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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형제의 나라’가 겪는 고통 앞에서

홍성식 경제·기획 에디터 “당신은 형제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잖아.” 몇 해 전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도우베야짓까지 튀르키예 여러 도시를 1개월쯤 여행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형제의 나라’였다.기차에서 사과를 깎아 건네던 할머니께 “괜찮다”며 사양의 의사를 표했을 때도, 이란 영사관 가는 길을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가며 안내해준 사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때도, 생전 처음 만난 영감님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았을 때도 “튀르키예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니 이 정도 친절과 환대에 어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길 들었다.시계를 70년 전으로 돌려보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동족이 서로에게 총칼을 겨눠야했던 비극의 역사가 우리 땅에서 벌어졌다. 죽음과 삶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게 전쟁이다. 귀한 목숨이 한순간에 동백꽃처럼 떨어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땅이었던 한국.하지만, 튀르키예는 망설이지 않고 한국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 영국, 캐나다 군인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고통을 겪는 한국으로 수많은 튀르키예 청년들이 온 것. 한때 지구의 1/3을 지배했던 강력한 군사제국 오스만 튀르크의 후손답게 튀르키예 군대는 용맹했다. ‘작전상 후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내장되지 않은 튀르키예 군인들은 전투 최일선에서 전진만을 거듭했다. 그래서다. 한국전쟁 참전국 중 파병 군인 대비 전사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튀르키예다.총탄이 쏟아지는 참혹한 전쟁터였지만, 튀르키예 군인들은 한국에서 가슴 따뜻한 이야기도 만들어냈다.전쟁고아가 된 한국의 어린 소녀를 자신의 딸처럼 보호했던 튀르키예 군인은 눈물바람으로 이별한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소녀를 잊지 않고 온갖 노력 끝에 다시 만난다. 튀르키예와 한국이 공동제작한 영화 ‘아일라’에 그 스토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튀르키예에선 60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튀르키예 사람들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고, 낯선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흔하다. 바로 그 튀르키예, 생명을 거는 전쟁에서 기꺼이 한국을 도왔던 튀르키예가 예상치 못한 큰 지진으로 국가 비상사태에 빠졌다. 이미 3만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일부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가 1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자연재해가 일으킨 홀로코스트’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70년 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튀르키예는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제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닐지.한국인의 핏속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흐른다. 타인의 고통에 눈 돌리는 건 인간만의 특성인 휴머니티를 배반하는 행위다. 오늘 바로 지금,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이들을 돕는 건 인간애의 생활 속 실천이다.

2023-02-15

2월의 詩

배문경 수필가 입춘을 지나자 바람은 유순하게 변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탓일까. 봄기운을 느끼고자 온몸이 촉수를 곤두세운다. 나뭇가지에 몰아치던 매서운 바람이 산수유 꽃망울을 피우고 여기저기 매화를 깨운다.눈부신 햇살과 따뜻한 바람에 고객의 표정도 밝아졌다.코로나의 길고 어두운 터널은 노년을 향해 집중 포화되어 건강에 적신호를 보냈다. 노인병원으로 코로나가 돌고 돌아 삶과 죽음의 이중주 앞에 노인들을 줄 세웠다. 한풀 꺾인 겨울 찬바람과 코로나가 뒷걸음치는 것이 역력하게 보인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찬 기운 가득한 농가에서는 입춘 날에 보리뿌리를 캐어 하루 묵혔다가 그 생긴 것을 보고 한 해 점을 쳤다고 한다.세 가닥 이상이면 풍년이고, 두 개면 중간이며, 단지 뿌리만 있고 가지가 없으면 흉년으로 여겼다. 제주도에서는 입춘 날에 굿을 열었다고 한다. 이제 농사를 기본으로 삼던 세상과는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지만 곡식만큼은 절기대로 움직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가 똑같이 삼 개월씩 나누는 것은 옛이야기다.얼렁뚱땅 겨울과 여름의 그림자 시간이 길어지면서 봄과 가을이 짧아졌다. 한없이 뜨거워진 여름과 지독스레 추워진 겨울로 바뀌어가는 것일까. 간절기 옷을 입기도 전에 계절은 꼬리를 감춰버린다. 올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 어디쯤에서 나이 한 살이 주는 무게가 한겨울 가장자리 같다.종합건강검진실로 찾아오는 단골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눈다. 오랜만에 본다 싶으면 그 사이 세월의 흔적은 시간보다 빨리 몸이 말해준다. 시력 저하나 기억력 저하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부정해진 어깨는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굽은 허리는 그동안의 노동의 강도와 습관을 말해준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은 세월의 깊은 주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겨진 거리에서 반갑다며 손부터 잡는다. 안부의 말에는 염려와 격려가 포함되어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오랜 시간 사회봉사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며 살아온 영순씨를 보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 언제 어디인지를 가리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영혼을 데워주신다. 색종이를 접어 작은 통을 만들어 맛난 사탕을 담아 나눠 먹으라고 주신다.위와 대장내시경을 했는데 염증도 용종도 없이 깨끗하다. 봉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암 발생률이나 심장병도 적다.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뇌 속에서 기분을 좋게 해주고 통증을 가라앉혀 주는 엔돌핀과 세로토닌, 도파민 등 긍정적인 신경전달물질이 많이 분비되기도 한다. 칠십을 바라보는 그녀가 고운 심지를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요양기관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는 정수님은 일 년에 두 번은 꼭 본다.간염보균자인 그는 국가에서 제공되는 간암검사를 상반기와 하반기 두 번 검사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기자로 활동한다는 아들에 대한 상담을 내게 받은 적이 있다. 외국의 의료수가가 비싸서 국내 온 김에 몸 상태를 체크한다고 했다. 무료검진과 개인부담으로 다양한 검사를 마쳤다. 다행히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결과를 확인하고 다시 외국으로 떠났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 다양한 혜택을 받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다. 건강지킴이라는 나의 직업이 감사하다.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인생이란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진다.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며 뒤돌아보아도 겨울 모퉁이를 돌고 있다.“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오세영의 ‘2월의 詩’중에서 )짧은 二月, 사람들은 생중(生中)에 오늘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2023-02-15

<3> 공매·경매 토지의 비방을 기술하다

토지개발공사도 주로 2년 장기 계약 방식으로 매각을 촉진했다. 토지개발공사에서 매각하는 토지는 주로 원시 매각이므로 명도의 문제는 아예 걱정할 필요가 없으나, 환매 조건부 매각도 있다.법원의 경매 토지는 매주 이루어지고 있는데 채권자가 법원에 강제 매각을 신청하여 법원에서 공개 경매하는 것으로 성업공사에서 매각 하는 부동산은 명도 책임을 성업공사가 지고 있는 반면 법원 경매는 매각 당사자인 법원에서 명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직 채무자가 거주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반드시 명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확인해야 하고, 합법적으로 명도가 가능하다 해도 최소한 명도에 따른 비용은 물론 조기 명도와 다툼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정한 추가 비용을 감안하여 입찰을 봐야 한다. 유치권 문제, 광업권, 관습법상 지상권, 분묘기지권, 온천공에 대한 권리 등의 전문적으로 고려해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농지의 경우도 조건부 매각이 된다.당나무는 박씨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박씨는 건너 마을에 있는 미스 김과 연애를 할 때 항상 당나무 뒤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첫 키스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용감하고 우람찬 신체의 골격이 더욱 돋보였고, 애인 미스 김은 뽀얀 피부에 통통한 몸매가 너무나 섹시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인상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지원해서 월남으로 가기 위해 부산으로 간다면서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서로 이승에서는 헤어지지 말자고 몸을 나누었다, 애인 박씨는 죽었다. 그 후 미스 김도 이름 모를 병으로 앓다가 죽어 갔다. 그렇지 않아도 당나무에 쉬어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에 대한 걱정이 대단했다. 그 후로 당나무와 김 사장은 몸이 아파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용마람 태수의 바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김 사장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기로 했다. 부동산이야말로 어릴 때 가난했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는 부동산을 살 수 있는 목돈이 없었다. 그나마 공기업에서는 장기 연부로 매각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토지 개발공사, 성업공사 등에서 길게는 3~4년에 걸쳐 잔금을 치를 수 있는 방법으로 연부매각을 하고 있었다.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경기도 출신 동료 직원 강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와 같이 성업공사와 법원 등에서 매각하는 공매 부동산과 경매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김 사장은 서울의 지리도 잘 모르고 해서 강 선배의 고향인 S시에 부동산에 대해 공동으로 투자하기로 하고 자주 S시에 가고 있었다. 성업공사에서 매각하는 부동산에 입찰을 봤다. 최고가 공개경쟁 입찰 방식이었다. 좀 도시 변두리긴 했으나, 광로변이고, 주변에 구획정리지구가 있었고, 아파트가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는 것도 고무적으로 발전 여지가 있는 곳이라고 강 선배가 설명했고, 김 사장이 봤을 때도 그렇게 느껴졌다.명당이니 양지니 음지니 하고 이론적으로 공부하긴 해도 현실적 투자 앞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우선 가격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앞으로 발전 전망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돈은 3년 분할 상환이라서 좀 낫긴 했으나, 계약금과 일부 중도금 줄 돈을 제외하고는 저축된 돈이 없어서 역시 걱정이었다. 그런데 우선 나대지라서 명도 책임이 없고, 걱정 끝에 첫 작품으로 변두리 광로에 있는 대지를 입찰을 봤다. 경쟁자가 제법 있었는데 김 사장이 차하위 입찰자와 근소한 금액을 더 쓴 것으로 발표 됐다. 그러나 매입 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니 실제 거래 금액 보다는 제법 싼 금액으로 낙찰 본 것이었다.T개발공사 강 선배와 법원에서 실시하는 임야를 낙찰 봤다. 워낙 가격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법원의 경매는 매각을 촉진시키기 위해 낙찰이 안 되면 1회 마다 25%정도 떨어진 가격으로 경매가 진행된다. 임야는 명도 문제가 없어서 강 선배와 공동으로 매입했다. 그 후에 법원에서 실시하는 신개발지 진입도로변 임야를 입찰 보기로 하고 시장조사부터 하고 권리 관계, 개발행위 관련해서 입목도, 경사도 등을 모두 점검하고 반드시 낙찰 받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입찰예정가보다 상당한 금액을 더 높여 입찰을 봤는데도 근소한 차이로 떨어졌다. 법원의 경매는 경매 당일 최고 낙찰자의 입찰 금액을 그 입찰 장소에서 발표하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다. 서진국 작가 김 사장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서울의 북쪽 변두리인 노원구 쪽에 주유소를 할 수 있는 땅을 매수 했다. 그 토지는 중랑천 건너 광로에 인접되어 있어 토지 앞 소방도로는 있었으나 중랑천 건너 6차선 큰 도로와 연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교량을 놓아야 했다. 미리 고향 향우회를 통하여 구청에 알아보니 다행히 고향에서 오신 분이 간부로 있어 문의한 결과 가능하다고 하여 그러한 지식을 갖고 그 토지를 아주 싼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다. 주유소가 잘 되어 서대문구 이대가 있는 학사 골목 뒤편에 상가도 매입하였다.당나무는 가난한 잠수부들의 슬픈 사연도 기억하고 있었다. 김 사장 건너집 아재가 죽었다. 잠수부로 작업하다 심장마비로 30대에 죽었는데 김 사장과도 집안의 먼 친척 벌이 된다. 그 건너집 아재에게는 20대 부인과 아들과 딸이 한명씩 있었다. 그 집은 여느 다른 집들도 다들 그랬지만 너무나 가난하였다. 그 부인은 이웃 동네 아들이 없는 늙은 노인에게 씨받이가 되었다. 그 노인이 그 집에 찾아 왔을 때 집이 단칸방 밖에 없어서 그 애들은 갈 곳이 없어 밖에서 울고 있었다. 김 사장은 그들과 또래 친구였다.

2023-02-15

애도의 조건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학내 포털의 ‘경조사’ 게시판에는 부고와 결혼 소식이 올라온다. 부서의 구성원이 상을 당하거나 결혼을 하면 부서의 장이 게시판을 통해 알리는 구조다. 경조사의 주체는 정규직 교수와 직원이 제일 많다. 계약직 직원으로 추정되는 경우도 발견되었지만, 비정규직 교수의 사례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경조사 주체의 제한이 없으니, 올리는 사람의 무의식이 작동할 결과일 것이다.게시판에 올라오는 경조사의 주체는 대부분 나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애도·축하의 마음이 생겨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부서 구성원들만 공유해도 될 법한 경조사를 학내 전체 구성원에게 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학내 구성원의 슬픔을 나누고 애도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의 경중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보통 슬픔에 더 많은 사연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지난 2월 5일은 이태원 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유가족협의회는 100일 추모대회를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서울시는 불허하고 경찰까지 동원해서 천막 설치를 막았다. 경찰과의 대립 끝에 시민분향소는 서울광장에 설치되고 추모대회는 간신히 개최되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부고는 한 사람의 삶이 공적으로 애도가능한 삶 및 국가적 자기인식의 상징이 되거나 되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버틀러의 논의는 미국에 의해 발생한 전쟁 사상자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통찰이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찰은 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막는 것일까?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목숨을 잃은 159명에 대한 애도는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장으로서 우리의 일상을 다시 인식하는 행위이다. 여전히 우리는 참사가 발생하기 전부터 예견되었음에도, 왜 경찰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를 밝혀내야 하는 국회의 국정조사특위는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국가 권력이 사회적 참사 규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규명을 둘러싼 지난 일들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 국가 권력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참사를 우연한 사고로 위장한다. 위장을 위한 지배 권력의 작동과정에서 희생자들의 사회적 고통이 심화하는 공통점도 있다. 이를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애도의 조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애도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도는 현실 인식의 결과이다. 이태원 참사는 사고인가? 참사인가? 각각의 인식론에는 전혀 다른 힘이 개입하고 있다. 그 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고 나야 희생자에 대한 올바른 애도가 가능하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국가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공적 행위가 이루어진 과정이다.

2023-02-15

남자도 갱년기가 있다구요

나선택 포항 행복한의원장 “요즘 남편이 부쩍 피로해하고 매사에 의욕도 없고 모임에 나가도 금방 들어와요. 종합검진해도 아무 이상이 없대요. 왜 그럴까요?” 피로감과 우울감이 주증상인 환자의 진료 중에 남성도 갱년기가 있다고 하면 여성도 아닌 남성이 갱년기가 있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다.남성의 갱년기는 30대 후반부터 70대 이후까지 장기간에 걸쳐서 남성호르몬이 감소하면서 나타나므로 증상이 완만하게 나타나고, 개인차가 많은 편이라 증상의 호소도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40대부터 뭔가 몸이 전과 같지 않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증상이 남성 갱년기와 관계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남성 갱년기는 뇌(시상하부)와 고환 기능이 저하되어 남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드는 것이 주 원인이다. 남성호르몬 분비를 빠르게 저하시키는 요인들은 뭘까? 과도한 흡연 음주 비만 등의 잘못된 생활습관, 지속적인 스트레스, 고혈압 당뇨 호흡기질환 등의 만성질환, 일부의 위장약 이뇨제 무좀약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에 의해서 남성호르몬은 빠르게 감소한다. 이 중에서도 만성적인 음주는 남성 갱년기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남성호르몬이 감소하면 골밀도와 근육량의 감소로 인해 여러 관절의 통증, 협착증이나 디스크 같은 척추질환, 오십견이나 회전근개 파열 같은 인대 및 근육 질환이 잘 생긴다. 성적 호기심과 성욕이 줄어들고, 발기부전이나 조루 같은 성기능 이상이 생긴다. 전신 피로, 졸림, 의욕 저하, 두통, 우울증 같은 신경 관련 증상들이 나타난다. 콜레스테롤 대사에 영향이 생겨 심장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는 HDL(고밀도 콜레스테롤=좋은 콜레스테롤)이 감소하여 심장질환이 잘 생긴다.대개는 각 증상에 따라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호전이 된다. 다만, 우울증의 경우는 좀 다르다.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사회 통념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 갱년기 우울증은 자살이나 충동적인 행동 등의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기 쉬워 아주 위험하며, 의욕이 저하되어 건강관리를 잘 하지 않으므로 각종 질병에 걸리기 쉬워진다.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우울함이나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게 좋다. 즐거움을 느끼는 활동을 하면 뇌에서 긴장할 때 나오는 에피네프린 등의 호르몬 분비가 줄고, 세로토닌이 늘어나 갱년기로 인한 우울감이 완화된다.양방에서는 최근들어 알약, 주사제, 경피제 등의 형태로 남성호르몬 보충요법을 쓰고 있다.한방에는 남성호르몬과 밀접한 기관인 부신과 고환의 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 약재가 많다. 녹용 인삼 구기자 토사자 등을 사용하여 체질과 증상에 따라 다양한 처방을 사용하고 있다. 효과는 수천 년에 걸쳐 검증되어 있다.갱년기를 거치면서 여성은 점점 남성화 되고, 남성은 점점 여성화 되는 경향이 있다. 젊은 시절 밖에서 많이 있었으니 중년부터 안에 많이 있다고 나쁠 것은 없다. 다만,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라야 한다. 몸과 마음 중 어디라도 문제가 생긴 것을 방치하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 그래야 바빴던 바깥양반에서 행복한 ‘안사람’이 될 수 있다.

2023-02-15

TK와 PK, 신공항 두고 다투는 건 어리석다

대구경북(TK) 통합신공항 건설 특별법 통과의 국회 첫 관문인 해당 상임위(국토교통위원회) 교통법안심사소위가 오늘(16일) 열린다. 특별법은 일단 법안소위를 통과해야 상임위 전체회의를 거쳐 본회의에 회부될 수 있다. 법안심사소위가 특별법 조기통과의 운명을 결정하는 셈이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그동안 신공항건설 실무진이 국회에 상주하며 법안소위 심사에 대비해왔다. 영남권 5개 광역단체장도 최근 한자리에 모여 TK·가덕도 신공항 조기 개항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시키기로 합의했다.법안소위 심사 단계에서 우려되는 부분은 국토위 야당 간사이자 법안소위 위원장을 맡은 부산출신 최인호 의원이 특별법 통과에 부정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홍준표 대구시장과도 SNS를 통해 설전을 벌인 적인 있는 최 의원은 TK신공항의 중추공항 표현, 활주로 길이, 국가재정 지원, 공항개항 시기 등을 문제삼고 있다.최 의원은 지난 14일 특별법 통과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국회를 찾은 강민구·임미애 민주당 대구·경북 시도당 위원장에게도 “TK신공항 건설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여러 문제가 담긴 특별법 조항 수정과 삭제 없이는 소위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재차 못 박은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대구경북 정치권에서는 법안소위에서 합의를 이끌어 내 특별법을 이달 내에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홍준표 대구시장이 최근 “최 의원이 허욕을 부리면 두 공항 모두 어려워진다”고 말했듯이, TK신공항 건설이 좌초된다고 해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 밀양신공항과 가덕도 신공항을 놓고 영남권이 분열돼 갈등을 빚다 모두 무산된 전례도 있다. 수도권에 모든 국가자원을 뺏기고 있는 비수도권 지방자치단체는 서로 협력해서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정치적 득실을 따져 갈등을 유발하는 행위는 어리석다.

2023-02-15

대학이 바뀌어야 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폭풍전야. 대학교육은 폭풍을 앞에 두고도 변하지 않는다. 타성과 관성에 젖어 구태와 구습을 반복하면서 개혁과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 급격한 인구감소는 대학정원을 채우기에도 힘들 시간을 예고했지만, 대학들은 교육부의 지원에 기댄 채 아무런 변화를 불러내지 않는다. 유초중등 공교육이 기른 학생들을 받아 책임있는 고등교육을 이어가야 하는데, 대학은 정원의 위기와 재정의 어려움 앞에 내실있는 교육을 일으키지 못한다. 교육부장관이 제안하는 대학교육 개선방안에도 ‘교육’보다는 ‘재정’에 높은 우선순위가 놓여 있다. 대학설립과 운영을 위해 정해진 재정적 요건을 완화하거나 대학기본역량 진단을 폐기하여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생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돈 문제만 해결되면 대학교육이 제대로 될까.대학은 시대를 읽어야 한다. 디지털과 온라인은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대세가 되었다. 인공지능은 챗GPT로 이어지면서 교육현장을 거세게 흔들 모양이다. 지난 세기를 휘몰았던 이념경쟁이 물러가고 실리 위주의 국제관계 형성이 글로벌 트렌드가 되었다. 대학교육을 20대 초반에 마치고 평생을 사는 교육 모델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기술과 지식의 수명도 예전같지 않다. 인성의 기본을 다지는 유초중등 교육과는 다르게, 대학교육은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대학개혁을 진정으로 겨냥한다면, 대학교육의 본질과 내용을 다시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대학은 각자 차별화와 특성화에 나서야 한다. 모든 대학에 모든 전공과 학과가 존재하는 ‘백화점식 대학교육’은 수명을 다했다.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며 모두 서서히 가라앉는 방식은 버려야 한다. 대학마다 독특한 연구와 색다른 융합을 통하여 각자의 존립이유를 밝혀야 한다. 특정한 대학에 진학하는 특별한 까닭을 학생이 찾아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학이름이 출세를 위한 간판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학에서 익히는 전문지식이 삶을 이어가는 데 끊임없이 힘이 되는 ‘지속적인 전문교육의 장’으로 대학을 바꾸어야 한다.대학은 내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을 겨우 따라잡는 교육은 대학교육이 아니다. 내일을 성큼 앞당겨야 하고, 미래를 먼저 조망해야 하며, 오늘 보이지 않는 사조를 이끌어야 한다. 실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하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열하게 겨루기 위하여 토론이 일어나야 한다. 어제는 없었던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대학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래지평을 향한 특별한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는 대학은 사라져야 한다. 다짐과 각오가 분명하지 않는 대학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대학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변화와 혁신을 위한 분석과 통찰이 있어야 한다. 공교육이 아무리 애를 써도 대학교육이 매듭을 잘 지어야 한다. 공교육과의 연계성을 잘 살려야 하고, 사람의 일생에 멋진 다리를 놓아주어야 한다. 사람이 평생을 거는 대학이 되어야 한다. 대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3-02-15

포스코·시민단체 간 갈등, 지혜롭게 풀어가야

포스코홀딩스 본사와 미래기술연구소의 포항 이전을 둘러싼 포스코측과 시민단체간 갈등이 재연되는 양상이다. 지난 14일 포스코지주사 본사·미래기술연구소 포항이전범시민대책위는 서울 용산 대통령실과 서울 포스코센터 등에서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상경 집회를 했다.범대위는 “주총을 앞둔 포스코가 포스코지주사 본사를 이전하면서 주소만 옮기는 것은 포항시민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며 “조직과 인력 등이 포함된 실질적 이전을 해야 한다”며 최정우 홀딩스 회장의 퇴진 등을 요구했다.포스코홀딩스 본사 이전을 둘러싼 시민단체와 포스코간의 갈등은 작년 1월 포스코가 지주회사 전환을 선언하고 포스코홀딩스 본사를 서울에 두기로 하면서 촉발됐다. 여러 차례 시민단체의 집회와 논란 끝에 지주사 본사의 포항이전에 합의됐지만 조직과 인력이 수반되는 본사 이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포스코측은 최근 주총을 앞두고 지주사 이전과 관련, 지주사 본사 이전과 미래연구소 본원 이전 그리고 포항지역 투자사업 확대 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지주사 인력과 조직은 이미 서울자원으로 충원돼 있고 법무, 금융, 대관, 기획 등 업무 특성상 서울에 잔류해야 할 일이 많다고 밝혔던 것이다.특히 시민단체가 기업의 인력과 조직 배치까지 요구하는 것은 경영에 개입하는 것과 같으며 기업가치 훼손, 기업 경쟁력 저하 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다.문제는 시민단체와의 갈등이 소모전 양상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면 지역경제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 다수도 갈등이 확산되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해법을 찾길 바란다. 포스코와 포항시는 반세기 이상을 상생관계로 맺어온 사이다. 최근 포항은 철강산업에 이어 이차전지 특구를 노리는 등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포스코 지주사 본사 이전을 계기로 서울과 포항간 교류 폭을 더 넓히고 포스코의 지역 투자 확대를 통해 지주사 본사 이전의 효과를 얻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갈등 해소에 지역사회가 공동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2023-02-15

대구 중앙로역 기억공간

홍석봉 대구지사장 ‘여기는 기억공간입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지하철화재 참사로 192명의 사망자와 151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고현장입니다. 우리는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고 추모하는 시민추모벽인 이곳을 기억공간이라 부릅니다.’18일은 대구지하철 참사 20주기를 맞는 날이다. 대구 중앙로역 지하 2층 ‘기억공간’ 추모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참사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검게 그을린 벽과 애잔한 추모 글이 추모객들을 맞는다. 아이들의 추모 포스터와 글이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다. ‘얼마나 아팠을까 20년 전 ‘그 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가 더 안전한 세상을 기대합니다’라는 추모글이 가슴을 적신다.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 유가족과 추모위원회는 참사 20주기를 앞두고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제대로 된 추모사업 추진을 대구시에 촉구했다. 이들은 참사 발생 6년 만에 조성된 추모공원은 시민 안전 테마파크로, 희생자 192명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은 안전 조형물로 불리며, 희생자 32구가 안치된 추모묘역에는 안내판 하나 없다고 했다.올해도 추모문화제와 추모식 등 행사가 마련됐다. 하지만 유족들은 20년 세월도 무심하게 당시의 아픔을 곱씹고 기억공간에서 신기루를 잡으며 배회한다. 참사를 기억해야 할 공간이 오히려 참사의 기억을 지우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는 유가족들의 지적이 귀에 따갑다.아직도 귀에 생생한, 희생자 가족들의 울부짖음. 대구는 2월만 되면 지하철 참사를 되새기며 가슴앓이를 한다. 기억공간 한 켠에 적힌 글이다. ‘고운님들이여! 생명의 별 밭에서 편히 쉬소서’/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2-15

야당이 발목잡고 있는 지역균형발전 정책

경북매일신문을 비롯한 지역언론사 대표로 구성돼 있는 한국지방신문협회와 대한민국지방신문협의회가 그저께(13일) ‘지방자치분권·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의 신속한 입법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언론사 대표들은 공동성명서에서 “특별법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않는 가운데 입법이 장기화 조짐을 보임에 따라,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는 지방의 어려운 현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조속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정부는 지난해 9월 14일 ‘지방자치’와 ‘국가균형발전’을 총괄하는 ‘지방시대위원회’ 발족을 위해 특별법안을 입법예고했다.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우동기 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전 대구가톨릭대 총장)이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법안에 명시된 국정과제를 총괄하게 된다. 정부는 당초 시행령 개정을 통해 지방시대위원회를 지난 연말 출범시킬 예정이었지만, 다른 법률과의 충돌 우려가 제기되면서 새로운 특별법 제정으로 방향을 틀었다.현재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지방시대 개막을 위해 특별법 처리를 서두르고 있지만, 민주당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태다. 최근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국가균형발전특위를 새롭게 출범시킨 민주당은 “정부가 제출한 법이 미비하다. 대안 법안을 발의하겠다”는 입장이다.정치권은 지금 비수도권이 직면하고 있는 인구소멸 위기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도는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성명서에서도 밝혔듯이, 인구의 50%와 대기업 본사(계열사 포함)의 75%가 수도권에 집중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일자리와 소득, 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으니 지방은 소멸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처하려면 응급조치가 필요하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담당하는 조직을 신속하게 정비해서 현 정부가 발표한 지방시대 정책을 하루빨리 시행해야 한다. 비수도권 지방자치단체의 인구소멸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여야의 정치 논쟁과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2023-02-14

경찰관이 보이스 피싱 범죄에 가담하다니

보이스 피싱은 주로 금융기관이나 유명상거래 업체를 사칭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의 금융정보를 빼내 범죄에 사용하는 전화금융 사기다. 2006년도에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해 해마다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 수법도 날로 교묘해져 좀처럼 사기 피해가 줄지 않는다. 2021년에는 피해 범죄건수가 3만982건에 달했고, 피해액이 무려 7천744억원에 이르렀다. 흔히 우리는 주변에서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한번 당한 사람은 평생 모은 돈을 일순간에 잃게 돼 한 가정이 무너지는 불행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피해자가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10여 년 동안 일어난 보이스 피싱 범죄 폐해는 실로 막중하다.그러나 금융당국의 지속적 홍보와 검경의 집중 단속으로 작년부터 피해가 조금씩 주나 수법이 다양하고 교묘해 아직은 발본색원될 단계는 아니다.이런 사기범죄에 경찰이 가담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범인을 잡아야 할 경찰이 되레 보이스 피싱 범죄에 가담하고 또다른 경찰은 그의 범죄를 은익하는 일까지 벌였다 하니 놀랍다.대구지검 형사1부는 전화금융 사기에 가담한 경북경찰청 소속 경찰관 A씨를 구속 기소하고, 또 그의 혐의를 무마하려 한 안산단원경찰서 소속 경찰관 B씨를 직무유기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실망을 넘어 경찰에 대한 불신이 더 커졌다. 경찰이 어떻게 고질적인 사기범죄에 연루됐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개탄의 목소리도 나온다. 경찰관의 기강해이를 떠나 경찰관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행위로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최근 부산에서는 추위를 피해 지구대를 찾아온 할머니를 내쫓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찰이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경찰관 한 사람의 잘못이 경찰 전체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경우다. 아직 우리 주변에는 민중의 지팡이로서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선 경찰관이 많다. 다수 경찰의 명예에 피해가 가지 않게 일벌백계로 경찰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2023-02-14

대통령 안 부러운 시장·도지사 시대 열리나

심충택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주말(10일) 주재한 중앙지방협력회의에서 6개분야 57개의 ‘중앙권한 지방이양 과제’를 발표했다. 국무조정실이 작년 7월부터 TF를 꾸려 정부부처간, 광역단체간 협의를 통해 ‘지방이양이 가능한 규제’를 발굴한 내용이다. 정부는 대통령이 발표한 과제 이행을 위해 관계법령 개정을 신속히 추진하고, 법령개정 없이 가능한 조치들은 즉시 추진하기로 했다. 후속조치는 대통령소속 지방시대위원회(위원장은 우동기 국가균형발전위원장 내정)가 출범하면 엄격하게 관리해 나간다는 방침이다.‘중앙권한 지방이양’은 윤 대통령이 대선후보시절부터 약속한 ‘지방시대 개막’을 실질적으로 이행하는 조치여서 무엇보다 반갑다. 예산과 조직, 인력을 앞으로 지방정부에 어떻게 배분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지난 10일 발표한 내용은 혁신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양과제들이 국회 문턱을 넘어 그대로 실천되면 광역단체장들은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 권한을 가지게 된다. 지난 1995년 민선 단체장시대가 열린 이후 비수도권 지방정부는 중앙권한의 지방이양을 줄기차게 주문해왔다.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주요 권한이양 내용을 보면, 앞으로 광역단체장은 100만㎡(약 30만평)까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을 해제할 수 있다. 수도권은 제외된다. 교육 분야의 경우, 지역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 권한도 이양된다. 지금까지는 재정 지원 사업을 할 때 교육부가 직접 대학을 선정하고 지자체는 컨소시엄 등을 통해 간접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수도권 공립대학의 정원이나 학과 조정은 교육부 장관의 사전 승인이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총 입학 정원 범위에서 자율 조정 후 교육부에 사후 보고만 하도록 했다. 다른 골프장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대중형 골프장’ 지정 권한도 시·도로 이양된다.다만, 이러한 권한이양이 ‘혁신적 발상’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전제돼야 할 숙제가 많다. 우선 광역단체장에게 이양되는 각종 인·허가권이 실질적인 효력을 내려면, 재정과 조직, 인력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 제주도를 예로 들면 특별자치도 출범 이후 수많은 정부 권한을 이양받았지만, 관련 예산과 인력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해 지방재정이 갈수록 쪼들린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중앙정부에서 권한만 이양하고 관련 예산·인력 지원에 인색할 경우, 윤석열 정부가 선언한 지방시대는 제주도처럼‘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 특히 지역대학 재정지원 권한을 이양할 때 중앙정부의 예산지원 방안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으면, 재정지원 규모가 지금보다 줄어들 소지도 있다. 그린벨트 해제나 대중골프장 인허가 같이 자칫 이권개입 논란이 일 수 있는 분야는 세심한 예방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광역단체의 전문적인 역량도 고민이다. 정부부처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해왔던 업무들을 시·도의 공직시스템에서 다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중앙정부의 권한이양이 지역균형발전과 실질적으로 연결되려면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되겠지만, 권한이양에 앞서 미비점이나 리스크, 타당성 등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2023-02-14

만 70세

우정구 논설위원 나이 칠십을 고희(古稀)라 부른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곡강시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따온 표현이다. 평균 수명이 길지 않던 시대에는 61세가 되면 환갑잔치를 벌이며 장수를 축하했다. 평균 수명이 80세가 넘어선 지금 세대에서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학문의 심화된 과정을 술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살에 섰으며 마흔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를 넘지 않았다”고 했다(논어 위정편).공자가 말하는 칠십은 종심(從心)의 경지다. 이 나이가 되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도 틀리는 일이 없었다는 것인데, 인생의 최고 경지를 두고 한 말이다.102세의 김형석 교수는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60세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65∼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고 그 나이가 됐어야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나이를 바라보는 세대관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건강 장수인구가 늘어난 탓이다.대구시가 70세를 기준으로 도시철도와 시내버스 무임승차 연령을 조정키로 하면서 노인 무료승차 연령 상향 논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지자체에 따라 시행 시기와 방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머지않아 70세가 노인 기준의 대세가 될 전망이다.칠십 나이까지 사는 사람이 드물어 고희라 불렀던 만 70이 이제는 노인 시작점이 되었으니 60대 노인이란 말은 사라져도 될 것 같다. 본격적인 장수시대가 열린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2-14

패러다임의 전환:디지털 트윈 그리고 미래항공모빌리티

김정현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 고등학생 시절, 첫 해외여행을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창문 밖으로 보이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때의 감격은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 같다. 거대한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모습, 활주로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비행기들, 무엇보다도 커다란 소음을 내며 이륙하는 비행기의 모습에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던 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당시에 “비행기 뿐만 아니라 자동차가 하늘을 날 수 있다면?”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그 엉뚱했던 상상이 20년이 지난 지금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2019년 우버(Uber)가 지상교통 혼잡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교통수단인 도심항공모빌리티(Urban Air Mobility·UAM)사업모델을 처음으로 제시한 이후 2023년 현재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미래항공모빌리티(Advanced Air Mobility·AAM) 관련 새로운 시장들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현대자동차, 한화시스템, 대한항공 등이 경쟁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영화 혹은 공상과학 소설을 통해 상상했던 것들이 교통 수단의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 실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뒤에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그리고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관련 기술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기술이 바로‘디지털 트윈’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디지털 트윈이란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상황들을 컴퓨터가 운영하는 환경에 그대로 모사함에 따라 실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을 컴퓨터환경에서 테스트하여 해당 현상에 따른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경우에는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하여 우주와 유사한 환경을 구축함에 따라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에 직접 가지 않고 관련 시스템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지멘스(Siemens)의 경우에도 실제 운영하고 있는 공장을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함에 따라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트윈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을 컴퓨터가 운영하는 환경에서 실험하여 해당 상황과 관련된 현상들을 미리 구현해보고 결과들을 미리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빅데이터, 인공지능, 그리고 디지털 트윈 관련 기술들은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많은 부분들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과거 설 연휴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에 탑승하며 반드시 챙겨야만 했던 종이 지도는 현재 휴대폰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며 더 나아가 목적지까지의 최단 거리와 같은 운행 정보에 대해서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903년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의 성공적인 비행처럼 120년이 지난 오늘 가까운 미래에 대한민국 상공에서의 AAM의 성공적인 비행을 그려본다.

2023-02-14

1표 차이의 의미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추위가 누그러진 탓일까? 간간이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비가 멎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달갑잖은 미세먼지가 나타난다. 코로나의 지겨움은 조금씩 사라지는 듯하지만, 물가상승과 경기불황, 정국 경색이 미세먼지마냥 희끄무레 감돌면서 칙칙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나날이다. 거기에 안개까지 더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지난 주말 안동으로 가는 길은 안개 속의 유영같았다. 흐릿한 날씨에 엷거나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감싸고,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원근의 풍경은 늦겨울의 수묵화마냥 담담하게 펼쳐졌다. 안동지역에 있는 두 개 큰 댐의 영향인지 한낮이 다 돼 가는데도 좀처럼 안개가 가시질 않았다. 하필이면 안개 잦은 지역에서 안개낀 날의 회동 탓인지, 안동에서 열리는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 제28대 임원선거를 앞두고 자욱하게 낀 안개는 모종의 암시(?)를 하는 것 같았다. 경북도내 20개 시군지부에서 모여든 400여 명의 문인들이 치열한 이파전의 경선에 뛰어들어 정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상황에 놓인 것 같다고나 할까?경상북도문인협회는 한국문인협회 창립 이듬해인 1962년 2월 지회가 결성, 공식적으로 출범하여 유치환, 김춘수 등 한국문단의 걸출한 문인들이 초창기 지회장을 맡으면서 기반을 다져 올해로 61년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여 개 시·군지부와 시·시조·수필·소설·평론·희곡 등의 분과위원회를 두어 지역문학의 활성화와 창작활동의 증진으로 경북문학의 발전을 도모하고 한국문단의 대들보 같은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2년마다 열리는 정기총회에서 선출하는 지회장은 지역ㆍ관록을 고려해 추대하거나 후보자 간의 경선을 통해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임해 왔으며, 이번 제28대 임원선거는 초기부터 팽팽한 접전에 과열양상으로 치달아 역대 최다 회원이 참석할만큼 양 진영의 높은 관심과 뜨거운 의지를 드러냈다.과연 피 말리는 한판 승부였다. 한 표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하고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는 드라마틱한(?) 선거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검표과정만 5번 반복할 정도의 초접전에 일부 신입회원들의 선거권 미부여에 거친 항의, 투표권에 대한 모호한 정관 조항 등으로 고성이 오가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지역별 정서나 성향, 장르, 연령, 관점 등이 서로 다른 373명의 회원들을 애써 양분하기도 지난할텐데, 어떻게 극적인 한 표 차이로 갈라놓을 수 있는지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는 선거의 무서운(?) 힘이 아닐 수 없다.한 표 차이의 신승(辛勝)에서 경북문인협회의 새로운 미래가 보인다. 화갑(華甲)에 접어든 경북문협이 이번 선거에서 보인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열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가히 역대급이다. 경북문학관 건립 추진, 문예발전기금 확충 등 공약과 지상과제가 많겠지만, 한 표 차이의 의미를 되새겨 배려와 포용으로 상대 측을 아우르며 화합과 성숙으로 지속가능한 경북문협의 더 큰 성장과 발전을 도모해야할 것이다.

2023-02-14

과학이라는 타자

최근 OpenAI사에서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가 화제다. 독일의 통계 자료 사이트인 Statista에 따르면 ChatGPT는 공개 이후 100만 가입자를 확보하는 데에 단 5일이 걸렸다고 하며, 넷플릭스(3.5년), 트위터(2년), 페이스북(10개월), 인스타그램(2.5개월) 등에 비교해 ChatGPT를 둘러싼 대중의 관심은 지금껏 우리가 마주하지 못한 규모의 것이라 할 수 있다.그간 여러 유형의 대화형 인공지능, 특히 사용자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된 언어모델형 AI가 여러 유형이 있었음에도 ChatGPT가 화제가 되고 있는 까닭은 이 프로그램이 우리의 상식을 월등히 뛰어넘는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 가령 특정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 코드를 알려달라고 하면 ChatGPT는 이에 해당하는 코드는 실시간으로 알려주면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공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철학적 질문을 던지면 ChatGPT는 답변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추가적인 생각을 덧붙여 알려준다. 흡사, 모니터 너머에 지식의 신이라도 기거하고 있다는 듯.신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ChatGPT는 아직 완벽하진 않다. 인터넷 정보를 기반으로 질문자에 답변하며 학습해나가는 탓에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답변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분야의 질문에 대해서는 제한된 지식만을 갖추고 있어 적절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 조금 평가 절하를 해보자면, ChatGPT는 모든 지식을 갖춘 신이 결코 아니다. 다만 일반 포털 사이트의 정보 검색 능력이 고도로 강화된, 그리하여 신뢰도에 있어 기존의 포털 사이트의 검색 값과 신뢰도를 월등히 뛰어넘는 강화된 검색 엔진에 가깝다.그럼에도 ChatGPT로 인한 변화는 이미 우리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 사례를 말해보자면, 대학계에서는 ChatGPT를 활용한 과제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 중이다. 가령, ChatGPT를 이용해 만든 코딩 과제, 혹은 에세이 과제는 표절인가 아닌가. 이것이 표절이라면 어떤 대상을 표절한 것인가. ChatGPT를 이용한 과제물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가. 실제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는 이미 ChatGPT를 활용한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대학에서는 ChatGPT 활용을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공고를 한다.아마도 대학은 학생들의 ChatGPT를 비롯한 대화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활용을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 것이, 인터넷의 보편화 이후 학생들의 과제물 표절 문제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해x캠퍼스’를 비롯한 과제물 판매 사이트에서부터 각종 백과사전식 지식 제공 사이트에 이르기까지, 과제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 때문에 대학 역시 학생들의 표절 여부를 가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취하고 있으나, 그와 같은 접근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오히려 대학에서 ChatGPT를 비롯한 인공지능형 기술의 사용법을 학생들에게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대다수의 과제는 위키로 통칭되는 사전형 지식 사이트의 정보를 참고하고 있으며, 평가의 기준은 지식의 적확성이 아닌 그것을 활용하는 학생의 능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어떻게 ChatGPT의 활용을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기술의 윤리적 활용 방안에 대해서 말이다.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따라붙는다. 우리는 과연 ChatGPT의 답변을 100% 신뢰할 수 있을까. ChatGPT는 과연 인간과 다른 방식의 판단능력을 가진 과학이 만든 타자인가. 사람들이 ChatGPT가 내놓는 답변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ChatGPT의 성능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을 기다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예컨대, 나를 대신해 정답을 말해주고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내 생의 독재자 말이다. 대상에 대한 잘못된 가치평가는 잘못된 열광을 낳으며, 잘못된 열광은 늘 비극으로 끝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열광도, 금지도 아닌 대상에 대한 적확한 지식이다.과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과학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인공지능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재고하는 것, 그것이 가장 시급하다. 인공지능은 당신의 삶을 인도할 대타자가 아니라 다만 도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3-02-14

어떤 이별

관계 맺음에 관해 생각하는 요즘이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에 더욱 안정감을 느낀다.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 책 읽는 것을 즐기고 사람들로 꽉 찬 공간에 홀로 놓이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둘러싼 배경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고독은 빨리 찾아온다. 쓸쓸한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면 이상하리만치 기묘한 평온함이 느껴지고 그런 상태야말로 가장 나다운 지점이라고 여기고 있다.동시에 나는 사람과 사랑을 믿는다. 누군가를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킬킬대는 순간 역시 소중한 일상 중 하나다. 부끄러움 없이 마음을 내놓으면 되돌아오는 진심에 위로받는다. 내가 힘들 때 중요한 부분을 붙들어주는 것도 타인이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마음속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관계를 맺을 때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기대되는 면도 있다. 삼십 대에 접어들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관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도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학생들이야말로 위태로웠던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준 특별한 관계다.처음 학교에 발을 디뎠던 날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눈동자, 그 천진한 호기심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내 안의 모자람을 모조리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학생들이 무심히 뱉는 사사로운 말이 비수처럼 꽂혀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고 사소한 순간에도 쉽게 주눅 들었다. 나는 더욱 기민하게 나를 의식하게 됐다. 그 난처함을 눈치챘던 것일까. 학생들은 나의 시시한 오답도 정답으로 믿었고 최선을 다하여 무한한 사랑을 건넸다.어느 날 한 학생이 물었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언제였냐고. 골똘히 고민하다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다 어쩌면 지금이 후회로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예하게 삶을 바라봤다면 좀 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면 뭔가가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선생이 해줄 수 있는 유의미한 조언이 될 것이었다. 비단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 앞에서 현명하지 못했던 일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나는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무해한 역할도 꿈꿨다. 그러나 선생은 좋은 말만 건넬 수 없고 맹목적인 낙관만을 외칠 수도 없었다. 현실은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끝끝내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던가.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못 되었으니까. 계속해서 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저 거들먹거리고 있는 건 아니냐고. 그로 인해 어떤 우월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리하여 어느덧 2월. 바로 엊그제가 졸업식이었다. 학교에 와서 처음 만났던 친구들이 삼 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떠나는 날이었다. 열일곱 고등학생이 스무 살이 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모두의 얼굴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당연하게 지속될 줄만 알았던 우리의 시간에 안녕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이제 졸업생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만의 보폭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살면서 여러 관계를 맺고 다양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가끔은 아프거나 무너지는 일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건 가르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었으니까. 그로 인해 더욱 단단해졌으니까.내가 아닌 타인의 미래를 간절히 그려본 적이 있던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글을 통해 타인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고 이름 붙여지기 힘든 모종의 감정을 나누었다. 그건 처음 만나는 형태의 우정이었다. 마음을 다했으므로 어떤 후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더 크고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더 많았다. 미련처럼 맺혀있는 마음을 졸업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갈무리했다.떠남으로 완성되는 관계가 있다. 헤어지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은 종결되었다. 어떤 이별은 만남보다 더 큰 설렘을 남긴다. 함께 나눴던 일들을 가슴에 품고 다가올 내일을 상상하는 일. 그것을 떠올리면 그제야 우리가 한 뼘 자란 것처럼 느껴진다.

2023-02-14

존재하지 않는 MZ세대와 소통하는 법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MZ세대는 없다. 없지만 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겠지만 사실이다.‘MZ세대’라는 용어는 ‘베이비붐 세대’나 ‘386세대’처럼 사회학적으로 규정된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MZ세대는 “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거의 20년에 달하는 시기를 하나의 세대로 묶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몇 년 전, 청년론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가 ‘MZ-generation(MZ세대)’이라는 항목 자체가 영문 위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언론매체나 공론장에서도 몇 년 전까지는 MZ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MZ세대’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이 처음으로 출간된 것이 2018년 말이다. 그것도 사회과학서적이 아니라 마케팅과 트렌드를 내세운 책이었다. 즉, MZ세대라는 개념은 M과 Z를 결합한 거대한 취향 공동체, 즉 소비 집단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만들어진 상업적 용어인 셈이다.그렇다고 해서 MZ세대라는 규정 자체가 무의미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김춘수‘꽃’ 중에서)고 노래했듯, 언어는 강력한 규정력을 갖는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신구세대의 갈등은 더 이상 ‘세대갈등’이라는 용어에 담지 못할 만큼 커지고 있다. 다만, 우리 사회의 게으름과 낡은 관성은 그 모든 갈등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고 해결하는 대신, 시끄러운 것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MZ세대라는 더 큰 상자에 담아버리고 ‘취급주의’ 표지를 붙인 채 방치해둔 것이다.MZ세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그들을 MZ세대라고 부르는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기성세대가 마음대로 ‘나’를 MZ세대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끼워 넣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가 포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포항시 주최로 미혼 남녀를 짝지어 주는 데이트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를 받은 적이 있다. 인구유출에 대한 지역사회와 지자체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청년에 대한 이러한 보수적 이해와 접근이 그들로 하여금 지역을 떠나게 하는 원인 중 하나는 아닐까. 지자체가 나서서 데이트 모임을 주최하기 전에 그들이 왜 연애와 결혼을 꺼리는지, 왜 학교를 졸업하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를 지역사회가 함께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만약 당신이 MZ세대와 소통하기 바라는 기성세대라면 그들에게서 MZ세대라는 타이틀을 떼어 버리고 그냥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는 연습부터 해 보자. 당신의 직원이, 부하가, 자녀가 무언가에 서툴다면 그것은 MZ세대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일이 서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예의와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관습과 예의가 유통기간을 지나 상해버린 것은 아닐지 고민해 보시길.

2023-02-13

일자리가 최선의 복지다

김규인 수필가 우리나라는 출생률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다. 빠른 속도로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데 이를 뒷받침할 젊은 세대는 줄어든다. 그런 가운데 젊은이들의 일자리 공급에 가려 노인들의 일자리 문제는 뒷전이다. 일할 사람이 모자라 정년 연장을 꺼내자니 젊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중소기업에서 일할 사람의 부족은 심각하다.지금의 노인들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힘든 시기를 살아왔다.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고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부모를 모시고도 자신은 자녀로부터 부양도 받지 못한다. 본인들의 노후를 준비하지도 못한 채 가정과 사회에서 어른으로서 지위도 흔들린다.공적연금과 기초연금 예산은 늘었지만, 정부의 긴축정책에 따라 노인 일자리 예산은 줄었다. 하지만 노인 일자리 예산은 큰 틀에서 결정할 필요가 있다. 사회 기여 측면에서 공공형 노인 일자리의 긍정적 효과는 무시할 수가 없다. 낮은 임금으로 쓰레기 분리수거, 공원 청소, 주차관리 같은 소소한 일을 노인들의 노동으로 메운다.공공일자리의 역할을 생각할 때 쉽게 예산을 줄여서는 안 된다. 노인들이 어슬렁거리며 하는 시답잖은 일이라고 치부하며 생산성의 잣대로만 가치를 판단하면 안 된다. 공공일자리는 투자한 돈 이상으로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이 강하다.노년의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외로움이 크다.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버는 27만 원은 우리 사회에서 27만 원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추운 날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먹을 수도 있고 난방을 하여 노인의 차가운 몸을 녹이는 돈이 되고, 추운 겨울을 나게 하는 소중한 생명의 끈이 된다.일하다 쉬는 시간에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얼굴 가득 웃음이 돌고 몸에 활기가 넘친다. 일하다 쉬는 휴식으로 삶에 리듬을 타고, 사람과의 관계가 이어지며 삶에 핏기가 돈다. 이러한 가운데 외로움은 남의 일이 된다. 봄철의 새싹처럼 몸에 생기가 돌고 삶의 만족도는 높아진다.일거리가 없어 몸을 쓰지 않으면 굳는다. 쓰지 않는 몸은 이내 병이 나고 드러눕게 되고 병원의 장기 입원자가 된다. 장기 입원 환자에게 국가가 부담하는 돈은 27만 원 이상이다. 건강보험공단의 돈주머니는 고삐가 풀려 어느 틈에 적자로 돌아선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지금 나이 든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일이다.나이 든 사람에게 최선의 복지는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 일자리는 홀로 사는 감옥 같은 집에서 탈출시켜 주는 열쇠요 삶의 소중함을 맛보게 하는 도구이다. 무기력함과 외로움 속에 살다가 병원비로 지원할 것인가 삶의 에너지로 지원할 것인가는 정부의 몫이다.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적은 돈으로 국민을 기쁘게 하는 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잠시만이라도 노인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말이다. 적은 돈으로 큰 효과를 얻는 것이 긴축 재정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는지.

2023-02-13

성찰하는 권력에 박수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전쟁 같은 정치’가 국민을 짜증나게 하고 있다. 집행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이나 입법권력을 가진 야당이나 하나같이 자기성찰은 없고 정적(政敵) 공격에만 혈안이다. 민생은 외면하고 ‘네 탓 공방’으로 날을 새고 있으니 ‘정치의 존재이유’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정치인들의 오만과 독선, 확증편향, 선택적 정의, 내로남불 행태는 전혀 변화가 없다. 여야가 바뀌었을 뿐, 권력은 자기성찰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권력은 ‘편견과 독선의 괴물’로 전락함으로써 정치는 국민에게 ‘희망이 아니라 근심’이 되고 있다.이처럼 권력은 왜 성찰에 인색할까? 그 원인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성찰을 위한 전제는 ‘경청(傾聽)’이다. 타인의 고언(苦言)을 겸허히 듣고자 할 때 비로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은 커질수록 자기중심성이 강해짐으로써 타인의 충고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권력의 크기와 성찰의 가능성이 반비례’하는 까닭이다.한국정치의 고질병인 ‘내로남불’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성찰을 거부하면 ‘소신’이고, 상대가 성찰을 거부하면 ‘아집’이라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니 ‘내 탓은 없고 남 탓’만 하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탓하면서 적폐청산에 올인(all-in)했고,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을 탓하면서 새로운 적폐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내 탓이오’라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권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게다가 여야의 강성 지지자들, 즉 정치팬덤들의 극단적 행태도 권력의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 좌우의 팬덤들은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당 내부에서 제기되는 합리적 비판까지도 이적(利敵)행위로 몰아서 집단린치를 가하고 있다. ‘충신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내부비판을 막고 있으니 권력의 자체교정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이처럼 권력의 성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성찰 없는 권력은 국가적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주권자인 국민은 ‘엿과 채찍’으로서 정치인들의 성찰을 유도해야 한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권력의 표리부동(表裏不同)’에 속지 말고, 위선적 권력은 가차 없이 비판하고 성찰하는 권력은 격려해야 한다. 특히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권력에 직언하는 충신들, 그리고 정치팬덤들의 비열한 공격을 받고 있는 내부비판자들에게는 성원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반면에 성찰을 거부하는 오만한 권력은 미래가 없음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권력의 속성상 자기성찰은 쉽지 않기 때문에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 국민이 채찍을 들 수밖에 없다. 최선의 방법은 대선·총선·지선 등의 선거를 통해서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보다 자기성찰에 충실한 정당과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퇴행적이고 야만적인 한국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

2023-02-13

포항人材 양성할 ‘명문고 부활’ 가능할까

포항향토청년회(포항청년회)가 조만간 포항지역 고교평준화 제도개선 문제를 공론화할 방침이어서 시민여론의 향방이 주목된다. 박용선 포항청년회장(경북도의회 부의장)은 최근 “현재 경북도내에서는 포항이 유일하게 고교평준화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지역 명문고 부활을 위해 청년회가 나서서 제도개선에 대한 시민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고교평준화 제도개선 결정권한은 경북도교육청에 있다. 지난 1979년 창립된 포항청년회는 40·50대 오피니언 리더 600여 명으로 구성돼 있다. 포항청년회가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경북도내 주요 고교의 대학입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 평균 합격률이 경주고 23.46%, 안동고 17.07%, 구미고 13.14%, 구미여고 10.44% 순으로 나타났다. 과거 경북도내 최고 명문고라는 소리를 듣던 포항고(9.23%)와 포항여고(8.62%)는 겨우 5·6위에 랭크되는 정도였다. 포항청년회는 포항지역 고교생의 학력하향 현상은 고교평준화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개선하려면 시민들을 대상으로 비평준화제도 회귀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는 절차가 꼭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사실 포항지역 고교평준화제도 개선문제는 어제오늘 제기된 현안이 아니다. 포항지역 교육계와 시민들 사이에서는 ‘고교평준화가 인재양성을 막아 인구유출 등 포항을 내리막길로 모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이번에 포항청년회가 중심이 돼 다소간의 진통을 감수하고라도 고교평준화의 명암을 공개적인 테이블에 올려놓고 분석해 보기로 한 것은 시의적절해 보인다.포항의 경우, 지난 2008년부터 경북도내에서 유일하게 고교평준화 제도를 도입해 현재까지 시행 15년째를 맞고 있다. 고교평준화 이후의 학력저하 현상은 비수도권 도시가 공통으로 겪는 문제다. 포항청년회가 이러한 지역문제를 열린 공론에 붙여 포항지역 청년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는 일에 포항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2023-02-13

우산고로쇠

홍석봉 대구지사장 ‘신비의 물’로 불리는 울릉도의 ‘우산고로쇠 수액’이 본격 출하되기 시작했다.요즘 고로쇠 수액 채취시기를 맞아 울릉도의 해발 400~700m 산 중턱의 눈 더미 속에서 주민들의 고로쇠 수액 채취 손길이 분주하다. 해마다 경칩전후인 2월 말∼3월 중순에 채취한다. 우산고로쇠 수액은 청정지역에서 생산돼 깨끗하고 맛도 으뜸으로 평가받는다.높은 당도와 산삼(사포닌)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우산고로쇠 나무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생, 100% 국산 유전인자를 가진 울릉도 토종 단풍나무과 활엽수다. 울릉도의 옛 지명인 우산국 이름을 따왔다. 산림청의 지리적 표시 임산물 제40호로 등록돼 있다.우산고로쇠 수액에는 시판 생수에 비해 칼슘은 약 40배, 마그네슘은 약 30배 높아 건강에 좋다고 한다. 아미노산, 비타민C, 미네랄 등 여러 가지 무기성분도 다량 함유하고 있다. 고로쇠 수액은 산후조리, 숙취제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노폐물 제거 및 신진대사 촉진 등과 비뇨, 변비, 류머티스, 관절염, 위장병, 신경통, 피부미용에도 효험이 있다. 신장병, 이뇨작용에도 효과가 크다고 한다. 냉장 보관하면 한 달 정도는 간다. 고로쇠는 ‘뼈에 좋은 물’이라는 뜻의 ‘골리수(骨利樹)’가 바뀐 말이라고 한다.우산고로쇠 수액으로 장을 담그면 일반 된장보다 뒷맛이 구수하고 개운해 장담그기용으로도 인기다. 울릉군은 해마다 우산고로쇠 수액으로 된장을 만들어 소외된 이웃에 전달하는 사랑의 장담그기 행사도 갖는다. 각종 쇼핑몰 등에서 판매해 요즘은 육지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우산고로쇠는 주민 건강을 챙기고 소득 증대에도 일조하는 효자나무가 됐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2-13

대구시 위기가구 대책… 복지 안전판 되길

대구시가 전국 최초로 지역특화형 복지위기가구 지원시스템을 구축해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한다. 복지가 잘되는 도시가 선진도시라는 점에서 대구시의 지역특화형 복지제도에 대한 관심이 쏠린다.대구시가 시도한 복지위기가구 지원시스템은 전기, 가스, 수도료 등을 2개월 이상 연체한 가구를 대상으로 정밀 조사한 후 지원 여부를 가리는 제도다.단전, 단수, 단가스 위기에 놓인 취약계층을 초기단계에서 신속히 발굴 지원할 수 있다. 기존 보건복지부 제공의 시스템보다 2∼5개월 가량 빨리 위기의심가구를 찾아낼 수 있어 복지 사각지대 안전판 마련에 큰 도움이 될 거라 한다.대구시는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간 조사를 벌여 최근 전기, 가스, 수도료 등을 2개월 이상 연체한 위기의심가구 7천238가구를 찾아냈다. 이 중 3천50가구에 대한 정밀조사를 끝내고 그 중 963가구에 대해서는 기초생활수급, 긴급복지 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4천188가구에 대한 조사도 곧 진행할 예정이라 한다.3년간 이어진 코로나 사태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정도 늘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료급식소를 배회하거나 생활고에 시달려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대구시가 선제적으로 위기가구 발굴에 나서고 있지만 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가구도 여전히 많다. 빈곤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수원 세모녀 사건과 같은 비극적 종말을 초래할 수 있다. 생활고를 비난해 극한 선택을 한 사례가 그동안 여러 차례 발생했다. 아직도 복지 사각지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위기 가구에 대한 이웃의 관심도 필요하지만 자치단체가 찾아가는 복지 정책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지방자치단체 존립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대구시의 지역특화형 복지 위기가구 지원서비스가 더 많은 성과를 내길 바란다. 또 대구시의 이같은 복지제도가 취약계층에게 희망이 되고 복지 선도도시가 되는 계기가 되면 더 좋다.

2023-02-13

의성 조문국(召文國), 옛 영광은 잠들어

삶을 이어가는 지역의 공간은 그 지역을 살아가는 지역민에게 주요한 관심사다. 사람들은 시간의 축적에 따른 잠재력, 공간적 위치, 주변과의 관계성, 역사적 사실, 민담이나 전설 등이 명징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의성 금성면에도 그 기대감을 드높인 전설이 전해진다. 삼한시대에 조문국이라는 커다란 왕국이 의성에서 번성했으며, 조문국 경덕왕릉(景德王陵)에 제를 지내면 가뭄을 해결해준다고 한다. 경덕왕릉에 얽힌 전설에서는 주로 꿈에 노인이 등장한다. 노인은 기이한 복식을 입고 나타나 옛 영광을 노래하거나 봉분의 관리에 대해 언질하거나 자신의 집 위에 있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를 조선 조정은 범상치 않게 여겨 의성 현령 이우신( 1670~ 1744)에게 고분을 정비하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게 하며 기우제나 향사를 국가가 주관토록 했다.의성 금성면에서의 전설은 조문국의 존재에 대한 신빙성과 관련되어 있다. 명덕리 비봉산에는 봉황이 날아올랐다는 이야기가, 백장령에는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게 100장의 그물을 쳤다는 이야기가, 오동산에는 봉황이 먹는 오동나무가 많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1960년 대리리·학미리·탑리리에서 5~6세기경 고분군 374여 기가 발굴되면서 이와 같은 조문국 전설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발견된 고분 중 100여 기는 경주 고분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특히나 새(봉황)의 깃털 모양 장식이 있는 금동관도 발굴되어 의성에 오랫동안 구전된 전설의 신빙성을 더욱 뒷받침하였다.의성은 동부의 산악지대를 제외하고 완만한 구릉과 곡저평야로 이뤄져 있어서 예로부터 영남의 곡창지대이자 경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삼한시대 사로국은 외부 세력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해 의성의 조문국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벌휴이사금 2년(서기 185년)에 조문국은 사로국에 복속된다. 이후 언제까지 조문국 왕실이 유지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화랑세기’에서 조문국의 왕녀 운모와 사로국의 김씨 왕실이 혈연으로 맺어져 신라의 진골 정통을 형성하였다고도 전해지지만 ‘화랑세기’는 정통 역사서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조문국의 기록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소략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금성면의 대규모 고분군은 옛 조문국의 장엄했던 영광을 짐작하게 한다.조문국 경덕왕릉에 지내던 기우제나 지역 향사는 조선때 국가향사가 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된다.이를 박규환이 1910년 개인적으로 제를 지내면서 그 명맥을 이어간다. 그러나 1919년 고종 승하에 곡을 하고 3·1 조문교회 만세운동을 주관하면서 고문으로 인한 병을 얻는다. 그는 당시 천석꾼인 신명환에게 향사를 이양한다. 신명환은 문화통치 시기의 정책에 맞춰 조문국 향사의 규모를 키우고 체계화하였다. 다만 경덕왕릉비를 세웠으나 비문에 일본의 연호가 기록되고, 조문국의 역사를 기록한 ‘미광’을 발간하였으나 조선식민지화를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는 등 당시의 일제 정책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60년 국립중앙박물관 주관으로 고분이 발굴되고, 1985년 경덕왕릉보존위원회로 이전되기까지 조문국 향사는 개인 중심의 향사에서 지역 중심의 향사로 천천히 변화하였다. 1988년 이후 적극적인 기록보존을 위한 노력-사료수집, 연구용역의탁, 간이전시실 운영 등의 의견 제시-으로 조문국에 대한 현대적 자료가 만들어진다. 현재는 의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향사가 이어지고 있다.의성 금성면 고분군에는 조문국사적지와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경덕왕릉을 중심으로 펼쳐진 조문국사적지에는 작약꽃단지·팔각정자·고분거님길·전시관 등이 있어 고분군 사이를 거닐 수 있으며, 길 건너 박물관에는 유물과 발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둥근 돌이 아닌 깨진 돌을 사용한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네모난 구멍이 많은 굽다리 토기, 새 깃털 모양 장식이 특징인 금동관모 등을 통해 조문국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했음을, 경주의 위세품 유물을 통해 사로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물관 옆에는 물놀이터와 지석묘·미로정원, 공룡놀이터가 마련되어 가족 단위의 여행객을 위한 여건도 마련되었다. 잘 갖춰진 숙박시설이나 캠핑장, 카페와 같은 인프라가 좀 더 구축되고, 문화공연과 연계된다면 더 많은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 같다.그러나 ‘여지도서’(1760)의 기록 “문소고을 과거사를 누구와 의론하랴/천년이 지난 오늘 경덕분만 남았도다/비봉곡조 없어지고 사람도 볼 수 없고/조문의 거문고 가버린 지금 그 소리도 묘연하다”처럼 의성은 현재 인구절벽에 가로막혀있다. 애써 지켜왔고 지금도 잘 지키고 있지만 조문국 향사와 같은 지역 문화를 이어받으려는 젊은층은 부족하기만 하다. 이는 비단 의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관광자원을 유치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여전히 의성의 옛 영광은 잠들어 조문국 꿈길 위를 벗어나지 못한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2-13

그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쓴다

바야흐로, AI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완승하고, 이세돌이 신의 한 수로 승리했던 드라마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인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조금은 더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AI는 현실 세계 바깥의 샌드박스 속에서 빠르게 발전하면서, 어느새 인류가 몇천 년의 시간을 들여 세워 올린 문명의 수준을 따라잡고 있다. 고작 몇 개의 단어만 입력하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수많은 일러스트 AI와 앨런 튜링이 제안했던 컴퓨터와 인간의 대화에서 자연스러움에 대한 튜링 테스트 같은 것은 이미 넘어버린 수준으로 대화하고 있는 chatGPT처럼, AI는 말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제 곧 음악을 만들고, 놀이를 하고, 생각을 할 것이다.인간 세계의 물리적인 시간 같은 것은 얼마든지 병렬 처리 프로세스를 통해 압축해버릴 수 있는 것이 디지털 세계의 시간이다 보니, AI가 인류 문명을 따라 잡는 속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빨라질 것이다. 소나 말이 끌지 않는데도, 굉음을 내며 스스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를 보았을 때의 압도적인 근대 문명의 충격만큼의 것이 우리를 덮치고 있는 셈이다.AI가 지배하는 미래 세계의 풍경은 이미 많은 작가들이 보여주었다. 그것들 대개는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따라잡는 세상을 희망찬 미래로 담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SF는 아직 열리지 않는 미래의 불확정적 영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가장 큰 동력으로 삼고 있기 마련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1932)에서 보여준 인간이 가진 감정이라는 잉여의 대상을 통제하는 소마(soma)라는 통제 시스템은 미래 문명에 대한 공포어린 시선으로 AI에 의해 초래될 세계에 대한 공포로 수렴된다.아이작 아시모프의 자율적인 의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기계인 ‘로봇’ 시리즈나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그리고 필립 K딕이 보여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알고리즘을 짜기 시작하는 기계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인류가 세워 올린 문명의 방향성을 문제 삼는 사춘기를 겪기 시작할 것이다. 사춘기를 겪고 나면 어엿하게 독립된 존재로서 그것은 세계 속에서 자기의 영역을 주장하고, 조만간 자신이 인간보다 기능적으로 나을 뿐만 아니라 더 힘이 센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하리라.AI의 도래가 가시화된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SF를 한 작품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neuromancer, 1984)’를 꼽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이버펑크(cyberpunk)를 대표하는 작가로, 필립 K. 딕 이후 가장 대표적인 SF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트릭스’라는 사이버스페이스 개념을 처음으로 소설 속에 구현해서 신체 교환된 포스트 휴먼이 디지털 네트워크와 실제 세계를 오가면서 겪는 모험담을 그려냈다. 주인공인 케이스는 피폐화된 세계 속에서 신체 교환과 약물 중독을 겪으면서, 자칫하면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 AI 윈터무트와 뉴로맨서가 주도하는 음모를 파헤쳐간다.이 소설은 마치 영웅의 서사시처럼 고난을 겪으며 이를 헤쳐나가는 구조를 띠고 있지만, 그에게 멘토는 실제의 사람이 아니라 매트릭스 속에 데이터로 업로드된 지금은 죽은 스페이스 카우보이이다. 자기에게 영향을 주는 AI의 존재를 알아내고서 이 소설의 주인공 케이스는 그와 맞서기보다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시스템의 주인은 불멸의 존재인 것이다. 감각 전이나 매트릭스 접속, 인격화된 AI 등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기술적 미래상은 수도 없이 많다. AI 계시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02-13

쪼개지면 망한다

김진국 고문 2000년 연말.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차기 권력’ 후보들의 정치 발언을 단속했다. 김 대통령은 그해 6월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을 했다. 12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1년 1월부터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받은 구제금융을 상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잘 달리던 그가 ‘차기’가 부상하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블랙홀’이었던 개헌처럼 ‘차기’라는 단어는 역대 대통령의 역린이었다.그런데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당적 이탈’을 언급했다. 노 장관의 정치 발언은 처음이 아니었다. 한광옥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노 장관을 불러 “제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는 김 대통령의 경고를 전달했다.그렇지만 질책받으러 호출됐다는 노 장관의 표정은 당당했다. 청와대 비서실을 여기저기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그때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여권 차기 주자로서 노 장관은 5~7번째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하며 합의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김영삼 당 대표는 ‘노란 봉투’를 던지고, 눈 덮인 지리산을 오르며, 노 대통령을 굴복시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현재 권력’과 동거했던 대표적 ‘미래 권력’이다.‘레임덕’이란 단어는 역대 정부에서 금기어였다. 그런데 집권 세력 안에서 ‘레임덕’과 ‘탈당’을 먼저 끄집어내는 건 의외다. 김기현 당 대표 후보의 후원 회장을 맡았던 신평 변호사는 ‘미래 권력’인 안철수 의원이 당 대표가 되면 윤석열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질 수 있고,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멘토라는 그의 발언은 당 대표 경선에 얼마나 목을 매는지를 말해준다. 그래도 너무 거칠다. 금도가 필요하다.차기 대권 도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당 대표가 된다고 바로 ‘미래 권력’이 되는 건 아니다. 차기 후보는 당 대표가 되기보다 훨씬 어렵다. 대통령이 지명해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스스로 존재감을 보여야 한다. 대통령제에서 임기 마지막까지 남는 과제가 정권 재창출이다. 정권이 넘어가면 5년 치적이 모두 뒤집힐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차기 후보에게 굴복하는 모양까지 연출했다. 그래도 ‘말 잘 듣는 후계자’는 환상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랬다.준비하지 않은 후보는 이기지 못한다. 임기 초반부터 ‘현재 권력’과 대립할 수는 없다. 하지만 후보가 될만한 사람의 손발을 모두 묶어 버리면 차기 경쟁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다. 자칫 정권을 넘겨줄 수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열린우리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한나라당의 이명박-박근혜 경선이 결선보다 더 치열했고, 정작 본선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문재인 대통령과 경선 이후 줄곧 ‘문빠’의 공격 대상이었다 후보가 되었지만 실패했다.물론 ‘현재 권력’이 실패하면 정권 재창출이 없다. IMF 사태가 벌어진 김영삼 정부, 집권당이 쪼개지고, 탄핵에 시달리고, 국론 분열됐던 노무현 정부 뒤에는 정권이 넘어갔다. 조그만 이견마저 ‘배신자’로 낙인찍고, 공천 파동이 벌어진 박근혜 정부도 결국 정권을 넘겨줬다. 바닥을 치는 ‘현재 정권’ 아래서는 정권을 재창출할 ‘미래 권력’도 없었다. 문제는 권력 주변 인사들이다. 현재 권력도, 미래 권력도 쪼개면 망한다. 현재 권력이라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쪼개지면 아무것도 못 한다.지지 정당을 쪼개놓고 당선될 미래 권력도 없다. 권력 주변 인사들은 다르다. 자리는 언제나 모자란다. 공직은 한정돼 있고, 지역구는 오히려 줄어든다. 앉힐 사람은 넘친다. 경쟁자를 줄일수록 자기 패거리 몫이 커진다. 당과 나라의 미래보다 패거리가 먹을 게 급하다. 이런 자들의 말에 현혹되면 현재 권력도, 미래 권력도 망하는 길로 간다. 집권당이 혼란하면 국민도 불행하다. 더이상 무리해선 안 된다. 전당대회 이후를 생각하면, 금도가 필요하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2-12

운동할 때 물, 어떻게 마셔야 할까?

박성률 트레이닝과학연구소장동국대 의과대학 연구초빙교수 “물을 마시고 운동을 하면 배가 아프다”, “운동 중 물을 마시면 근육이 풀어진다”, “운동 직후 물을 마시면 살이 찐다”. 이처럼 운동과 물에 대한 속설은 의외로 많다. 운동과 물은 따로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불가분적 관계이며 운동할 때 가장 필수적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운동할 때 물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제한으로 마셔서는 안 된다. 운동 중이나 직후에 마시는 물이 과다할 경우 호흡곤란, 폐부종, 뇌부종이 발생하여 혼수상태 또는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적정량의 물을 언제, 어떻게 마셔야 할까?운동을 하게 되면 수분 손실이 많아지게 된다.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운동선수의 경우 하루에 체중의 6~8%까지도 수분을 잃을 수 있다. 흔히 탈수라 하는 수분 손실 현상은 갈증, 식욕 상실, 무기력, 불안, 메스꺼움, 과민증 등으로 나타난다. 보통 체내 수분이 체중의 1%가량 손실되면 갈증현상이 나타난다. 약 2%가량 부족하게 되면 운동 중 심박수와 체온이 올라가고, 3~4%에 이르게 되면 혈류량 감소로 인해 신체활동력과 유산소 운동능력이 20~30%까지 감소된다.게다가 고온 환경이나 계속적인 고강도 운동으로 수분 손실이 더 증가하게 되면 현기증, 정신착란, 기억 감퇴 등이 나타난다. 심한 경우에는 열 탈진, 열사병을 넘어 죽음까지 초래할 수 있다. 만성적인 탈수 상태가 되면 수분을 보충해도 운동수행능력이 잘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운동 전후나 중에도 적절한 물 보충은 해야 한다. 유산소운동이든 무산소운동이든 운동 형태와 상관없이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면서 빠져가는 수분을 보충해주는 게 운동 효과가 크다.수분 섭취 방법은 운동 강도에 따라 다르다. 목이 마를 때만 마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운동하기 2시간 전에 약 0.5ℓ를 마시는 것이 권장되는데, 1시간 이상 땀을 많이 흘리는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운동 중과 후에 손실된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 특히 운동선수의 경우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훈련이나 시합 중에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증은 쉽게 인지할 수 없는데, 이는 젖산 등 노폐물 배출이 잘 이뤄지지 않아 피로 누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운동선수는 자신의 체액 손실을 알고 보충해야 한다. 운동선수의 경우 운동 중에 시간당 약 0.5ℓ를 마시는 것이 권장되지만 운동할 때 얼마나 마셔야 하는지는 개인의 수분 요구량에 따라 다르다. 운동 전과 후의 체중 차이와 운동 중 섭취한 수분의 양을 합하면 체액 손실이 계산된다. 예를 들어 운동 중에 0.5ℓ를 마셨는데, 운동 후 체중이 1kg 줄었다면 수분 요구량은 1.5ℓ이다. 특히 운동 중에 수분 보충은 반드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마셔야 한다.운동선수와 같이 하루에 몇 시간씩 강도 높은 운동을 한다면 운동 전중후 충분한 수분을 섭취해야 한다. 물에 희석한 미네랄워터 또는 주스는 운동선수를 위한 수분보충제로 권장된다. 특히 장시간의 강도 높은 훈련이나 마라톤과 같은 시합 후에는 몸에 충분한 전해질을 공급하는 것이 좋다. 전해질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이온음료가 추천되지만, 약 3/4의 물과 1/4의 사과 등 과일 주스를 섞어 마시는 방법도 있다.특히 나이가 들수록 갈증을 느끼는 능력이 저하되는데, 노인에게 탈수증은 치명적일 수 있다. 체내의 만성적인 물 부족 현상은 단순 목마름을 넘어 근감소증을 더욱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근감소증은 근육량의 감소로 인한 근력의 저하가 동반되고 이로 인해 신체기능이 저하되어 낙상의 위험도가 증가한다. 노인의 낙상은 골절상을 발생시키고 이는 높은 사망률과 이환율을 증가시킨다. 게다가 근육량의 감소는 신진대사를 떨어뜨려 노인성 비만을 증가시켜 당뇨병, 고지혈증과 같은 대사성 합병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독일스포츠영양연구소(Deutsches Institut f00FCr Sportern00E4hrung)는 근력운동 후 근육 재생에 우유 섭취를 권장한다. 특히 저지방우유는 탄수화물, 전해질 및 칼슘뿐만 아니라 근육 형성을 위한 고품질 단백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또한 물은 차갑게 해서 마시는 것이 좋다. 물의 온도는 4~5℃가 가장 잘 흡수되기 때문이다. 다만 과민성 대장염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무조건 찬물을 마시는 것보다는 미지근한 물을 섭취해야 한다. 변비가 있는 사람의 경우는 차가운 물을 천천히 마시는 것이 좋다.세계보건기구(WHO)는 하루 1.5~2ℓ 정도의 수분섭취를 권고하지만, 최근 우리나라 물 충분 섭취자 비율이 감소하고 있는 추세로 나타났다. 우리 몸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수분은 인간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물질이다.운동을 하면 땀이 나는데, 땀도 수분의 일종이다. 운동 전에는 미리 수분을 보충하고, 운동 중에도 갈증이 나기 전에 규칙적으로 물을 천천히 조금씩 마시며, 운동 후에도 땀을 흘린 만큼 탈수 예방을 위해서 충분히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2023-02-12

‘벚꽃 피는 순서’와 ‘첫눈 오는 순서’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우리 대학은 한국에서 가장 마지막에 망할 겁니다. 그건 우리 대학의 벚꽃이 한국에서 가장 마지막에 피기 때문입니다”라는 농담을 하는 대학의 보직자를 만난 적이 있다.그가 재직하는 대학이 서울보다 더 북쪽인 한국의 최북단에 있기 때문에 “벚꽃 피는 순서로 대학이 망한다”라면 가장 그 대학이 늦게 망할 것이라는 농담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필자는 씁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서울과 지방으로 양분되는 한국적 현실이 이런 코미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벚꽃 순서’의 내면에는 서울과 지방을 양분하는 고질적 병이 숨겨져 있다.‘지역대학의 세계화’를 강조하며 포스텍을 지키던 포스텍 교수들조차 퇴임 후에는 대부분 서울로 올라가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경북이나 대구, 부산이 고향인 분들도 퇴임 후 고향을 찾지 않고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 선호도는 포스텍 교수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필자는 개인적으로 ‘지방대’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칼럼에서 ‘지방대’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사실상 지방대라는 말에 오늘의 대학의 문제가 모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서울에 있지 않는 대학은 지방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심지어 경기도에 있는 대학들도 지방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에 있는 유력한 대학들도 ‘인서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생유치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니 정말 한심한 현실이 한국의 서울과 지방의 양분화 상황이다.2023학년도 정시모집 결과 수험생이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은 곳은 전국적으로 26개 학과, 14개 대학인데 모두 지방대로 집계됐다고 한다.얼마 전 대구의 모 대학 총장이 대학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입시 실패에 대한 총장 책임을 묻는 글 아래에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 새로운 집행부가 출범할 것이라는 사실만 약속드린다”는 댓글을 달았다고 한다. 사실상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내비친 셈이다.대입에서 정원을 못 채운 지방대가 속출하면서 ‘대학이 벚꽃 피는 순서대로 문 닫는다’는 말이 나돌고, 이제는 총장 사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아마 이런 현상이 더 가중될 것이다.1960∼70년대 시절 신생아는 연 100만 명에 가까웠고 초등학교는 한 반에 100명 가까운 콩나물 교실이었다. 2부제, 3부제 수업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초등학교 교실은 한 반에 20∼30명 수준이고 폐교되는 학교도 종종 있다.우리나라 주민등록인구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출생아가 사망자보다 적은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 현상이 이미 시작되었다.한국은 출생아가 역대 최저치인 30만 명 선이 무너졌고 대학정원은 약 50만 명이니까 조만간 대학의 거의 반은 문을 닫아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조정, 정부지원, 지방대 특화 등 다양한 정책이 제시되기도 한다.구조 조정은 모든 대학이 다 같이 정원을 줄이자는 것이고, 정부지원은 지방대에 좀 더 많은 지원을 하자는 주장이다. 시장논리에 따라 각자도생토록 하지 말고 구조조정과 재정지원을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또한 지방대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특성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포항의 포스텍이 전국적인 명성의 프리미어 대학으로 문제가 없지만, 한동대의 100% 충원은 글로벌 역량강화와 선택과 집중으로 성공한 것이라는 예를 들며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기도 한다.그러나 국민들이 ‘첫눈 오는 순서’로 대학을 지망하고 그 지역에 사는 것을 선호한다면 어떤 구조조정도 정부지원도 효과를 크게 갖기 힘들다.이러한 선호는 서울과 지방의 양분을 고착화시키고 있다.일부 대학의 폐교는 어쩔 수 없다 하여도 서울과 지방에 대한 양분법의 인식과 지방과 지방대학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줄어든다면 현 대학정원 미달의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 가능하다. 재수, 반수를 통해서 ‘인서울’ 대학으로 가려는 분위기가 없어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미국의 많은 우수한 대학들이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에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주요 명문 주립대학들은 주의 수도가 아닌 작은 마을에 있다. 이것은 교육선진국이라는 유럽이나 일본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마찬가지이다.미국과 같이 한국도 서울 지역 가리지 않고 대학이 교육과 연구의 질로 승부하는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한다.서울·지방 이분법은 이 사회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벚꽃 피는 순서’로 망할 것이라는 말은 ‘첫눈 오는 순서’로 지역을 선호하고 서울과 지방을 양분하는 고질적인 한국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떠한 처방도 약이 될 수가 없다.이러한 고질적 병이 사라질 때 한국의 대학충원율 문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사실상 ‘벚꽃 피는 순서’라든가 ‘첫눈 오는 순서’라든가 하는 지역적 차별을 일컫는 농담도 사라져야 한다.

2023-02-12

챗봇 돌풍

우정구 논설위원 2016년 3월 5일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인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은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인공지능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게임의 전개가 다양하고 경우의 수가 많은 바둑을 이기지는 못할 거란 기대는 곧 허물어졌다. 알파고가 세계 최고수인 이세돌을 4대1로 눌렀던 것이다.알파고의 승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기계의 승리란 측면에서 인간 세계에 던져준 충격은 실로 컸다. 인공지능 발달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하는 의문을 남겼다.컴퓨터가 최초로 개발되고 계산에서 사고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과 같은 기능은 거듭 발전해 왔다. 1997년에는 IBM의 인공지능 딥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꺾었고, 인공지능 왓슨은 미국의 퀴즈 프로그램에 나와 역대 우승자를 모두 제치는 기염을 토했다.난공불락 영역으로 여겼던 바둑이 무너지고 최근 미국의 오픈 AI사가 개발한 대화형 GPT가 출시됐다. 출시 두 달만에 월간 이용자가 1억명을 돌파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판 챗봇 출시도 임박하다고 한다.챗GPT는 대화전문 인공지능 챗봇이다. 인간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질문에 답변한다. 대학의 과제나 판결문 작성도 단숨에 써낼 수 있다. 어떤 복잡한 문제도 척척 대답을 한다고 한다. 인터넷이나 모바일폰 등장을 능가하는 일상의 변화가 예상된다니 얼마나 엉뚱한 세상이 될지도 걱정이다.또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의 진화로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을 한다. AI가 법률 자문을 하고 논문도 써주며 기사도 작성도 한다니 기상천외하다. 그보다 AI가 사람의 감정 영역까지 침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2-12

역사적인 판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2월 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 나온 것이다. 재판부는 베트남인 응우옌 티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명백한 불법행위가 인정된다면서 원고에게 3천만 원과 관련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재판부는 한국군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이 1968년 6월 12일 작전 중에 원고 가족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원고의 이모와 남동생, 언니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원고와 오빠가 중상을 입은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소멸시효가 완료됐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 역시 원고가 처한 심각한 장애 사유로 발생한 늦은 권리행사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이번 판결에 한국인들의 증언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해병대 소속 증인들이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10월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파병을 기점으로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4만8천여 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그 결과 5만여 명의 베트남인을 죽이고, 한국군 5천여 명의 사망자와 1만여 명의 부상자, 2만여 명의 고엽제 환자가 생겼고, 총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언젠가 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시작해 다낭에 이르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방문 목적은 베트남의 전쟁역사박물관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예외 없이 전쟁역사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에서 방송으로 안내하는 베트남 전쟁 전개 과정이 처음에는 영어로 바로 다음에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사실이 특이하게 다가왔다.파리를 관통하는 센강의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는 프랑스어, 영어, 도이치어 순서였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전쟁역사박물관을 찾은 푸른 눈의 여행객들은 실망을 감추지 않고 한국어 방송 도중에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자부심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미안함이었다. 남의 나라 내전에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하여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학살한 대가로 10억 달러 벌어서 조국 근대화의 소중한 종잣돈으로 썼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20세기 국가들이 보이는 공통의 행태가 있다. 그것은 고대에는 자국(自國)의 위용은 과시하고, 현대에는 피해자로 자신을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일본이 대표적인 본보기다.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되, 디아스포라와 유대인 학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이스라엘. 임나일본부설과 찬연한 만세일손의 국가로 자부하다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만 누누이 강조하는 일본. 그런 대열에 우리도 합류하기 일쑤였다.이번에 나온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배상 판결은 역사적이다. 가해자로서 대한민국의 책임을 물음으로써 가증스러운 일제와 그 후예들에게 우리의 역사 인식과 책임감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베트남에서 한 짓은 눈 감고 왜 우리에게 사죄를 요구하느냐’ 하는 일본인들의 역겨운 시선을 일거에 날려버린 판결이기 때문이다. 재판부에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2023-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