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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기, 뽑기

등록일 2025-07-14 18:34 게재일 2025-07-1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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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수 수필가

출퇴근길에 학교 담장 곁을 걸어서 오간다. 10년째다. 중간이 대문이고 양쪽으로 담장이 있다. 담장 밑과 보도블록 사이엔 폭이 한 뼘쯤 되는 모래흙 부분이 있어, 풀들이 화단 삼아 잘도 살았다.

으레 보던 풀들이라 재작년 3월까지는 관심 없이 지나다녔다. 그해 4월 초 어느 아침, 북쪽 담장 아래서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았다. 마치 그 옛날 젊은 엄마를 만난 듯, 반가운 존재가 보였기 때문이다. “반가워! 도시 대로 가에서 너를 다 만나다니, 넌 내 ‘행운’이야”라며 이름 지어주고, 첫인사를 나누었다. 사진도 찍었다.

‘행운’ 앞에 잠깐 머무는 동안, 내 맛봉오리와 후각세포는 어느새 그 옛날 응달에 잔설이 하얗던 이른 봄 고향 아침 밥상에 갔다. 밥상엔 젊은 엄마가 ‘행운’으로 끓인 국이 올랐다. 행운의 풋 내음, 풋 맛이 단박에 허기를 채워나갔다. 엄마는 어디서 뜯었는지, 해마다 이른 봄이면 꼭 그 국을 밥상에 올렸다. 높바람에 겨우내 얼었던 몸과 마음을 국은 녹여내고도 남았다.

‘행운’의 고향 이름은 ‘구시디’다. 논밭 두렁, 도랑 가, 길 가 등 모래 쌓인 곳에 잘 자라는 구시디는 언제나 진초록 깔끔이다. 줄기와 잎이 연약하고 작아 다른 풀들이 자라기 전 이른 봄에 잘 보인다. 구시디의 표준말은 ‘벼룩이자리’다. ‘모래별꽃’이란 이름도 있다. 어린잎은 일종의 세제로서 소독에 쓰기도 하고, 데쳐서 나물로도 먹고, ‘구시디국’도 끓인다.

“아, 어찌 이런 일이!….” 학교 담장이 가까워지자 저절로 나온 말이다. 작년 늦봄 한 출근길에서다. ‘행운’이 벗들과 어우렁더우렁 살던 담장 아래. 풀들은 다 없어지고, 사막 모습만 휑하게 남았지 않은가. 풀들이 자라나고, 꽃 피우며, 열매 맺는 모습을 바라보던 행복도 뽑혀버린 풀들과 함께 깡그리 뽑힌 마음이다. 올핸 초여름에 벌써 두 번째 뽑기를 당했다. 황량, 쓸쓸하다. 왜, 풀들을 깎지 않고 뽑아냈을까.

환경미화에 별난 교장이나, 담당자가 왔나보다 하면서도, 상실감과 애틋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날, 고향에서는 김맬 때 외는 풀을 안 뽑았다. 벌초만 했다. 냉이같이 뿌리를 먹는 나물만 캐지 다른 나물, 꼴, 사료, 거름 용 풀들은 뜯거나 깎거나 베었다. 풀은 뽑기‧캐기보다, 뜯기‧깎기‧베기를 하는 게 맞다. 고마운 생명을 살리며, 자원으로 재이용도 해야 하니까 말이다. 풀 뽑기를 한 담당의 생명경시 마음이 죄 없는 ‘행운과 그 벗들’은 물론, 내 행복도 그만 유명을 달리하게 하고 말았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깎기’보다 ‘뽑기’에 얼빠졌다 싶다. 해방 후 80년을 심고, 깎고, 가꾸어 온 것들을 뽑아버리는 집권세력의 행태가 곳곳에 번진다. 기존 제도를 ‘깎기’ 곧, 다듬고 가꾸어나갈 생각은 않고 ‘뽑아 없앨 궁리’의 먹구름만 피워대니 말이다. 자기편 욕망 충족이 목적인 게 뻔한 것들을 ‘국민의 뜻’이라고 호도하면서….

뽑거나 캐기보다 뜯거나 깎기 중심으로 살아온 게 우리 사회다. 정치권은 부디, 이를 버리지 말고 이어나가 깎고, 다듬어 복된 나라로 가꾸어주기를 두 손 모아 비는 마음 간절하다.

/강길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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