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인간 실격’의 주인공은 자신을 인간으로서 자격을 잃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이지만, 사회로부터 인간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기에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사람들을 위한 변론’에서 실격당한 사람은 장애인이다. 그 자신도 장애인이어서 그런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그의 변론은 폐부를 찌른다. 그의 사유의 깊이는 그의 고통에 비례했음이 분명하다.
장애인은 살아가는 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이 있었다고 한다. 김원영 변호사는 장애인의 삶이 손해라고 생각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삶은 아니라면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장애인도 자기 삶의 저자이다. 상처받지 않은 척 노련하게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연기하지만, 내가 나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일치시키고 싶은 기본적 욕구를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혐오하지 않고 수용하기로 선택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도 가능하다. 사진 찍듯이 한순간에 포착되는 매력은 떨어지지만, 초상화를 그리듯이 천천히 바라보면 장애인도 아름답다. 장애인을 존중하기 위해 괴물 같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변론을 읽다 보니, 어렸을 때 뚱뚱하다고 놀림 받던 일이 생각난다. 장애인의 상황이 더 안 좋기는 하지만, 외모 차별, 능력 차별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 현상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상 체중인 적이 없는 나의 신체는 어린 시절에는 놀림거리였고, 커서는 매력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중증 장애인과 나의 신체를 비교하는 것이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신체 때문에 놀림 한 번 받지 않은 독자들보다는 조금 더 이 변론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변론은 어느 정도 성찰하는 힘을 가진 일부의 장애인에게만 해당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근거가 없는 장애인들도 많다. 어떤 상황에서도 수용하기로 선택하기에는 버거운 장애를 가진 사람, 아무리 천천히 초상화를 그리려고 해도 보기가 저자 자신도 부담스러웠던 남윤광 같은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
그런 중증의 장애인들은 존엄하지 않은가? 이들을 위한 변론이 필요하다. 그 변론은 사진 찍듯이 한순간에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섬세한 손길로 초상화를 천천히 그려주기를 바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장애인들도 행복과 고통을 느낄 줄 안다는 것으로 변론하고 싶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부여돼 있다. 어떤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가진 사람도 좋거나 싫은 감정은 느낀다. 행복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그 하나만으로도, 장애인은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똑같이 울고 웃는 존재이다. 감정 앞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이 존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