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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왕버들 59그루 둘러선 ‘성밖숲’은 또 하나의 랜드마크

최병일 기자
등록일 2025-08-04 20:04 게재일 2025-08-0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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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만 기억하는 당신에게 전하는 성주의 진정한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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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습으로 서 있는 왕버들의 모습. 

성주는 좀처럼 여행지의 이미지를 얻지 못한 곳이다. “성주에 대해 어떤 걸 알고 있어요?” 물어보면 참외 혹은 사드미사일 정도의 대답이 돌아온다. 그 땅에는 우리가 몰랐던, 그래서 놀라온 여러 면모가 여기저기 숨어 있다.

 

꼭 들러 봐야할 두번째 장소는 ‘세종대왕자태실’
소나무 숲 높이 솟아오른 절벽 정상부 산 아래로 
탁 트인 경치는 한눈에 봐도 으뜸 중 으뜸인 명당

 

여름 아궁이에 천천히 익혀 발효한 보리등겨장
돼지불고기에 곁들이면 보리 특유 향 입맛 돋워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해주는 거대한 왕버들 나무. 

 △ 하늘을 향해 용틀임하는 59그루의 숲

성주읍 바로 곁에는 이천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그리고 하천변으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는 숲이 있는데, 공원을 만들고 숲을 조성한 게 아니라 그 반대다. 숲이 있어 공원이 되었다. 이 숲의 이름은 ‘성밖숲’. 이름이 아주 직관적이다. 숲의 위치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적어도 시내 한복판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 아닌가. 성주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은 한번쯤 이 숲의 이름을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성주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이정표 역시 ‘성밖숲’이다. 그만큼 성주를 대표하는 곳이자, 성주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500년 넘는 세월을 사는 왕버들의 풍경. 

보통은 건축물을 랜드마크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성주만큼은 이 숲을 랜드마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 생각없이 들러보면 흔하디 흔한 천변공원처럼 보이겠지만, 여기서는 반드시 나무를 눈여겨봐야 한다. 짧은 것은 300년, 최대 500년에 달하는 왕버들 59주가 늘어선 풍광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숲 자체의 면적은 1만5,000㎡(약 4,500평) 정도지만, 성주읍이라는 지역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는 공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버드나무의 수명이 이렇게 길지 않다는 점이다. 이 나무는 물가에서 주로 자란다. 그만큼 빨아들이는 수분이 많다. 물을 많이 머금는다는 건 쉬이 썩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500년이라는 왕버들의 수명은 놀라운 일이다. 그토록 오래 한곳을 지켜온 나무는 저마다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서로 얽혀 가지끼리 몸을 맞댄 왕버들. 

하나같이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 20미터는 족히 넘을 법한 키에 가지를 활짝 펼쳤다. 수분이 많은 특징 때문인지 오랜 세월을 살아남는 동안 몸통이 멋들어지게 뒤틀려 있기도 하다. 용틀임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몸짓이다. 그런 나무가 59주나 있다. 그러니 이 숲은 보면 볼수록 놀랍고, 나무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눈을 떼기가 어렵다.

 

독특한 형상으로 세월을 견딘 왕버들. 

 △비보림(裨補林)으로 시작한 숲의 역사

나무의 역사가 500년을 헤아린다면 이 숲은 언제 만들어진 걸까. 역사를 뒤적여 보니 무려 1380년까지 기록이 거슬러 올라간다. 『경산지』와 『성산지』에서 찾은 이야기를 보자. 이에 따르면 이 숲은 성주읍의 지세가 약하다는 지관의 조언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성주의 서문 밖 마을에서 자꾸만 이유없이 아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지관이 제시한 게 숲이었다. 마을 안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마주하고 있는 게 문제니 그 사이에 숲을 만들라는 거였다. 처음에는 이 자리에 밤나무를 심었다. 그러니까 성밖숲은 원래 밤나무숲이었던 셈이다. 

세월의 흔적처럼 이끼가 낀 나무는 오랜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시간이 흘러 7년 간의 왜란이 끝난 후 성주 인근의 마을은 기강이 급격하게 무너졌다는 문구가 나온다.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강이 해이해졌다’, ‘민심이 흉흉해졌다’는 표현으로 보아 생사 문제는 아닌 듯하고 아마도 거주민 사이에 불화가 거듭됐던 게 아닌가 추정해 볼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숲의 주인은 밤나무에서 버드나무로 바뀌어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비보림으로 만든 숲은 무려 50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냈다. 지금은 그 희소성을 인정받아 1999년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왕버들 군락 아래 피어 있는 보라빛 맥문동 꽃. 

원래 성밖숲에서 유명했던 건 왕버들 군락 아래를 장식하던 맥문동의 보랏빛 꽃이었다. 여름이 절정으로 향하면 나무의 발치마다 수도 없이 많은 맥문동 꽃이 피어났다. 아쉽게도 2020년 홍수 이후로 아직까지 영 그때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간간이 맥문동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숲은 시간을 두고 마주할 필요가 있다. 조금은 여유롭게 보고 즐기며 여름의 시간을 만끽하는 게 이 숲을 여행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주말마다 이곳을 찾아오는 성주시민부터가 이곳으로 그렇게 대하고 있다. 돗자리를 펴고 챙겨온 먹거리를 나눠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누구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흘러가는 이천을 바라보는 모습. 그런 그들을 보며 나 역시 발걸음을 느리게 가져가며 숲을 즐기게 됐다. 그렇게 왕버들 군락의 춤사위를 바라보다 보면, 성주는 우리가 몰랐던 매력적인 속내를 마침내 드러내어 보여준다.

 

세종이 낳은 19명의 왕자들의 탯줄을 모셔둔 태실 .

△명당에 묻은 왕자의 탯줄

성주를 여행하기로 했다면 꼭 들러야 할 두 번째 장소는 단연 세종대왕자태실이다. 여기도 역시 이름 그대로. 조선의 성군 세종대왕이 낳은 왕자들의 탯줄을 모셔둔 태실이다. 조선 왕가는 자손을 출산하고 나면 그 탯줄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뤘다.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기관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짧은 생각에는 궁궐 어딘가에 봉안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천하의 명당이라고 할 만한 곳을 찾아 태실을 정했고, 그곳에 예를 다해서 묻었다. 왕가의 대를 잇도록 해 준 것이기에 그만큼 귀하게 대했다.

세종대왕 태실이 보관 되어 있는 석선사.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던 건, 이 멀고 먼 성주까지 찾아와 태실을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대체로 조선의 왕가의 무덤이 수도권에 있다는 걸 감안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경기권역을 벗어난 왕의 무덤은 영월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숨을 거둔 단종의 장릉뿐이다. 

심지어 성주는 영월보다도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 아닌가. 세종대왕은 왜 이렇게 먼 땅에 굳이 태실을 만든 것일까.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을 직접 찾아가 보니 얼핏 알 것도 같았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숲길을 따라 올라간 곳은 높이 솟아오른 절벽의 정상부였다. 가려줄 것이 없어 햇살이 하루종일 내려오는 자리이기도 했다. 산 아래로 탁 트인 경치가 한눈에 봐도 이곳은 으뜸 중의 으뜸인 명당.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바로 절감할 정도였다.

석물이 파손돼 받침대만 남은 태실. 

세종대왕은 이곳에 적서 왕자 19명 중 장자인 문종을 제외한 18명의 탯줄을 묻었다. 여기에 원손인 단종의 태실도 함께 만들어 두었다. 탯줄을 묻을 때도 각각 태항아리에 따로 담았고, 그 위에는 석물을 올려 장식을 했다. 그렇게 조성한 석물은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다. 

다만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했던 다섯 왕자는 석물이 파괴돼 받침대 역할을 하는 연엽대석만 남았다. 왕자들의 탯줄이 묻힌 자리를 하나씩 둘러보며 태실을 거닐자니 왕가의 핏줄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던 세종대왕의 염원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곳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 명당은 명당이었다.

돼지 불고기에 등겨장을 넣어서 먹으면 보리특유의 향이 올라온다. 

△입맛 돋우는 향토음식 등겨장의 매력

그래도 여행을 왔으면 먹거리도 찾아보는 게 순서다. 기왕이면 성주의 음식을 먹고 싶었다. 요즘은 어딜 가나 비슷한 먹거리가 주를 이룬다. 돈이 되는 걸 팔고자 하는 상인의 마음이야 모르는 것이 아니나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좀처럼 눈에 띄는 것이 없어 아쉬움이 짙게 퍼져가던 찰나, 등겨장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성주읍의 골목 한쪽에 자리한 고방찬남경식당이라는 곳이 등겨장을 내준다고 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잘 정리된 분위기가 사장님의 심성을 엿보게 한다. 이곳의 주력 메뉴는 돼지불고기다. 등겨장은 여기에 딸려서 나오는 소스에 지나지 않는다. 사장님에게 등겨장을 물었더니, 예부터 성주 일대에서 즐겨먹던 장류라고 했다.

보리로 만든 등겨장. 

“옛날에는 먹을 게 많지 않았잖아요. 고추장 된장을 담가 먹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성주사람들은 보리등겨를 반죽으로 만들어 여름 아궁이 불에 천천히 익혀서 건조한 후에 발효시켜 먹기도 했거든요. 이렇게 여름에 만든 장은 겨울이나 이듬해 봄에 먹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제법 맛있어요.”

기대를 부풀리는 설명이다. 주문을 넣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상 위로 가득 음식이 깔렸다. 돼지불고기는 간장에 잘 재워서 구운 것이다. 그냥 먹어도 짜지 않고 다소 담백한 맛이 돋보였다. 고기를 쌈에 싸고 여기에 등겨장을 올려서 입에 넣었다. 

등겨장은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진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서서히 제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냥 찍어 먹어 봤다. 맛이 순하다. 보리 특유의 단맛이 뒤에서 올라왔다. 미리 지어서 온장고에 보관한 것이 아닌 갓 지은 밥에 등겨장을 더하니 한 그릇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하, 좋구나. 이런 맛이라면, 일부러 찾아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글 사진 정태겸 여행작가, 정리 최병일 기자 skycbi@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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