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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갚는 한 해가 되길

등록일 2021-01-04 18:51 게재일 2021-01-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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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사람은 소규모 집단인 가족과 친족만으로 형성된 자연적 공동체에서 다수 언어와 다수 인종으로 구성된 대규모 집단의 사회나 국가를 이루고 다양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유형 속에서 개인이 속한 사회나 국가에 빚이 없는 사람은 없다. 빚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남에게 빌린 물질적인 빚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로 신세지고 도움 받으며 사는 마음의 빚이다. 성현은 도의 가르침을 세상에 세우는 것이 빚이고 학자는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는 것이 빚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빚이다. 공직자들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빚이고, 출가자들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빚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빚이 없다는 것은 주어진 책임이나 의무를 이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같다.

한(韓)나라에서 대를 이어 정승 벼슬한 사람으로 장량(장자방)이란 사람이 있었다. 장량은 본래 한나라가 진(秦)나라에 멸망당하자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집안의 재산을 모두 털어 진나라 시황제의 암살을 도모하였다. 후에 한나라 고조를 도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공을 다 이룬 뒤에는 물욕을 버리고 물러나 신선의 도를 즐겼으므로 세상에 빚이 없는 사람으로 전해진다.

시골선비 박수(1864~1918)가 살았던 시대는 지도층의 분열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구한말이다. 지도층의 분열은 외세의 압박을 불러들여 백성들의 삶의 궁핍과 정신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박수는 그의 저서 ‘중당유고(中堂遺稿)’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빚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빚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그저 빚을 갚기만을 바라며, 빚이 있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그저 빚이 없는 사람이 될까 염려할 뿐입니다. 저는 마음속에 빚 문서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아직 한 푼도 청산하지 못하여 늘 개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박수가 말하는 마음의 빚은 자신과 사회구성원인 백성으로서의 책무이다. 사람은 자기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근원적인 빚을 지고 산다는 의미이다. 박수는 얽히고설킨 사회 속에서 빚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살기가 힘들수록 맹자는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고 했다. 즉 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도 없다는 뜻이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힘들며 독립적 인격체로 살기가 어렵기에 마음의 빚은 더욱 움츠릴 수밖에 없다. 구한말은 500여 년을 유지해 오던 한 왕조가 스러져가던 때였다. 당시의 백성들은 지배층의 부패와 정치놀음에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삶을 겨우 유지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중산층은 무너지고 실업자는 이중 삼중으로 쌓였다. 정치는 진영논리에 빠지고 부패는 개혁으로 포장되었다. 다수의 횡포는 규정과 법치를 농락하고 있다. 새해에는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박수가 원하는 빚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그 빚을 갚기만을 바라며, 빚을 근심하지 말고 빚이 없는 사람이 될까 염려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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