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 (12)1882년까지 500년 동안이나 금섬(禁島)
조선 태종 16년 전함 2척 이끌고 황토구미에 정박한 전 삼척만호
바람 멈추지 않자 꿈에 나타난 해신의 명에 따라 아이들 섬에 버려
양심 가책에 동상 모신 사당 건립… 해마다 삼월 삼짓날이면 당제
△ 명나라를 모방해서 공도 정책 시행
고려 말에 시작된 공도 정책이 조선조 들어와서는 더욱 강화됐다. 중국에 새로 들어선 명나라의 영향과 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만을 왕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성리학의 이념 때문이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신왕조 수립 직후인 홍무4년(1371년) 연해 주민의 출해를 엄금하는 해금정책을 발표했다. “단 한 조각의 판자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는 명나라 초의 군사적 불안 때문이었다. 명나라가 들어섰지만 당시 절강성과 복건성 연안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경사성과 방국진 같은 해상 세력이 왜구와 결탁해 명 왕조를 부단히도 괴롭히고 있었다. 이들이 더 큰 반란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주원장은 해금 정책을 실행했다. 반란세력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상업 활동을 막기 위해 해상 활동을 금지시킨 것이었다.
명나라를 사대했던 조선왕조가 명나라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조선 또한 신생 국가라 섬들까지 방위할 군사,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왕조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섬들과 해안가에서의 거주나 활동을 금지하는 공도, 해금 정책을 편 것이다. 허락 없이 섬에 들어가거나 거주하게 되면 반역죄로 다스렸다. 국가를 탈출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 공도 어긴 거주민들 토벌한 사례도 있어
공도정책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대부분 풀렸다. 전쟁으로 피폐한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해 섬의 개간을 통한 세수 확보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울릉도, 욕지도, 금오도 같이 왜와 가까운 섬들은 19세기 후반까지도 공도정책이 이어졌다. 공도정책을 어기고 울릉도에 거주하던 거주민들을 토벌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또 있다.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9월 2일 경인 1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김인우를 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아 파견하다
김인우(金麟雨)를 무릉(武陵) 등지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습(朴習)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武陵島)의 주회(周回)가 7식(息)이고, 곁에 소도(小島)가 있고, 전지가 50여 결(結)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方之用)이란 자가 있어 15가(家)를 거느리고 입거(入居)하여 혹은 때로는 가왜(假倭:왜구를 가장하여 중국이나 조선 해변을 약탈하던 가짜 왜구. 당시 해변에 살던 불한당이 간혹 무리를 지어 가왜구 행세를 함)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三陟)에 있으니, 청컨대,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여기어 삼척 사람 전 만호(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불러 무릉도의 일을 물었다. 김인우가 말하기를,
“삼척 사람 이만(李萬)이 일찍이 무릉(武陵)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 섬의 일을 자세히 압니다.“
하니, 곧 이만을 불렀다. 김인우가 또 아뢰기를,
“무릉도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사람이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가 혹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만일 이 섬에 주접(住接)하는 사람이 많으면 왜적이 끝내는 반드시 들어와 도둑질하여, 이로 인하여 강원도를 침노할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어 김인우를 무릉 등지 안무사로 삼고 이만(李萬)을 반인(伴人)으로 삼아, 병선(兵船) 2척, 초공(抄工) 2명, 인해(引海) 2명, 화통(火通)·화약(火藥)과 양식을 주어 그 섬에 가서 그 두목(頭目)에게 일러서 오게 하고, 김인우와 이만에게 옷[衣]·입(笠)·화(靴)를 주었다.
태종 16년(1416), 울릉도 안무사로 임명된 전 삼척만호 김인우는 전함 두 척을 이끌고 울릉도 황토구미에 정박한 뒤 섬사람들을 샅샅이 잡아들였다. 뭍으로 귀항하기 전날 밤, 안무사의 꿈에 동해의 해신이 나타나 “어린 소년과 소녀 한명 씩을 두고 가라” 명했다. 하지만 안무사는 해신의 명을 무시하고 배를 출항시켰다. 유학을 신봉하던 안무사에게 해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배가 돛을 올리자 거센 풍랑이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 동자와 동녀신 모신 성하신당
그러던 어느 날 안무사는 문득 소년 소녀를 두고 가라던 꿈이 생각났다. 안무사는 섬사람들을 배에 태운 뒤 어린 소년과 소녀 한명씩을 뽑아 심부름 보내며 자신이 머물던 집으로 가서 필묵을 가져오도록 했다. 아이들이 배에서 내리자 안무사는 돛을 올리고 출항을 명했다. 바람은 이내 잠잠해 졌다.
뭍으로 돌아온 뒤에도 김인우는 늘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몇 해 뒤 조정에서 다시 그에게 안무사를 명했다. 안무사는 울릉도에 도착해 전에 그가 머물던 거처를 찾았다. 그곳에는 서로 꼭 껴안고 죽은 소년 소녀의 백골이 놓여 있었다. 안무사는 그곳에 사당을 짓고 소년 소녀의 동상을 모셨다.
울릉도 황토구미에 있는 성하신당의 내력이다. 성하신당에 깃든 이야기는 실화와 전설이 뒤섞여 있다. 신당 안에는 섬에서 흔히 보는 장군신이나 용왕신이 아니라 동자와 동녀 신이 모셔져 있다. 성하신당의 비극적 설화는 제주 마라도 할망당의 애기업개 설화나 흑산도 진리당의 피리 부는 소년 설화와 유사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 설화 모두 뱃길을 막는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소년이나 소녀를 제물로 바친다. 재물로 바치기 위해 어른들은 모두 동일한 간계를 부린다. 두고 온 물건을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보낸 뒤 배를 몰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마라도의 소녀와 흑산도의 소년, 울릉도의 소년, 소녀는 모두 외로움과 굶주림에 지쳐 숨을 거두고 사후에는 신당에 신으로 모셔진다.
설화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인신공양 풍속이 일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인신 공양 과정에서 직접적인 폭력이 행사되지 않고 간계가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신 공양은 암암리에 지속되었고 범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죄의식을 씻어버리기 위해 희생자들을 신격화 시킨다.
희생자들이 신의 세계에 들어간 이상 현세에서의 범죄는 더이상 죄악이 아니게 된다. 희생자들의 신격화를 통해 범죄자들은 면죄부를 받는다. 성하신당, 밀랍으로 빚어진 동남 동녀상은 실물처럼 생생하다. 마치 그들의 원혼이 상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황토구미 해안가에 바람이 분다. 억울하게 죽은 소년 소녀는 죽어 신이 됐어도 그들이 살던 땅에 끝내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조선시대, 섬은 뭍에서 벗어난 도피와 은둔의 땅이었지만 삶의 풍파는 섬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울릉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마음 편히 살 땅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의 공도정책에 따라 울릉도는 500년 동안이나 금(禁)섬이었다. 지킬 힘이 없으니 조정은 울릉도를 방치해 버렸다. 그래도 백성들은 기어코 섬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자리 잡을만하면 조정에서 보낸 군사들에게 붙들려 다시 뭍으로 쫓겨나길 반복했다. 그래도 백성들은 끊임없이 울릉도를 찾아들었다. 조선 조정이 방치한 울릉도와 독도를 끝끝내 지켜낸 것은 백성들이었다. 울릉도의 공식적인 주민 거주는 1882년부터 허락됐다.
오랜 세월 태하마을 주민들은 매년 삼월 삼짓날이면 성하신당에서 당제를 모셨다.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거기에 더해 근래에는 울릉군청 주도의 당제도 따로 모셔지고 있다.
주민들은 아직도 신당을 두려워한다. “지금도 무서워요.” 가끔씩 무속인들이 찾아와서 기도 드리고 간다. 소위 ‘신빨’을 받기 위해서다. 성하신당이 그만큼 영험하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일 터다. 울릉도는 그렇게 신화의 땅이 됐다.
/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