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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선택적 회피 사회

강길수 수필가 사람은 선택적 동물이다. 잠에서 깬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매 순간 무엇을 선택할지 요구받는다. 만일, 어떤 이가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다 해도 그게 선택이 되는 기막힌 운명에 놓여있다.이러한 선택의 숙명은 생태계 아니, 존재계 전체를 관통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불교의 연기론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선택에 따라 벌어지는 현상이니까. 그렇다면 인간사회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 법칙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어떨까. 아마도 얼핏 보아서는 모르는 일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우리나라는 사실상 명·청을 상국으로 모셨던 조선 시대를 차치해도, 구한말 위정자들의 선택에 따라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 해방도 자력이 아니라, 열강들의 결정에 따라 선택되어 졌다. 그 후 남북분단과 6·25 동족상잔의 휴전협정까지, 외세가 개입한 우리나라 역사의 선택 문제였다.반도 국가의 특성 때문일지 몰라도 의존적 선택 기질이 우리의 디엔에이에 있는 것만 같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선택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선택적 회피 현상’이 사회 저변에 흐른다. 특히, 그래서는 안될 분야까지 오염되어 보인다. 이를테면 언론계, 입법·행정·사법은 물론, 교육, 종교 분야까지 망라된다. 온전한 데가 안 보인다. 하여, 선택의 현미경을 볼 줄 아는 국민은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다.예를 들어, 가수 K씨 교통사고사건 전개를 보자. 시쳇말로 화풀이 대상의 시범케이스에 걸려든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제기불능을 언급하면서까지 뭇매를 때릴 사항인가.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속전속결 재판이 진행되는 것도 정치권의 이해할 수 없는 재판 지연과 비교하면 너무나 이상하다.우리나라는 삼세번 문화사회다. 삼세번 심성을 가진 우리가 한 번 실수를 한 사람을 완전히 매장당하도록 선동하고, 동조하는 게 현실 모습이라 생각하면 힘 빠진다. 선택적 회피가 없는 사회라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가 ‘유권력 무죄, 무권력 유죄’로 확대되었다 하면, 원래 그런 건데 순진한 소리 말라고 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랬으면 나도 좋겠다.제1야당 전 대표, JK혁신당 대표 같은 인사들의 해괴한 재판 과정은 국민을 열불 나게 한다. ‘선택적 회피가 작동’하지 않고서야 어찌 자유민주주의 사법 체계하에서 그렇게 질질 끌고, 되지도 않는 이유로 이런저런 기각을 일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왜, 판사가 재판에 정치적인가. 상식이란 눈으로 보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침묵하는 다수 국민의 희망 거울에 비친 우리 사회와, 언론· 입법· 사법을 주무르는 자들의 행태를 비추는 거울에 드러나는 그것의 모습은 너무 다르다. 왜일까. 바로 선택적 회피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해서는 안 될 야만의 횡포들이 일상이 되어가니 말이다. 5·18, 세월호, 전직 대통령 탄핵, 이태원, 선거 부정 등 꼭 비추어야 할 중차대한 일들이 부디 선택적 회피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4-07-22

탈리타 쿰

강길수 수필가 주일미사에 일찍 도착했다. 기다리는 동안 늘 해오던 대로, 휴대폰 매일 미사 앱을 열어 그날 미사 경문들을 읽는다. ‘복음’을 보는데, ‘탈리타 쿰’이란 말에서 시선이 멈췄다. 마음에 간절한 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방금 죽은 12살 소녀는, 예수가 한 이 말로 되살아났다. ‘탈리타쿰’은 예수의 모어 아람어다. 이 이야기는, 야이로란 회당장(會堂長)의 믿음과 그에 응답하는 예수에 관한 신앙을 보여준다. 아버지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예수를 찾아가 위신, 체면 다 버리고 그 앞에 엎드려,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한다. 이에, 예수가 집으로 가는 도중에 딸은 죽고 만다.도착한 예수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하고 명령했다. 이 말에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 걸어 다녔다. 굳게 믿는 아버지의 간청을 들어주는 예수의 권능으로, 죽었던 아이가 살아난 엄청난 신앙 사건이다.덧붙여 내 시선이 멈춘 것은, 이 이야기가 거울 되어 우리나라의 요즘 모습을 비췄기 때문이다. 내다 버린 진실, 정의, 공명에 목말라 답답한 가슴에 예수의 간단명료한 명령이 하늘 화살로 와 박혔다. 우리 사회가 꼭 죽은 소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일제 강점기, 일본을 방문했던 시성 타고르가 한국에 못 오게 되자,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짧은 시를 주었었다. 바로 ‘동방의 등불’이다.YS 정부의 국방장관,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 님이 최근 5·18에 대해 충격적 증언을 했다. ‘스카이데일리’는 그가 안기부장 때, “북한의 5·18 개입을 우리 정부가 직접 확인했다”라고 6월 24일 인터뷰 기사로 보도 했다. 또, DJ 정부 대통령 밀사로 김경재 전 의원 일행이 방북했다. 그들은 “북한 노동당 간부들의 간곡한 요청과 안내에 따라 한국의 국립묘지 격인 평양의 애국열사릉을 방문, 5·18 개입 북한 특수요원의 가묘(묘비) 10여 기를 목격했다고 밝힌 바 있다”라고 ‘대한언론KNEWS’는 올 5월 2일 자 ‘오피니언’에 썼다.2020 총선 이후 많은 이들이 부정선거 규탄 대규모 집회, 수사 촉구, 고발, 소송, 강연, 유튜버 방송 등을 계속하고 있다. ‘2017대선부터 올 4·10 총선까지 모든 공직선거가 부정선거였다’라는 주장과 근거도 제시한다. 특히, 지난달 현직 여당 K 의원은 부정선거 조사 촉구 이후, 사전투표 폐지 법안 발의가 진행 중이다. 또, 여당 대표 후보 4인 중 3인이 직, 간접적으로 부정선거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5·18 및 부정선거와 관련, 경천동지할 내용이 드러나고 증언되어도 우리 주류언론은 망자의 침묵뿐이다. 죽은 야이로의 딸 같다. 진실을 아는 국민은 분통 터지고, 실망과 환멸을 느낀다.하여, 나라에 하늘의 ‘탈리타 쿰!’이 내리길 소망한다. ‘동방의 등불’이 다시 켜지게….

2024-07-08

횃불 하나

강길수 수필가 22대 국회가 시작되었다. 의원이 다수인 야당은 소수인 여당의 반대와 관행을 무시하고 단독 국회를 열어, 법사위를 포함한 11개 상임위원장을 뽑았다는 보도다. 자유민주주의인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민주당’이 든 1야당이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회 독재를 또 시작했다. 국민이 뽑은 다수라 강변하겠지만, 올 총선의 진실을 알고도 그랬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다.지난 4·10 총선 선관위 발표 선거 데이터를 분석한 G 박사는, 58개 지역에서 승부가 바뀌어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주장했다. 여야의 진짜 의석은 여당 166, 1야당 118이라고 했다. 당일 투표와 사전투표 결과의 차이가 통계학 대수의 법칙을 위반한 계산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경영학을 했던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투표는 국민, 당락은 선관위!’라는 경천동지할 주장이 유튜브 등에 퍼져도 선관위는 물론, 제도권과 주류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입으로 ‘민주주의’를 읊지만, 실제로는 입법 독재를 자행하는 거대 야당의 행실을 투표지의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국민은 또 목도하고 있다. 일말 양심도 없는 의원 나리들이다. 자기들이 어떻게 거대 야당이 되었고, 진짜 민심을 속으론 다 알 터. 도덕, 윤리는 고사하고 눈치마저 팽개친 철면피들이다.‘여의도 대통령’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제 국민은 명확히 알게 되었다. 대체 언론의 책무와 지식인, 정치인들의 사명과 시민단체들의 정의, 종교인들의 사랑은 다 어디에다 버린 걸까.정치인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국가는 어찌 될 것인가. 야당은 현 정권을 ‘검찰 독재’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시민 나는 그 반대로 느낀다. 재판 중인 범법 혐의자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특권을 악용, 재판 지연 등 법질서를 파괴해도 멀쩡하다. 이래도 ‘검찰 독재’인가. 21대 국회에서 나라의 안위와 살림은 안중에 없이, 포퓰리즘적 법안을 쏟아내 정부 발을 묶은 사실을 국민은 다 안다. 암울한 야만의 필드였다.횃불 하나 밝혀졌다. 갓 출발한 22대 국회의 여당 수석대변인 K 의원의 횃불이다. 자신의 SNS에 4·15와 4·10 부정선거 문제를 22대 국회의원으로선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이 사실을 보도한 한 유튜브 방송은 18시간 만에 4100명이 시청했고, 댓글 799개가 달렸다. 댓글은 대부분 용기 있는 의원을 응원하고 존경하며, 차기 당대표와 대통령감에 추천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국민이 새 희망을 본 것이다.그렇다! 정상 국회의원이라면, 부정선거 의혹만 나와도 달려들어 바로잡아야 할 최우선 국가 근본 과제다. 한데, 지난 4년간 우리 국회는 외면했다. 민주주의의 기반인 선거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얼마나 상심했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초선 K 의원을 당대표와 차기 대통령감이라는 댓글까지 많이 달까. 국민은 언제까지, 가짜일지 모르는 국회의원들의 탈 쓴 행태를 강 건너 불 보듯 해야만 하는가.지금은 국민 각자가 나라와 나의 길이 같음을 다시 깨달아, 무엇이 국가를 위한 일인지 찾아내야 할 시기다. 또, 참여할 일엔 분연히 일어나 횃불을 함께 들 때다.

2024-06-24

마무리 큐시

강길수 수필가 뭔가 다르다. 평소에 안 나던 소리가 차 뒤 트렁크 쪽에서 들린다. 어떤 울림 같은 소리다.“차 소리가 이상한데….?”하고 함께 탄 아내에게 말했다. 그녀는 별다른 말은 안 했다. 짐을 잘못 실었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텃밭까지 갔다. 두어 시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과 300m 정도 달렸는데, 차 뒤 오른쪽 바퀴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차를 세우고 살폈다. 타이어 공기가 다 빠졌다. 제법 큰 쇳덩이가 타이어에 박힌 것도 보였다.농로 중간이라 차 세울 자리가 마땅찮아 200m 정도 더 가 차량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세웠다. 비로소 박힌 쇳덩이를 자세히 보았다. 건설공사에서 콘크리트 벽을 칠 때, 쓰는 마감재 부착용 연결쇠였다. 공사 관련자가 길에 떨어뜨린 게 공교롭게 내차 뒷타이어에 박혔다. 앞바퀴였다면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지 않은가. 어이없다.공사 앞뒤 처리를 말끔히 안 해 엉뚱한 내 차가 피해당했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고 분하기도 했다. 일단, 스페어타이어를 끼려 시도했으나 어려워 보험 서비스를 불렀다. 전화하는 내 손이 잠시 떨리기도 했다. 보험 출동 기사는 이런 게 박히는 사례가 제법 있다며 때울 수 없으니, 새 타이어로 바꾸라고 권했다. 결국, 타이어를 앞당겨 바꾸는 불편과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지난 7, 80년대 산업화 시기를 실험실에 근무했다. 당시 대부분의 실험기기 장치는 외국산이었다. 어느 날, 국산 전기 건조기가 처음 들어왔다. 검수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손에 상처가 났다. 모서리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날카로운 금속 돌출부에 손을 베인 것이다. 그때의 실망감과 이 타이어 펑크 사고의 황당함이 궤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실험실에서 품질관리 활동을 하던 때, 미팅에서 한 부서장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품질관리는 마무리 큐시(QC·Quality Control)를 잘해야 해.’라고…. 나는 국산 건조기 생각이 나며 그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었다. 오늘은‘사람의 활동은 마무리 큐시에 유종의 미가 달렸다’하는 마음이 짙게 다시 들었다. 소비자가 만족하는 제품과 용역을 내주는 일이 바로 마무리 큐시니까.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붕괴, 가스누출 사고, 세월호 침몰 같은 끔찍한 대형 사고에서부터 오늘 타이어 펑크처럼 사소한 일까지 원인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 요인은 마무리 큐시가 제대로 안 된 탓일 터. 실무자, 감독자, 감리자 등 관련자가 자기 일을 온전히 해냈다면 즉, 마무리 큐시를 제대로 했더라면 큰 사고란 불행은 닥치지 않았을 것이다.우리 사회는 전 분야가 마무리 큐시를 덜 하거나 오롯이 안 하는 것만 같다. 정치인, 공직자, 언론 등이 말로는 ‘국민, 국민’하지만 속은 제 잇속 챙기기 바쁜 비양심적 행태가 뻔히 보이니 말이다. 또, 담배꽁초 처리 같은 기초질서를 제대로 안 지키는 국민도 마찬가지다. 이제부터라도 사회 온 구성원이 마무리 큐시를 잘 해내도록 이끌고 가르쳐 국민이 안전하고 복된 나라로 바꿔나가기를 간절히 빈다.

2024-06-10

어제와 오늘, 내일

강길수 수필가 활짝 웃는 장미꽃들이 금속 담장을 껴안고, 사람을 홀린다. 앞엔 맥주보리가 익는다. 듬성듬성 개보리도 뒤따른다. 5월 하순, 학교녹지의 한 모습이다.올 4월 1일 처음 보리 팬 이삭이 보였다. ‘벌써 보리가 패다니’하고 살펴보았다. 사는 면적도 더 넓어졌다. 보던 보리와 달라 웹을 검색했다. 맥주보리였다. 아마 나무에 거름 줄 때 씨앗이 따라왔겠지. 내 마음엔 맥주보리는 어제, 장미는 오늘, 둘이 함께하여 내일 같다. 문득 옛 고향의 ‘풋보리 디딜방아’가 떠올랐다.그 옛날, 아홉 집이 동기간같이 모여 사는 산골 동네에도 봄이면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닥쳐왔다. 보리가 반쯤 익을 무렵 저녁, 동네 아낙들은 허리춤에 풋보리 두세 됫박씩을 가지고 우리 집 디딜방앗간에 모였다. 저마다 고되게 사는 이야기들을 곡조로 살린 디딜방아 노랫소리는 밤이 이슥토록 흘러나왔다.배고픈 가족들이 보릿고개를 넘을 일용할 풋 보리쌀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거친 디딜방아 풋 보리쌀로 꽁보리밥을 지어 먹으면, 그야말로 까끄라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밭 있는 집은 풋 꽁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집은 송기(松肌)죽, 나물죽 같은 것들로 연명해야 했다.사람은 오늘을 산다. 오늘은 바로 어제에서 왔고, 내일로 이어지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 사람들은 오늘만 있는 듯이 산다. 바보 질문이 저절로 속에서 나온다. ‘오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오늘이 어제와 닿았다는 진실을 내팽개치고 사는 우리네의 행태가 너무 슬프다.우리의 어제는 어땠는가. 바로, ‘보릿고개’가 온 나라를 짓누르는 때였다. 그 예로, 1961년은 국민소득 82달러란 보릿고개의 해였다. 보릿고개를 넘고야 말겠다는 어제 지도자들의 의지, 결기, 국민의 근면, 자조, 협동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이 있을까. 단연코 없을 터다. 산업화 시기를 학생, 근로자로 살아낸 필자는 감히 장담할 수 있다.저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일찍이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들 곧, 창조적 소수의 지도하에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라고 했다. 나아가 ‘그들이 창조적 대응을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군국주의, 전제적(專制的) 소수의 독재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라고 경고했다.우리 정치꾼들은 나라 곳간 채울 마음은 쪼끔도 없이 퍼낼 궁리만 해 댄다. 권좌에 앉으려는 뻔한 속셈이다. 토인비의 창조적 대응을 훼손하는 소인배 행태다. 솔직히 명절 통행료 면제나 개인당 25만 원 지급 같은 포퓰리즘이 국민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만일 정부가 세금으로 국민을 다 먹여 살린다면 세금은 누가 낼까. 소가 웃을 자가당착이다.우리는 토인비의 ‘창조적 대응’에 주목해야 한다. 어제 나라 엘리트들이 창조적 대응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 냈다는 사실을 뜻있는 국민은 다 안다. 기후위기와 전쟁 등 국제 정세 변화는 국민 특히, 정치인에게 어제를 반면교사로 ‘창조적 대응’을 하라고 요구한다. 맥주보리와 장미가 함께하여 아름다운 것처럼….

2024-05-27

빨대 신귀족

강길수 수필가 동네 공원에 핀 커다란 이팝나무 하얀 꽃이 부드러운 목화송이다. 저 흰 목화를 타서 무명을 짜, 옷과 이불을 짓는다면 이 동네 아이들이 다 입고 덮어도 남겠다.한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팝꽃이 ‘보릿고개 배고픔을 참아 넘기는 달램의 이밥’이었다니, 우리네가 지난날 겪은 고난의 삶이 고스란히 꽃 안에 스며 있다. 가슴 아리다. 지난 산업화 시기 건설현장, 공장, 실험실, 기획, 관리, 설계, 사무실, 정부 부처 등 온갖 일터에서 불철주야 피땀 흘리며 보릿고개를 물리치던 근로자들. 그들은 이팝꽃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며 오늘을 살까.70~80년대 산업화 시기 근로자들은 죽기 살기로 일해 나라 곳간을 채웠다. 그들은 ‘잘살아보세!’로 각인된 산업화 시기와 데모, 최루탄으로 얼룩진 민주화 시기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살아낸 주인공이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를 메운 운동권 학생들에게 근로자들은 일하며 말했었다. ‘저 친구들은 부모 잘 만나 대학생이 되었는데, 하라는 공부는 않고 데모만 해대는구나. 대학 못 간 우리도 있는데! ’라고….국민이 자기 벌이로 애들 키우며 저축하고, 이웃과 서로 도우며 안전하게 사는 사회가 왜 비민주사회인가. 일찍이 링컨 대통령이 정의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 정치는 산업화 시기가 오늘보다 더 가깝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때는 국가와 국민, 민족을 위한 잘 살기 정치였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날 민주화 세력을 자칭하는 자들에게는 국가와 국민, 민족이 없다. 자기와 제 편 이익에만 혈안 된 행태가 뻔히 보인다. 대수의 법칙 위반 선거결과 숫자들이 그 증거다.나라가 선진국에 오르는데 근간 역할을 해낸 근로자 눈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진정한 것이라 볼 수가 없다. 솔직히 서민은 지금보다 산업화 시기가 삶의 형평성이 더 높았고, 자유로웠으며, 살기 좋았다. 일부 정치인들이 구금되거나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이 비민주이며 독재라는 주장은 서민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산업화 시기야말로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 시기라고 믿는다.합법적인 정권을 독재나 친일파 프레임을 씌워 반대하고 저항하며, 폭력까지 동원해 파괴하려 했던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을 근로자들은 똑똑히 보았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 왜 북한과 중국 독재는 입도 뻥긋 못하면서, 동맹국 미국을 극렬히 반대하는 것일까. 일은 않고 무슨 단체에 빌붙다가, 슬그머니 민주화에 숟가락 얹은 무리가 나라 곳간 채울 생각은 없고, 빼먹을 궁리만 한다.5·18이나 세월호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나라 곳간에 빨대를 꽂아 민주화 유공자란 신분 상승을 꾸미는 작업이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빨대 신귀족’을 더 만들겠단다. 합법적 정부를 부정하는 게 민주화란 이상한 등식에 젖은 행태를, 국민은 언제까지 가슴 저리며 바라봐야만 할까.‘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가는 일’이 벌어지는 비극을 국민이 계속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24-05-13

4·10 숫자들의 향

강길수 수필가 4·10 총선 전 어느 아침.옆 아파트 담장 안쪽에서 보랏빛 꽃을 앙증스레 피워내는 한 그루 라일락을 올해도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아니나 다를까. 라일락 향기가 몸과 마음의 온 세포를 윤슬처럼 일렁이게 했다. 대체 라일락은 어떤 유전자를 가졌기에 저토록 자기 삶에 정직, 진실할까.식물은 거짓을 모른다. 본능대로 살며 꽃피우고 열매 맺는다.한데, 자칭 만물의 영장(靈長) 인간은 어떤가. 영적 존재, 윤리, 도덕, 진선미, 지정의, 신망애, 과학기술 등을 앞세워 가장 진화했다고 자화자찬해온 인간이다. 화성에서 인간의 헬기가 뜨는 시댄데, 지구촌은 전쟁이 참혹하다. 또, 우리나라는 ‘부정선거’란 경천동지할 칼춤이 벌어져도, 다수가 모르쇠다. 나라 사랑은 어디에 팔아먹었나.올 ‘4·10 총선도 부정선거’라고 G 박사 등 전문가들이 주장한다. 부정선거로 55명 이상의 당선자가 낙선자로 바뀌었단다.하면, 이번 선거는 진짜 여당이 이겼고, 무효가 아닌가. 나도 선관위 홈피에서 포항 북구 ‘개표 단위별 개표 결과’를 내려받아 계산, 분석해 보았다. 시간상 흥해읍, 장량동, 죽도동의 결과만 가중평균하여 관내 사전과 당일 투표율을 산출, 북구 결과로 삼았다. 통계적 표본이 크기 때문이다. 관외 사전투표율 계산은 받은 데이터를 썼다.그 결과, 후보별 득표율은 더불어민주당 사전 44.7% 당일 55.3%, 국민의힘 사전 32.6% 당일 67.4%, 무소속 사전 37.0% 당일 63.0%로 나왔다.사전투표 득표율은 더불어민주당이 타 당보다 7.7~12.1% 높다. 이는, 큰 표본은 통계적 추정 정밀도가 높다는 대수의 법칙을 위반하는 수치다. 어떤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결과다.한편, 비례대표 득표율은 통계적 변칙이 더 심하다. 각 당의 득표율은 더불어민주연합 사전 41.8% 당일 58.2%, 국민의미래 사전 33.3% 당일 66.7%, 녹색정의당 사전 36.2% 당일 63.8%, 새로운미래 사전 36.4% 당일 63.6%, 개혁신당 사전 42.5% 당일 57.5%, 자유통일당 사전 20.4% 당일 79.6%, 조국혁신당 사전 48.1% 당일 51.9%로 나타났다.비례대표는 더불어민주연합과 개혁신당, 조국혁신당의 사전투표율이 다른 정당들보다 5.6~14.8%까지 높다. 자유통일당은 너무 낮다. 왜일까. 비례대표득표율도 지역구처럼 대수의 법칙을 위반한 통계적 이상 수치다. 누군가의 의도적 개입이 추정된다. 다른 군소 정당 계산은 생략했다.라일락꽃이 향기 나듯, 숫자도 향이 난다. 거짓이 없는 향이다. 우리는 4·10총선 개표 결과 숫자들에서도 향을 맡을 수 있다.앞의 포항 북구 선거 개표 결과와 계산 숫자들도 향이 짙다. 총선 전 핀 라일락꽃이 오늘도 향기를 사방으로 뿜어낸다. 나는 그 향기에 더해, 이번 총선 숫자의 향도 음미한다.이 향이, 우리나라에 진실하고 정직한 공명선거를 꽃피우는 향기로 거듭나기 바란다.

2024-04-22

침묵하는 다수

강길수 수필가 방송국 녹지에 2월 말부터 피어났던 진달래꽃이 가는 3월과 함께 시나브로 졌다. 옹골지고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타고 오는 봄을, 도시 복판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린지가 여덟 해다. 한데, 올해는 꽃이 전 같지 않았다. 어딘가 풀죽은 듯 초라해 보이고, 어떤 침묵이 스민 것만 같았다.올 이른 봄은, 같은 거리를 오가는데도 뭔가 달라졌다. 작년 3월, 은행나무 밑에서 새봄을 모셔오던 하얀 별꽃도 못 만났다. 흔하던 민들레꽃도 덜 보였다. 봄비 잦은 탓일까. 기온 이상인가. 사회 분위기 때문일까. 아무튼, 내가 본 올 이른 봄은 자연도, 사람도 예전보다 ‘침묵, 침묵하는 다수’로 다가왔다. 하지만, 4월이 오면 온갖 봄꽃 피어나 침묵의 구름을 걷어낼 테지.총선의 달 4월. 바야흐로 봄꽃 축제가 벌어졌다. 개나리, 벚꽃, 조팝꽃, 자목련, 민들레꽃, 영산홍…. 출퇴근 거리에서 만난 꽃들이다. 집에 도착한 선거홍보물을 일람해 보았다. 국회의원 지망생들의 나라 사랑은 보기 어렵다. 자신들의 입신과 이권만 추구할 뿐, 국민 사랑 마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한 홍보물은 국민이 뽑아 법으로 보장된 대통령 임기를 대놓고 단축, 종식 시키겠단다. 법치 파괴의 파렴치한 망발과 뻔뻔함이 확증편향에다 과대망상의 극치다.국민은 상상할 수 없는 공직자 아빠 찬스 엄마 찬스 비리를 다 딸 입시에 썼다가 발각되어, 나라 젊은이들의 기를 꺾고 2심까지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갑자기 무슨 혁신 당을 만들었다. 스스로 대표가 되어 국회의원 하겠다고 비례대표 출마도 했다. 재판 중인 야당 대표를 벤치마킹해 자기 범죄 방탄 국회를 만들 속셈인가. 별주부전 토끼 간 같이 편리한 양심을 단 인간인가.정말 알 수 없는 일은, 이런 인간의 지지자가 많다는 언론 보도다. 이성(理性)과 양심은 어디에 버리고 짜인 대본에 놀아나거나, 감언이설 에테르 또는 떨어지는 떡고물에 마취당한 사람들인지 모를 요지경 세상이다. 더욱이 지지층이 40~50대라니 더 어처구니없다. 20~30대보다 진실을 못 보는 헛똑똑이들인가 보다.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슨 혁신당 지지자들은 침묵하는 다수가 아니라 짖어대는 소수라는 사실이다. 개처럼 짖어대는 소수가 사회의 분위기를 망치고, 침묵하는 다수도 자칫 휩쓸리는 악순환이 임계점에 닿은 느낌이다. 상대방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야만, 증오, 언어폭력, 조작의 검은 기운들이 여론, 선거 등에 침투하여 만든 각본대로 몰아가는 것만 같은 사회 분위기니까.지금은, 침묵하는 다수가 분연히 일어나 소리 내고 행동할 때다. 침묵하는 다수가 세상 식별안테나를 켜 들고, 이성과 진실의 소리를 골라 들어야 한다. 진실을 모르면 선전, 선동에 이용당할 수 있으니까. 불법적 사전투표를 하지 않은 침묵하는 다수 유권자가 본투표를 하는 일이다. 이것이 첫 번째 소리이자, 행동일 터이다. 만일 이 선거 후 또 부정선거 사실이 드러나면, 이번에는 침묵하는 다수의 진짜 힘을 보여 주자. 선거소송 법관들이 국민이 무서워, 양심 저버리는 판결을 감히 할 수 없을 때까지….

2024-04-08

죽인 양심 시대

강길수 수필가 다음 달 10일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날이다. 재외투표 3월 27~4월 1일, 선상투표 4월 2~5일, 사전투표 4월 5~6일이다.코앞의 총선을 생각하니 웬일인지 ‘양심(良心)’이란 말이 떠오른다. 선거와 양심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내 마음은 이 말을 소환했을까. 나라가 신생자유민주주의 체제였던 때 나고 자란 연유일까. 아니면, 인간 본성 탓일까.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선거는 양심과 상관이 있기 때문이리라.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헌법전문에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라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두말할 것 없이 선거로 일꾼들을 뽑아 출발했다. 한국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일제강점기여서 정상 국가는 아니었다. 해방 후, 1948년 5·10 총선으로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어 정부를 수립하고 세계에 공포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결국, 선거를 통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나라의 선거가 공명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거 공명성은 유권자와 선거사무원들이 양심적으로 투표와 선거사무를 해내야만 확보될 수 있다. 만일 누가 비양심적인 투표나 선거사무를 했다면, 그 투표나 선거는 당연히 무효다.양심이란 무엇일까. 한 백과사전은 양심을, ‘선악을 판단하고 선을 명령하며 악을 물리치는 도덕의식’이라고 풀이한다. 즉, 양심은 부정선거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주체라는 뜻이 된다. 하면 선거에서 선, 악은 무엇일까. 당연히 선은 공명한 선거고, 악은 부정한 선거다.지난 4·15 총선 후, 일군의 양심적 애국자들이 선거 데이터 통계분석, 부정투표지 등 수많은 부정선거 사실과 증거들을 밝혀내고, 지난 4년간 부정선거 퇴치를 외쳤다. 그러나 대다수 주류언론과 정치권, 사법당국, 정부까지 별 관심이 없었다. 제기된 선거소송도 대법원은 법정기일 180일을 대부분 어기며 질질 끌다가 의원 임기가 끝나갈 무렵 모두 기각했다. 스스로 양심을 죽인, 곡조 슬픈 시대다.집권 여당은 이번 국회의원 후보공천에서 오랫동안 줄기차게 부정선거 없애기 운동을 했던 두 후보를 경선 배제 또는, 공천취소 하여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결국, 한 분은 ‘가가호호공명선거대한당’을 창당해 ‘비례대표 출마’를 결정했고, 다른 한 분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죽인 양심 시대의 가슴 아픈 초상(肖像)이다.이제 국민은 어찌해야 하나. 각자가 나부터 양심을 되살려야 한다. 침묵했던 국민이 되살아난 양심의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할 때다. 사전투표지에 관리관 개인 도장을 찍으라는 공직선거법을 무시하고 인쇄로 갈음하는 ‘불법적 사전투표는 하지 말고, 본투표 하기’부터 실천하는 일이다. 이것이 국민이 내는 큰 양심의 목소리가 될 테니까.

2024-03-25

하루에 한 번은

강길수 수필가 3월…. 내일이면 그 중순이다. 절기로 따지면 입춘이 한 달 전에 지났고, 우수 경칩도 지났으니 분명 봄이다. 한데, 나는 절기보다는 달별로 계절을 구분하는 습관이 들어 “3월!”이라고 말해야 봄이 왔다는 기분이 든다.양지바른 산 자드락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산골 소년은 마른 풀잎 사이에서 솟아오르던 3월 새싹을 만나러 나섰다. 겨우내 땅속에 단잠 자던 싹눈은 3월이면 따사한 햇빛 노크에 눈을 뜨고야 만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눈시울 간질이면 못 이긴 척 기지개 켜고 새싹으로 올라온다. 아지랑이 오름 길 따라 눈길은 절로 위로 향한다. 잎눈 품은 나뭇가지에 봄 새 한 쌍이 노래를 부른다. 노랫가락은 아지랑이 등 타고 파란 봄 하늘에 하늘하늘 올랐다.3월은 내게 먼저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달이다. 사람들은 가을하늘을 ‘천고마비’라 칭송하지만, 눈 녹은 물이 졸졸 흐르는 도랑 가, 버들강아지 가지 위로 펼쳐진 햇빛 찬란한 3월의 하늘과 비교할 수는 없다. 따사한 해, 몽글몽글 피는 아지랑이, 그리고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들, 뭇 가지에 눈뜨고 피어나는 새잎들…. 이 모든 것을 품은 존재가 바로 3월 하늘이기 때문이다.지난날, 한 문우는 이메일 끝에 “하루에 한 번 하늘을 바라보자!”라는 자기 경구를 써서 보내왔었다. 나는 답신에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바라보자!”라고 강조 보조사를 덧붙여 보내곤 했었다. 국어사전엔 ‘대조’나 ‘화제’ 또는, ‘강조’의 보조사로 ‘~은’을 풀었으나, 내 느낌은 ‘해야 하는’ 강제성이 강하다. 하여, 그 무렵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 하늘을 바라보거나 응시하게 되었었다.사람은 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일까. 하늘은 도대체 인간에게 어떤 존재이며 의미일까. 생명 사는 곳을 둘러보면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는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 풀, 동물, 나아가 모래, 돌, 평지, 산, 바다 같은 무생물까지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래에 살거나 있다. 어쩌면 모든 존재의 본향은 하늘이 아닐까. 한반도의 반대편 남반구에서 보아도 하늘은 같다.하늘이 무엇이기에 많은 민족의 탄생신화나 설화의 주제가 되어있을까.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하늘이 어떤 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깊은 믿음을 갖게 한다. 사람이 하늘을 두고 이야기할 때는, 물리적 공간의 하늘보다는 뜻을 담는 게 더 많을 것이다. 종교 사상을 빌리지 않더라도, 하늘은 지구촌 공통의 어떤 절대성에 대한 표상이 틀림없으리라. 이를테면 우리 단군신화에서 보듯, 제천(祭天)이나 천명(天命)사상 같은 것 말이다.하면, 인간은 하늘 앞에서 어떤 존재여야 할까. 하늘 무서운 줄 아는 인간, 민심이 곧 천심임도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마음이다. 안 그러면 자기 능력도, 업적도, 명예도 이카로스의 날개가 되어버릴 테니까. 한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공익에 눈감고, 사익에 눈뜬 꾼들이 득실거린다. 하늘 앞에 서면, 제 날개가 녹을 것도 모르는 체….슬프다. 모두가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면 참 좋으련만….

2024-03-11

하고자 하면

강길수 수필가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미사 복음에서 이 성경 이야기를 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우리 사회도 깊은 병이 들었다. 몸의 한 부위가 병들면 온몸이 아프거나 영향받듯, 지금 우리 사회 공동체도 지체(肢體)들이 심한 병을 앓고 있다. 나병 환자가 하고자 하여 예수께 무릎 꿇고 도움을 청해 나았듯, 우리 사회도 지금 무언가 하고자 해야 한다.’한국의 가장 크고 심각한 병은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부정선거다. 2020년 4·15 총선 직후 우리나라는 부정선거 문제가 제기되었다. 많은 애국자의 희생적 노력으로 부정선거는 사실로 드러났다. 선거소송 재검표장에서 쏟아진 수많은 위조 투표지는 물론 선관위가 발표한 선거결과 수치의 통계학적 분석데이터 등은 확실한 증거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좌 편향된 악의적 정치재판으로 부정선거의 진실을 덮어버리거나 쉬쉬하며 정의를 묻어버린 망국적 행태를 보였다.나라의 선거 공정성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결연한 활동으로 국민 절반 이상이 부정선거 사실을 알았다는 보도를 보았다. 또 국정원과 인터넷진흥원의 합동 선관위 보안 점검 결과도 발표되었다. 이어 KBS의 부정선거 관련 보도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최근엔 여당 비대위원장이 사전투표지 감독관 도장날인을 인쇄로 갈음하지 말고 법대로 ‘개인 도장날인 시행’을 수차 요구하기에 이르렀다.이 같은 변화는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나병 환자의 결기와 같다. 그의 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병고에서 나으려는 절실한 자각에서 비롯되었을 터다. 사무치게 병이 낫기를 바란 환자는 이제 병을 낫게 할 분만 찾아가면 되었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기의 간절한 소망을 부탁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우리나라의 크고 심각한 병은 어찌해야 나을까. 이런 마음이 든다. 우선 선관위가 침묵하는 국민과 하늘 무서움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병 환자처럼 ‘하고자 하면’ 길이 보이리라. 다음 대통령이 선관위에 공정선거를 요구하는 일이다. 국민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은 최고 책임자로서 나라의 크고 시급한 이 문제를 꼭 ‘하고자 하는 일’로 삼아야만 한다. 이는 선거 개입이 아니라 대통령의 중요한 책무의 하나다. 그다음 정치권 여야가 함께 공명선거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공직선거법 제158조 3항은 사전투표지에 투표관리관 개인 도장날인을 규정하고 있다. 한데 선관위는 공직선거관리규칙 84조 3항에 ‘인쇄 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게 했다. 법 위반이며 해괴한 망발이다. 인쇄는 인쇄고, 날인은 날인이다. 부디 선관위, 정부, 여당, 야당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오는 4·10 총선부터 우리나라가 부정선거 중병에서 깨끗이 낫도록 해 주기 바란다. ‘하고자 하면’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2024-02-26

‘성직자들의 타락’

강길수 수필가 우리 사회가 걱정된다. 총선 두 달 앞. 예비후보들의 나라 사랑 없는 자찬 문자 폭탄에 짜증이 난다. 엎친 데 덮쳐, 한 자칭 성직자의 타락행위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성직자 신분을 정치공작 도구로 쓴 사악함을 국민은 목도 했다. 목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대통령영부인을 상대로 함정 몰카 범죄를 자행한 것이다. 그는 재작년 성직자 신분과 동향 출신을 내세워 관저 입주 전인 영부인에게 접근, 아무도 모르게 선물전달 몰카를 찍었다. 1년 반 가까이 두었다가 총선 직전에 영상을 공개하며, 무슨 투사인 양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저의가 무엇일까.어느 종단(宗團) 할 것 없이 성직자가 정치꾼으로 타락하여, 국민을 허탈케 하고 종교에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재작년 성공회와 가톨릭의 성직자가, 해외 순방 중인 대통령이 전용기에서 떨어지기를 비는 기도문과 그림을 SNS에 올려 국민과 신자들을 절망케 했었다. 어떤 종단은 성직자들이 이권개입 칼부림까지 한 적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와 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종교는 삶의 궁극 목적을 알려주며, 현세초월의 인생길을 안내하는 주체다. 하여, 성직자는 신앙 인도자이며 모범이다. 성직자가 현세에 집착하면, 그게 바로 타락일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거나 통일운동을 하는 성직자들은 대체 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자기네가 신봉하는 교리나 신앙 규범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야 영위될 수 있음에도 하나같이 좌파적이거나 친북, 친중적일까. 오랫동안 성당에 다닌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성직자 타락 현상이다.우리가 누리는 자유, 민주, 풍요는 절대로 그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벌써 이를 잊은 건가.오늘의 나라 번영은 걸출한 선각 지도자들과 근면한 선배 국민이 함께 피땀으로 이룩한 것임을, 삿된 정치판에 물든 타락 성직자들이 알기나 할까.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이란 종교적 진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희생이었음이 사실이다. 죄 없는 종교 성자(聖者)들을 지금도 타락 성직자들이 능욕하고 있다.타락 성직자들은, 그 종교의 창시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눈에 보인다. 십자가 길을 걷지 않거나, 고행길을 따르지 않는 모습들이 드러나니까 말이다. 신자들은 종교집회에서 정치 선동을 당하고 싶지 않다. 함께 십자가를 진 성직자, 같이 고행하는 성직자와 살고 싶은 거다.선교와 통일운동을 겸하는 성직자라면, 북한의 인권·자유·민주를 신장시키는 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성직자라고 정치적 신념을 못 가질 이유는 없다. 하지만, 종교의 공적 집회에서 성직자가 본인의 정치적 신념을 신앙이나 교리처럼 주장하면, 그가 바로 하늘에서 땅으로 타락한 것이다.자유민주주의는 과정이 결과만큼 중요한 정치체제다. 만일, 선거 과정이 부정했다면 무효이듯, 성직자의 사악한 정치참여는 그의 타락이 된다. 부디 우리 사회의 성직자들이, 본분에 어긋나는 타락의 길을 가지 않기를 빈다. 그리하여, 국민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24-02-12

장미꽃 미라

강길수 수필가 장미꽃이 미라가 되었다. 산채로 얼어 마른 미라다. 지난 십이월 중순까지 스테인리스 울타리를 부여잡고 봄이 시샘이라도 할 만큼 많이 피어있던 장미꽃이다.해(年)가 바뀌는 동안 몇 차례 혹한에 맞섰던 장미 나무는 식솔들이 강제로 얼어 죽임당한 채 몸만 살아남았다. 떠나보내기 아파, 미라가 된 식구들을 부여잡고 된바람에 떨고 섰다. 추위를 버티던 장미꽃 앞 녹지의 쑥들도 시나브로 시퍼렇게 얼굴이 얼더니 미라가 되고 있다. 둘러보면 이뿐만이 아니다. 기후 변화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산채로 얼어 죽는 나뭇잎과 풀들이 많다.식물들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즉각 반응하는 존재다. 지난 12월 장미꽃은 두어 차례 한파가 지나가도 중순까지 꿋꿋이 이겨내 사람을 놀라게 했었다. 연말연시 추위는 심하지 않다고 느꼈었는데, 그 새 얼어버렸다. 첫 추위에 동상(凍傷)이라도 입은 걸까. 식물의 생장이 예전과 다르게 변하는 현상은 지구가 ‘온난화’를 넘어 ‘가열화’ 단계에 있다는 징표란 생각이 가슴을 후벼판다.2015년 12월 12일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된 ‘파리기후변화협약(파리협정)’은 산업화 이전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 2℃ 이하 유지’를 장기목표로 세웠다. 이를 위해 ‘기온 상승 1.5℃ 이하 제한’도 채택했다. 유로뉴스(Euronews)에 따르면, 2023년 지구 평균 기온은 14.98°C로 2016년보다 0.17°C 높았다. 또, 1991∼2020년 평균보다 0.60°C 높았고, 산업화 이전인 1850-1900년보다 1.48°C 높았다. 이는 파리협정의 제한치 1.5°C를 불과 0.02°C 앞두고 있다.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불 때는 냄비 안의 개구리’인지도 모른다. 지구온난화를 알면서도 강 건너 불 보듯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니까. 물이 시나브로 더워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냄비 안의 안락에 빠져, 뛰쳐나올 생각을 못 하다가 결국 열에 죽고 마는 개구리의 운명…. 이처럼 인간도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 현상을 외면하다가 어느 한계의 날, 갑자기 파국적 현실을 만날지도 모른다.산채로 얼어 미라가 된 장미꽃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 사람이 버리는 오염물로 나빠지는 자연환경이 어떤 한계를 넘으면 생명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또, 모든 생명을 부양하는 지구는 환경오염을 더 못 견딜 지경이 되면 자기 리셋을 한다는 사실도 함께 선포하는 것이리라.온 지구촌이 물 한 방울, 휴지 한 장, 전기 한 등, 기름 한 방울 등 일상 모든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자원을 아껴야 한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 요청 사태 다음 해인 1998년에 벌어졌던 ‘아나바다운동’같이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삶을 살아내야만 할 시대다.장미꽃 미라를 조심스레 손으로 만져본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꽃잎이 바삭바삭 부서져 까칠하게 내린다. 이런 마음이 들었다. ‘장미야 미안해! 공동 운명체인 너와 자연을 제대로 모르는 우리 인간들이 참 미련해서…’.

2024-01-22

마중물 소명

강길수 수필가 ‘마중물’이란 말을 가슴에 품고, 2024년 새해를 맞았다. 구랍 27일 오후였다. ‘만시지탄이지만, 천만다행이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쳤다. 이어, ‘마중물이 부어졌으니 맑은 물을 퍼내야 할 텐데….’ 하는 바람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대한민국의 공영방송 KBS가 드디어, 부정선거 문제를 26일 밤 9시 톱뉴스로 방송했단다. 그것도, 4꼭지나 할애하였다는 낭보였다. 당장 인터넷에서 그 톱뉴스를 찾아 시청했다. 비록 완곡했지만, 우리나라 부정선거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어, 보는 가슴이 뜨거워졌다.마음에서 시청료에 대한 거부감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시청료 자동 납부를 박절하게 끊지 못하고 놔두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20대 4·15 총선 후, 많은 이들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을 때 이런 방송이 곧바로 나왔어야 했다. 126건이나 되는 선거 소송이 제기된 선거였으니 말이다. 그때 주류언론이 본연의 역할을 다했더라면, 부정선거 문제는 진즉 다루어졌을 것이다.선거 소송은 대법원 단심제로, 법정 기간이 180일로 짧다. 사회 영향 최소화를 위함이다. 이번 KBS 보도에 따르면, 대법원은 126건 소송 중에서 5건만 재판 과정을 거쳤고 나머지는 작년 9월에 일괄 기각하였다. 법정 소송 기간을 4~6배 미루어 기각, 종결했다. 국회의원 임기 4년 중 2~3년 반을 지난 때였다. 대법원이 법정기일을 대놓고 깔아뭉개는 기막힌 현실을, 국민은 눈뜬장님처럼 쳐다봐야만 했다.지난 4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정선거 척결을 외치며, 대한민국의 선거 공정성 회복을 위해 밤낮없이 애썼던 선지자적 애국시민들이 많다. 그들의 진실과 정의에 대한 갈망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 마중물로 되어, 대한민국호란 펌프에 부어지기를 열망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사회의 주류언론들은 이 국가적 거악, 나라 내부침략 행위를 그냥 강 건너 불 보듯 했다.선거가 어떤 세력에게 불법으로 장악당한다는 것은, 그 거짓세력이 나라의 지배층이 된다는 뜻이다. 즉, 국민을 수탈대상으로 삼는 전체주의 체제로 변하는 것이다. 선거를 장악당한 다른 나라들의 예에서 보듯, 부정선거는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미칠 것이다. 전체주의가 된 후,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만시지탄이지만 천만다행으로, 공영방송 KBS가 부정선거 공론화의 마중물을 부었다. 다른 언론들도 잇달아 심층 보도 등으로 마중물을 더 부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 법조계, 학계, 정치권, 국민이 함께 펌프질하여 맑은 물을 퍼올릴 것이다. 마중물은 대한민국언론에 하늘이 내리는 소명(召命)이라 본다. 이 ‘마중물 소명’ 수행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올 4·10총선이 100일도 못 남았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천부의 지성으로 계획, 실천, 점검, 조치하는 데 있을 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부정선거를 막는 특단의 대책을 짜, 나라의 전 기관과 온 국민이 함께 실천해 마중물 소명의 목표, 맑은 물을 퍼내야만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는 피해야 하므로….

2024-01-08

2023 세모에

강길수 수필가 올해가 일 주간도 못 남았다. 다시, 세모(歲暮)다. 올해 끝날, 12월 캘린더 한 장을 넘기면 제야의 종소리를 타고 새해 2024년이 밝을 것이다.생각해보면, 시간은 인간사회처럼 다사다난한 게 아니라 그저 강물처럼 유장하게 흐를 뿐이다. 그런 시간을 사람은 책력을 만들어 구분하고,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다. 1년 동안의 해, 달의 운행, 월식, 일식, 절기, 기상변동 등을 적은 책이 책력이란다. 인간은 왜 책력을 만들까. 영적, 이성적 존재여서 그럴까.사람은 자연 속에 태어나 영향을 받고, 주면서 살다가 결국 그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인간이 자연과 상호작용과정에서 터득한 천문(天文)의 한 분야가 책력이자, 캘린더이리라. 하여, 사람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을 터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올해를 산 나도, 며칠 뒤 12월 캘린더를 넘긴다 생각하니 뭔가가 뒷등을 당기는 기분이다.2022년 2월, 러시아 침공으로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된다. 엎친 데 덮쳐 올해 하마스-이스라엘전쟁도 터졌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체제를 버렸음에도, 왜 서방과 척을 질까. 권력자들의 야욕을 이해할 수 없다. 따져 보면, 배다른 형제지간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아랍의 반목과 전쟁은 또 무엇일까. 인류의 집단지성 향상은, 과학기술 발전과 반비례한다는 말인가.우리 정치권은 왜 ‘좌우 대결’이란 헛된 프레임으로 역사상 가장 찬란히 이뤄낸 민족중흥의 복을 걷어차고, 쪼개기로 국민을 어둠으로 몰고 갈까. 한심하다. 우리 지성들과 언론들은 왜 부정선거, 여론조작, 통계조작 같은 사회 거악들의 본질적 문제들을 외면, 침묵하거나 빈 거짓된 말만 해댈까. 비겁하다! 설마 우리 사회에,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dystopia)가 스며든 게 아닐까. 무섭다. 오웰의 빅브라더가 이미, 우리 사회를 움켜쥐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드니 말이다.그 무엇이, 이 세모에 내 뒷등을 당길까. 올 한해를 곰곰이 돌아본다. 맞아, 그랬어. 그 말이 뒷등을 당겼던 거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 ‘입장 바꿔 생각하는 마음’ 말이다. 지난 한 해는 분명 나와 우리 집, 우리 사회와 우리나라, 나아가 지구촌도 역지사지를 더 잊은 한 해였다 싶다.‘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겨레의 삶에 연연히 흐르는 ‘품앗이 문화’를 말하리라. 아이들 어릴 때, 이 속담이 들어간 동요를 “옛말에도 있었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자!…”하고 씩씩하게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리 세상이 돈, 권력, 야만으로 탁해져도 겨레의 마음에서 이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콩 한 쪽도 나누는 마음은 바로 역지사지 정신’이니까.비록 나라 안팎 사정이 녹록지 않더라도, 2023년 세모에 나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콩 한 쪽도 나누는 품앗이 문화 곧, ‘역지사지의 삶’을 연연히 살아온 우리 겨레이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 국민은 2024 새해에도 부정, 비리, 조작, 야만적 폭거 같은 사회악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살아내리라 믿는다.

2023-12-25

짜가가 판친다

강길수 수필가 추위가 서너 번 지나갔음에도, 학교 담장의 장미꽃은 잘도 버틴다. 어떤 가지는 아예 새순을 뽑아 올리기도 한다. 환경변화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12월 초에도 꽃을 피워야 하는 절박함으로 드러난 게 분명하다 싶다.지난 1일, 두 장 남았던 달력에서 한 장을 뜯어냈다. 올핸 유달리 달랑 남은 마지막 달력 한 장의 무게감이 크다. 11월 달력 한 장을 뜯어내며, 30년 전 히트했던 한 가수의 유행가 가사가 가슴에 여울졌기 때문이다. 가사 일부는 이렇다.“세상은 요지경/요지경 속이다…./야 야 야들아/내 말 좀 들어라/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짜가가 판친다….”올해 12월을 맞으며, 1993년 대유행했던 노래의 가사가 왜 되살아 난 것일까. 내 마음에 비친 올 우리 사회의 모습이, 12월에 핀 장미꽃의 절박함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인터넷에서 당시 노래 동영상을 찾아 다시 시청해 본다. 노래하는 가수의 초점을 잃은 듯한 눈, 백치미를 연상케 하는 표정과 몸 율동이, 내내 풍자와 해학으로 넘쳐나 보인다.그 야릇한 모습이, 문민정부가 출범했던 그해 우리 사회상보다는, 오히려 요사이 우리 사회의 초상(肖像)을 더 풍자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서 내 잠재의식은 이 가사를 소환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든 일부의 짜가 곧, 가짜가 사람들을 속이고 괴롭히며 때론 타인 삶을 불행하게도 해왔다.하지만, 그런 게 인간사회의 주현상은 아니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정말, 예전보다 ‘많은 짜가가 판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나라의 헌법기관 선거관리위원회가 국민적 불신의 늪에 빠진 것이다. 2017년 대선부터 선거마다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한 짜가 사전선거 데이터를 계속 발표해 놓고도, 많은 국민의 부정선거 제기에 대해 통계적 해명 한 번 못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기 때문이다.올해 ‘도둑놈들’, ‘비밀지령 2-∞’ 등 대한민국 부정선거 연구서들이 연이어 나왔다. 또 ‘왜(歪) 더 카르텔’ 같은 다큐멘터리 영상물들도 나왔다. 이런 증거물들은 한결같이 ‘부정선거는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국난’이라 경고하고 있다. 이쯤 되면, 주류언론들이 ‘거악(巨惡) 청산의 혁명적 사회개혁’을 요구해야 정상 나라일 것이다. 한데, 그 주류언론들은 비겁한 침묵만 일삼고 있다. 대체, 왜일까.산업현장에서 일하며 정치에 무심히 살아왔던 나도, ‘부정선거’라는 말에 분기탱천했다. 나라 주인 국민이 선거주권을 빼앗기면, 국민 뜻이 아닌 가짜 체제가 서는 엄청난 반역이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통해 부정선거의 진실을 파악했다. 부정선거로 뽑힌 공직자는 짜가 곧, 가짜다. 가짜들이 국민을 수탈대상으로 삼는 온갖 악법을 만드는 광대놀음, ‘짜가가 판치는 요지경 세상’을 언제까지 두고만 봐야 할까.12월의 장미꽃들이 내게 말한다. ‘국민이시여, 이제 짜가에 놀아나지 말고, 초겨울에도 꽃피는 우리 장미들의 민감한 반응을 따르세요. 그게 꽃길이랍니다. 무얼 근심합니까. 세상일은 시작이 반인데!’라고….

2023-12-11

은행나무 메모리카드

강길수 수필가 11월 하순, 한낮에 보도를 걷는다.늦가을 거리 모습은 올해도 자연의 아이러니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보도 한쪽 학교 석축 위 울타리엔 장미꽃이 제법 많이 피었다. 그 아래 작은 나무들과 풀들이 여름날처럼 푸르다. 맞은 쪽 보도에 줄지은 은행나무는 노란 낙엽을 흩날리고 있다. 장미꽃과 은행 낙엽과 푸른 잎들이 뒤섞인 늦가을풍경이다.종잡을 수 없는 기후변화에 나무, 풀들은 올가을도 헷갈리며 어지러운가 보다. 기후의 난동(亂動)에 대처하기도 벅찬데, 곁을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탁류로 뒤범벅되어 범람하니 식물인들 정신 차릴 수 있으랴. 늦가을의 어리둥절 어지러운 세상 풍경을 나무, 풀들이 온 누리에 방영하고 있다.보도 위의 은행 낙엽 하나를 집었다. 가장자리가 옅은 갈색이다. 예전과는 달리 색바랜 노랑이다. 문득, 낙엽이 은행나무가 겪는 삶의 모습을 그린 메모리칩으로 보인다. 얼른 낙엽 메모리칩을 마음의 컴퓨터와 연결한다. 곧바로, 은행나무가 바라본 우리 사회의 초상(肖像)들이 모니터를 채운다.군대 시절 꼭 이맘때, 야간훈련에 만났던 ‘북진통일로’가 나타났다. 하늘을 메운 둥근 늦가을 달을 쳐다보는 순간, ‘그리스도의 과제가 여기 있다’고 깨닫던 젊은 마음이 되살아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참상들이 사람의 눈물마저 마르게 한다. 먹기 어렵던 시대는 ‘식량 뺏기 싸움’이란 명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전쟁을 총알받이 서민들은 어찌 알아듣고, 살아내야만 할까.유튜브로 보았던 다큐멘터리 영화 ‘왜(歪) : 더 카르텔’의 충격이 파노라마 된다. 부정선거 재판에서 법과 양심, 상식마저 내팽개친 대법관들의 검은 실루엣이 앞을 가린다. 180일 법정 재판기일을 사보타주로 몇 배나 넘기고, 126개 선거소송 중 5개 선거구만 재판을 열었다. 재검표장에 나왔던 태산 같은 부정선거 증거물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선관위에 면죄부를 하사한 대법관들의 흑심이 요괴하다. 대법정 지킴이 정의의 여신상이 노하여 오른손 저울을 던져버릴 기막힌 사법부다.지난 총선에서 통계 법칙을 짓밟고, 빼앗아 부풀린 가짜 사전투표 수치로 거대 야당이 된 무리. ‘민주주의’니 ‘국민’이니 하는 립서비스로 국민을 꾀며, 의회 독재 광대놀음만 한다. 걸핏하면, 당국자들을 탄핵 겁박하는 위선이 하늘을 찌른다. 6·25 남침의 주범, 북한의 기만에 이용만 당하던 지난날의 ‘삶은 소대가리’도 어른거린다. 국민을 개, 돼지로 얕보고 수탈 대상으로 삼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은행잎 메모리칩이 말한다. ‘사전투표인 명부’를 국민이 볼 수 없는 대한민국이라고….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맞는가. 그렇다면, 사전투표자 수를 조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부정 시비 있는 사전투표는 왜 하며, 본투표 5일 전에 할까. 사악한 자가 그 기간에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선거절차를 이래 놓고도 공명선거를 입에 담는가.은행나무가 본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것들뿐일까. 비록 어지러운 가을일지라도 부디 우리가 진실의 불을 밝혀, 나무 풀들도 함께 즐거운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빈다.

2023-11-27

사회 자정작용 시스템

강길수 수필가 10월 하순, 후덥지근하던 가을 날씨가 소슬해진다. 어제와 오늘은 습도가 20%대까지 낮아졌다. 그래선가. 보도의 벚나무 낙엽들이 절반은 부서졌다. 샛노랗거나 새빨간 벚나무 낙엽을 줍던 즐거움도 올핸 못 누릴까 보다.낮은 습도에 벚나무 낙엽이 쉬이 부서지듯, 자연물들은 서로 반응한다. 그들의 상호 반응이 내겐 자정작용(自淨作用)으로도 보인다. 발생하는 오염물들을 자연은 끝없이 자정작용으로 정화한다. 공기나 물 등 무생물들도 물리, 화학적 자정작용을 한다. 살펴보면, 자연은 자정작용이 점철된 시스템이다.인간사회는 어떨까. 당연히 자정작용시스템을 갖는다.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는 결국 자정작용시스템이다. 인간사회의 정치제도 중 자정작용의 결정체는 무얼까. 바로 ‘자유민주주의’라 본다. 지구촌 대부분 나라가 사실상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한 것을 봐도 그렇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전이 말하듯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다.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허울이나 말장난에 불과하다.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룬 것은 행운이다. 75년의 짧은 기간에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사회를 국민과 지도자가 해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자정작용시스템은 무엇일까. 언론, 관습, 문화, 윤리, 도덕, 나아가 입법, 사법, 행정 등 사회 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자정작용시스템은 바로 공명정대한 선거다. 주권이 국민에 있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2020년 4·15총선 직후 부정선거 소송이 126건이나 제기됐다. 이후 많은 분이 부정선거퇴치 운동을 한다. 저작가 G 박사는 2017년 대선부터 올 강서 보궐선거까지 8차례에 걸쳐, 통계학 대수법칙을 위반하는 부정선거를 선관위가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또 H 교수는 올 강서 보궐선거 사전투표 결과가 나올 확률은 무려 5.7경분의 1이라 한다. 오랫동안 품질 수치를 다뤘던 나도 사전투표 결과를 보는 순간, 조작된 수치임을 직감했다.숫자는 진실이며, 증거다. 10월 강서 보궐선거의 득표율은 당일 투표 여당 47.12%, 1야당 48.46%, 차이 1.34%다. 반면, 사전투표는 여당 30.61%. 1야당 65.68%, 차이 35.07%다. 투표자 기준 사전투표율은 46.51%다. 따라서 비슷한 두 모집단의 투표결과는 거의 같아야 한다. 상식적, 통계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결과다.앞에서 보았듯 우리나라는 신성한 사회 자정작용시스템인 선거가 거악 오염시스템으로 전락해버렸다. 부정선거 획책 세력이 국민을 깔보고, 사회 체제 전복을 암암리에 도모한다는 의심이 짙다. 전쟁은 외부침략이고 부정선거는 내부침략이다.대통령과 정부, 정치권, 사법부, 언론은 이제부터라도 부정선거를 발본색원하여 나라의 자정작용시스템을 회복시켜내야 한다. 혁신, 변화 다 좋지만 선관위 발표 거짓 선거 숫자에 바보처럼 승복하여 어릿광대놀음만 해서는 안 된다. 여당 혁신위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부정선거를 막는 일이다. 이는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의 뜻이다.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존속 여부가 걸린 문제니까.

2023-11-06

우리, 울지 말자

강길수 수필가 “우리, 울지 말자!….”편의점 앞 탁자 의자에 앉아 고개 숙여 우는 아가씨의 등을, 다른 아가씨가 쓰다듬으며 한 말이다. 스무 살 전후로 보이는 앳된 아가씨들이다.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 그녀들 곁을 지날 때였다. 거리가 멀어지는 데다, 벽돌 깔린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굉음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못 들었다. 출근길, ‘상대로 젊음의 거리’에서의 일이다.‘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젊디젊은 아가씨가 초가을 아침을 울고 있을까.’ 걱정과 궁금함이 마음에 여울졌다. ‘젊음의 거리란 이름을 가졌지만, 음주, 가무, 유흥, 때론 싸움, 밤엔 쓰레기가 나뒹구는 모습으로 점철된 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뒤따랐다. 연전, 이곳에서 청년들이 싸우던 모습도 떠올랐다. 시나브로 가슴이 저려 왔다.젊은이들이 그 젊음을 만끽하고, 희망을 충전하며, 사랑과 위로를 주고받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젊음의 거리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거리를 걸으며 출퇴근한 지난 8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상대로 젊음의 거리’로 부르기 전 3년, 후 5년을 오갔다. 젊음의 거리 조성 이전, 조성 중, 조성 이후를 다 보며 다닌 것이다. 한데 웬일인지, 내 눈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6년 전, 이곳을 ‘상대로 젊음의 거리’로 지정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젊은이가 모이지만, ‘정체성이 없는 음주 유흥거리로 형성된 이 거리를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거리로 만들기로’ 했단다. ‘가로환경개선 사업과 유해환경개선 사업, 지중화 사업을 추진’하고, ‘그린웨이(Green Way) 프로젝트’와 ‘도시재창조 프로젝트’를 연계, 시민에게 ‘문화공간, 여가 공간을 제공하는 문화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어우러진 복합체 도시로의 변모’를 꾀한다고도 했었다.참 좋은 소식이었다. 한데, 지금 현실은 어떤가. 간선도로에 벽돌을 깐 가로환경 개선과 전선 및 통신선 지중화 사업만 미흡하게 마친 게 전부다.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거리로 만들기’와 ‘문화공간, 여가 공간을 제공’하는 기획은 공염불이 되었다. 그린웨이, 도시재창조라 했지만 철길숲과의 연계성도 별로 없어 보여, 시 당국에서 제대로 고민한 것 같지 않다.아침마다 청소하는 분들이 없다면, 이곳은 호객용 찌라시와 담배꽁초, 각종 음주 쓰레기로 범벅이 된 거리가 되었을 터다. 청소원이 늦게 오거나, 비 오는 날 아침은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젊은이들의 독창과 개성의 문화거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무릇 모든 시스템은 투입과 산출의 구조이듯, 독창과 개성의 문화도 노력과 투자를 들이지 않으면 나올 수 없을 것이다.만일 이곳이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거리’라면, 젊은 아가씨가 밤잠도 제대로 못 잔 얼굴로 초가을 아침에 울고 있을까. 나라 장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위해, 중앙과 지방정부의 노력과 투자는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지금이라도 시 당국은, 이곳이 젊은이들을 위한 진정한 ‘상대로 젊음의 거리’가 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서 초가을 아침에 울고 있는 아가씨의 눈물을 닦아 주기 바란다.

2023-10-16

‘1-3 일동’ 감사 연꽃

강길수 수필가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 곁에 연꽃 한 송이가 있다. ‘1-3 일동’ 감사 연꽃이다. 아까워 못 마시는 작은 혼합 음료병이 변신한 연꽃이다. 벌써 3주가 지났다. 연꽃엔 명함보다 조금 큰 종이쪽지가 붙었다. 쪽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였다.“항상 저희를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1-3 일동”큰 글씨 세 줄로 쓴 감사 글 아래 왼쪽 공간에, 분홍 하트 눈을 가진 토끼를 그렸다. 토끼 왼쪽과 오른쪽에 위아래로 분홍 하트가 각각 두 개씩 그려져 있다. 그 오른쪽엔 1학년 3반 일동 표시 글을 써넣어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쪽지에는 모두 7개의 하트가 있다. 사랑과 행운의 하트가 틀림없으리라.8월 중순 금요일, 흐리고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이었다.이웃 시 S 여고에서 일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마칠 시간이 가까워 교사(校舍) 입구에 놓은 시료 채취기 앞에서 기다렸다. 안에서 여학생 네댓 명이 나오더니, 내게 쪽지를 붙인 혼합 음료 두세 병을 내밀며 말했다. “저, 이것 좀 받아 주실 수 있으세요?”예상치 못한 상황에 엉거주춤, 한 병을 받으며 말했다. “응. 한 병이면 돼. 고마워!” 교내 종교모임 학생들인가보다 여기며, 붙은 쪽지의 글은 읽지도 않고 음료병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학생들은 내게 해맑은 웃음을 덤으로 선물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되어 시료 채취기를 철거했다. 빨리 가고픈 마음에, 음료는 꺼내 보지도 않았다.집에 돌아와 조끼 주머니에서 음료병을 꺼냈다. 비로소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래. 세상은 역시 살만한 거야!”하고 속말이 튀어나왔다. 쪽지는 종교모임 학생들이 쓴 게 아니라, 1학년 3반 ‘Z세대’들이 쓴 것이었으니까. 더운 여름날 교내에서 일하는 이들을 어린 딸들이 분별(分別)하고, 뜻을 모아 감사의 마음도 함께 담아준 음료병…. 아까워 음료를 마실 수가 없다.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분별을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들이 휘젓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정치, 행정, 사법, 언론, 학계, 종교계 등 사회 대부분 분야가 분별력을 잃고 좌충우돌한다. 때문에, 묻지 마 강력범죄가 퍼지지 않겠는가. 한데, 이 학교 1-3 어린 학생들은 어찌하여 근로자를 분별(分別)하고 감사하게 되었을까.지금 고1이면 거의 홑 자녀일 테고, 동기간(同氣間)이 있어도 두셋일 것이다. 그러니, 이 고운 딸들이 그저 예쁘고 기특하기만 하다.S 여고 1-3반 학생들의 분별력이 감사로 태어나, 내게 다가온 날…. ‘디지털 원주민’으로도 불리는 ‘Z세대’ 고1 소녀들. 그들은 내 마음에 ‘1-3 일동 감사 연꽃’으로 피어났다. 양심 저버리고 분별력 잃은 기성세대의 검은 마음. 그 검은 마음에 1-3 일동 감사 연꽃 씨앗이 뿌려져, ‘분별의 연꽃’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불의와 부정, 조작과 선동을 몰아내고, 진실과 정의와 사랑이 도도히 흐르는 분별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2023-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