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짜장면과 파도소리

▲ 김순희 수필가혼자 하는 것보다 친구와 같이 하면 더 좋은 것들이 있다. 깻잎무침 접시에서 젓가락으로 한 장 떼어낼 때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눌러주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보고 나서 꽁냥꽁냥한 연애에 대해 폭풍 수다 떨기, 두껍고 버거운 책 못다 읽고서 ‘너도 그랬어?’ 하며 공감해주기, 택배 박스에 섞여온 뽁뽁이 터트리며 남편 흉보기, 그 중에 최고는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이다. 햇살이 좋은 날, 약속 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파도소리 들으러 가자고 말을 건네니 두 말없이 따라나섰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운전대 잡은 사람 마음대로 하라며 웃었다. 장기 읍내를 지나 바닷길로 접어들다가 양포항을 만났다. 함께 간 친구들이 이 어여쁘고 조그만 항을 못 보았다기에 미리 둘러본 내가 소개해주고 싶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먼저 화장실에 들렀다. 여자 화장실에 조그만 소변기가 나란히 있다. 남자 아이 손잡고 온 엄마를 배려하는 거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났다.가족단위의 방문객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원은 인라인이나 킥보드도 탈 수 있고, 동네와 인접해 있어 여러 가지 샤워 시설이나 식수대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조금만 나가면 바다를 만질 수도 있고 모래를 밟으며 놀이를 즐길 수 있으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도소리에 섞여 왔다. 항구의 북쪽에는 길이 700m의 긴 방파제가 있다. 방파제가 시작되는 곳에 작은 숲도 있어서 아이들과 놀기에 좋고 텐트를 칠 수도 있어서 캠핑족들이 찾기도 한다.요트 계류장도 있는지 폼 나는 배들이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었다. 갈매기 모양의 가로등이 길게 늘어서 있는 산책길 끝에 공연장이 있다. 오늘은 파도소리만 예약되어 있을 뿐 다른 공연이 없어서인지 낚시꾼 몇 명과 갈매기들이 사이좋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가로등 기둥마다 스티커들이 붙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치킨과 중국집 전화번호였다. 바닷가에서 먹는 짜장면은 어떤 맛일까 궁금했던 우리 일행은 두 그릇만 시켜 보자고 입을 모았다. 가방엔 준비해 간 김밥과 커피가 있었으니까. 배달의 기수답게 통화한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철가방 사나이가 나타났다. 낚시꾼에게 먼저 다가가 물어보다가는 “짜장면 시키신 분?” 외쳤다. 설마 여자 셋이 시켰을까 싶은지 우리가 손짓을 하자 그제서야 달려왔다.나는 짜장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입이 짧기도 하고 기름끼 있는 음식이 비위에 맞지 않기도 해서이다. 그래서 늘 무엇을 시킬까 망설이는 식구들 틈에서 자신 있게 짬뽕을 시키고는 아들의 짜장면 접시에서 한 젓가락 얻어먹는 것으로도 만족했다. 오늘도 맛만 봐야지 싶었다.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더니 면 두 접시에 젓가락도 두 개만 딸려왔다. 하는 수 없이 한 개의 젓가락을 둘로 나눴다. 키가 작아진 나무젓가락 때문인지 짜장이 손에 묻고 입가에도 흔적을 남겼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서야 웃음이 났다. 그것도 모르고 먹을 만치 맛난 점심이었다. 안도현 시인은 중국집 앞을 지날 때는 침도 삼키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늘 냄새와의 싸움에서 지고 만다고 시를 썼다. 까만 짜장면에 코를 박고 비벼 먹던 아이적의 추억이 코를 잡아당기니 이길 수가 없다고 말이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음식에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켰는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을 이 곳에서 맛보았다. 아마 시인이 이 바닷가에서 일 인분 시켜 먹고 나면 새로운 시를 한 편 쓸지도 모른다.파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배 한 척이 수평선을 그으며 지났다. 후식으로 항구를 돌아보기 위해 방파제로 향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파도소리를 들으니 배불렀던 짜장면은 금방 소화가 되어버렸다. 짜장면은 파도소리에 비벼먹어야 제맛이란 걸 양포항이 알려주었다.

2018-05-18

아카시아궁궐

▲ 강길수수필가사월 하순 중간 날. 일터의 대체휴일이라 오랜만에 가까운 야산등산에 나선다. 휴일이면 거의 오르던 이 등산길을 올 봄엔, 다른 일들로 오래 오지 못했었다. 사월의 꽃들이 삼월에 피고, 오월의 꽃들도 사월에 피는 기후변화시대를 또 절감한다. 하늘을 이고 갓 피어난 아카시아꽃이 뿜어내는 향기가 저절로 마음메모리칩을 검색한다. 기억모니터에 ‘아카시아궁궐!’이 클로즈업된다. 젊은 날의 자작 합성어다.돌아오는 길…. 마지막 쉬는 곳의 벤치에 무심코 앉으려는데, 벤치 옆에 까만 비닐봉지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산에 오신 여러분, 쓰레기를 소중한 자연에 버리지 말고, 이 봉지에 담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어느 고마운 마음이 서린 봉지다. 비닐봉지를 어떻게 벤치에 걸었는지 살펴본다. 벤치 지지대 사이의 공간을 장식하는 무늬조각물을 이용,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게 걸었다. 훌륭한 아이디어다.나도 전에 등산로를 걷던 중 버려진 비닐봉지를 주워서, 이 벤치 곁의 나뭇가지에 쓰레기봉투로 건 적이 몇 번 있다. 벤치 주위에 담배꽁초가 많았고, 과자 껍질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가 보면, 바람에 비닐봉지가 돌돌 말려있어 쓰레기 넣기가 쉽지 않거나 아예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바람을 고려하여 비닐봉지를 걸 튼튼한 가지를 골랐는데도 그랬다. 이 봉지는 그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하고 있으니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그때 왜 의자는 살펴보지 않았던지 모르겠다. 눈은 잘 보라고 있는 보배인데 말이다.‘나보다 한 수 위를 사는 분이구나!’ 벤치에 앉으며 든 마음이다. 이어서, ‘나는 이 방법을 왜 찾아내지 못했을까’하는 후회가 가슴을 톡 친다. 젊은 날부터 직장에서 실험, 연구, 품질 등을 다루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랬기에 문제를 찾아내고, 연구하고, 해결하는 데는 나름대로 안목을 가졌다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한데, 오늘 그 믿음에 흠 하나를 더 보탠 것이다.벤치 장식무늬에 쓰레기봉지를 건 눈을 가진 이는 어떤 분일까. 그는 분명 나보다 한 수 위를 사는 분 같다. 우리사회에서 요즈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적폐청산을 제대로 하는 분을 오늘 만난 기분이다. 한편에서는 적폐라 규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보복이라 주장하는 일 같은 것들은 원칙으로 보나, 상식으로 따져도 칼자루 쥔 측의 사법처리 대상은 될지언정 적폐라 볼 수는 없다 싶다.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같이, 만인이 다 고쳐야한다고 하는 것들이 진짜 적폐일 것이기 때문이다.벤치쓰레기봉지가 나비효과를 낸 때문인지, 벤치주위가 전보다 많이 깨끗해졌다. 옥에 티 같은 담배꽁초 몇 개를 주워 봉지에 넣었다. 손끝으로 봉지 건 분의 따사한 마음이, 가물에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로 전해져 왔다. 봉지에 쓰레기가 차면 그분은 쓰레기봉지를 회수해 처리하고, 다시 새 봉투를 걸 것이다. 우리사회의 숨은 적폐청산가 중의 한분이 그가 아닐까.해가 서산에 걸터앉기 시작한다. 일어나 집을 향해 걷는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더 짙게 후각세포를 파고든다. 쳐다본 파란 하늘에 아카시아꽃들이 모자이크로 박힌다. 꽃을 맴도는 꿀벌들도 덩달아 모자이크가 된다. 저 꿀벌들은 이 시각에도 하루 꿀 수확량이 모자란 걸까. 무엇 때문에 저리도 열심히 일할까. 일벌들이 가져간 꿀과 화분으로 여왕벌과 수벌도 먹고 살 텐데 억울하지도 않고, 적폐란 생각도 안 드나보다.그 옛날, 고향집 정경이 어느새 파노라마 되어 마음 스크린에 비춰진다. 남쪽 삽짝 곁에 서서 살던 아름드리아카시아나무. 봄이면 엄청 많은 꽃을 피워 향기를 온 사방으로 뿜어댔다. 온갖 벌, 나비들 찾아와 한 가족으로 살던 곳. 내가 지은 이름 ‘아카시아궁궐’로 손색없던 보금자리. 온 가족이 꿀벌 되어 제 할 일 묵묵히 하며 살았기에, 적폐가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 집….오늘따라, 지금은 사라진 아카시아궁궐이 사뭇 그립다.

2018-05-11

어린이날에

▲ 김병래시조시인·수필가‘학원에 가기 싫은 날은 가장 고통스럽게 엄마를 씹어 먹고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눈깔을 파먹고 이빨을 다 뽑아 버리고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고 마지막으로 심장까지 먹고 싶다’는 내용의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글이 항간에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그 아이 부모의 말로는 특별히 문제가 있는 아이는 아니라고 하니, 대다수 요즘 아이들 정서와 사고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물론 아이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아이를 그 지경으로 만든 어른들의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고, 그런 글을 동시(童詩)라고 입에 피 칠을 한 채 심장을 먹고 있는 그림과 함께 책으로 만들어낸 어른들의 일그러진 심성에도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더욱 기막힌 것은, 그 아이의 엄마라는 사람이 “처음에는 저도 상당히 충격을 받았지만 아이 얘길 듣고 보니 요즘 유행하는 엽기물이나 괴담만화에 익숙해진 초등생들은 잔인하기보다는 재밌는 표현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육십 평생을 살면서 세상의 온갖 험한 꼴을 본 나 같은 사람에게도 소름끼치는 말이 요즘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게 들린다는 것이다. 하기야 이제는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쯤은 별로 놀라운 뉴스거리도 아닌 세상이니 미구에는 오락삼아 부모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요즘 아이들은 동심(童心)을 잃었다고 한다. 하늘을 찌르는 콘크리트 구조물인 아파트 단지를 옮겨 다니면서 학원과외에 찌들고 컴퓨터오락에 빠진 아이들에게는 동심이 깃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동심을 잃은 아이들이 동요인들 좋아할 까닭이 있겠는가.‘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과 보고 듣고 접촉하는 것이 온통 인위적 환경인 이들의 정서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결코 ‘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라거나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날리며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같은 동요의 가사와 가락에 가슴이 뭉클하고 코허리가 시큰해지는 세대일 수가 없는 것이다.고향과 추억이 담긴 동요가 생소하고 따분한 대신 인기 가수들의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노래에는 열광을 하는 아이들, 동심의 시절이 생략된 소위 신인류(新人類)의 모습이다.요즘 아이들은 옛날과는 비교도 되게 풍족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때의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혹사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잠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태교다 원정출산이다 조기교육이다 과외다 해외연수다, 가능한 수단은 무엇이든 다 동원하게 되고, 그래야만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 정성과 헌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대다수인 것 같다. 그래서 얻게 되는 부나 권세나 명예가 과연 어린 시절에 동심으로 누려야할 자유와 즐거움을 대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사람은 물론 많지가 않은 것 같고.소파 방정환의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제정한지 9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건강해지고 행복해졌는지 돌아볼 때가 되었다. 어린이날 하루 아이들에게 무얼 사주고 어디로 데려갈까를 걱정하는 것이 부모나 어른의 구실은 아닐 터이다. 온갖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무질서하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갈수록 정체불명의 인종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우려와 경각심을 가지기는커녕 어른들이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일이라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2018-05-04

헌길

▲ 김순희 수필가어린 시절, 학교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과수원 사이를 지나는 새길과 논을 옆에 두고 가는 헌길이다. 통학버스가 다니기 위해 새로 만들어 놓은 길은 차 전용이었고, 자전거가 마주와도 한 쪽은 내려서 길가로 비껴서야하는 헌길은 걷는 사람 전용이었다. 두 길 모두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30분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내가 주로 다닌 곳은 헌길이었다. 헌길엔 도랑이 바짝 따라 붙으며 길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물빛에 내 그림자를 비춰가며 개멀구를 따먹고, 산 밑까지 내려오다 냇물을 건너지 못한 칡덩굴이 향긋한 냄새를 풍겨 코를 벌름거리게 했다. 지금도 오래된 길을 좋아한다. 포항에서 출발해 영천에 가는 길은 고속도로와 국도도 있지만 오늘 가 볼 길은 이 두 길이 태어나기 전 이용했던 헌길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길이라 자세히 설명하고 귀담아 들어야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다. 일단, 연화재를 지나 고속도로 빠지지 말고 청송·기계 방향으로 튼다. 강동면 새마을로를 달려 달성네거리에서 직진신호를 받아 달릴 때쯤 네비게이션은 서포항IC로 차를 올리라고 재촉하겠지만 우린 그냥 지나친다. 봉계리란 이정표가 나오면 고지교라는 다리를 건너기 위해 좌회전 한다. 이제 촌길로 들어선다. 과수원 사잇길로 직진하며 가지에 하얗게 열린 사과꽃을 구경하다보면 운주사, 영천CC라고 조그맣게 써진 이정표가 나온다. 이 길이 아닌가싶게 좁은 길이다. 망설이지 말고 구불길로 들어서라. 길은 굽어지는 동시에 가팔라지니 속도는 저절로 느려져 이제부터는 산이 뭐라 말하는지 들이 무엇을 키우고 있는지 귀에 눈에 넣기 좋아진다.산 아래 동네에는 지난주에 꽃잎을 다 떨구고 연두 잎을 내기 시작한 벚나무가 윗동네인 산골에는 이제사 연보라 빛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나무들도 따뜻한 기운에 한껏 물을 올리느라 연두연두해지니 입장료도 한 푼 내지 않고 구경하는 우리 마음도 말랑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차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 산을 다 오르면 여기서부터 영천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다.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올봄에 비가 잦아서 저수지에 농사지을 물이 가득한 수성2리를 지나다 보면 마늘밭에 올마늘의 키가 제법 크다. 들에는 밭을 살찌우려는 경운기 소리가 가득하다. 오래전 폐교가 된 수성초등학교에 지금은 아이들 대신 군인들이 숨어서 훈련 중이다. 조금 더 가다보면 강물인가 할 만큼 너른 임고저수지가 보인다. 오늘은 바람이 없어서 연둣빛 봄산이 저수지에 몸을 비춰 매무새를 다듬기 좋다. 저수지 물을 끌어다 복숭아를 키우는 금대리는 봄 내내 분홍 천지라 낚시터 이름도 무릉도원이다. 마을버스가 지나길 잠시 기다렸다 자두밭 배밭을 지나 임고면에 접어든다. 임고면 황강길에 남강 정사가 자리한 연못이 오늘 여행길의 압권이다. 벚꽃이 질 무렵에 이곳에 가면 연못은 하얗게 꽃잎으로 뒤덮인다. 그러다 산들바람이라도 불면 떠다니던 잎들이 연못 한 귀퉁이로 몰려와 하얀 레이스 천을 덮어 놓은듯하다. 꽃은 폈을 때도 곱지만 지고 나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군자는 대로행이라며 다니던 길만 고집하던 내 운전습관을 보더니 친구가 정해진 길로만 다니니 토끼길 운전이라 했다. 그 길이 그 길이면 그날이 그날이라 권태라는 올무에 걸리기 십상이다. 짧은 시간을 길게 늘리는 방법은 다양한 길을 가보는 것이라는 충고에 처녀길도 과감히 나서고, 가던 길도 빙 둘러 가 봤다.길의 사계절이 보이기 시작했다. 촌길 끝에 임고초등학교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숲을 가진 학교로 뽑힌 곳으로 운동장 가득 플라타너스가 둘러섰다. 비 오는 아침, 노을 지는 해거름녁, 널따란 플라타너스 잎이 수북이 쌓여 바스락 거리는 늦가을, 언제든 가도 좋은 곳이다. 헌길을 찾아 나서는 이유가 거기 있다.

2018-04-27

라일락꽃내음

▲ 강길수수필가세레나!좋아하는 봄꽃들이 사월초순에 다 졌습니다. 개나리꽃, 진달래꽃, 벚꽃, 살구꽃, 목련꽃이 그들입니다. 사월에 필 꽃들이 삼월에 피었으니 일찍 진 것은 당연한데, 마음이 개운치 않으니 웬일일까요? 그나마 겹벚꽃과 라일락꽃이 피어 아직은 꽃피는 봄이라 일러줍니다. 그 곳은 어떤가요? 아마도 비슷할테죠.오늘아침 출근길에 불현듯 ‘내가 뭐하고 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척에 라일락꽃을 두고도 자주 가지 않는 방향이라고 내음 한번 제대로 느껴보지 않고, 또 이 봄을 소진하는 한심한 존재’란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보고 느낄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봄꽃들에게 문을 닫고 산 게지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고 언젠가부터 생각하고 다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세레나.라일락꽃 앞입니다. 실로 한해 만에 맡아보는 진한 라일락꽃내음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아카시아꽃내음이나 인동초꽃내음, 치자꽃내음과는 또 다르게 후각세포를 막 일깨웁니다. 마음이 갑자기 타임머신을 탔나봅니다. 그 옛날, 신혼시절로 바로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이른 봄날 같던 늦겨울 2월에 결혼하고, 몇 달을 우리는 주말신혼부부로 살았지요. 직장 때문이었습니다. 군청에 근무하던 새색시가 어떤 마을에 출장 갔다가, 라일락묘목을 얻어 시가 댁 마당에 심었습니다.첫 며느리를 얻은 시아버지는, 새아기에게 하듯 소중하게 라일락나무를 돌보았습니다. 라일락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며 봄마다 온 집안을 함께 사는 향기로 감쌌습니다. 부모님은 라일락나무를 멀리 사는 맏아들 집처럼 여기고 사신 듯합니다. 마루 가까이 심은 것이며, 며느리가 가져 온 나무라고 애지중지 하시는 걸 종종 보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라일락나무에다 자식과 며느리, 손주들을 그려 넣고 바라다보며 그리움과 기다림을 달래면서 살았다 싶습니다.세월은 강물처럼 잘도 흘렀습니다. 라일락나무도 어느새 고목이 되어갔지요. 그 사이 아버지가 먼저 하늘나라 가시고, 어머니도 몇 해 후 뒤따라가셨습니다. 고향집에는 늙은 라일락나무만 동그마니 지키게 되었습니다. 물론 배롱나무나 향나무, 화초 몇 본과 함께였지만 내 눈에는 라일락나무가 외로워만 보였지요. 그나마 동생부부가 고향집 지키며 사는 것이 고맙고, 다행이라 여기며 지냈습니다. 어머님 제삿날이 초파일이어서 갈 때마다 라일락꽃내음이, 부모님의 향기로 다가오곤 했습니다.세레나.그러던 어느 해 가을이었지 싶습니다. 아버님 제사 지내려 고향에 갔는데, 라일락나무가 베어지고 밑둥치만 남았지 뭡니까. 동생에게 라일락나무를 왜 베어 냈느냐고 물었더니, 고목이 되어선지 진딧물이 많이 끼어 그랬다 했습니다. 속으로 안타깝고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날, 고향집 라일락나무는 내 마음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옛날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새댁 아내와 뛰놀던 아이들과 함께, 수채화로 그려져 스며있기에 더 향기로운 라일락나무로 말입니다.‘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의 집에 살 수 있다’는 진실을, 이 아침 라일락꽃내음에서 또 느낍니다. 생활이란 핑계를 멍에로 걸고, 오늘도 걷고 있는 자신도 또다시 만납니다. 삶이 비록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사인곡선일지라도, 그 길목에서 가끔은 라일락꽃내음도 즐기며 걸어가야 한다 싶습니다.부디 라일락꽃내음 향기로운 봄을 맘껏 누리기 빕니다. 세레나….부디 라일락꽃내음 향기로운 봄을 맘껏 누리기 빕니다. 세레나….

2018-04-20

제비가 돌아오지 않는 봄

▲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겨우내 움츠렸던 아이들이 봄 햇살 아래 나와서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할 때쯤이면 노래에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제비가 돌아왔다. 해마다 그렇게 삼짇날을 전후해서 제비들이 돌아오는 것은 계절이 바뀌는 것만큼이나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 먼 남쪽나라로 날아갔던 제비들은 생사를 건 긴 여정 끝에 고향집에 돌아온 감회가 벅찬지 마당의 빨랫줄에 앉아 한동안 숨가쁘게 지저귀곤 했다.제비는 철새임에도 유달리 귀소성이 강하다고 한다. 지난해 머물렀던 곳이나 태어난 집을 다시 찾아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암 수 한 쌍이 2회에 걸쳐 서너 마리씩 번식을 하니 가을이 되어 남쪽으로 떠날 때에는 다섯 배가 넘게 식구가 불어나는 셈이다. 그러나 오가는 이동 중에 절반가량이 죽고 늙어서 더 이상 번식을 할 수 없는 제비들은 오지를 않아서 매년 일정한 수를 유지했던 것 같다.제비들이 오고 가는 날이 매년 일정한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흔히들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와서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떠나는 거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길한 숫자로 꼽는 3과 9가 겹치는 날에 제비가 오고 간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길조요 영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오십여 년 전만 해도 시골에서는 제비가 둥지를 틀지 않는 집이 거의 없었다. 가축이나 애완동물이 아닌 야생조류가 사람들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간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제비와 한 가족처럼 살아온 셈이다.제비가 처마 밑에 둥지를 틀면 사실 귀찮은 점이 없지 않다. 새끼들이 깨어나면 적잖이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수시로 떨어지는 배설물을 치우는 일도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날짐승일지라도 사람을 의지하고 찾아든 것을 박절하게 내치지는 않는 것이 우리네 옛 인심이었다.‘곡식에 제비’라는 말이 있듯이 텃새인 까치나 참새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것과는 달리 제비는 오히려 농사에 해로운 벌레를 잡아먹어서 사람들에게 보은을 한다. 새끼를 가진 암수 한 쌍이 하루에 수백 회나 벌레를 잡아 나른다고 하니 그 수가 실로 적지 않은 것이다.이제는 시골에서도 제비를 보기가 쉽지 않다. 지난 몇 십 년 사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제비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지금은 90% 이상이나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런 추세라면 얼마를 못 가서 아예 제비를 볼 수 없게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제비가 줄어드는 이유로는 농약이나 각종 공해로 인한 먹잇감의 감소에다 사람들의 주거환경이 제비가 깃들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가 이제는 대부분의 인심들이 더 이상 제비를 반기지 않는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제비가 하등 이로운 존재도 아닐 뿐더러 현대화된 가옥구조에 제비가 날아들어 둥지를 트는 것은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제비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할 것이다. 농작물의 해충쯤이야 농약으로 간단히 해결이 될 것인데 집안을 어지럽힐 뿐인 제비를 반길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물론 제비들과 함께 살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나 정서가 없는 세대로서는 당연한 반문이다.제비가 날아들어 보금자리를 틀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난한 시절에서 국민소득 3만 불에 육박하는 시대로, 우리나라는 참 눈부시게 발전을 했다. 하지만 그래서 얼마나 더 행복해 졌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제비들이 더 이상 살수 없게 된 땅이 사람들에게는 과연 행복한 세상일 수가 있을까.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제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멀리 남쪽하늘을 쳐다본다.

2018-04-13

어슬렁 숲 탐방

▲ 김순희 수필가林(숲)이란 글자 속에는 나무 두 그루가 손을 잡고 서있다. 어깨도 서로 맞대고 있어서 바람이 불면 한 방향으로 몸을 뉘었다 일어서길 반복한다. 흔들릴 줄도 모르는 빌딩숲에서 넘어지기만 하던 나는 푸른 기운을 받으러 林으로 간다.`어슬렁`이라는 제목에 꽂혀 얼른 신청했다. 지난해부터 기다린 이 모임은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포항시 가까이 위치한 산이나 숲을 천천히 걷는다고 했다. 무릎이 시원찮아 가파른 산은 겁부터 나는데, 한 달에 한 번 숲을 거닐며 나무 이름, 꽃 이름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숲에 사는 동물과 곤충들이 숲과 도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니 어슬렁어슬렁 따라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마음에 쏙 들었다.오늘 갈 곳은 봉좌산(鳳座山)이었다. 포항시 기계면과 경주시 안강읍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정상에 봉좌암(鳳座岩)이라는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지만 우리는 봉좌산 기도원에서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거기다 흙보다 돌이 많아 걸을 때마다 돌산에 온 것을 환영하는 돌들의 부딪힘이 소리가 되어 몸에 전해졌다. 산이 오르락내리락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건 계속 오르막뿐이었다.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숨이 턱에 찼다. 힘에 겨운 나에 비해 같이 간 사람들은 힘든 내색 하나 없다. 나 혼자만 얼굴이 벌겠다.더 이상 못가겠다 싶을 즈음 샘이 보였다. 이름이 `참샘이샘`이다. 땔감나무와 풀을 베어 농사를 짓던 시절에 나무꾼들이 쉬던 장소에 한여름에도 얼음이 서려 있어 그곳을 파보니 찬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조롱박 모양의 간이 우물을 만들었는데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이었던지라 모두들 이곳에서 물을 마시며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뒤에 섰다 나도 한 바가지 얻어 마셨다. 가쁘던 숨도 잦아들고 달아오른 몸도 식혀줬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 챈 회원 한 사람이 주위에 핀 꽃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샘가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에서 잎을 따서 비벼보라고 했다. 비비니 손에서 향긋한 숲 내음이 났다. 저리던 다리를 부추겨 더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 향이었다. `비목`이라는 나무를 눈여겨 봐두고 또 오르기 시작했다.봉좌산은 봄이면 연달래가 많이 피는 곳이다. 만발한 연달래를 보려면 담주 쯤 올라야 할듯하다. 군락지라는 표시를 뒤로 하고 일행들의 꽁무니만 따르며 오르다 문득 산 아래를 굽어보니 발아래 내가 사는 세상이 있었다. 아침까지 아등바등했던 그 곳이 내가 빠져나온 자리의 흔적도 지운 채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내려오는 길에는 바람이 많았다. 포항의 바람은 모두 이 숲으로 모인 것 같았다. 왜 저리 맑나 했더니 바람이 나무의 손을 잡고 하늘을 열심히 닦은 덕분이었다. 가만히 서서 보자니 바람도 숨이 찬지 한소끔 쉬었다. 그사이 나뭇잎에 힘껏 매달렸던 자벌레 한 마리도 한 뼘 움직였다.오르는 길이 숨이 찬만큼 내려오는 길은 더 가팔랐다. 오르는 속도가 늦은 사람은 내려 올 때도 맨 나중으로 쳐지게 마련이다. 관절이 약한 나는 소심하게 한 발 한 발 내 디뎌야 했다. 그때, 오솔길 양옆으로 도열한 나무들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어 미끄러지는 나를 잡아주었다. 마라톤 코스에서 기록과는 상관없이 뒤쳐져 달리는 선수에게도 아낌없이 응원을 보내는 시민들처럼 나를 지켜주었다. 나무들이 왜 그렇게 손이 많은지 이제 알 것 같다. 나같이 어설픈 등산객들에게 보내는 박수소리를 더 크게 하려고 그렇게 봄이면 잎 같은 손을 내놓는 것이다. 그래서 봄이면 가지 끝까지 물을 퍼 올리느라 숲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다.봉좌산을 내려오니 나는 탐방팀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자 다음 모임에 꼭 오라며 흔드는 그들의 손이 나뭇잎을 닮아있었다.

2018-04-06

민들레갓털, 봄바람 타다

▲ 강길수 수필가아침저녁 한 생명의 곁을 지나다닌다. 내겐 봄의 전령사다. 3월 초부터 아가 손 초록 잎을 내밀어 오가는 이들에게 손짓한다. 나는 반가우면서도 찜찜하다. 의문들이 머리를 헤집고 나오기 때문이다. `넓은 들판, 아름다운 시냇가, 따사한 산자락 다 버리고 아가 손은 하필 이 틈바구니에 삶터를 잡았단 말인가. 더구나 도시의 길가 딱딱한 콘크리트 틈에 말이다. 무엇이, 어찌하여 이 여린 생명을 비좁고 오염된 틈에 태어나 살게 했을까.` 마음이 상상의 나라로 날아간다.바람, 그랬다. 봄바람이었다. 어느 봄날, 강 건너 남녘에서 봄바람이 산들산들 푸른 언덕 넘어오다가 한껏 부푼 하얀 갓털송이를 만난 것이다.“갓털아, 너는 왜 솜사탕으로 부풀었니? 너 멀리 떠나고 싶은 게로구나. 날 기다렸지? 내가 널 데려다 줄게. 가는 길에 같이 아름다운 봄 구경도 실컷 하고….”봄바람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갓털 한 움큼을 등에 태웠다. 그리고 살랑살랑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아니다. 그 봄날, 무심한 듯 푸른 언덕을 간질이며 날아가는 봄바람에게 갓털이 말을 건 것이다.“봄바람아, 너는 왜 풀밭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지나가니? 나를 잘 봐! 이렇게 솜사탕 되어 네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단다. 부디 날 저 먼 새 땅에 데려가 달라고 말이야….”온 나래를 활짝 편 갓털은 멋진 패러글라이딩묘기를 부리며 봄바람 등에 살짝 올라탔다. 난생 처음 탄 비행기가 이륙하듯 마음이 들뜬 갓털은 훨훨 하늘로 날아올랐다.둘은 의기투합했다. 봄바람과 갓털 중 누가 함께하기를 청했든, 그런 건 따질 필요가 없었다. 둘은 새 땅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씨앗을 함께 감싸 안고 봄 유랑을 했다. 아지랑이와 어깨동무하고, 발아래 펼쳐지는 신록의 박수갈채에 신 나 종횡무진 꿈나라를 휘저으며 날아갔다. 산 자드락 마을이 발아래 지나가고, 커다란 칼라시트지붕 즐비한 공단을 가로질러 푸른 물 쉬어 흐르는 강도 휘저어 넘었다.어느 순간, 갓털은 기절하고 말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높은 빌딩에 봄바람이 부딪치며 생긴 와류에 휩쓸려, 정신을 잃은 것이다. 한참 후 정신이 들었을 때, 또다시 눈앞이 캄캄했다. 도시의 어느 길가 측대 앞에 고인 빗물위에 자신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갓털은 마음을 다잡고, 무엇보다 몸에 씨앗을 매달고 있는지 살폈다. 씨앗은 물가 작은 콘크리트 틈바구니에 끼어, 되레 자신을 부여잡고 있었다.`다행이다!`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불행일지도 몰라!`하는 걱정도 뒤이어 몰려왔다. 신났던 봄바람도 갑자기 들이닥친 커다란 빌딩에 혼비백산, 온 몸이 일그러지며 도시를 빠져나가기에 바빴다. 이윽고 철길을 건너 야산에 닿았다.신록이 보이자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갓털 생각이 났다. 어디에 떨어졌는지, 다른 봄바람을 만나 새로운 곳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 탓은 아니지만, 갓털에게 미안했다. 어버이를 알기에 통성명도 않고 봄 유람의 벗이 된 갓털이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세상일이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음을 다시 깨달으며, 봄바람은 갓털이 부디 무사하기를 빌며 말했다.“민들레갓털아! 미안해. 부디 네 씨앗이 새싹으로 태어나 잘 살아라. 난 너를 믿는다. 네 꽃말도 불사신이잖아….”내 삶의 길도, 민들레갓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싶다. 산촌에 태어나 무슨 학교 졸업이란 갓털을 달고, 나라의 중화학공업화정책이란 봄바람에 휩쓸려 시험보아 취직했으니까. 또, 직장을 따라 고향 떠나 콘크리트 도시의 한 틈에 뿌리내려 살고 있으므로. 따져보면 학교공부나 취업준비 공부도, 훈련도, 봉사도 모두 새로운 곳에 가 살게 하려고 갓털을 키우는 일이었다.새로운 봄바람, 기술융합시대란 4차 산업혁명시대의 갓털은 또 무엇이 될 것인가.

2018-03-30

봄 마중 가자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동무들아 오너라 봄 마중 가자 / 나물 캐러 바구니 옆에 끼고서 / 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보자 / 종다리도 봄이라 노래하잔다”봄이면 절로 흥얼거려지는 이 동요의 가사가 맞는지 인터넷에 찾아보니 봄 마중이 아니라 봄맞이란다. 하지만 마중이란 말이 더 좋아서 그냥 입에 익은 대로 부르기로 한다.이 노래처럼 봄을 삶 속으로 맞아들이던 시절이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거나 다니며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가운 가족이나 손님처럼 나가서 마중하던 시절이었다. 가난으로 헐벗었던 시절에는 겨울이 참 춥고 길었다. 그래서 따뜻한 봄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다 마침내 얼었던 땅이 풀리고 새싹이 움트는 삼월이 오면 너도나도 달려 나가서 봄을 맞았다. 달래와 냉이를 캐고 쑥을 뜯어서 새 봄의 기운을 식탁에 올리기도 했다.농경사회에서는 동식물만큼이나 사람들도 계절과 기후변화에 민감했다. 해토머리엔 쟁기로 논밭을 갈아엎는 봄갈이를 하고, 봄풀이 돋으면 온종일 보리밭에 김을 매었다. 때마침 봄비가 내리면 물을 잡아 못자리를 만들고 봄채소의 파종을 하는 등 그야말로 신토불이로 계절을 사는 삶이였다.산업사회가 되어 생활과 주거의 환경이 바뀌면서 대다수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에 많이들 둔감해졌다. 냉난방 시설이 잘 된 실내에서는 바깥의 기후나 풍경을 직접으로 체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절의 추이가 그다지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다. 주말이나 되어 야외로 나가보고서야 봄이 벌써 이만큼이나 다가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산업화가 삶의 주축이 되면서 경제적인 여유는 갖게 되었지만 자연과는 점점 멀어진 것이다.이제는 먹고살만해졌으니 인문학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들 한다. 아이들에게도 학습능력 못지않게 건강한 정서의 함양이 중요하다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틈만 나면 스마트폰에만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감성과 정서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늘이 아무리 맑고 푸르러도 쳐다볼 줄 모르고, 새싹이 돋고 꽃이 피어도 들여다보지 않고, 새가 울고 벌 나비가 날아도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과연 어떤 심성과 정서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걸핏하면 자살을 하거나 아무런 죄의식이 없이 남을 해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정서의 고갈과 심성의 황폐가 초래한 결과가 아니겠는가.물질만능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찌들고 비뚤어진 심성과 정서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연과의 친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로 망가진 사람이 산속에 들어가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에서 보듯이 자연에는 병든 심신에 대한 놀라운 치유력이 있다. 인문학 따위를 배우지 않아도 얼마든지 삶의 지혜와 에너지를 얻을 수가 있는 곳도 자연이다.자연과 친해지기 위해서 구태여 사람들이 북적대는 유명 관광지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집에서 가까운 들이나 한적한 시골마을이 더 좋을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쑥도 뜯고 냉이도 캐고 진달래꽃도 따먹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밝고 고운 정서의 함양과 튼실한 정신력을 기르는데 더없이 좋은 학습이 될 것이다.친해지려면 먼저 이름부터 알아야 한다. 스마트폰 검색기능을 활용하여 주변의 가장 흔한 풀이름 나무 이름을 익히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림으로 그려보거나 사진을 찍어 인터넷 블로그에 올려놓고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찾아 첨가한다면, 예체능 과외학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상의 자연공부 체험학습이 될 것이다.식물뿐 아니라 곤충이나 새들의 이름도 알아두고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자. 그러면 그 나무와 풀꽃과 곤충과 새들이 한결 새롭고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어떤 인문학 수업보다도 생기롭고 즐거운 공부가 될 것이다.

2018-03-23

쑥떡

▲ 김순희 수필가겨울 축제가 끝나간다. 우리 어머니들은 대명절인 설날에 칠 일을, 정월대보름에는 오 일을, 마지막 축제인 이월엔 하루를 놀았다. 봄을 알리는 음력 2월 1일 또한 명절이라 이름 붙여 놓고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일뜸질이 시작되니 마지막으로 노는 날이었다. 일꾼들을 위로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머슴날, 농사가 시작되는 때라 중화절이라고도 불렀다.온갖 떡을 해서 나이만큼 먹는다 해서 나이떡 먹는 날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월에는 윷놀이로 하루해가 저물었다. 마당 가운데 새끼줄을 쳐놓고 네가락의 윷을 던지고 모야 윷이야를 외치고, 말판도 없이 `건궁말`을 쓰다보면 금방 허기가 졌다. 짬짬이 참을 먹어야 했기에 집집마다 한두 가지씩 해 온 음식으로 한상을 차렸다. 쑥떡 옆에는 배추뿌리 삶은 것도 콩가루를 뒤집어쓰고 있고 무나물, 콩나물국, 메밀묵도 한자리 차지했다.이 날은 먹고 노는 날이기에 모든 걸 미리 해 놓는 게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쑥떡이었다. 햇쑥은 아직 키를 키우기 전이라 한 나절을 뜯어 모아도 국이나 끓여먹을 정도였다. 양지바른 곳에 소복이 돋아난 것은 작은 칼로 하나씩 뜯어 쑥털털이나 전을 해먹었고, 그러고도 남은 쑥이 키를 키워 늦봄에 억세지면 낫을 들고 가 쓰윽 베어 한 자루씩 집에 가져와 말렸다. 다음해 묵은 쑥으로 떡을 해 먹기 위해서다.쑥떡을 하려면 사나흘은 필요했다. 이월을 며칠 앞둔 날에 먼저 콩을 가마솥에 볶았다. 알맞게 볶은 콩이 완전히 식으면 빻기 힘드니 따뜻할 때 디딜방아에 넣고 찧었다. 고은 채로 치고 다시 빻아서 가루를 만드는데 하루해가 갔다. 다음 날엔 지난해 말려놓았던 쑥을 삶았다. 여린 잎이 아니라 억센 쑥대를 다듬었기에 시래기 삶듯 군불을 지펴서 오래 삶아 물러지도록 했다. 다 삶기면 빨아서 하루 정도 물에 울쿼서 쓴물을 뺐다. 또 하루해가 기울었다.다음 날, 쑥은 물기를 빼 놓고 쌀을 물에 불린다. 불린 쌀을 디딜방아에 넣고 가루를 낸 후 쑥과 섞어서 또 찧는다. 그런 후 솥에 찐다. 떡보자기 째로 넓은 안반에 놓고 떡메로 칠 때에만 남자가 나섰다. 찰지게 떡이 되면 접시로 둥글려 작은 덩이로 나눈 떡에 고소한 콩가루를 묻히면 쑥떡이 완성되었다.영덕에 사는 경숙언니는 떡을 잘 만든다. 어머님이 편찮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쑥떡을 몇 되나 해 보냈다. 봄 내내 새벽기도 마치고 오는 길에 한 자루, 일마치고 남은 해가 기울 때까지 두어 자루씩 뜯어 데쳐 냉동실에 모아두었다가 쌀 양보다 쑥을 더 많이 넣어 향이 진한 진짜 쑥떡을 만들었다. 꽃보자기에 장미꽃으로 장식까지 해서 이바지음식 보내듯 정성으로 쌌다. 펴 보시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냉동실에 소분해서 넣어두고 하나씩 꺼내 데워 요구르트랑 드셨다. 항암치료가 몸에 겨워 입맛을 잃었을 때 자주 찾았던 음식이 쑥떡이었다. 떡집에서 사온 것은 입에 대지 않으셨다. 뜯는데 삶는데 품이 많이 드니 그곳에서 파는 것은 쑥이 장화신고 건너간 듯 모양만 쑥떡을 흉내 내고 있었다. 몸이 성할 때는 아무 말 없으셨던 어머니였지만 입도 속도 내 것이 아니었는지 속내를 다 보이셨다. 입이 써 질대로 써서 다른 음식은 거의 못 드실 때에도 경숙언니 쑥떡만은 맛나게 드셨다.어머님을 여의고 첫 제사가 돌아왔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것을 제사상에 올리고 싶어 경숙언니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두말 않고 쑥떡을 해서 달려왔다. 영덕에서 포항 오는 새로 생긴 기차를 타고 역에 내려서 얼른 떡 상자만 건네고 고맙다는 말도 길게 못했는데 바쁘게 돌아서 갔다. 쑥떡을 올리며 맛나게 드실 어머니 생각에 콧망울이 시큰했다.겨울 끝을 알리는 봄비가 자복자복 내린다. 어머님이 알려주었던 언덕 그 자리에 올해도 뽀얀 쑥이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소쿠리랑 작은 칼을 준비해 봄 마중을 가야겠다.*건궁말 ㅡ머리속에 윷판을 그려놓고 말을 쓰는 것.

2018-03-16

각자도생

▲ 강길수 수필가도대체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올까. 영하 10도를 오가는 날씨가 며칠씩, 몇 차례가 지나갔는데 속잎이 살아있다니. 더구나 딱딱한 콘크리트바닥과 벽의 틈바구니에서…. 겨우내 저 잎들과 뿌리는 얼마나 떨었을까. 차라리 얼어 죽기라도 했으면 살을 에는 추위의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텐데, 생명의 어떤 힘이 저 잎을 저리도 처절하게 살아내게 한다는 말인가.어제 저녁, 인터넷을 보다가 믿기지 않는 기사를 만났다. 과학자들이 올겨울 북극의 기온이상 현상에 경악했다는 것이다. 저 겨울민들레는 그 기사가 말하는 기후변화에 온 몸으로 선제대응하며 사는 걸까. 민들레가 살고 있는 온대지방 이곳은 겨울기온이 영하 10도를 넘나든다. 한데, 정작 가장 추워야 할 북극은 영상을 오르내리는 이상기후를 알아채고 민들레는 발열내의라도 챙겨 입었단 말인가.민들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짝 마른 잎을 들춰본다. 추위를 참아내며 사는 푸른 속잎이 내게 물음 화살을 쏘았다.“아저씨, 그런 생각 마세요. 나도 조상들처럼 겨울엔 어머니뿌리 품속에서 편히 잠자고 싶어요. 어쩐 일인지 지금은 세상이 나를 한겨울에도 깨어있게 만들잖아요?”그랬다. 도시 콘크리트 좁은 틈바구니에 묵묵히 둥지 튼 이 민들레는, 기후변화시대를 발 빠르게 알아채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게다. 어디 민들레뿐이랴. 낮은 아파트 담장 위에 고개를 내민 장미꽃나무 가지도 물오른 버들가지같이 초록으로 물들어있다. 봄에 겨울잠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식물들이 실은 이 겨울에도 잠들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식물들이 다투어 시대변화에 맞추어 사는 시대를,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기후와 환경의 변화, 나라와 국제정치, 경제, 안보상황의 변화 등에 대해 머리로 생각하거나 입으로 말만 했지, 저 민들레처럼 몸으로 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지방에 제법 큰 지진이 두 차례 지나가도, 겨우 인터넷 통해 가정과 차량용 소화기를 샀을 뿐, 생존배낭 하나 마련하지 않고 대책 없이 살고 있다.그뿐 아니다. 나라안보가 위태로워도 걱정만 할 뿐, 주위 사람들처럼 아무 일 없는 듯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웃나라 일본이나, 먼 하와이에서도 핵전쟁 발발시의 대피훈련을 한단다. 반면, 우리나라는 가장 다급한 당사자인데도 아무 교육훈련이 없어도 침묵하는 다수 국민의 하나에 끼어 나도 그냥 살아간다.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이 무생물, 동물, 식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이성과 감성적 존재라는 데 있을 것이다. 이성이란 인식하고, 사유하며, 판단하고, 나아가 실천하는 힘이라 여긴다. 또, 감성이란 환경이나 자극에 대해 올곧게 느끼는 마음의 힘이라 생각한다.어떤 이는 민들레는 본능으로 살고 있을 뿐인데, 뭐 그런 걸 이성과 감성으로 사는 사람과 비유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이 말은 식물과 그 본능은 하찮은 것이란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한겨울에도 민들레 잎이 살아야 하는 기후를 초래하게 되도록 스스로 놔두었느냐고 되묻고 싶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을 물질문명의 편의성 추구에만 몰두하다시피 살아온 건 아닐까. 그 결과 생물의 종은 급속히 줄어들고 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를 가져왔다면, 인간이 온당한 이성과 감성으로 살아온 존재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내 눈에 비친 나의 삶은, 비좁은 콘크리트 틈바구니에서 겨울 혹한을 억척스레 이겨내는 민들레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각자도생!`그렇다. 한겨울에도 깨어있는 민들레가 내게 보여 준 이 시대의 화두다. 식물들이 기후변화를 알아채고 발맞추어 자라나며 살듯, 우리시대 사람들도 온갖 변화에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야만 하는가보다. 각자도생의 슬픈 길을….

2018-03-09

사람사이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는 명망 있는 원로시인이 하루아침에 괴물로 전락했다. 오래 전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 시인이 `괴물`이란 제목의 시를 써서 그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소위 `Me too`운동으로 피해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관행처럼 자행되어온 각계의 성폭력 실상이 하나씩 까발려지고 있다. 연극계의 대부로 군림하던 연출가, 유명 배우, 법조계 판사, 천주교 신부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잇달아 치부를 드러낸 채 백일하에 끌려나오는 형국이다. 피해자들이 겪었을 치욕과 고통이 우선이지만, 가해자들 역시 그동안 쌓아올린 지위와 명성과 업적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쓰레기로 매도되는 현실에 여간 참담한 심정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비행이 지탄받아야 하는 것처럼 업적과 공로를 인정하는 일도 외면해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다. 다만 예술과 지성과 권위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상대의 약점을 악용해서 성적 욕망을 채우려 했다면 뒷골목 불량배들이나 다름없는 파렴치한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라도 기초가 부실한 사상누각이라면 웬만한 지진에도 폭삭 무너지고 마는 것처럼, 외관상으론 대단한 예술가나 법관이나 성직자들이 일거에 패륜아로 전락하는 데에는 뭔가 기본적인 것에 부실과 하자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사람을 다른 말로 인간이라고도 한다. `인간(人間)`이란 한자어는 본래 `사람이 사는 세상`의 의미인 `인생세간(人生世間)을 줄인 말인데, 그것이 `사람`이란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영향이라고 한다. 아무튼 지금은 `인간관계`니 인간문화제`니 하는 말처럼 사람이라는 말보다 인간이라는 말이 더 흔하게 쓰이고 있다.`人間`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사이`다.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이라 할 수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성립한다는 말이고, 인간다운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도 인간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도리는 유치원에서 다 배운다는 말이 있다.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과 질서와 규범을 지키는 사회성이야 말로 무엇보다 우선이고 기본이다. 학식이든 지성이든 품격이든 그런 기본이 있고난 다음에야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지성과 품격을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조차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는 유치원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무엇보다 우선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치원생 수준의 기본적인 것부터 충실하게 다지는 것이 먼저다. 교육도 예술도 종교도 정치도 그것에서부터 시작한다면 훨씬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런 기본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훼손하고서는 어떤 교육도 종교도 예술도 이데올로기도 결코 바람직하거나 정당한 것이 될 수가 없다.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사회다.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온갖 주장과 논리가 난무하고 이해득실과 시비곡직이 난마처럼 얽히고설켜 혼란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기본을 회복하는 일이다.학벌이나 지위나 재물의 고하를 막론하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인간은 가장 저급한 인간이다.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성의와 공감능력이야말로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실과 고통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고 절실하게 공감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피해자들이 받을 치욕과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제 욕구를 채우는 짓을 자행해 왔다는 것에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겠는가.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기본도 못 갖춘 파렴치한이라는 말 밖에.

2018-03-02

투투쓰리

▲ 김순희 수필가스무 살 시절은 르네상스다. 그래서였나, 그 시절 두꺼비약국 지하에 있던 르네상스 커피숍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커피를 주문하면 머그컵이 아닌 받침까지 얌전하게 딸린 잔에 담겨 나왔다. 탁자 중앙에 설탕과 프림이 미리 놓여있어 티스푼으로 내 간은 내가 맞췄다. 커피를 처음 만난 날은 초등학교 2학년 설쯤이었다. 외지로 돈 벌러 나갔던 고모가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귀향했다. 보따리 중에 유리병 세 개가 든 선물 상자가 제일 눈에 띄었다. 그게 무엇일까 궁금해죽겠는데 보여주지도 않고 만지지도 못하게 한 엄마는, 마루에 놓인 장식장에 보기 좋게 진열해 버리는 것이었다.호기심 많던 언니와 나는 그 밤을 그대로 넘길 수 없었다. 식구들의 숨소리가 잦아들 무렵 살금살금 마루로 나왔다. 뻘쭘하게 서서 잠든 장식장이 놀라지 않도록 유리문에 손바닥을 밀착해서 열고 천천히 병을 하나씩 꺼내는데 성공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니 하나는 과일향 가득한 주스가루였다. 시커먼 가루가 든 갈색 병에서는 나무 향 같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냄새가 났지만 하얀색 가루가 든 병은 정체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미숫가루처럼 물에 타 먹는 건가보다. 언니가 대접에 냉수를 한가득 떠오고 나는 밥숟가락으로 세 병에 든 내용물을 모두 한 숟가락씩 물에 탔다. 맛을 봤다. 밍밍했다. 가루 양이 적나싶어 한 숟가락씩 더 넣고 젓고 맛보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병의 3분의 1이 푹 내려가도록 넣고 저어도 달콤해지기는커녕 쓴맛만 더해갔다. 세상에, 고모는 왜 이렇게 맛도 없는 것을 사왔을까.다음날 언니와 나는 엄마의 잔소리를 끝도 없이 들었다. 엄마는 쓴 커피에 하얀 프리마를 넣고 함께 딸려온 오렌지주스 가루가 아닌 원래부터 집에 있던 설탕을 넣었다. 그러고선 숙모가 시집올 때 장만해온 하얀 사기로 된 잔에 담아 어른들부터 한 잔씩 대접했다. 어린애들은 먹는 게 아니라며 주지도 않았지만 밤새 쓴맛을 본 우린 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장롱 위에 과자세트에 만족했다.오래 커피와 알고지낸 사이지만 입보다는 코와 귀로 만나길 즐긴다. 아들은 별다방 커피가 입에 맞다 하고 남편은 집 앞에 있는 포항이 본점인 곳이 자기 취향이란다. 나는 맛보다는 향기가 더 좋다. 볶은 콩을 사와서 그라인더에 쏟아 부을 때 내는 소리가 더 좋다. 갈색 알갱이들이 금속 재질과 만나 다라랑 거리며 소복이 담기는 순간이 좋고, 뽀지락 거리며 갈리는 소리, 소리와 협연하듯 울려 퍼지는 향은 늘 맛보다 그윽하다.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를 마신 것은 얼마 전이다. 대게를 싸게 먹을 수 있다기에 친구들과 구룡포 항구 끝자락에 자리한 조립식 건물로 갔다. 배가 있어서 직접 잡아 온다는 그 집은 정말 대게만 쪄서 나왔다. 네 사람에 열한 마리이니 넉넉했지만 까서 먹는 재미에 손이 바빴다. 한참을 정신없이 게딱지에 밥까지 비벼먹고 나니 느끼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번듯한 가게가 아니라 후식으로 기대할게 없었다. 모두 커피가 땡기는 눈빛이었다.그때 우리 방문을 열고 “커피 시키신 분?” 이러는 거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기에 그 커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었다. 차보자기를 든 아가씨가 가버리고 나니 더욱 커피가 간절했다. 나는 옆방으로 가서 그 다방 전화번호를 물었다. 아가씨가 조금만 기다리라 하더니, 금세 우리에게로 건너왔다. 가져온 양이 넉넉해서 세 잔 정도는 된다며 식성이 어떻게 되냐고 묻는다. 우린 그냥 알아서 해 달라 하니 보온병의 커피를 종이컵에 따르고 프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을 넣어 휘리릭 저어 준다. 대게와 너무 잘 어울리는 달콤한 다방커피였다.커피 두 스푼, 프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이 제일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법칙이라도 되는 듯 학창시절 제일 번화가에 `투투쓰리`란 다방 이름이 있을 정도였다. 언제부터인가 시커먼 아메리카노가 최고인양 떠들지만 우리에게 커피는 역시 투투쓰리가 정답이었다.

2018-02-23

상대로 젊음의 거리 유감

▲ 강길수 수필가`상대로 젊음의 거리`를 아침저녁 불편하게 오간다. 젊음의 거리 재조성공사가 한창 진행되기 때문이다. 공사는 지난 가을부턴가 본격화 된 것으로 기억된다. 지난해 초여름, 포항시당국에서 `정체성이 없는 음주 유흥거리로 형성된 이 거리를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거리로 만들기로` 하였다는 보도를 보았었다. 이를 위해 `가로환경개선사업과 유해환경개선사업, 지중화사업`을 추진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 무렵, 새로 조성될 `젊음의 거리`에 대한 필자의 희망을 본 칼럼에 쓴 바도 있다.기술자와 작업자, 중장비들이 동원되어 연일 공사가 진행되었다. 새해가 되자, 바뀌어가는 거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차도와 인도, 인도와 가로수의 경계석이 교체되고, 보도블록도 새로 깔렸다. 가로수 밑동에 보호판이 씌워지고, 통신과 상하수도의 표시판도 바꿨다. 전선지중화부대시설이 생기고, 도로한복판에도 없던 경계석이 놓여졌다. 공사가 완료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드러난 모습이 내 눈엔 전보다 더 모나고 딱딱해 보였다. 또,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이 드러났다.우선, 소 도로와 이어지는 곳이나 횡단보도부분의 차도와 인도의 경계석이, 낮은 기존도로와 달리 높게 설치된 점이다. 왜 높게 했는지 모르겠다. 노약자나 어린이들, 음주한 사람들이 소 도로나 횡단보도로 갈 때는 높은 경계석을 내려서야 하는 부담과 자칫, 넘어질 위험도 안게 되었다.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소 도로로 갈 때도, 횡단보도처럼 내려서 끌고 가야만하도록 되고 말았다. 이곳 인도에서는 자전거를 아예 타지 말라는 뜻인지 모르겠다.다음, 가로수의 경계석과 보호판이 사각형으로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보호판은 포항시가 표시되어있어 시당국의 주문제작품이다 싶었고, 중간의 무늬들도 모두 사각형이다. 나무 둥치부분의 큰 원형구멍과 네 모서리의 타원형구멍 네 개가, 사각모양과 무늬들의 딱딱함을 다 완화시킬 수 없어 보였다. 인근 다른 도로의 가로수 경계석과 보호판은 원형으로 많이 설치되어 있다.그 다음, 새로 놓는 도로 중앙의 분리경계석은 무슨 용도일까 하는 의문이다. 이쪽 인도에서 건너편 인도로 가지 말라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다 완공되어 봐야 알겠지만 내 눈에는 소통을 막는 설치물로 보였다.인간은 환경적 존재이다. 인간의 환경을 자연환경과 인위적 환경으로 나눈다면, 도시인들은 자연환경보다는 인위적 환경의 영향을 더 받으며 자라나고 산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이곳을 시당국에서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거리`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조성공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문화거리`란 어떤 환경이어야 할까. 당국이 애초에 구상하고 설계했던 문화거리가 지금 나타나는 모습이었다면, 실망감이 앞선다. 설계자는 당국과 참여 주민들의 뜻을 가로환경설계에 반영했을 텐데, 위에 열거한 문제점 같은 것들은 사소하다고 무시해버린 걸까. 도형심리학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여러 모양들이 어우러진 이 거리의 환경이 찾는 이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불문가지다. 따라서 자연처럼 모나지 않는 거리환경이 요구된다.문화는 `소통`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소통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바로 왕래와 친교에서 시작되고, 친교는 모나지 않는 성격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새로 조성되고 있는 `상대로 젊음의 거리`는 소시민인 내 눈에는 오히려 전보다 더 왕래와 친교를 막는 느낌이 든다. 자전거를 타고 진입하기 어려워졌고, 맞은편으로 건너가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할 판이다. 또, 새로 설치되는 인도의 기물들은 대부분 사각형이어서 딱딱해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남은 공사에서만이라도 세세한 부분까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정서에 끼칠 작은 영향까지 깊게 고려하여 시행되었으면 참 좋겠다.

2018-02-09

청빈(淸貧)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옛날 그리스에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헌 나무통을 집으로 삼고 몸에 걸친 누더기 한 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가 양지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데 알렉산더대왕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한 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기도 했던 알렉산더는 그리스에 훌륭한 철학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였지요. 그런데 막상 거지꼴을 하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자 존경심보다는 우선 딱한 생각이 들어서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좋은 옷과 편히 살 집이라도 마련해주고 싶어서였겠지요.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자기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알렉산더대왕을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은 지금 내가 쬐고 있는 햇볕을 가로막고 섰으니 옆으로 좀 비켜나 주시오. 내 소원은 그것뿐이오.”그제야 알렉산더는 자기가 디오게네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만일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이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장면입니까?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호령하던 영웅 알렉산더의 권세와 위용도 디오게네스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비폭력 불복종의 저항으로 대영제국의 식민통치를 인도에서 몰아낸 마하트마 간디 역시 유산으로 남긴 거라고는 손수 실을 잦던 물레 하나와 걸치고 다니던 옷 한 벌, 안경과 필기구 정도가 고작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간디의 위대성이 재물이나 권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청빈함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20세기의 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도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고아들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입힐 수가 있었던 것이었고요.우리나라에도 청빈의 전통이 있었지요. 조선조 초기 명제상으로 알려졌던 황희는 거의 평생을 관직에 있었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의 자리에만도 18년이나 있었지만 비가 오면 빗물이 줄줄 새는 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울타리도 없이 초라한 그의 거처를 방문했던 세종대왕이 그의 그런 생활을 몹시 부러워했다는 일화도 있는 걸 보면, 그의 가난함이 결코 그를 옹색하거나 초라하게 하지는 않았다는 얘기지요.지금 우리는 물질만능의 환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재물은 많이 가질수록 좋고 돈이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풍조는 전염병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고 자라나는 아이들까지 이미 감염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평수가 능력의 척도가 되고 자동차의 크기가 인격을 대신한다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통념이지요. 그래서 많이 가진 사람들은 기고만장하고 못 가진 사람들은 기죽고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합니다. 그러니 부와 권세를 잡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하지요. 권모술수와 부정부패를 능력으로 생각하고 불법과 무질서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때 부와 권력을 누리고 휘두르던 사람들이 줄줄이 적폐세력으로 엮여서 철창으로 들어가고 돈 때문에 자행되는 끔찍한 패륜 사건들을 보면서도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면 개선의 여지가 없을 수밖에요.청빈(淸貧)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는 `성품이 깨끗하고 살기가 가난함`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동서고금의 성인현철들이 한결같이 청빈을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실천한 것은, 그저 단순한 안빈낙도나 자기수양을 위한 방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물질만능의 시대에, 청빈한 삶이 어째서 시대착오적인 현실도피나 패배주의가 아니라 부패하고 혼탁한 시대를 준열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가장 아름답고 참된 삶의 덕목이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파멸로 치닫고 있는 인류의 역사를 지속 가능한 것이 되게 할 유일한 길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

2018-02-02

가는 날은 장날

▲ 김순희 수필가포항에는 오일장이 열리는 곳이 많아서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주말이면 장기에 있는 시댁에 자주 가게 되는데 집을 나서며 2일·7일이면 흥해장, 4일·9일이면 안강장, 5일·10일이 들어간 날이면 반드시 오천장에 들른다. 오늘은 드라이브도 할 겸 빙 둘러가는 길을 택했다. 3일이니 구룡포 장날이다. 잘 뚫린 영일만도로를 타고 가다 미끄러지듯 내려서면 푸름한 바닷내음이 가득한 항구가 나타난다. 고깃배들이 우리보다 먼저 달려와 일렬로 서 있는 부둣가 주민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시장이 가깝다.입구는 조금 더 가야 나오지만 나는 샛길을 좋아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어깨가 맞닿아 비켜서기도 힘든 지름길로 가는 것이 더 재미지다. 그 좁은 골목길로 살곰살곰 들어가면 시장의 중간쯤이 나타난다.오늘은 운이 좋다. 넓은 어시장이 있는 죽도시장에 가서도 시간이 맞아야 볼 수 있는 개복치 해체 작업을 구룡포에서 보게 된 것이다. 남편과 나는 가려던 길도 잊은 채 아예 붙어 서서 보았다. 우리 마음을 아시는지 뭘 살거냐 묻지도, 가라고 떠밀지도 않고 능숙하게 칼질 삼매경 중이다.아주머니에게 우리가 먹는 하얀 묵이 살로 만든 것인가 묻자 내 얼굴을 힐긋 보더니 “껍질을 묵지. 살은 조안에 따로 비지요?” 두툼한 살인가 했던 것이 껍질이란다. 참 얼굴도 두꺼운 녀석이다. 언뜻 보면 머리뿐인 개복치니 말이다. 관광객인지 모녀가 지나가며 “고래를 잡나보다”하고 중얼거렸다. 개복치라고 고쳐 말해주니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처음인 물고기라며 이름을 다시 묻는다. 개.복.치.남편은 아버님이 기다리니 그만 장을 보러가자고 재촉이다. 한 봉지 사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구룡포장에 가면 우리가 꼭 들르는 곳은 국수공장이다. 가게 안쪽 마당에서 해풍에 노랗게 말린 국수를 주인할머니가 아들과 썰고 계셨다. 구경해도 되냐고 하니 흔쾌히 그러라 한다.할머니 시집살이만큼 오래된 기계에서 뽑은 면은 대나무 발에서 바람과 햇살을 받아 바싹 마른다. 마른 국수발은 두툼한 전용 칼로 쓱싹 눌러 자르는데 국수 부스러기가 투두둑하고 떨어진다.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내가 이건 버리느냐고 물으니 다 쓸데가 있단다. 새 키우는 사람들이 가져가 사료로 쓴다고 한다. 때 마침 참새가 발밑에 떨어진 국수를 쪼으러 포르르 날아들었다. 이 집 국수가 맛있는 건 하늘 위에서도 잘 보이나보다. 마트에서 파는 국수보다 삶아 놓으면 쫄깃한 맛이 일품인 `제일국수`는 할머니의 오랜 손맛과 해풍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다.몇 해 전에는 물려 줄 자식이 없어서 나 죽으면 문 닫는다 하셨는데, 오늘은 아들이 일을 배우기로 했다며 웃으시는 입가에 자랑스러움이 잔뜩 묻어난다. 예전에 장날에만 국수를 만들어 판다던 말이 생각나 여쭈니 “무신날에도 한데이~”하며 허리를 펴신다.시장 입구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며 건어물가게에서 코다리 두 두름을 흥정해서 4천원 깎았다. 값을 치르며 시장의 가게이름들을 보니 구룡포인데 장기 기름방, 오천 떡집, 영주 한약방 같이 다른 고을이름을 달고 있다. 거스름돈을 거슬러주시며 다들 고향이 그곳들이라 붙인 거라고 했다. 철규 분식처럼 자식 이름을 붙인 가게도 여럿이었다. 떠나온 곳이 그리운 이는 나고 자란 고향을 머리에 이고서 그리워하고, 집 떠난 자식이 보고픈 이는 자식 이름을 걸어놓고 치열한 삶을 살며 그리움을 달랬다.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지헌이엄마가 된지 25년. 아들이 기숙사로, 원룸으로 살림을 난 지 5년이 넘었다. 현관문에다 지헌이네집이란 팻말을 달아야 할까보다.구룡포 시장에서 찬거리를 두 손 가득 샀다. 그리움을 덤으로 얹어서 그런지 더 푸짐했다. 오일장에는 흔한 바코드 대신 오래 묵은 흥정이 있다. 내가 오일장에 자주 가는 이유이다.

2018-01-26

앙상한 가지

▲ 강길수수필가 세레나!설밑과 설 무렵에는 앙상한 가지와 함께 사는 행복이 있습니다. 낙엽수가 못 사는 지역이나 열대지방 또는, 남반구에 사는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행복일 것입니다.앙상한 가지가 무에 그리 행복감을 주느냐고요. 그러게요.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요. 예전엔 앙상한 가지를 보면 상실감과 허무감이 온몸에 스며들곤 했었는데, 왜 그리 되었는지 꼭 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앙상한 가지와 함께 살며 한해를 보내고 맞이한 연륜이 깊어져 서로 길든 게 아닌가싶어요.언제였던가요. 꿈 많던 고교시절 한해를, 우린 학생회 활동으로 함께 보냈었지요. 설밑에 헤어져, 삼 년만엔가 군에 가며 잠시 얼굴을 본 게 마지막이었잖아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설밑 거리의 앙상한 가지 아래에서, 까까머리시절과 세레나가 떠오른 건 웬 조화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기에 제멋대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고 가고 하는 걸까요.사람의 마음도 나이가 드는지, 안 드는지 헷갈립니다. 시대와 세월이 탄환보다도 빠르다 싶을 땐 마음도 나이가 드는 것 같고, 앙상한 가지로 인해 옛날이 오늘 같을 땐 마음은 나이가 들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나이가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심사를 세레나도 헤아릴 테지요.세레나.앙상한 가지가 내겐 결코 작지도, 좁지도 않았습니다. 칼바람 막을 옷 모두 벗고 당당히 겨울을 이겨내는 앙상한 가지 사이로, 새봄 기다리는 가지의 눈 위로 하늘과 해와 달과 별, 산과 바다와 들과 강을 다 담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크기와 씀씀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을 세레나도 알리라 믿어요.낙엽수는 가을이 오면 잎을 떨구어 겨울을 준비합니다. 어릴 때부터 무수히 보았기에, 나무에서 왜 낙엽이 져야하는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먼 길을 오고 말았지요. 머리가 희어져서야 낙엽과 앙상한 가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무 연구자들은, 물이 부족해지는 겨울에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낙엽이 진다고 합니다. 살기위해 오히려 버리는 지혜를 선택한 앙상한 가지….두 주체가 서로 길들여지면, 상대방을 자기처럼 알고 느끼며 살게 되는 거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사람과 사물사이도 같다 여깁니다. 앙상한 가지와 길들여지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아둔한 나는 겨울방학 때 산에서 땔나무를 하는 등, 앙상한 가지와 함께 숱하게 살아내면서도 그 가지에서 새봄을 느끼지 못하며 자랐습니다.그저 나무와 풀, 자연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남들 따라하며 지냈지요. 아직 잔설이 응달에 남은 이른 봄, 진달래 개나리가 피기 전부터, 동네 뒷도랑 가에 핀 버들강아지를 따 먹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놀았습니다. 동무로 놀면서도 버드나무가 목마르게 새봄을 기다리는 사실을 그땐 왜 느끼지 못한 걸까요.세레나!어찌하겠습니까. 머리에 서리가 내린 후에야 사람의 삶도 앙상한 가지의 삶과 다를 바 없어야 한다는 걸 알아채고, 길들여져 가니 말입니다. 이제라도 길들여지고 있으니 다행이라고요. 고맙습니다. 타령 같은 이 말을 받아주니까요. 동 서양의 여러 선각자, 성현들이 설파하거나 보여준 삶이, `사람도 앙상한 가지같이 한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면 누가 될까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가정과 가정 사이, 단체와 단체 사이, 지방과 지방사이, 정파와 정파사이, 나라와 나라사이도 앙상한 가지 같이 버릴 것 버리고, 새봄을 향해 서로 길들여지면 참 좋겠습니다.설밑과 설 무렵엔, 앙상한 가지사이로 올 아지랑이새봄의 행복을 함께 누립니다.

2018-01-19

겨울 보리밭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겨울 보리밭을 보러 간다. 보릿고개와 함께 보리밭도 거의 사라져서 이제는 보기가 쉽지 않다.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겨울이면 온 들판이 다 보리밭이었다. 밭은 물론 벼를 베어낸 논에까지 이모작으로 보리를 심었다. 혹한의 겨울에도 끝내 푸른빛을 놓지 않고 견디었다가 봄이면 제일 먼저 생기를 띠고 자라나서 이 땅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던 보리밭. 가냘픈 보리 싹이 얼어붙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월동하는 보리밭이 내게는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보다도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 세한의 풍경이다.이 땅에 살아있는 생명들은 모두 겨울이 닥치기 전에 월동준비를 한다. 풀들은 서둘러 씨앗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고 나무들은 잎을 다 지우고 수액이 얼지 않게 몸 안의 수분을 줄여 최대한 빙점을 낮춘다. 잎을 지우지 않고 겨울을 나는 상록수들도 두꺼운 잎이나 바늘잎으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동물들도 털갈이를 하거나 땅속에서 동면을 한다. 곤충들은 대부분 알을 남기고 생을 마친다.그런데 보리는 거꾸로 가을에 싹을 틔우고 벌거벗은 아이처럼 어리고 여린 잎으로 겨울을 난다. 땅마저 어린뿌리에 서릿발 칼날을 들이대는데 보다 못한 하늘이 눈이라도 내리면 차가운 눈을 솜이불인 양 덮고 삭풍을 피한다. 흔히들 서리를 맞고 핀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하고, 겨울에도 잎이 푸른 송죽(松竹)의 기상과 절개나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동백과 매화의 단심과 고결을 찬양하지만 어찌 저 겨울보리의 막무가내에 비길 것인가. 절개니 품격이니 하는 수사가 오히려 사치스러운 저 어처구니없는 맹목은 무엇이란 말인가.한 사발의 보리밥이 무엇보다 절실하던 시절이 있었다. 멀건 나물죽으로도 가파른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면 아직 다 여물지도 않은 보리를 베어다 풋바심을 했다. 설익은 보리 이삭을 솥에 쪄서 말렸다가 절구에 찧으면 풋바심한 보리쌀이 되었다. 그걸로 밥을 지으면 껍질이 말끔히 벗겨지지 않아 입안 감촉이 좀 껄끄럽고 보리풋내가 나긴 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엔 더 바랄 게 없었다.반세기가 넘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풋바심한 보리밥의 맛과 감촉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다. 보리밥 한 사발이 무엇보다 절실했던 때의 그 소박하고 왕성한 식욕은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은 원초적 건강성이었다.겨울 보리밭 앞에서 왜 문득 그런 생각이 들까. 고려 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몰래 가져오기 전에는 백성들이 무엇을 입고 겨울을 났을까. 귀족들이야 비단이나 수입품으로 얼마든지 겨울옷을 지어 입었겠지만,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은 목화솜과 무명천도 없이 어떻게 겨울을 났을까. 짐승의 털가죽이라도 구하지를 못하면 삼베옷으로만 겨울을 나지 않았을까. 저 겨울보리처럼 헐벗은 채 막무가내로 겨울을 나다가 숱하게 얼어 죽지는 않았을까.세계 십위권의 경제대국에다 국민소득 3만 불에 육박하는 대한미국은 이제 헐벗고 굶주림에서 한참을 벗어났다. 영양실조 대신 비만을 걱정하고 먹고 남긴 음식쓰레기가 골목마다 넘쳐나고 못다 입고 버린 옷가지들이 산더미 같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잃은 것은 없을까. 자살자가 늘어나고 함부로 남의 목숨도 해치는, 심지어는 제 자식까지도 죽여서 태연히 암매장하는, 이 극에 달한 패륜과 생명경시 풍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겨울 보리밭 앞에서 오래 발길이 머문다. 얼어붙은 땅에서 가냘픈 잎과 뿌리로 혹한의 계절을 견디는 저 겨울 보리가 보여주는 생명이란 얼마나 경이롭고 엄연한 것인가. 나도 덕지덕지 껴입은 미망과 허위의 옷가지를 벗어버리고 살을 에는 삭풍의 채찍 앞에 서고 싶다.

2018-01-12

번와

▲ 김순희 수필가밤마다 그림 같은 달을 뱉어 낸다는 죽장 토월봉 아래 입암서원이 앉아있다.말 그대로 서있는 바위인 입암으로 오는 길은 세 갈래이다. 안동에서 청송을 지나오는 북쪽 길, 포항 영천을 거쳐 오는 길은 남쪽이다. 죽장에서 동쪽으로 난 상옥 하옥으로 가는 길이 세 번째인데 이 길은 비포장이다가 이제는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드나들기 편해졌다. 등짐장수들이 오랫동안 걷고 걸어서 낸 그 길에 기대어 조금 더 넓은 길을 냈다. 어딘가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것은 아는 길을 가는 것과 같이 마음이 푸근해진다.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선바위가 우리를 반긴다. 서원의 문지기인양 늠름한 모습에 떠들던 일행의 발길이 다소곳해진다.조선 중기 장광 여헌 선생께서 입암으로 오신 것은, 따르는 제자들의 권유를 받기도 했고 난리를 잠시 피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마을에 와 보고는 진심으로 이 마을을 사랑하셨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떠나 있을 때도 몹시 그리워하다 마침내 당신이 돌아가 누울 자리로 여기를 택했다. 선현이 사신 곳이니 명예롭기도 하지만 돌아가신 곳이어서 더욱 뜻 깊은 곳이다.서원 앞 들이 농부가 구름을 간다는 `경운야`이다. 구름 속에 가려진 산비탈에서 소를 모는 농부의 목소리가 구름을 뚫고 들려온다. 농부는 밭을 갈다가 흥에 겨워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저 갈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서원 앞 들이 비에 젖었다. 물안개 자욱한 저 들에 여헌 선생은 무슨 씨를 뿌렸을까 궁금해졌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보는 이의 마음이 아름다움을 낳는 것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느낀다.서원의 마당에 섰다. 가만히 지붕을 올려다보자니 대부분 새기와 인데 중간 몇 골의 기와에만 이끼가 얹혀 있다. 번와를 한 모양이다. 번와란 기와를 뒤집어 새로 간다는 뜻이다. 기와를 새로 잇는 작업을 할 때는 아무리 낡아도 전부 다 새것으로 갈 순 없다고 한다. 원기와를 십 분의 이 이상을 남겨야 보수라고 할 수 있다. 서까래든 기둥이든 전통건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보수를 할 때 이 원칙을 꼭 적용한다고 했다.번와장이는 지붕 위에서 네 발로 기다시피 일을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서 장기를 두 듯 일을 한다면 기와 골의 이가 제대로 맞는지 금세 알 수 있지만 지붕 위에 엎드려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오르락내리락 하며 기와를 얹기엔 너무 번거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솜씨 좋은 번와장이 우리나라에 흔치 않다고 한다.번와에서 살아남은 몇 골의 기와를 보니 더 정이 갔다. 오래 써서 낡은 것이지만 먼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경험치를 인정받은 것 같다. 새로 자리를 옮겨 앉은 기와들이 혹여나 제자리 못 찾고 낯설어서 들뜨기라도 할까 봐 중간에 앉아 군기를 잡고 있어 든든하다.이끼 긴 기와를 보니 어머님이 생각났다. 살림의 고수답게 서투른 나를 늘 일깨워 주셨다. 긴 투병 끝에 어머님을 여의고 얼마 전 49재를 지냈지만, 그제 증조부 제사를 지낼 때 삼색 나물을 삶는 내게 늘 무르게 데치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간장독이 바닥을 보인다는 동서의 말에도 메주 만들어 달며 짚으로 매듭짓는 방법을 꼼꼼히 일러주던 말씀이 새록새록 새겨졌다. 어제는 지인이 건네는 쑥떡을 보면서도 어머님이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즐겨 찾던 음식인데 싶어 목이 메었다.건물을 깁는 일보다 새 건물을 세우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번와 할 때도 모두 새 기와일 때 더 보기에 깔끔할 것이다. 하지만 원래 것은 그 자리에서 바람과 비를 견뎠고, 그 곳에 살다간 이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있다.비에 젖은 마을의 둘레 길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다 문득 돌아보니, 새로 들어온 새기와가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이끼 낀 오랜 기와가 힘을 보태고 있는 입암서원의 지붕이 훤해 보였다.

2018-01-05

설밑

▲ 강길수 수필가올해도 열흘이 못 남았다. 설밑이다. 이달 초까지도 살아서 꽃피우던 까마중도 몇 차례의 강추위에 얼어 말라가고 있다. 자연의 섭리, 계절이 강제로 까마중의 생명을 걷어갔다. 해마다 설밑이면 `또 한해가 갔구나!`하고 파고드는 생각에, 세월과 가장 밀도 높게 서로 마주대하며 살아왔다. 웬일인지 올 설밑엔 까마득한 옛 생각이 떠오른다. 봄을 맞으며 군에서 제대하고, 한해를 고향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취업준비로 보내게 되었다. 때마침 어떤 인연으로 한 아가씨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펜팔이 된 것이다. 글 쓰는 취미를 가진 그녀의 편지는, 농사일과 취업준비란 부담을 가지고 지내는 내게 요새 유행말로 `사이다`였다.그해 설밑이 되었다. 나는 `세모(歲暮)`란 서툰 시 한 수를 답장에 써 보냈다. 어찌해서 그리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공교롭게 그 시의 세 번째 연이, 올 설밑 내 마음과도 닮아 보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의 설밑마음도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세모야/ 냉랭한 별빛 속에 이어지는/여로처럼/네 꿈과/네 삶이 남긴/자국은/숲 속 오솔길의/옛이야기 같이 남았는가?”세월 곧, 시간이란 무엇일까. 나와 무관하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 앞에 서면, 실상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존재라는 것을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다. 나란 실존은 만물과 함께 시간의 큰 수레에 실려 싫든, 좋든 어디론가 강제로 가고 있다는 사실. 설밑만 오면 덧없이 가는 세월이 더 진하게 사람의 가슴을 물들이는 것이다.백과사전의 `시간`을 열람해본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 특수 및 동시상대성이론 등이 적혀있다.또 철학과 종교들에서 말하는 시간의 개념들도 많고, 융의 동시성이론도 요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결론은 아직 `수수께끼`란다. 전문가들이 그럴 진데, 범부인 내게는 시간이론들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바람(風)같다.왜 시간은 한 방향 즉,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만 가는 것일까. 사람의 마음대로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대로 젊어지기도 하고, 늙어지기도 하며, 태어나기 전에도 가보고, 먼 미래도 가볼 수 있는 세상.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타임머신이란 기계도 시간의 한 방향성 때문에 사람이 상상한 유토피아의 하나일 거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란 현존 앞에서 대립과 타협, 희망과 절망, 무관심과 기도를 번갈아 체험하면서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또 살아갈 것이다.인간도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이 유한한 생명임을 아는 한, 시간이란 절대자 앞에서면 마음 비우지 않을 수 없다는 진실을 만나는 설밑….시로 편지의 답장을 쓴지 강산이 몇 번 바뀐 세월이 흐른 설밑을 맞아, 내 마음 안 판도라의 상자에서 되살아 나온 시 `세모`….지금 다시 보니 풋풋한 스무네 살 청년의 싱싱함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때도 요즈음 못지않은 청년취업난에 위축되어 살았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꿈꾸며 살고 싶어 네 번째 연과 마지막 연은 이렇게 맺고 있다.아가씨는 그때 이 시를 어떻게 보았을까.“세모야/만추의 황혼 속에 낙엽 져/소망하는 가지처럼/꿈꾸는 제야의 종소리/퍼지면/진홍 태양과 함께/찬란한 원단이/밝아오고야 말리니…. /자,/세모야/우리 함께 노래하자꾸나”

2017-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