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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바닥 공사

관행(慣行)이란 말은 ‘오랜 기간 똑같이 하던 것들’이라는 의미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공정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꿰맞추며 이상한 짓을 할 때 붙이는 용어이다. 여직원이 커피 타는 것은 관행이라는 말을 대놓고 한 적도 있다. 이런 여직원이 커피 타려고 회사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면 여태 그런 관행에 익숙했던 사람들 눈엔 그 여직원은 완전 ‘또라이’로 보인다. 세상은 변하고 ‘페미’라는 새로운 단어가 익숙해진 요즘 그런 여직원이 있다면 여직원을 욕할까 아니면 커피 타라고 시킨 그 누구를 욕하게 될까.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곳에서 관행이란 미명 하에 이상하고 어색한 짓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바닥이 원래 이래.” 공무원 회의하는 데 한번 가본 적이 있다. 고위공무원이 들어오면 갑자기 다 일어난다. 나도 덩달아 영문도 모르고 일어났다. 아마 조직의 어른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재판 구경을 가보면 기가 막힌다. 판사 들어오면 다 일어나야 한다. 여긴 일어나라고 말을 한다. 한번은 방청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판사가 나를 째려보더니 자기 앞에서 다리 꼬지 말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관행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난 죄인이 아니다. 왜 판사 앞에서 다리 모으고 두 손 가지런히 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 듣고 싶다. 민주공화국에는 모든 권력자는 견제를 받게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 바로 검사, 판사이다. 이들은 죄를 지어도 99% 기소를 당하지 않는다. 미국은 24시간 내 완전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판결문도 우리나라에선 겨우 0.3%밖에 밝히지 않는다. 이러니 판결이 판사 마음대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그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관행이다. 기자가 기사에 ‘핏짜, 커리’쓴다. 물론 허접한 잡지사 기자 나부랭이가 본배 없이 쓰는 것이다. 피자나 카레라고 글을 쓰면 밋밋해 보여서 그렇게 썼다고 항변할지는 모르지만, 외국어와 외래어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얼뜨기 기자이리라. 구제역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익산 춘포역이나 군위 화본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구제역은 입구(口), 발톱제(蹄), 돌림병역(疫)이다. 따라서 소나 돼지 등의 동물의 입이나 발굽에 생기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병을 가리켜 구제역이라고 쓰고 말한다. 가축들이 구제역에 걸리면 입의 점막이나 발톱 사이의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침을 흘리다 죽게 되는데 이게 전염성이 강하다. 상당히 위험한 병이기에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데 사람들이 쉽게 잘 알아듣지 못한다. ‘신병을 확보하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군대에서 신병(新兵)이 새로 들어왔나 싶었다. 하지만 그 신병이 아니다. 범인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신병(身柄)이란 말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도 못 봤다. 물으면 전부 얼버무린다. 자루 병(柄)자가 해석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알아먹지도 못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왜일까? 물어보니 이 바닥 관행이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관행으로 치부하고 이런 짓을 묵인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묻고 싶다. 날 잡아 바닥공사 제대로 한번 해야 할 판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5-05-15

답답한 오월

오월은 행사가 많은 달이다. 한글날이나 개천절같이 그냥 행사가 많은 달이 아니라 어른과 애들을 챙겨야 하는 가정의 달이고 스승까지 챙겨야 하는 게 오월이다. 집사람 말로는 별로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니라는 결혼기념일까지 끼어있고 가족 생일까지 있으면 상당히 심각한 한 달이 되어버린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들 어린이날 선물 일일이 챙기다가 한 달 내내 굶을 판이라는 오월이 왔다. 노년층만 이럴까? 요즘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고 난리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사는 부류는 공직자 같은 월급쟁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월급이라고 해야 몇 푼 되지 않아 한 달 살기가 바듯한 형편인데 이렇게 행사가 집중되어 버리면 답답해지게 된다. 건강한 경제구조라면 소비를 주도하는 계층은 30~40대이다. 이 세대가 돈을 쓰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 세대가 돈이 쪼들리면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는 이야기다. 30~40대는 결혼을 했다면 대부분 빚이 많다. 혹 부모의 지원이 있다고 해도 재벌이 아닌 한 빚은 대부분 가지고 출발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금융권 전세자금 대출의 70%를 30~40대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애들 보육비도 장난이 아니다. 좀 더 큰애 교육비도 더 장난이 아니다. 여기에 할아버지 할머니 간병비도 있다. 명이 길어져서 거의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운 나쁘면 부모들도 여기에 합세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은 평균 10년 6개월간 병치레를 한다는 통계를 본다. 젊은 세대들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러니 30~40대 가계의 ‘엥겔계수’는 20% 이상이고 애들 밑에 들어가는 고정비용이 30%란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 이자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상황이 이러할진 데 오월은 그들에게 잔인한 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요즘 어린이 데리고 놀러 갈 장소를 물색해 보면 어린이 놀이터가 동네마다 있는 철봉에 미끄럼틀 정도의 그런 수준이 아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돈도 엄청 비싸다. 우리 때처럼 애들 데리고 촌에 내려가 천렵하거나 텐트 치고 해수욕하는 그런 상상을 한다면 정말 대단히 헛다리 짚는 것이다. 고급 호텔이나 리조트 정도는 가줘야 부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물값 또한 만만찮다. 애들 낳으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그러는지 위정자들은 연일 정권 욕심에 연일 바쁘다. 악마는 항상 디테일에 숨어있다. 젊은 층이 필요한 것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면 된다. 젊은 세대에게 대폭 집값을 내려줘서 금융 부담을 최소화하고 유치원도 늘리고 보육원도 늘려야 한다. 어른들 치매센터 늘리고 요양병원비 줄여주어 이런 잡다한 짐을 덜어줘야 한다. 취업 안 되고 일자리 없는 것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만 인간적 삶을 위한 복지 영역은 개인 문제가 더는 아니다. 비싼 장난감 선물비를 깎아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그네들의 능력 문제이다. 더 비싼 놀이터에 애들을 데리고 가고 비싼 음식 먹고 좋은 선물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외적인 문제는 정부가 좀 책임져주면 어떨까 싶다. 뭐든지 다 들어주는 포퓰리즘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논리에 아연실색하겠다. 언제까지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 논리로 정책을 세울 것인가. 답답한 오월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5-05-08

관식이 타령

집안에 음기가 너무 세게 흐른다. 집안에 남자라곤 나 혼자이다. 첫애가 딸이라고 했을 땐 그래도 둘째는 아들이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에 불과했다. 삼신할머니에게 그만큼 빌고 빌었건만 둘째도 달지 않고 나왔다. 딸 둘에서 멈췄다. 딸 셋이 되면 내가 집을 나갈 것 같아서다. 삼 형제를 두신 우리 아버지의 업적에 큰 누를 끼치고 말았다. 집안의 대가 끊어졌다. 여자들의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네들의 세상은 여태 내가 겪지 못한 사건의 연속이었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 안다고 하기엔 많이 역부족이다. 여자들의 심리는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 혹은 ‘본부장’이란 타이틀은 대체로 재벌가 아들이 걸치는 직책이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다. 아는 것도 많고 매너나 에티켓도 좋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구석은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설정해 놓고 가난한 여자를 좋아하게 만들면 그 드라마는 대박이 난다.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의 구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는 모든 여자는 가난한 여자가 되어 꿈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언제 적 이야기인가. 일제 강점기 때 조종환의 ‘장한몽’에 나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가 AI 시대에도 먹히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김중배의 다이아에 심순애는 이수일을 차버리지 않는가. 결국 돈 앞에는 사랑이고 뭐고 없다. 냉혹한 돈의 현실만 있을 뿐이다. 난 여태 돈 많은 남자 싫어하는 여자는 잘 보지 못했다. 우리 집 여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졸지에 돈을 잘 벌어오지 못하는 나는 평생을 죄인처럼 눈치만 보면서 살았다. 오랫동안 실장이나 본부장에게 몰입되어 있던 여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이란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지고지순’이란 단어를 남자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양관식. 거의 외계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현실 세계에선 극히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이다. 대부분 부상길, 아니 ‘학 씨 아저씨’란 인물이 현실 속 전형적인 한국 남성 모습이 아닐까 싶다. 졸지에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관식이 때문에 참 피곤하다. 오직 한 여자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는 한 남자의 순애보는 모든 여자의 로망이 되었다. 덕분에 나 같이 여자가 많은 집에선 전부 양관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학 씨 아저씨’보다 더 한 꼰대 인간 취급을 한다. 세상이 개벽했다. 여자들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변화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돈 없는 관식이가 돈 많은 본부장을 밀어내고 말았다. 걱정은 둘째 딸이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데 아직 관식이를 찾고 있다. 세상에 관식 같은 남자는 없다. 대부분이 학 씨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고 귀에 따까리가 앉도록 말했건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관식이 타령이 끝이 없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해 줬으면 싶은데, 그 드라마 한 편이 정신을 흐려놓았다. 그 전에 자기 남편감은 경제력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돈 많은 양관식.” 이다. ‘히떡’ 자빠질 뻔했다. 이번 생애에 둘째 사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노병철 수필가

2025-05-01

전통주 찬가

안동 임청각(臨淸閣)은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 및 정비하기 위한 종합계획이 2025년까지 완료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경상북도, 안동시는 중앙선 철로 개설로 훼손되기 이전의 임청각과 그 주변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 정비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위해 1763년 허주 이종악이 발간한 문집 ‘허주유고’ 속 그림인 ‘호해람’, 1940년을 전후하여 촬영된 사진과 지적도 등 고증이 가능한 자료를 근거로 계획을 마련했다. 임청각은 단순한 99칸짜리 민가가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합의로 추대된 민족의 지도자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내놓았던 애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역사적 장소다. 이러한 이유로 임청각의 복원은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상룡 선생은 고성 이씨 집안 출신으로, 최근 안동 고성 이씨 가문에서 ‘음식절조’(飮食節造)라는 귀중한 책이 발견되었다. 이 책에는 다른 옛 조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술 제조법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을 받았다. 특히 향온주, 하일주, 보리청주, 자하주(紫霞酒) 등 다양한 전통주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어 앞으로 고성 이씨 가문의 전통주가 새롭게 조명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자하주는 한 번 마시면 몇 달 동안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신선의 술로, 유하주(流霞酒)라고도 불린다. 이 술은 신선이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북 무주의 한풍루라는 전각에서 처음 접했다. 그런데 이 술이 안동에서도 빚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자료를 뒤지다보니 김만중의 ‘구운몽’에도 자하주가 나오고 작자미상의 한문소설 ‘운영전’에서도 자하주가 나온다. 그럼 남해에도 자하주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춘향전’을 보면 월매가 춘향과 이도령을 엮으려고 술상을 보는데 여기에 나오는 술 이름을 보면 자하주가 나온다. 춘향전의 고향은 남원인데 남원에서도 자하주가 빚어진 모양이다. 대한민국 온 산천에 산신이 산다고 하니 산신이 곧 신선이라 보면 이 나라 삼천리강산 곳곳에 자하주가 있다 해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 정여창과 옥계 노진을 배출한 함양 개평마을에 들렀다.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양반들도 명함 꺼내놓기 힘들었다는 이 마을을 ‘좌 안동, 우 함양’이라 불릴 만큼 지위가 높았었다. 개평마을에 와서 ‘솔송주’를 한 병 샀다. 일두 선생의 16대손 며느리 박흥선이 빚는다는 전통주라고 한다. 사실 솔송주 역시 여러 군데서 만들고 있는 술이지만 그 집안의 독특한 비법이 어떤 맛을 만들어내는가가 중요하기에 호기심 반으로 호기를 부렸다. 당시 일두 선생은 술을 마시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아 선생 시절에 만들어진 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별로 따질 생각은 없다. 지방마다 특색있는 술맛을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의 ‘한산 소곡주’, 평안도 전통 주 ‘문배주’ 충남 면천의 ‘두견주’, 경주 교동 최씨가의 ‘법주’ 등고 같이 또 다른 전통주를 기대해 본다.

2025-04-24

도박의 무서움

누군가가 나에게 ‘훌라’를 할 줄 모른다고 놀려댄다. 난 훌라를 할 줄도 모르고 배울 마음도 별로 없다. 승부 근성은 있어 돈 따먹기라면 뭐든 하는데 이상하게 훌라는 흥미가 별로 없다. 같은 모양이 나오면 그냥 먹어 점수 나는 게 아니라 빼고 더하고 하는 게 복잡한 것 같아서다. 워낙 단순 무식형 인간이라서 그런지 깊이 생각하기 싫은 성격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친구들이랑 놀러 가서 밤새도록 훌라를 치고 있기에 개평이라도 뜯어 맥주 마시러 나갈까 싶어 기웃 되다가 웃음이 피식 나왔다. 이건 내 어릴 때 치는 ‘나이롱 뻥’과 똑 같지 않은가. 카드로 하면 ‘훌라’이고 화투로 하면 ‘나이롱뻥’이다. 난 또 마작같이 아주 고급스러운 노름인 줄 알았더니 한낱 나이롱뻥인 것을 알았으면 나도 익혀 놓을 걸 그랬다. 나는 지금도 친구들이랑 모임에서 화투도 치고 포커게임도 한다. 물론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따면 개평도 주고 기분이 즐겁다. 명절 때도 꽤나 오랫동안 친척들 간에 화투를 치기도 했지만, 요즘은 다들 바쁜지 제사만 지내고 뿔뿔이 흩어지는 통에 그 흔한 윷놀이 한판 할 시간도 없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다. 어릴 적 농한기 때 화투판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민화투와 육백 같은 화투 놀이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다들 즐겼던 놀이였다. 조선 시대 때부터 투전이란 놀음이 유행했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오늘날 ‘짓고땡’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노름이다. ‘구구이’ ‘사륙장’이란 용어가 자연스럽게 입에 붙을 정도로 숫자계산에 능해야 하는데 다섯 장 화투 들고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는 데 세월 다 보내고 있으면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된다. 그래서 머리 나쁜 인간은 절대 못 하는 짓고땡은 별로였다. 그래서 나와 많은 돈이 오가는 도박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큰 소득을 올리려는 인간의 속성이 도박 속에 찌릿한 맛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그 맛에 한 번 길들여지면 사람이 정신 줄을 놓는다. 돈 잃고 인간성 다 보여주는 게 바로 노름이다. 중독 또한 심각하다. 국내 도박 시장 규모가 GDP의 9%에 달하고 국내 성인의 10%가 도박중독자이고, 도박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연간 80조 원으로 추정된단다. 도박이 주(酒)·색(色)보다 더 위험하다고 한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남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첫 번째는 여자이고 두 번째는 술이고 세 번째는 도박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어머니는 우리 자식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시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당시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어머니의 걱정은 여자, 술 그리고 도박 순인데 도박의 무서움을 간과하신 것 같다. 봄맞이 집 청소를 하는데 장롱 속에서 난데없는 화투 한모가 툭 떨어진다. 몇 번 치지 않은 듯 제법 깨끗한 화투였다. 집사람의 눈빛이 심상찮게 변한다. 어머니도 안 계시는데 한판 치자는 신호를 보낸다. 내 주머니에 돈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몇 시간 안 가서 다 털렸다. 그날 뉴스에 대규모 도박단이 검거됐다는 방송이 나온다. 그중 40명이 주부란다. 집사람과 내 눈이 마주쳤다. 씩 웃는 그 모습에 오줌 지릴 뻔했다.

2025-04-17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노병철수필가 어떤 때는 한 대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자기가 손해 보는 짓은 죽어도 하기 싫고 자기 생각만 옳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싸가지 없는 전형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인간은 모든 인간 삶 자체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있는 듯했다. 세상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듯이 나도 다른 사람 인생에 디딤돌은 못될망정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겠다 싶어 대충 맞춰주고 사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막가파 인간들에겐 왠지 그런 마음이 사라진다. 혹자는 종교인이라면서 어찌 마음을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 먹느냐고 수양이 덜 됐다고 나무라지만, 수양은 수양이고 성질은 성질인 것 같다. “난 그 쪽 보다 이 쪽으로 가고 싶어.”“밥은 무슨 밥 그냥 허기만 달래면 되지.”어떤 때는 내가 제 놈의 ‘심부름꾼’이 된 느낌마저 들어서 혼자 여행길을 잡은 지가 꽤 된다. 동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나의 규칙에 따라줘야 하기에 처음 몇 번은 맞춰주더니만, 서로가 불편하니까 이젠 같이 가자는 말도 잘 안 한다. 그 지방 특색 있는 음식은 모조리 다 먹고 와야 하고 어지간하면 내가 보고 싶은 곳은 다 다녀야 하는 나의 특유의 여행습관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 혼자 여행하는 인간형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지병이 혼자 여행하는 것을 막았다. 운전대만 잡으면 잠이 쏟아지는 이상한 병이 내게 있다. 당뇨로 인한 졸음 현상이 심했다. 그래서 운전대를 오래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 편하자고 운전만 해 달라는 여행 동반자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관광버스 여행이었다. 아주 저렴하고 운전은 안 해도 되면서 음주가무는 전혀 없는 그런 여행만 전문으로 하는 관광버스들이 생겨났기에 정말 편했다.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혼자 아닌 혼자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요즘은 목적 여행을 시작했다. 목적이 같은 사람끼리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무리가 생겼다. 하지만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고 판단되면 같이 여행을 가지 않았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상한 인간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나를 변하게 했는지 주위 좋은 사람들이 나를 바꿔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인식에 변화가 왔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 중 여행을 가장 즐겁게 하려면 동행자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동감한다. 하지만 이는 나 중심적 사고방식이다. 나를 기준으로 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린다. 이게 맞는 것일까? 동행자에게 나의 여행습관까지 포기하면서도 맞춰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야 깨달았다. 남들이 보았을 때 ‘나’라는 인간도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는 인간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론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결정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부터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사람이 옆에 온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람이 사는데 네 가지 ‘연’이 있단다. 혈연, 학연, 지연 그리고 ‘인연’이란다. 그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세월이 알게 해 주었다.

2025-04-10

강요하지는 마라

노병철수필가 누군가가 내 생각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논리가 없고, 궤변이다. 왜 저런 생각이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설득해 보려 노력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이미 확정 편향적 시각으로 모든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에게 그 어떤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안다. 오직 자신의 사고에 몰입되어 생각이 다른 타인을 경멸한다. 세대 간의 간격이 넓어 서로의 사고 폭이 좁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동시대 같은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다. 하긴 쌍둥이라도 의견차는 존재한다니깐 크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삶의 부조리란 개인의 욕구와 사회 현실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며, 이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기본조건이라고 말한다. 말을 이렇게 하니 참 어렵다. 하지만 쉽게 풀이할 마땅한 말도 없다. 오늘 대통령이 탄핵당하든 기각이 되든 어떤 결론이 헌법재판소에서 나올 것이다. 그 결과를 보고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 성향에 따라 반 미치는 사람들이 속출해 난리가 날 것 같다. 이들은 개인의 욕구와 사회 현실의 불일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울분을 토하고 과격해질 조짐이 보인다. 이미 여러 곳에서 좋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갈수록 흥분도는 더해갈 것이다. 일반적인 윤리의식과 통상적 일반인의 상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니 어안이 벙벙하다. 마치 카뮈의 이방인이란 작품 속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도 슬퍼하지도 않고 살인을 저질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사태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분노에 휩싸여 폭력까지도 불사할 정도로 흥분한다. 모두가 나만의 사고에 몰입되어 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고 자기 생각이 매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한다. “내 마음 같지 않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서나 들을 법한 말을 요즘 사람에게 들으면 조금 뜬금없다. ‘생뚱맞다’라고 표현해야 하나. 사람 마음이 똑같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정반대인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사람들은 절대 한 방향만 바라보지 않는다. 문제는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물리적 힘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냄새나는 홍어를 먹기 싫은데 누군가가 총이나 칼을 얼굴에 들이대면서 먹으라고 강요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마누라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해서 밥상을 엎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는 것을 보고 ‘맞을 짓 했다’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그 누구도 타인의 생각을 강요받을 이유는 없다. 난 냄새 나는 홍어가 먹기 싫다. 맞아가면서 먹는 것은 더 싫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강요하는 것은 파쇼적 사고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끝이 그렇게 좋지 않았음을 우린 배웠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은 늘 극단주의자들에게 선동당하고 급기야 폭력적으로 변하고 만다. 참으로 참담하고 안타까운 현상이다.

2025-04-03

어처구니가 없다

노병철수필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절이나 궁궐 같은 곳을 다니다 보면 지붕 위에 동물들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본다. 내 전공도 아니라 잘 모른다. 하지만 절 설명만 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간혹 절에도 보이기도 해 갑자기 질문할까 싶어 책을 통해 대충 외워두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해 생기면 신망을 잃기에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얼굴을 보니 낯이 익지 않은 것을 보아 새로 온 보살이다. 대부분 절에 다니는 노보살은 바로 잊어버리는 터라 칠정례 같은 것은 수십 번 설명해도 “그게 뭔데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아침 예불 때 일곱 번 절하는 것을 칠정례라고 한다. 송광사같이 여덟 번 절하면 팔정례이고, 동화사같이 아홉 번 절하면 구정례이다. 그런데 이것을 잘 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불자 한 분 왔다 싶어 기분이 좋았다. “범종은 새벽에 33번 저녁에 28번 칩니다.” “아닌데요. 아침저녁 전부 33번 칩니다. 바뀌었습니다.” 새로 온 보살이 치고 들어온다. 갑자기 당황스럽다. 내가 나이를 먹어 세상 바뀌는 것도 몰라 가장 기초적인 것도 몰랐다 싶어 바로 사과했다. 내가 몰랐다고. 집에 와서 왜 바뀌었는지 뒤졌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조계사에 스님에게 전화했다. 스님조차 뜬금없는 나의 말에 당황한다. 알아보고 전화해 주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는다. 이내 전화 와서는 그런 일 없단다. 확실하냐고 몇 번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다음 순례 때 바뀌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주려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 후, 볼 수 없었다. 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을 절에 가면 많이 본다. 이걸 전문용어로 서수상(瑞獸像)이라고 한다. 서수상을 설명하면서 지붕 위에 있는 토우상에 대한 설명을 같이해 주었다. 저것을 잡상(雜像)이라고도 하고 ‘어처구니’라고도 한다고 설을 풀었다. 그러자 설명을 듣던 보살 한분이 어처구니가 아니란다. 맷돌을 돌리는 나무막대로 된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도 하고 이것도 어처구니라고 한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런데 맷돌 손잡이조차 어처구니가 아니란다. 어처구니는 뜻밖이거나 기가 막힐 때 하는 말인데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을 못 돌리지 않느냐 그래서 “어처구니없다”라는 말이 생겼다. 그리고 당 태종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귀신을 쫓기 위해 병사 모양의 어처구니 조각물을 지붕 위에 올린 데서 유래한 것으로, 기와장이들이 궁궐을 지을 때 어처구니를 깜박 잊고 올리지 않은 데서 비롯된 말이라는 설명도 했다. 난 분명 확신이 있었다. 집에 와서 나의 확신을 재점검해 볼 요량으로 뒤졌다. “‘어처구니’를 ‘추녀 끝에 올라가는 잡상’이나 ‘맷돌의 손잡이’로 볼 수 있는지는 문헌으로 검증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 점에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점 양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에서 이런 말을 내놓았다. 그럼,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어처구니’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가 막힌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민망할 정도로 퍼부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 그녀를 보면 정중히 사과할 요량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 후, 볼 수 없었다.

2025-03-20

진정 성공한 삶

노병철수필가 사람들은 살면서 환경 탓을 많이 한다. 아버지가 재벌이었으면, 아니 어머니가 재벌 집 무남독녀라는 설정도 괜찮다. 그랬다면 자기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워낙 없는 집에선 몸뚱이만으로 어떻게라도 해서든지 난국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사람에겐 절실함이 생긴다. 그래서 부자 부모에게 집이라도 하나 얻은 친구와 월세방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경상도에선 “새가 빠진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뭐 빠지게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그렇다 보니 나이 먹을수록 남는 것은 악다구니뿐이다.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충혈된 눈으로 반항적 기질만 쌓이고 만다. 젊은 시절, 내가 본 책 중에는 성공한 사업가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고 성공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여기서 성공이란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했다. 성공은 곧 돈이 많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얼마나 단순한 논리인가. 머리가 나쁜 것은 여기서도 표시 난다. 그들의 인생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탁월한 기술이 무엇인지만 열심히 뒤졌다. 근면 성실 그리고 절약만이 최선이 아니란 생각이 어슴푸레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분야에서든 세계 수준의 전문가, 즉 마스터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4시간, 일주일에 28시간씩 7년간 연습해야 하는 시간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전문가가 절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렇게 피곤하게는 살고 싶지 않았기에 좀 더 손쉽게 돈 벌 궁리만 했다. 1만 시간의 노력은 그냥 우리가 늘 들었던 근면, 성실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정도는 안다. 사람은 주제파악이 중요하다. 따라서 1만 시간을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보다 머리 좋은 사람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자신만 죽어라 하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남들도 나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그들은 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달린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 수백 권의 책을 독파하면서 겨우 하나 건진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선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머리 좋은 인간도 복 많은 인간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에 나의 전두엽이 빠르게 다가간다. 그렇다. 조건이 충분하지 않는 사람이 살 길은 ‘복’이었다. 결론은 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어차피 성공이란 단어는 비교 대상이 필요조건이라는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남들보다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이것저것 어렵게 따지지 말고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진정으로 즐길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이 행복감이 성공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인즉 성공이란 단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기준으로 정해진다는 말이다. 돈이 많아도 불행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결론은 삶의 질이다. 행복도 복인데 복 받는 인생을 살기 위해 즐기는 삶을 찾아본다.

2025-03-13

개성시대

노병철 수필가 “아메카노로 주시고요 따뜻하게 원샷으로 부탁드립니다.” 커피 주문을 하는데 앞에 여자가 한 말이다. 무슨 소리 하는지 잘 못 알아들었다. 대충 마시면 될 것을 무슨 서양 음식 먹으러 온 식당에서처럼 “뭐 넣고 뭐 빼고 해서 주세요”하는 식으로 주문한다. 꽤 세련되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까탈스럽게 보였다. 어른 말대로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 “최고의 맛은 개인의 특별한 취향에 맞는 맛이다.” 그렇다고 자기 취향에 맞게 주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동태탕 먹는데 파 빼고 무 빼라면 그 집에서 그렇게 끓여 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에선 이런 주문이 가능하고 종업원들도 이런 주문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카푸치노를 주문하면서 탈지분유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 준다는 것이다. 왜 카푸치노에 탈지분유를 넣어야 하는지 이해 가지 않지만 그렇게 마셔야겠다는 독자적 취향을 맞춰준다는데 기가 막힐 뿐이다. 우린 이런 손님을 ‘진상’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맛있다고 하면서 가장 많이 찾는 것이 최고의 맛이다.” 우린 개인의 특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튀는 놈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고상한 척한다며 따돌림받기 일쑤이고 “마카다 짜장면”에 익숙한 우리 문화는 혼자 튀는 것을 철저히 부정한다. 우리의 전통은 까라면 까야 하는 획일성에 기초한다. 이 전통은 예와 효에 근거한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절대 대들면 안 되고 상급자에게, 선배에게는 항상 복종해야 하는 문화이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 “너는 아비 어미도 없나”라는 말이다. 개인보다는 철저하게 단체나 조직이 우선된다는 것이다. “저는 회를 못 먹어요.” 이제 세상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자신의 취향이 존중받는 세상이 온 것 같다. 직장 회식을 가자고 하면 회를 못 먹어서 이번 회식엔 빠지겠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그냥 따라와서 튀김이나 몇 개 먹어주는 배려 따위는 기대하기 힘들다. 자기주장이 정말 뚜렷하다.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가치 기준이 너무나 명확하다. 여기에서 기성세대들과의 마찰이 발생한다. 나와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들을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데 마다하지 않는다. 더불어 살기에 우리네 교육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언제부터인지 내 머리엔 ‘일사불란’이란 단어가 아주 깊숙이 꽂혀있다. 내가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따라와야지 반기를 들거나 어영부영하고 있으면 가차 없이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요즘 하다간 노동부에 끌려가 아주 된통 당하고 말 것이다. 의견이 다른 것에 대해 귀 기울이고 소수자로 불리는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뭔가 특별함을 인정해 주는 그런 사회가 왔다. 그래서 나이 든 분들이 혼란에 빠진다. 아직 충과 효에 빠져나오지 못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와 다름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나 혼자 거부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더불어 살기 위해선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철저히 그네들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살아야 할 때이다. 지금은 개성시대이니까.

2025-03-06

여행찬가

노병철수필가 다리 떨리는 나이엔 여행을 가고 싶어도 못 가니 가슴 떨릴 때 길을 나서라는 말이 있다. ‘죽어서 명당 찾지 말고 살아서 좋은 곳을 다녀라.’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집사람이 먼저 집을 비우기 시작한다. 젊었을 땐 허락을 받는 척이라도 하더니 지금은 현지에서 문자 한 통으로 끝낸다. 어디 있으니 그리 알아라. 언제 들어갈지는 모른다는 내용이다. 집구석 엉망으로 돌아간다고 욕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난 이게 더 좋다. 나도 언제든지 여행 갈 수 있으니 말이다. 피차 서로 구속하면서 살 나이는 지났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중국과 수교도 되기 전에 여행을 갔다. 북경반점을 보고 짜장면집이 되게 크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반점이 호텔이라는 사실을 알고 귀국해서 중국을 다 아는 체했다. 총무를 비서장이라고 하고 사장을 총경리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곁들여서 말이다. 그 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중국 여행을 다니게 되었고 중국 여자들이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밥 먹기 위해 반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반찬부터 먹고 밥 먹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된 것도 여행을 통해서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의 크기를 말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이 사는 우물이란 공간 밖으로는 나가 본 적이 없기에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본 끝없는 평야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여름벌레에게는 얼음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것을 설명할 수 없듯이 말이다. 글은 경험에서 나온다고 한다. 경험이 부족하면 사고가 틀에 매이게 되고 연산하는 폭이 극도로 좁아진 상태라 했던 말만 계속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수필 작가이자 교수이고 외국물도 먹은 박사로 평생 교단에서 존경받고 살다가 퇴직 후 나름 자신의 지식을 통한 수준 있는 작품을 내놓으려 하다 식겁하고 자중하는 분이 있다. 그분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는 글, 읽히는 글을 써야 하는데 자꾸 전문 지식이 그것을 막는다고 한다. 장자 추수 편에 보면 시골 훈장에게는 진정한 도를 설명할 수 없다고 나온다. 자신이 배운 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습성이 있다고 했던가. 평생 한 우물을 팠다고 전문가 소리는 들을 지은 정 밖으로 나가면 개구리라는 소리를 피하지 못하게 되는 원리렷다. 여행을 통한 폭 넓은 경험만이 좋은 글을 내어놓을 수 있다고 스스로 체득한 것을 알려준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마사지라는 것을 거의 강제로 받는다. 그리고 장사치 앞에 앉아 물건 사기를 강요받는다. 싸게 여행 가려면 패키지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하지만 손해 보는 장사는 누구도 하지 않는다. 옵션을 걸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돈을 각출해 낸다. 이런 것 때문에 해외여행을 가기 싫다는 사람을 봤다. 먹는 것이 입에 맞지 않고 향신료 때문이라면 어찌 말은 된다고 하지만, 가기 싫다는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외국 여행이 싫으면 국내 여행도 괜찮지 않은가. 여행을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거실에 누워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다가 일생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하다. 움직일 수 있을 때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올해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싶다.

2025-02-20

정치가 깨어나야 한다

노병철 수필가 시국이 참으로 어수선하다. 연일 방송엔 계엄 이야기로 도배를 한다. TV 속에 나오는 대통령의 그 뻔뻔함을 보면 참 기가 막힌다. 자기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투다. 여기에 야당 대표인 이재명은 그럼 아주 착한 사람인가. 까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도긴개긴이란 말이다. 정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들이다. ‘면후심흑’(面厚心黑) 즉, 두꺼운 얼굴(面厚)과 시커먼 속마음(心黑)을 갖춰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얼굴이 얇아 체면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이 맑아 의중을 숨기지 못하는 자는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결코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가볍게 여기며, 사과하는 법이 없다. 품위와 인격은 일찌감치 개한테 줘버리고 이 길을 택한 자들이다. 그들이 체득한 생존술은 국민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최우선이며 그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다. 그들에겐 정치공학은 딱 한 가지이다. 이기면 모든 것이 미화되어 ‘절세의 군주’가 되고, 패하면 모든 것이 폄훼돼 ‘만고의 역적’이 된다는 것을 머리에 새기고 있다. 이번 계엄도 성공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위기의 대한민국이 계엄이 살린 것이 된다. 이게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이 이해하고 넘어갈 보편타당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온갖 거짓 뉴스를 남발하는 유튜버들이 하루 52시간 근무도 하지 않고 엄청난 돈을 번다고 한다. 먹방으로 한 달에 1억 이상을 번다니, 명문대 졸업 후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잘리지 않으려 애쓰며 버는 돈과 비교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에스키모족이나 마사이족처럼 경제력이 낮아도 행복도가 높다며, 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일하지 않고도 세금을 쓰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정치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마오쩌둥은 죽기 직전의 병석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절대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노년층, 중년층, 청년층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권력 핵심부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미 세대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정치라고 간파한 것이다. 이 추운 날에 태극기 손에 들고 거리로 나선 노인들과 응원봉을 들고 춤을 추면서 거리에 함께하는 젊은이들을 봉합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나라 정치를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라고 치켜세우는데 이건 그런 이념적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갈등이 여전하고 종교가 정치화되고 세대 간의 갈등은 이미 선을 넘었고 심지어 이젠 젠더 갈등 또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치 영역이다. 국민 간에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정치가 빨리 개입되어야 할 시점인데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올 줄 모른다.

2025-02-13

독한 사람들

노병철 수필가 새해가 밝아오면 늘 하는 소리가 있었다. ‘금연’.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우습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아직도 눈에 띈다. 정부는 더 강력한 경고문을 담뱃갑에 박아 넣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 정도로 담배를 끊게 만들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에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이지만, 정부에서는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담배 판매금지를 못 하게 하는 이상한 세상에서 ‘해롭다’는 문구만 남발한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담배회사와 담배 농가의 붕괴를 포함한 담배 산업의 소멸, 그로 말미암은 엄청난 세입 감소와 사회적 비용을 아직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언제까지 국민건강을 담보로 세수를 챙길 것인가. 그래도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한 건 사실이다. 담배를 시내버스에서도 피웠고 고속버스 안에서는 물론 비행기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의자 뒤에 재떨이가 있었다. 특히 영화 보면서도 담배를 피웠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중간에 필름을 한번 갈아 끼울 때는 너도나도 피워대는 통에 극장 안은 연기로 자욱했다. 온갖 발암성 물질이 있다고 해도 담배는 숙지지 않았다. 남자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남성’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깐. 챨스 브른슨이 담배를 피우면서 악당을 죽이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담배 입에 물고 포커 돌릴 때 우린 화장실 뒤에서 연기로 ‘도너츠’를 만들어가며 폼을 잡곤 했었다. 이런 시절이 있었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 참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담배를 끊은 지 20년 정도 된 것 같다. 쉽지는 않았다. ‘금연 주식회사’라는 책을 읽어보면 금연을 하지 않으면 단계적으로 벌칙을 주는데 집사람을 잡아다가 전기고문하고 그래도 피우면 마침내 죽여 버리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흡연자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으로 묘사되고 사실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필자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매 순간 담배의 유혹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유혹은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을 마친 후에 피우는 담배 한 모금의 추억을 더듬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과감하게 결단내야 한다. 사실 보건복지부 공무원도 아니고 금연 프로그램 종사자도 아니다. 금연을 홍보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그렇게 착한 인성을 가진 인간도 아니다. 술 마시고 마늘로 싼 돼지고기 쌈을 안주로 먹고 담배까지 한 대 피운 사람이 친하다고 내 귀에 대고 속삭일 땐 정말 못 견디겠다. 솔직히 흡연으로 인한 일반적 건강론은 내 알 바 아니다, 단지 그 역겨운 냄새에서 해방되고 싶을 뿐이다. 담배 냄새는 너무 지독하다. 이젠 진짜 담배를 끊어야 할 때이다. 옛날엔 담배 끊은 사람보고 ‘독한 인간’이란 말을 했다. 그만큼 담배 끊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 어려운 금연을 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찬사와 시기가 함축된 말이 ‘독한’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담배를 아직 끊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독한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언제까지 역한 냄새 풍기는 독한 인간으로 살 것인가. 을사년 새해는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제대로 한번 금연을 결심해 보자.

2025-02-06

국민은 지금 배가 고프다

노병철수필가 국가 정책은 다수의 국민이 이해하고 그 정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국가의 폐단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세계화’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우루과이 라운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도 활동하고 선진국이라는 나라만 놀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그런 세계화의 노력이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대중 정부의 정책은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햇볕 정책’이다. 다른 말로 하면 ‘퍼주기 정책’이라고도 말한다. 남북정상회담까지 성사하면서 북한에 대한 포용적인 접근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협력을 증진하고자 했으나 북측의 기만에 놀아났다는 질책만 듣게 된다. IMF 때 급한 나머지 좋은 기업 마구잡이로 팔았다는 소리까지 들었었다. 이명박 정부의 개발 우선 정책은 지방 균형발전 같은 것은 뒤로 미루고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경제 정책을 극대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지방은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고 4대강 사업으로 경제는 운하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해외 자원 개발한답시고 브로커에게 속아 그네들에게 넘어간 국가 세금이 거의 천문학적 숫자로 밝혀졌다. 국민의 세금은 대통령의 주머닛돈이 절대 아닐 텐데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었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는 공무원조차 그 실체를 잘 몰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나중 탄핵받고 그 실체가 최순실에 의한 창조인지 대충 알게 되었다. 당시 대구시는 ‘창조 사과’를 도시 브랜드로 정하고 본격적인 홍보에 나섰다가 망신만 당했다. 그만큼 ‘창조경제’라는 것에 대한 감조차 잡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영국의 경영 전략가 존 호킨스에 의해 정립된 경제용어를 정부 관료들이 제대로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문재인 정권이 미국 유학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워런 버핏의 경제론을 많이 따라 그동안 유지해 왔던 재벌 부양정책에서 가져다주는 낙수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고 소득주도성장을 주도했다. 하지만 급속한 인건비 상승은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조였고 집값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한 어설픈 정부로 인식되고 말았다. 그럼, 윤석열 정부는 기본 정책 기조를 어디에다 두고 있을지 찾아봐도 무엇하나 제대로 나오는 것이 없다. 초반에는 규제 완화와 민간 주도 성장을 핵심 경제 정책으로 들고나왔다. 이명박 시절 정책을 갖다 쓴 느낌이 들 정도였으나 사회정책에서 그 유명한 ‘공정’이란 말이 등장한다. 나중 명태균 보고서로 정책 회의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최순실같이 일개 사인에 의한 정책 장난이었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경제 정책은 명확성이 중요하다. 정책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하면 경제 주체들의 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공무원들도 올바른 정책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특히 관치 금융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아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권력욕에 국민경제는 내팽개치고 좌우 논쟁으로 혼란만 야기하는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묻고 싶다.

2025-01-23

‘개소리에 대하여’

노병철수필가 ‘On Bullshit’라는 수필이 있다. 미국 철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가 20년 전에 쓴 책이다. 우리나라에선 ‘개소리에 대하여’로 번역되었다. Bullshit은 헛소리, 허튼소리로 점잖게 번역이 되는데 이 책은 조금 과격하게 ‘개소리’로 번역하고 있다. 이 책에 요지는 거짓말쟁이(liar)와 개소리쟁이(bullshitter)를 구분한다. 거짓말은 진실을 알고 상대를 속이는 것이고 개소리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소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말로 ‘아니면 말고’식이다. 종이신문과 몇 안 되는 공중파 방송에 의해 정보를 전달받던 시절에 우리는 참과 거짓을 언론에서 표현한 그대로를 믿었었다. “신문에 났어.”라는 이 한마디로 모든 논쟁은 종결됐다. 따라서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사명감이 있었고 불의에 항거하는 기개가 남달랐다. 그게 기자정신이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결과물을 기사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 타협이란 것이 없었다. 아무리 사장이라고 해도 기자가 쓴 기사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권력의 감시자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언론이 입법, 사법, 행정의 뒤를 이은 제4의 권력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은 변하고 언론도 변했다. 권력과 타협하기 시작했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쏟아내고 권력을 향한 용비어천가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린 언론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잘 예로 드는 것이 나폴레옹 이야기다. 유폐돼 있던 코르시카를 탈출해서 시시각각 파리로 진격해 오는 상황에 따라 그를 지칭하는 단어가 식인귀, 괴물, 폭군에서 나중에는 ‘황제 보나파르트 폐하’라는 극존칭으로 변하는 아부 근성을 말한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주는 속칭 ‘빨아주는 기사’를 생성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거짓 기사에 놀아났다. “당신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보가 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신문을 읽는다면, 당신은 잘못된 정보를 얻는 사람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자 정보는 메이저 언론만 가질 순 없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사건의 사진이 몇 분도 되지 않아 사진으로 전송되어 버리고 주요 메이저언론만 장악하면 국민의 생각도 바꿀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은 군사정권 종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그 한 예가 이번 계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계엄군의 행동을 안방에서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건을 입맛에 맞게 덮으려야 덮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럼에도 왜곡 보도는 여전하며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기사, 선동과 날조,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사용한 기사 등 질이 낮거나 자극적인 기사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린다. 유튜브 같은 매체도 언론 역할을 한답시고 여기저기서 방송을 해댄다. 일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극적인 것을, 화면을 만들어 송출한다. 사람들의 관심도를 높여 돈을 벌기 위해 거짓 뉴스가 판을 친다. 이런 잘못된 기사나 방송에 현혹되어 자칫 어설픈 정치 논단까지 일삼게 되고 만다. 정말 주의할 일이다.

2025-01-16

노인과 음식

노병철 수필가 장염과 식중독은 비슷하다. 설사와 복통, 구토와 발열이다. 노로바이러스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건 식중독이 아니라 장염을 말한다고 알면 된다. 식중독은 오염된 음식에 의해 발생하기에 살모넬라, 대장균 같은 독한 녀석들 이름이 나온다. 장염이나 식중독 구분은 병원에 맡겨놓으면 되고 우선 중요한 것은 상한 음식이나 비위생적인 음식을 아깝다고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노인에겐 절대적인 말이다. 젊을 땐 어느 정도의 균을 퇴치할 능력이 몸에 존재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면역력이 줄어 조금만 이상해도 탈이 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식중독균은 끓여도 죽지 않는다. 끓였다고 안심하고 먹다간 큰일 난다. 옛날엔 다 먹었는데 괜찮다고 우기지 말고 제발 젊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하면 된다. “한겨울엔 괜찮다. 옛날엔 다 먹었다.” 이런 말씀을 하던 어머니가 식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만큼 오래된 음식은 먹지 말라고 했건만 노친네 고집이 장난이 아니다. 버리기엔 아깝다고 먹은 음식 때문에 병원비만 수천 배 더 들어갔다. 돈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온 식구들이 병간호하랴 병문안하랴 난리였다. 자식들이 서울서 내려오고 부산서 올라오고. “엄마가 자식들이 보고 싶어 상한 음식을 억지로 먹었나 보다.”라고 동생들이 위안을 주지만 모시고 있는 우리 부부는 좌불안석이다. 어떻게 모셨으면 상한 음식을 엄마에게 드렸냐고 야단을 치는 것 같다. 특히 엄마를 모시고 있는 장남인 나는 집사람에게 더 죄인이 되고 만다. 집에서 엄마와의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제일 큰 문제가 위생 문제이다. 걸레 빨다가 음식 만지고 하는 통에 손녀들이 기겁한다. 청소도 하지 말고 음식도 하지 말라고 애원해도 들은 체 만 체이다. 냄비 태워 먹은 것이 열댓 개가 넘고 집안이 메케한 탄 냄새가 가실 날이 없을 정도다. 어머니 손맛은 자식들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주면 주는 대로 먹었던 시절. 즉 아주 익숙한 맛이란 뜻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음식 솜씨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나 역시 집사람 음식 솜씨를 잘 모른다. 신혼 때는 정말 이상한 음식을 먹으라고 들이민다고 생각할 정도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엄마 손맛에 익숙한 나로선 엄마한테 가서 좀 배워오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 우리 애들은 지네 엄마 음식 솜씨를 환상적이라 극찬을 하지만, 거의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나로선 어쩌다 먹는 집밥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진짜 그정도로 맛있다면 흑백요리사에 나갔을 것이다. 결론은 우리가 엄마의 손맛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익숙한 맛이란 이야기이지 결코 맛이 진짜 있거나, 위생과 결부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상위에 놓인 된장찌개에 온 식구들이 입에 빤 숟가락을 넣던 시절은 지났다. 이젠 앞접시가 일반화된 시대이다. ‘꼰대’. 권위적인 나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은 항상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노인이라고 영국 BBC방송은 꼰대를 오늘의 단어로 소개하면서 풀이한 내용이다. 노인들도 이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시대정신에 맞게 사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2025-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