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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가장놀이

등록일 2026-03-05 17:20 게재일 2026-03-0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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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철 수필가

애처가와 공처가 차이를 묻는다. 난 대답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내 팬티는 내가 알아서 빨면 공처가이고 내 팬티 빨 때 마누라 팬티도 같이 빨면 애처가라는 말은 이십여 년 전부터 나돌던 이야기다. 주위에 힘없는 가장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서로 묵례하면서 겸연쩍게 웃는 모습이 남자들의 자화상이다.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던 반딧불이 세대는 이미 한참 지나간 이야기다.
 

장사꾼과 사업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장사꾼은 물을 많이 뜨기 위해 양동이만 늘리고자 힘쓰지만, 사업가는 한꺼번에 다량의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부터 준비한단다. 근본 생각부터 차이가 나야 한다는 말이다. 집안에 가장 노릇도 마찬가지이다. 권위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냥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권위가 생기는 시절이 아니기에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 대통령 꼴이 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 할 자리임에도 탄핵당하고 형사소추 당하고 있으니, 나라가 어디로 갈지 자못 걱정스럽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양아치들의 계급 놀음인 보스가 아니다. 일종의 리더십이 있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위치이다. 보스는 사람들을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그들을 이끌고 간다. “가라”고 명령하지 않고 “가자”고 권고한다. 따라서 보스는 권위적이지만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보스는 음흉하게 비밀리에 일을 꾸미고 들키면 발뺌하거나 다른 이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남을 절대 믿지 않으며 겁을 주는 폭력에 의한 공포심을 심어주어 복종만을 요구한다. 아버지는 보스였다. 그게 남자라고 믿었다. 가끔 소리도 지르고 밥상도 한번 엎고, 술 드시고 늦게 들어와 자는 애들 깨워서 일장 연설도 하고. 그래도 절대 탄핵당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가장으로서 존경받지 못하고 늘 뒷전이거나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젊은 시절 할아버지나 아버지 흉내 내면서 힘으로 짓누르려고 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김두한 시절 흉내 내던 보스 기질이 그대로 살아남았으리라. 농사짓던 시절 아버지의 권위는 하늘 이상이었다. 나라에서도 군사부일체니, 뭐니 하면서 아버지 권위를 부추겼다. 덕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는 잘 먹고 잘 놀다 가셨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 세대까지는 어떻게 세력 유지하면서 버틸 줄 착각했다. 꿈은 바로 깨졌다. 대통령은 탄핵당하기 일쑤이고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됐다.

요즘 젊은 애들은 남자도 음식을 한단다. 서로 맞벌이가 많아 청소나 설거지도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작업구역으로 변모했다. 우리 때는 여자 일로 규정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거들어 주면 칭찬받았는데, 이젠 안 하면 바로 지적당한다. 다행히 아들이 없어 며느리에게 구박받으며 사는 아들 꼴을 안 봐서 다행이지만, 사위가 내 딸에게 잡혀 사는 것도 별반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내 딸이라 못 본 체할 뿐이다. 안사돈은 자신이 낳아 좋은 음식만 갖다 먹여 키워놓은 자식이 저 지경으로 사는 걸 보고는 천불이 나 어쩔 줄 모르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병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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