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에 가면 호칭은 단 하나다. 모두가 “사장님”이다. 진짜 사장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손사래를 쳐도 “사장님 나이스 샷”은 멈추지 않는다. 호칭은 사실을 부르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편리하게 만드는 장치다. 반복되면 어색함은 사라지고, 결국 말은 의미를 잃는다. 골프장에서 사장님이 넘쳐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칭이 존중의 표현이기보다 서비스의 윤활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듣는 쪽도, 부르는 쪽도 그 허구를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주사 이모’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적잖이 낯설었다. ‘주사 아줌마’도 있을 수 있고, ‘주사 도우미’도 가능할 텐데, 왜 하필 이모일까. 더 묻게 된다. 고모는 왜 안 되는가. 외삼촌은 왜 상상조차 되지 않는가. 호칭 하나에 이렇게 많은 전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고, 동시에 불편함을 남긴다.
이모라는 호칭은 이미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식당에서도, 마트에서도, 동네 병원에서도 여성 노동자를 부르는 가장 무난한 말이 되었다. 이름 대신 불리고, 직함 대신 쓰이며, 개인은 자연스럽게 지워진다. 친근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친근함은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부르는 쪽은 편하고, 불리는 쪽은 선택권이 없다.
과거 드라마 속 가사도우미는 “청주댁”, “안성댁”으로 불렸다. 본래 ‘댁’은 존칭이었지만, 어느 순간 출신과 신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었고, 급기야 비하의 언어로 굳어졌다. 지역과 혈연을 담던 말이 노동과 종속을 표시하는 기호로 변한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계층을 정리하고, 한 번 굳어진 호칭은 좀처럼 위로 이동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모라는 말조차 부담스러워졌는지, 재벌가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가사노동자를 “실장님”이라 부른다. 반면 골프장에서는 모두 사장님이고, 글 쓰는 세계에서는 모두 선생님이다. 미술계에서는 작가라 부른다. 이 공간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이모’라는 호칭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모는 특정한 장소, 특정한 계층에만 허용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호칭 하나로 공간의 위계가 구분되는 셈이다.
백화점에서 이모라는 호칭이 통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곳에서는 “저기요”면 충분하다. 아가씨도 아니고, 이모는 더더욱 아니다. 호칭을 지우는 대신, 서비스 공간의 격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모라는 말이 그만큼 낮은 위치로 고정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평생 이모라는 호칭을 거의 쓰지 않고 살았다. 어머니는 외동이었고, 아버지 쪽에는 고모만 있었다. 그래서인지 식당에서도 이모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오십쯤 되어 보이면 무조건 아가씨라 부른다. 그 말에 불쾌해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불편함은 말보다 맥락에서 생긴다. 내게 이모는 친족 호칭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모는 여성 노동자를 부르는 가장 손쉬운 말이 되었다. 친근함이라는 포장을 두른 채, 개인을 지우고 역할만 남기는 언어가 된 것이다. 만약 주사를 놓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우리는 뭐라고 불렀을까. ‘주사 외삼촌’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요즘 꽤나 심심하긴 한 모양이다.
/노병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