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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살던 조선인만 141명… 대부분 전복 채취·산삼 채약

최병일 기자
등록일 2025-11-27 18:50 게재일 2025-11-2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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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15)개척령 반포와 라페루즈 탐험대
남양 옥천길

115명이 전라도 출신으로 압도적… 강원도 14명·경상도 11명 불과
루이 16세 당시 라페루즈 백작, 울릉도 지나며 선박 건조 장면 목격
옥천 3교 드넓은 초지엔 산나물 운반 모노레일 산등성이까지 깔려

△  옥천에서 출발한 산길 구간 

해담길 남양에서 옥천으로 넘어가는 산길 구간은 1991년 남양과 통구미 마을을 이어주는 통구미 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 자동차가 다니던 울릉도 순환도로의 일부다. 이제 자동차가 지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길은 서면의 남양에서 울릉읍의 옥천, 혹은 옥천에서 남양 어느 방향으로 넘어가도 무방하다. 난이도 역시 비슷하다. 오늘은 옥천에서 출발한다. 옥천 계곡을 따라 산으로 거슬러 오른다.

 무릉 1교, 2교 두 개의 다리를 건너가면 무릉교통 차고지다. 울릉도의 시내버스들이 여기서 출발한다. 이 부근에서 안평전 방향으로 가면 해담길의 옥천- 의료원길 코스로도 이어진다. 차고지를 지나 옥천호텔 앞의 옥천 3교를 건넌다. 다들 작은 다리다. 이길 또한 이정표를 찾기 어려워 마을 어르신에게 여쭈니 돌아오는 대답.

“이리 실렁실렁 올라가면 소 멕이는 데가 있고 그래요. 물어서 찾아가소.”

계속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사동 정수장. 이 일대의 식수 공급원이다. 정수장 입구에 고욤나무 한그루가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다. 몇 개를 따서 맛보니 달디 달다. 일종의 애기 감이다. 고욤나무는 고양나무 혹은 소시(小枾)라고도 한다. 한방에서는 열매를 따서 말린 것을 군천자(君遷子)라 해서 소갈·번열증(煩熱症) 등에 약재로 쓴다. 씨를 뿌려서 자란 고욤나무는 흔히 감나무를 접목할 때 대목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남양옥천길에서 본 염소. 

다시 길을 가는데 누군가 죽은 나무뿌리 하나를 길가의 바위 위에 올려놨다. 언뜻 보니 날아가는 용의 형상이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나무들도 저처럼 땅속에서는 용 한 마리씩 키우고 있구나! 

옥천 3교를 지나면 갈림길, 여기서는 그냥 직진이다. 고갯마루까지는 오르막길 1.4km다.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갑자기 드넓은 초지가 나타난다. 소등어리 아래 초지다. 외딴 집 한 채가 초지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초지뿐만 아니라 산등성이까지 모노레일이 깔렸다. 

윗통구미 나물밭 

밭에 기르는 산나물과 야산에 자라는 산나물을 채취해 운반하는 모노레일이다. 나물 철에만 와서 지내다 가는 집일까?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다.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가 집 앞에 앉아 있다. 집고양이 같다. 주인이 잠시 외출 중일까? 아니면 가끔씩 들르는 것일까? 집 앞 초지에는 돌배나무 한그루가 돌배를 잔뜩 매달고 서 있다.

돌배나무 아래는 두기의 무덤이 있다. 필시 이 집에서 살다가 이승을 떠나신 분들이리라. 산속에서 나서 산속에 살다가 산속에 묻힌 이들. 삶은 어쩌면 그다지 넓은 영토가 필요치 않다. 평생을 마을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사람이나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살다간 사람이나 무엇이 다를까. 모두 지구라는 행성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가는 것을. 

이 초원은 산 중이지만 바다 전망도 빼어나다. 사동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맑은 날은 머나먼 육지도 보일 것이다. 산중에서도 세상을 드넓게 보며 살 수 있는 곳. 밤이면 더 많은 우주의 별들을 보고 살아가리라. 그러니 대도시에 사는 삶보다 이 섬의 삶이 어찌 더 좁다고 할 것인가. 

내륙의 도시인들이 밤거리 불빛 속을 유영할 때 이 섬 집의 주인은 은하계의 별들 사이를 유영할 것이다. 그야말로 우주적인 삶이니 대체 누가 더 넓은 세상을 사는 것이겠는가!

△ 울릉도 숨어 살던 조선인 전라도 출신이 압도적 

윗통구미.

 아마도 이런 평원이 있는 산 중이라면 울릉도 개척령 반포 이전에도 안무사들의 토벌을 피해 숨어살기 딱 좋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렇다 할 길도 없었을 터이니 감시의 눈은 피할 수 있고 농사지을 땅도 충분하고 따뜻하여 숨어 살기에 최고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개척을 위해 고종의 명을 받고 울릉도를 조사한 이규원의 검찰 일기에 따르면 공식 입주가 금지됐던 당시 울릉도를 조사한 결과 이미 조선인 141명과 일본인 78명이 울릉도에 살고 있었다. 

드러난 이가 그 정도였으니 이런 곳에 숨어 살던 이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시 울릉도에 숨어 살던 조선인의 출신지는 전라도가 압도적이었다. 141명 중 무려 115명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전라도 흥양과 삼도 출신이었다. 흥양은 고흥, 삼도는 거문도를 말한다. 삼도 출신은 김재근, 이경화, 김내윤 등이었으며 바로 옆의 여수 초도 출신은 김내인, 김근서 등이었고 이경칠 등 순천 낙안 출신도 있었다. 강원도 출신은 14명, 경상도 출신은 11명에 불과했다. 당시 울릉도는 이미 작은 전라도였다. 특히 전라도 출신들은 해마다 지속적으로 울릉도를 찾아와 살다 가는 이들도 다수였다. 그래서 울릉도 지명들 대부분은 전라도 말에서 왔다.

 141명의 직업은 채곽(전복채취) 129명, 산삼 채약 9명, 대나무 베기 2명 등이었다. 대다수가 어업을 위해 울릉도에 입도해 살았다. 울릉도는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자 직장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고향을 떠나 봄에 울릉도로 들어와 막사를 짓고 살면서 벌목을 해서 배를 짓는 틈틈이 전복과 물고기를 잡아서 말렸다. 

△ 울릉도를 기어코 지켜낸 백성들 

남양주상절리. 

가을철 새 배의 건조가 끝나면 배에 해산물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수백년 동안 반복했다. 조정의 처벌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어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울릉도를 찾아들었다. 조선 조정이 버린 섬, 그럼에도 기어코 울릉도를 지켜낸 것은 백성들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명을 받고 세계를 탐험하다 울릉도를 발견한 탐험가 라페루즈 백작의 저서에도 기록으로 남았다. 라페루즈(La Perouse) 백작은 프랑스의 해군제독 출신 해양탐험가였다. 1741년 남프랑스 귀오(Guo)성에서 태어나 1788년 남태평양 바니코로(Vani koro)섬에서 사망했는데 세계 탐험 항해 도중 1787년(정조 11년) 5월 27일 울릉도를 지나가며 주민들이 배 짓는 작업을 목격했다.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기 100년 전부터 울릉도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던 사실이 외국의 문서로 확인된 것이다. 

“나는 이 섬을 제일 먼저 발견한 천문학자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을 다줄레라 명명했다. 우리는 이 내포들에서 건조중에 있는 중국 배와 똑같이 생긴 배들을 보았다. 포의 사정거리 정도에 있는 우리 함정들이 일꾼들을 놀라게 한 듯했고, 그들은 작업장에서 50보 정도 떨어진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은 몇 채의 움막집 뿐이었고, 촌락과 경작물은 없었다. 따라서 다줄레 섬에서 불과 110km 밖에 안 되는 육지에 사는 조선인 목수들이 식량을 가지고 이 섬에 와서 여름 동안 배를 건조하여, 이를 육지에 가져다 파는 것으로 보였다. 이 생각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의 서부 첨단부로 돌아왔을 때, 이 첨단부에 가려서 우리 선박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다른 한 작업장의 일꾼들이, 선박 건조 작업을 하고있는 중이었는데, 우리를 보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 중 우리를 조금도 겁내지 않는 것 같은 2~3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숲으로 도망하는 것을 보았다.”   (라페루즈 탐험대의 ‘세계 탐험기’중)

1787년, 조선 조정이 바다와 섬을 등한시 하고 있을 때 프랑스 탐험가들이 울릉도까지 찾아왔었다. 그들이 섬에서 본 것은 조선의 병사들이 아니라 조정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울릉도 선주민들이었다. 이렇게 또 프랑스인들에 의해 울릉도를 지킨 것은 수토사들이 아니라 백성들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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