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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과거는 묻지 않는다

최병일 기자
등록일 2026-01-21 19:53 게재일 2026-01-23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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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주기행’ 경주에서 펼쳐지는 2박3일 복수로드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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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주기행’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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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주기행’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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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주기행’ 홍보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경주는 시간을 덮어두는 도시가 아니다. 천 년의 유적은 땅 위에 그대로 남아 있고, 과거는 늘 현재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래서 이 도시는 위로보다 기억에 가깝다. 영화 ‘경주기행’이 복수극의 무대로 경주를 선택한 이유도 그 지점에 있다. 이정은, 박소담, 공효진, 이연. 네 모녀가 경주에 모이는 이 영화는, 복수가 어떻게 ‘여행’의 형태를 띠는지 보여준다.

막내 딸 경주가 죽었다. 수학여행을 간다며 들뜬 얼굴로 집을 나간지 불과 이틀째가 되던 날이었다. 가해자는 초범이고 술김에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에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이유로 고작 15년 형을 선고 받는다. 옥실(이정은) 모녀는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피고인과 합의해 그의 형량을 8년 형으로 줄여주었다. 

범인이 안쓰럽거나 동정을 해서는 아니다. 그리고 8년 뒤 옥실은 자신의 세 딸 중 첫째 장주(공효진), 둘째 영주(박소담), 세째 동주(이연)와 함께 경주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 8년을 묵혀 둔 복수를 위해서. 

영화는 김미조 감독이 가족과 경주로 여행을 떠났던 2014년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독은 비 내리는 대릉원에서 파란 우비를 입고 가족과 일렬로 걸었을 때 묘하게 스산하면서 신비로웠다고 회상한다. 감독의 경험은 영화 곳곳에 녹아 있다. 

관광지이자 어린 시절 수학여행지였던 경주는 사실 여러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고분의 도시는 영화적 모티브가 됐다. 

경주기행을 견인하는 동력은 단연 각기 다른 결의 슬픔을 안고 충돌하는 네 여자의 조화다. 이정은이 연기한 엄마 옥실은 이 여행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경주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길을 헤매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이 도시에 이미 오래전부터 와 있었던 사람처럼.

박소담이 연기한 영주는 엄마와 반대편에 있다. 법대를 졸업했으나 백수인 그녀에게 그에게 낯설고, 동시에 불안한 공간이다. 관광객처럼 걷지만 시선은 늘 뒤를 살핀다. 가족을 가장 사랑하는 전형적인 장녀 장주(공효진)는 이 둘을 연결하는 매개다. 겉으로는 가장 평온해 보이지만, 가장 오래된 상처를 안고 있다. 그리고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행동파 동주(이연)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대표한다. 네 사람은 함께 이동하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지는 않다.

‘경주기행’의 줄거리는 단순히 요약하기 어렵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영화는 끝까지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과거의 사건이 조금씩, 유적을 걷듯 드러난다. 대릉원 인근의 능 사이를 걷는 장면, 불국사로 향하는 돌계단, 밤의 월성 주변. 이 장소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을 호출하는 장치다. 경주의 유적은 말이 없지만, 사람의 감정을 숨기지 않게 만든다.

복수극이지만 영화는 속도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여행 영화처럼 천천히 이동한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 숙소에서의 침묵, 식당에서의 짧은 대화가 반복된다. 이 느린 호흡 속에서 관객은 깨닫게 된다. 이 복수는 즉각적인 응징이 아니라, 오래 미뤄둔 감정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여행의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돌아오는 여행’에 가깝다. 네 인물 모두 경주에서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과거에 남겨두고 온 무언가를 다시 마주한다. 그래서 경주는 관광지로 소비되지 않는다. 유적은 사진의 대상이 아니라, 인물들이 멈춰 서는 지점이다. 돌담 앞에서, 능선 위에서, 말이 끊긴다. 경주라는 공간이 감정을 앞질러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밤의 경주는 영화의 긴장을 극대화한다. 낮에는 평온했던 유적이 밤이 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불 꺼진 사적지와 조용한 길은 복수극의 무대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영화는 끝내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복수는 행동보다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그 결정이 이 여행의 결말이다.

‘경주기행’은 공개 이후 제45회 하와이 국제영화제에 이어 제24회 피렌체 한국영화제에 공식 초청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장소를 서사의 중심에 둔 독특한 복수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경주라는 도시를 관광적 시선이 아닌 기억과 죄책감의 공간으로 재해석한 점이 해외 평단의 관심을 끌었다.

대중의 반응은 엇갈렸다. 속도감 있는 복수극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느리고 침묵이 많은 영화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경주라는 도시와 인물의 감정을 함께 따라간 관객들은 “여행을 다녀온 뒤처럼 여운이 길게 남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에서는 “경주를 다시 보게 됐다”, “유적이 이렇게 불안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라는 평가도 이어졌다.

이정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복수의 무게를 견딘다. 박소담은 흔들리는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공효진은 관계의 균열을 가장 일상적인 표정으로 보여준다. 이연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분노와 슬픔을 현재형으로 끌고 온다. 네 배우의 호흡은 경주의 시간과 닮아 있다. 빠르지 않고, 겹치며, 쉽게 끝나지 않는다.

‘경주기행’은 말한다. 복수는 도착지가 아니라 여정일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여정에 가장 어울리는 도시는, 모든 시간이 겹쳐 있는 경주라고. 이 영화에서 여행은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피할 수 없었던 감정과 마주하는 과정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경주에 가고 싶어진다기보다, 경주에 ‘다시’ 가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남겨두고 온 감정이 있는 도시처럼. 경주는 이 영화에서 끝내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다만 숨길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이 이 복수극이 여행의 형태를 띠는 이유다.

경주에 가면, 과거는 묻히지 않는다. 영화 ‘경주기행’은 그 사실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증명한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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