 약탈하여 중국으로 물러갔다. 병인양요의 결과로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구미 열강은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인식하게 되어, 종래의 조선과 청나라 관계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고 프랑스군이 탈취해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훗날 유럽 사회에 조선과 동양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중요한 호랑이해에 그 중요한 병(丙)의 해에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은 작은 전투의 승리에 도취하여 결과는 조선이 서양의 먹이가 된다. 대원군이 병인년의 승리가 자신과 국가와 집안을 거덜 내는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듯이 그것이 대원군 혼자의 잘못이었을까?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들의 행동과 결단이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복거일 저서 ‘낭만적 애국심’에서도 볼 수 있다.

류대창명리연구자
류대창명리연구자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의 ‘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되었을 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선택한 길이다. 로마군과의 항전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그는 관 속에 누워 몰래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로마군 진영에 이르렀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장차 로마 황제가 되리라고 예언 한 다음, 최후의 소원으로 야브네에 학교를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베스파니아누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 사소한 은혜가 유대교를 살렸다. 요하난은 성경이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가든 지니고 갈 수 있는 조국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면 유대교는 살아 남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신전이 사라져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보았다. 이 사실이 마사다의 반생명성과 불모성에 대한 궁극적 평가다. 로마군과 항전에서 마지막 남은 요새는 사해 연안의 마사다였다. 거기서 그들은 서기 73년까지 버텼지만 결국 공성 기계들에 의해 무너졌다. 결국은 여인들과 아이들을 포함해서 960명의 생존자에게 도망치거나 항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들은 아내와 아이들의 목을 따 먼저 죽인 다음 자신들도 자살했다. 마사다의 참극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반생명적이다.”

자살을 미화해서도 영웅시하는 사회는 반인륜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싸워 죽는다면 자랑스럽지만, 또한 살아남아 나라를 재건해야 할 사람도 필요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설이 뜨거운 이슈다. 마치 미친 호랑이가 날뛰면 그 피해와 환란은 선량한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교훈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류대창의 명리인문학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