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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항아리

등록일 2021-11-04 18:19 게재일 2021-11-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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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빈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저녁을 굶은 아이와 젖이 마른 엄마가 부둥켜안은 것처럼 둥근

새벽에 울려 퍼지는 수도원의 종소리처럼 둥근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운명이 없는 눈송이들이 항아리에 담긴다

가장 멀리서 가장 깨끗하게 온 것들을 담아

어떻게 이토록 자기의 가슴을 슬프게 만들 수 있는지

빈항아리는 차곡차곡 눈을 쌓는다

슬픔을 발효시키려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듯

둥근 자세를 바꾸지 않고

모든 기도를 다 드린 마음처럼 둥글게

항아리는 비어있다

‘빈 항아리’는, 결국 사라질 것이기에 “운명이 없는 눈”을 조건 없이 받아준다. 텅 ‘빈 항아리’는 비록 아무 것도 갖지 못한 가난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눈처럼 이 지상에서 갈길 잃은 슬픈 이들을 엄마처럼 품어줄 수 있다. 그래서 그 항아리는 ‘둥근’ “수도원의 종소리처럼” 구원의 이미지를 지닌다. 곧 사라져야 할 눈송이들은 그 빈 항아리의 포근한 품속에서 순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기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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