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11) - 울릉도 해담길
육지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에도 섬으로 숨어 들어
1893년 바위에 글 새긴 ‘각석문’ 흉년 넘긴 개척민 고난의 삶 웅변
황토를 나라에 상납한 태하마을, 한때 강원도 울도군 군청 소재지
△ 각석문에 기록된 울릉도 역사
현포마을 해담,길 노인의 나물 농장 끝 지점 오르막에 당도하면 순환도로와 이어지는 곳에 전망대가 있다. 현포항, 노인봉, 추산, 대풍감까지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한다. 여기서 태하삼거리까지는 2.68km다. 시멘트 길이지만 경사가 급하지 않고 내내 바다를 보며 가는 길이니 힘들지 않다. 현포령 고갯길 풍력 발전기 있는 곳이 북면과 서면의 경계다.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이 가파르다. 다행히 차도와 별도로 계단을 만들어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내리막길의 끝은 삼거리다. 왼쪽은 일주도로, 오른쪽이 태하마을 가는 길이다. 차도 옆 샛길에 태하리 ‘광서명각석문(光緖銘刻石文)’ 안내판이 있다.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뜻의 각석문은 울릉도 개척기의 기록이다. 1890년과 1893년에 새겨진 글인데 내용은 울릉도 개척기 서경수, 심순택, 이규원, 민종성 등의 공적을 기리는 것이다.
영의정 심순택은 1889년 쥐와 새들 때문에 농사 피해가 큰 울릉도에 양곡 지원을 건의해 조정에서 삼척, 울진, 평해의 환곡 중 300석을 지원토록 했다. 이 양곡 덕분에 울릉도 개척민들은 흉년을 넘기고 살아남았다. 개척기 울릉도 주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태하는 황토기미라고도 한다. 황토가 많이 나서 황토를 나라에 상납했는데 그래서 황토기미란 이름을 얻었다. 태하는 큰 황토기미, 고개 넘어 학포는 작은 황토기미다. 태하 해변에는 황토를 파냈던 흔적이 남아있다. 태하는 울릉도가 공도정책으로 주민 거주가 금지됐다가 공식 거주가 허락된 뒤 강원도 울도군(울릉군)이 처음 신설됐을 때 군청 소재지가 있던 마을이다.
1900년 10월25일 반포된 울도군 설치에 대한 칙령은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로 관할해야 할 일”이라 했다. 독도를 그 당시에는 석도(石島)라 했다. 지금은 홀로 독을 써서 홀로 섬이 됐지만 당시에 독도의 이름은 독섬이었다.
'그래서 한자도 석도다. 독은 돌의 전라도 지방 말인데 독도란 이름 또한 당시 울릉도, 독도를 누비며 살았던 거문도 등의 전라도 출신 선주민들이 남긴 유산이다. 홀로 섬이 아니라 돌뿐인 바위섬이라 독도라 불렀던 것이다.
△ 울릉도 가장 오래된 신당, 성하신당
1883년 공식 입주한 개척민은 16호 54명이었다. 공식 입도 전에 살았던 선주민을 뺀 숫자다. 1896년 9월, 울릉도 도감(島監) 배계주(裵季周)의 보고에 의하면 주민은 277호 1,134명으로 늘었다. 울릉도는 우산국 이후 1500년 만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태하는 조선 초기부터 조정의 관리들이 숨어 사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드나들던 마을이다.
버스 정류장과 서면사무소 태하 출장소 사이 작은 솔숲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울릉도의 가장 오래된 신당인 성하 신당이 그것이다. 신당 주변에는 9그루의 소나무가 경비병처럼 신당을 호위하고 서 있다. 선주민들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신당. 넉살 좋은 고양이 한 마리가 신당 안까지 따라와 비벼댄다. 신당 한쪽 귀퉁이에는 약수가 있어 나그네의 갈증을 풀어준다.
조선 시대 초기 국가의 섬에 대한 정책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조선이 공도 정책을 시행한 적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근거가 빈약하다. 울릉도, 금오도, 욕지도 등 조선시대 말까지 공식적으로 입도가 금지된 섬들은 말할 것 없고 조선 초기부터 조정은 대부분의 섬에 사람이 사는 것을 금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 기록들이 이를 증거 한다. 또 현재 섬에 사는 주민들의 입도조(최초로 섬에 정착한 조상)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정착한 사실이 또한 이를 증명한다. 공도가 없었다면 그 이전 고려나 삼국시대부터 정착한 입도조가 있어야겠지만 아쉽게도 극소수 섬을 제외 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 기간 섬의 역사가 단절됐다는 증거다.
우리가 공도 정책을 인정한다 해서 독도 영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주민 거주를 금지 시켰을 뿐이지 영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조정이 거주를 금지시킨 울릉도에 백성들이 기를 쓰고 들어와 살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명백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왕조사만 역사가 아니다. 백성의 역사가 진짜 역사다. 또 공도정책은 왜구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 거주를 금지시킨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섬이 왜구들의 근거지가 되거나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 그 진짜 목적이었다.
△ 삼별초의 난 진압후 공도정책 시작
조선 순조 시대(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에 의해 찬진(撰進)한 책 만기요람에도 울릉도 공도의 목적이 적시되어 있다. 만기요람은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들이 집약된 국가의 공식문서다
“이 섬은 가지도(可之島)로서 본래는 우산국이었는데, 신라 때 쳐서 빼앗았다가 뒤에 그들이 왜인들을 끌어들여 도적질을 할까 두려워서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 두었다.” (만기요람. 1808년)
울릉도로 숨어 들어가 산 사람들은 중죄인으로 다스렸다는 기록도 전한다. 공도정책은 섬에 사는 이들 중 주동자는 사형을 시킬 정도로 가혹했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김안(金安)이 수모(首謀)가 되어서 무릉도(茂陵島)로 도망해 들어갔사오니, 율이 마땅히 교형에 처하는 데에 해당하옵고, 그 밖의 종범(從犯)은 모두 경성(鏡城)으로 옮길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1월 25일 을사 1번째기사 1438년) >
주동자는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경성으로 옮겨 처벌을 받은 것이다. 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던 시절을 울릉도는 지나왔다. 육지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 머나먼 섬으로 들어가 살았을까. 섬에 사는 것에 대한 처벌이 가혹했지만 그래도 뭍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은 목숨 걸고 섬으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섬에 사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국법을 어긴 중죄인이 됐다. 조선은 섬을 오래도록 버렸다. 조선의 섬에 대한 정책이 그러하였다.
공도정책의 시작은 고려 말 삼별초의 난 진압 이후부터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진도로 이주해 왕실 종친이었던 왕온을 옹립, 왕으로 삼은 뒤 왕궁을 건설하고 8개월 남짓 삼별초 왕국을 유지했다. 삼별초 왕국에 호응해서 안면도부터 진도, 흑산도, 남해도까지 서남해의 수많은 섬들이 반란에 가담했다. 섬에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토착 해상 세력들이 있었고 이들이 삼별초와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여몽 연합군에 의해 반란은 곧 진압됐다.
이후 고려 정부는 진도와 흑산도, 남해도, 거제도 등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 시키는 공도 정책을 감행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섬들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왜구와 섬 해상 세력들이 손잡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진도 사람들은 고려 충정왕 때인 1350년에 영암과 해남 등지로 강제 이주당해 디아스포라로 떠돌다 87년만인 조선 세종 19년(1437년)에야 비로소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조선은 그 뒤를 따라 전면 공도 정책을 시행했다. 그렇게 우리 섬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