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다. 지금 내가 무엇에 꽂혀있는지 최근의 사진들이 말해준다. 지난 일 년 동안 찍은 것을 보니 오래된 것들이다. 단청이 벗겨진 대웅전의 꽃문살, 오백 년은 거뜬히 자리를 지켜온 은행나무의 늦가을, 사진 속에 피사체는 그 곳을 지나간 시간들을 곱씹고 있다.
나를 지나간 시간들이 담긴 사진첩이 책꽂이에 몇 권 끼어 있다. 결혼 전에 찍힌 내 모습이 담긴 앨범은 한 권 뿐이다. 삼촌이 군대에서 휴가 나온 기념으로 찍은 사진 속에 다섯 살의 내가 흑백으로 웃고 있는 것이 처음이다. 초등학교 소풍 간 날 단체 사진 몇 장이 보이다가 바로 졸업식 날로 건너뛴다. 그 사이 칼라가 입혀졌다. 중고등학교도 몇 장뿐이다. 앨범엔 스무 살 넘어서 사진이 대부분이다.
휴대폰이 생기면서 사진이 넘쳐난다. 필름 한 롤을 카메라에 넣고 찍을 때는 필름 가격 때문에 한 번 망설이고 인화할 때 또 돈이 드니 셔터를 누르기가 늘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갑게도 디카가 나오면서 그 고민을 필름카메라와 함께 장롱 속에 넣어버렸다.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면서 올해만 해도 몇 개의 앨범을 만들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찍은 많은 사진 중에 골라서 편집을 했다. 며칠 동안 컴퓨터 화면에 매달려서 수백 장의 사진을 추리는 일이 고되지만 한 권의 책으로 인쇄되어 내게 오는 기분이 남달랐다. 아직은 화면보다는 종이가 더 익숙한 세대인지라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있어야 이게 진짜인가 싶다.
가만히 보다보니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처음 앨범과 다른 점이 있었다. 예전엔 사진마다 내 경직된 얼굴이 중앙에 떡하니 있었다면 며칠 전 만든 앨범의 절반은 내 모습이 없다. 나머지는 유명한 유적지의 노을과 엽서에 나왔던 경치, 내가 지나온 여정들이 담겨있었다.
요즘은 내 모습을 좀처럼 찍지 않는다. 마흔이 넘으면서 내 모습 찍히는 것이 싫다. 살이 쪄서인지 나이 먹은 티가 확 나는 게 사진 속에 여자가 누구인가 싶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얼굴이 찍혔더라도 선글라스와 챙 넓은 모자로 많은 부분을 가려놓았다.
사진 찍는 걸 즐기는 나는 소풍을 가면 눈보다 스마트폰에 열심히 담는다. 나무, 길, 바람. 그 속에 있는 내가 가장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내가 거기 있었다는 티는 내야겠기에 그림자로, 때론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늘은 반사경의 나를 사진에 담았다. 그것도 얼굴이 개미만해서 웬만해서는 알아보기 힘들다. 그 것이 나란 것을 나는 안다. 또 같이 간 친구도 알아볼 것이다. 내가 궁금하고 보고 싶은 사람 눈에도 뜨일 것이다.
남편과 여행을 하면 나는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찍는 일에 열을 올리는 남편이 있기에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즐기면 된다. 그러다 가끔 “거기 서봐.” 할 때 남편을 향해 웃어주면 된다. 여행에서 돌아와 남편의 카메라에 담긴 나를 보면 대부분 마음에 든다. 다른 누군가가 찍어준 내 모습보다 예쁘다.
며칠 전, 도서관에 갔다가 시립도서관의 위치와 건물을 알려주는 안내 팸플릿이 있기에 집에 가져왔다. 그것을 넘겨보던 남편이 “당신 여기 나왔네.” 한다. 자세히 보니 대잠도서관 카운터에서 책을 빌리는 사람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다. 나였다. 언제 찍힌 것인지 기억에도 없지만 분명 나였다.
그 팸플릿을 도서관 사서에게 보여주니 긴가민가 한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빽빽이 꽂힌 채로 줄 서 있는 책들이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몇 만 권의 책보다 내게 관심 있는 남편 눈에만 보인 것이다. 초등학교 단체 사진에서도 나를 찾아내는 초능력자이니까 말이다.
지인들이 SNS에 올린 내 사진을 마음에 들어해주어서 엽서전을 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진에 대해 1도 모르는 사람도 전시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의의를 두었다. 친구들아 놀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