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성상파괴운동
서양미술사에서 13세기는 중세에 속하며 고딕양식이 서유럽 전역에 확산되던 시기이다. 13세기를 이탈리아어로는 두에첸토(Duecento)라고 부른다. 1200년대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의 두에첸토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은 비잔틴 미술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1054년 기독교는 정치적, 신학적 입장차 때문에 교황 중심의 로마 가톨릭과 비잔틴 제국의 동방정교로 분열되었지만 비잔틴 미술은 이탈리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미술을 마니에라 그레카(maniera greca)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 풍’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비잔틴 양식을 가리킨다.
로마 가톨릭과 비잔틴 교회는 수백 년 넘게 갈등과 반목을 이어왔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로마제국 단독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그 이름에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불림·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이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 분명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의 이전은 중심의 이동이자 권력의 이동이다. 그리고 그 권력에는 종교 권력도 포함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최고의 머리는 성인 베드로의 대를 잇는 로마의 교황이다. 그런데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옮겨가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로마 교황과 대립하게 된다.
동·서방교회 충돌의 불씨가 된 것은 성화 사용에 대한 입장차였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기는 했지만 기독교 교리가 아직 완전히 갖춰지지 않아 여러 신학적 쟁점들이 종교회의에서 다퉈지고 있었다. 교회에서의 미술품 사용을 두고 찬반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을 한다. 대(大)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그림 사용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교육적 목적으로 그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술품 사용 반대파는 우상숭배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성서의 가르침을 이유로 내세웠다. 교황의 지침에 따라 서방교회는 적극적으로 미술품을 수용했던 반면 비잔틴의 동방교회는 교회에서의 미술품 사용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파괴했다. 이 사건을 가리켜 ‘비잔틴 성상파괴운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술품 사용을 둘러싼 두 교회 간 분쟁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476년 게르만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이 몰락했다. 게르만족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토착 로마인들과의 유대 및 결속이 필요했고,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를 적극 수용했다.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야만족들을 개종시키는데 미술품은 용이한 수단이었다. 반면 비잔틴의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면서 각 지역별로 다양한 신학적 이론들이 생겨났고, 교리에서 벗어난 이단적 사상으로 비잔틴교회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 문제와 직결된 그림 사용에 대해 완고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서방교회는 로마제국 황제의 정통성을 이어가던 비잔틴에 명목상 종속되어 있었다. 730년 비잔틴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금지령을 내렸고, 이를 이유삼아 서방 교회가 콘스탄티노플에 바치던 세금 납부를 거부하면서 서로간의 골이 깊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속내는 성상금지령을 빌미로 비잔틴의 정치적 간섭과 규제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비잔틴과 거리를 두는 대신 야만족들이 세워 왕성한 힘을 키운 프랑크 왕국에 손을 내밀었다.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754년 파리 북부 생드니 대성당에서 프랑크의 왕 피핀 3세를 위한 축성식을 개최했고 그 자리에서 그에게 ‘프랑크의 왕이자 로마의 대군’이라는 직위를 내렸다. 이로써 프랑크의 왕은 교황으로부터 지배와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교황은 프랑크 왕의 힘을 등에 업고 비잔틴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