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름날의 무더위를 이기는 법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보양식이다. 특히 복날에는 삼계탕 집에 손님들이 만원이고, 보신탕집도 성업이다. 보신탕하면 떠오르는 개고기의 식용에 대해서는 외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많다.
보신탕문화가 서구사회에서 논란의 쟁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무렵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개막을 앞둔 시기다. 당시 브리지트 바르도를 필두로 한 동물애호가들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서유럽에 한국의 보신탕 문화가 대표적인 야만적 문화의 한 형태로 비춰졌었다. 세계 각 국마다 그 나라 민족들이 즐기는 혐오스런 음식이 많을진대, 우리의 보신탕문화가 서구인에 의해 도덕적 몰매를 맞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한국이 경제성장을 토대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는 과정에서 최대의 국제적 행사를 치르다 보니 보신탕 문화가 다른 나라의 것에 비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선조들은 복날에 개고기를 즐겼음이 기록돼 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줄 때 잔칫상에 개고기가 올라온 것도 흥미로운 기록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의 유배지에서 흑산도에 유배돼 있던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개고기 요리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편지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면, 섬에 유배된 형이 짐승고기는 도무지 먹어보지 못한다고 하니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라도 섬에서 자라는 수많은 야생 개를 잡아 5일에 한 마리씩은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섬이라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기에 그물이나 덫을 사용하던지 식통(食桶)을 만들어 사냥하라고 개잡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은 흑산도에서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님을 위해 개고기 섭취를 권유했으며, 산속의 개를 잡는 방법 설명과 요리법에 대한 설명도 매우 구체적이다. 요리법은 박제가가 만든 법으로 식초, 장, 기름, 파 등으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까지 개고기 요리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개고기 요리가 광범위하게 보급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학자 홍석모(1781~1857)가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도 `시장에서도 구장(狗醬)을 많이 판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종실록`에는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를 좋아하는 줄 알고나서 날마다 개고기 구이를 만들어 제공해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청현직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전통시대의 보신탕문화의 역할을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여름이면 무더위를 보신탕으로 이긴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특히 복중에 많이 먹는 이유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해 개고기는 화(火), 복(伏)은 금()에 해당, 화기(火氣)로서 금기(氣)를 억눌러 더위를 이겨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보신탕 문화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서유럽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다. 동물애호의 시각과 동물권 시각에서 보는 것인 반면, 보신탕 문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국내 시각은 다양한 음식문화의 차원에서 조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부정과 긍정이라는 보신문화를 가치관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지금까지 소모적인 논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즉,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다소 복잡한 문제를 쉽게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