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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에 더 쓸쓸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빈소

권광순··안찬규기자
등록일 2015-06-15 02:01 게재일 2015-06-15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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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포항서 두분 영면<BR>訃告 안 내 조문객 적어
▲ 지난 12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달선(91) 할머니의 빈소를 찾은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7) 할머니가 “슬픔과 한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먼저 가서 쉬고 있어라. 내가 힘 닿는대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라며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이용선기자

일본군 위안부 최연소 피해자 고 김외한 할머니(84)의 빈소가 마련된 12일 오후 안동의료원 장례식장에는 적막감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이날 오후 늦게까지 찾는 이는 20여명 내외로 쓸쓸함을 더했다. 메르스의 영향 탓에 유족들이 김 할머니의 타계 소식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조화를 보낸데 이어 김희정 여성가족부장관과 이인선 경북도 행정부지사, 권영세 안동시장이 유족들을 위로했다. 안동의료원은 규정에 없지만 위안부 할머니 예우차원에서 시설 이용료 지원을 약속했다.

안동 출신인 김 할머니는 1943년 2월 일본 홋카이도로 끌려갔다. 당시 만 12세인 할머니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악몽에 시달린 부모님이 일찍 결혼을 서둘러 강제징용을 당했던 남편과 결혼해 4남 1녀를 뒀다.

김 할머니는 결혼 30년이 지난 후에야 이 같은 사실을 남편(87)에게 고백했다. 정부 발표로 자식들도 2년 전에야 이 사실을 알 정도로 남편은 침묵했다. 이후에도 남편과 함께 생활해 오던 김 할머니는 2012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이곳에서 잠시 건강을 회복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상태가 악화돼 지난해 7월 재입소했다. 남편 역시 수시로 상경해 할머니를 보살폈다.

“자식들에겐 알리지 말라던 아내가 당한 고초를 처음 듣고 그냥 안아 줬지요. 어린 여자아이가 당한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머리와 가슴이 수시로 아프다고 할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팠지요.”

빈소 한 켠 1.5평 남짓한 방에서 아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증언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역사의 상처로 보였다.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지난 11일 포항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도 타계해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50명으로 줄었다. 포항의 김달선(91) 할머니는 지난 11일 오후 9시 15분께 포항시 북구 장성동의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 할머니는 70세 때 뇌경색으로 2~3차례 쓰러진 후 건강히 악화돼 대구 요양원에서 3년간 치료를 받아오다 지난 4월 고향인 포항으로 옮겨져 투병해 왔다.

포항시 북구 여남동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19세이던 1943년 청어를 팔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흥해장에 나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미얀마 행 배에 태워졌다. 1947년 23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상봉했지만 한국전쟁 통에 남자 형제를 모두 잃는 슬픔을 또다시 겪었다.

유일한 혈육인 동생 김만금(78) 할머니는 “이젠 아프지 않고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며 눈물을 삼켰다.

김 할머니의 영전에도 대통령의 조화에 이어 김희정 여성가족부장관과 이강덕 시장이 조문했다.

/권광순··안찬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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