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 부산대 교수 ‘홍대용’ 평가 재해석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오랫동안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로 불리며 근대 과학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명예교수가 16년간의 연구를 집약한 ‘홍대용 평전’(푸른역사)은 이러한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홍대용의 대표 저서 ‘의산문답’과 ‘임하경륜’, 청나라 지식인들과의 서신, 수학·과학 저작 등을 분석한 이 책은 그를 “과학적 사고보다는 정주학적 기론(氣論)에 기반한 상상력의 소유자”로 재해석하며 역사적 신화에 균열을 낸다.
강 교수는 홍대용이 주장한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이 관측과 수학에 근거한 근대 과학이 아니라 정주학의 사유 체계에서 비롯된 한계적 이론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홍대용은 지구 자전은 주장했지만 공전에 대해서는 침묵했으며, 혼천의는 관측 도구가 아닌 천체 모형으로 제작됐다. 더욱이 ‘의산문답’은 인쇄되지 않아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했고, 그의 우주론은 도교의 수련론이나 재래식 동기감응설에 기대어 구축됐다고 분석한다.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지구중심설을 탈피하지 못한 채 ‘선언적 상상력’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홍대용이 신분제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라는 기존 평가에 대해서도 강 교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홍대용이 노비를 소유한 지주였고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어, 그의 ‘평등론’은 “실제 행동과 괴리된 실천성 없는 수사”에 불과했다고 해석한다. ‘임하경륜’에서 ‘놀고먹는 사족’을 비난한 부분은 신분제 철폐 주장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실제로는 재능 있는 농민·상인의 자식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이상을 피력하면서도 “토지 분배나 거주 이전 자유를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통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영천 군수 시절 진휼곡 착복 사건을 보면 “민생을 돌보기는커녕 수탈 구조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론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강 교수는 지적한다.
홍대용이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명분론적 ‘화이론’(華夷論)을 허구로 규정한 배경에도 개인적 갈등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주목된다. 강 교수에 따르면, 귀국 후 김종후가 그와 교류한 청나라 인사 엄성·반정균을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는 오랑캐 추종자”로 매도하자, 홍대용은 이에 반발해 “지구처럼 세상도 둥글어 중국은 중심이 아니다”라는 지원설(地圓說)을 내세우며 화이론 자체를 부정했다. 이는 단순한 민족 주체성 발현이 아니라 “개인적 관계와 학문적 자존심이 얽힌 복합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1400쪽에 달하는 이 평전은 홍대용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며 “20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염원한 ‘자생적 근대화’의 환상이 투영된 결과”라고 결론짓는다. 강 교수는 “홍대용은 주자학을 부정하지 않은 실천적 정주학자였으며, 그의 사상은 근대적 사유의 맹아가 아니라 당대 현실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