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갑질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면신례(免新禮)를 들 수 있다.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 벼슬에 임명돼 처음 출사하는 사람을 신래(新來)라고 했는데 이 신래가 실질적으로 해당 관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면신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신입관원이 선배관원들에게 행하는 일종의 신고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선후배의 관계와 해당 관료 집단의 화목을 도울 수 있는 일종의 통과 의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성을 띠고 있었기에 경제적,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악습에 대해 성종 때 성현(1439~1504)은 새로 문과에 등과한 선비의 지나친 호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려는 데서 면신례가 나오게 됐다고 그 유래를 분석했다. 처음 벼슬하는 사람의 오만방자함을 막고 선후배의 위상을 엄격히 해서 조직생활에 순응하게 하려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율곡 이이(1536~1584)는 고려 말 부패한 과거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했다. 과거 제도가 부패해 젖내 나는 귀족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선배들이 나이어린 급제자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것이 면신례의 유래가 됐다는 것이다.
세상 풍속이 저속하고 투박해지니 여러 관청에 처음 배속된 관원이 있으면 벌례(罰禮)나 면신이라는 명목으로 술과 고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마시고 먹으며 어떻게든 음식의 가짓수와 그릇 수를 더욱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요구했던 풍습이었다. 당시 처음 관청에 들어왔을 때 그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던 사람도 후배가 들어오면 똑같이 후배에게 반복했다.
관료사회에서 심한 병폐를 일으키고 있던 이 제도를 1664년(현종5) 대사간 남구만(1629~1711)이 관원들의 면신례를 금지시키기를 청한 글이 ‘약천집’에 수록돼있다. 당시 적폐인 습속을 벼슬아치의 수치로 여긴 남구만은 임금에게 계(啓)를 올린 것이다. 남구만은 사대부가 출신(出身)해 군주를 섬기는 것은 이익을 얻고 녹봉을 받기 위한 계책만은 아니니 선배들이 후배를 처음 맞이할 때는 읍하고 겸양하며 자리에 오르게 하여 예우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찌 되었건 왕조시대의 면신례가 서열과 위계를 중시하는 관료 집단에서 선배가 후배를 길들이는 도구로 이용된 것은 분명하다. 이를 명분으로 새로 출사하는 관원에게 참기 어려운 모욕과 학대를 가했던 데서 신래침학(新來侵虐)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신래 침탈을 금지하는 규정이 경국대전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못된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시대에 줄곧 제기됐다.
이와 같은 기존 세력의 텃세 부림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많이 나타난다. 현시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군대폭력이다. 장군과 그의 부인 갑질을 비롯하여 고참병사가 신참을 가혹하게 괴롭히거나 지속적으로 폭행한 극단적인 사건들이다. 또한 기업에서 애사심을 기른다며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한 신입사원에게 가하는 갑질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듯 선후배간 엄격한 위계질서와 복종을 강요하는 문화는 대학에도 나타난다. 신입생 신고식이라는 관행으로 행해지는 폭행, 강요 등 군대식 얼차려와 각종 가혹행위가 근절되지 않자 경찰에서는 대학 내 군기잡기 논란과 관련해 현재 시행되고 있는 집중신고기간을 연장한다고 밝혔다. 오늘날의 갑질은 인권유린은 물론이고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으며 그 잔혹성은 면신례의 관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다. 특히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상대에게 가해지는 우리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갑질문화의 악순환 고리를 끊지 않고 선진국진입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